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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Oct 05. 2021

여대에서 가사를 전공하고 아이를 넷이나 낳고 나서,

서울 법대에 들어가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되다.

1914년에 평안북도의 한 가정에서 2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탄광을 운영하시던 아버지는 그녀가 2살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서 어렵게 살림을 꾸려갔다. 당시에는 아들만 공부시키는 것이 당연했던 때였고, 집안 형편 또한 어려웠지만 어머니는 그녀가 공부하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들이든 딸이든 공부만 잘하면 대학에 보내주겠다"라고 공언할 정도로 생각이 깨어있던 어머니 덕분에 그녀는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이 심했던 사회에서 남자들과 똑같이 교육받을 수 있었단다.

그렇게 똘똘한 그녀였기에 일제 식민치하이던 그녀가 여섯 살 때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같이 놀던 일본 아이가 조선이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자 여섯 살이던 그녀가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가면서도, ‘조선이 왜 일본 땅이냐며 당장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며 화를 냈다.

일본 경찰은 그런 그녀를 보고 진짜 감옥에 가고 싶냐고 윽박을 질렀지만, ‘조선 사람은 조선에 살고 일본 사람은 일본에서 사는 게 맞지 않냐!’고 야무지게 말해 일본 경찰도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녀는 1931년에 자신이 졸업한 평양 정의여자고등 보통학교의 선생님이 된다. 그리고 바로 독립운동가였던 정일형을 만나 결혼을 했는데, 남편은 그녀가 대학에 가서 공부를 더 했으면 좋겠다며 적극 권장한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열심히 공부했던 그녀는 1932년에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에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한다. 정작 그녀가 원했던 것은 법 공부였고 관이 꿈이었지만, 당시 법대에서는 여성을 학생으로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가사와 법 공부를 하느라 늘 시간을 쪼개가며 공부를 하던 그녀의 남편이 독립운동으로 투옥되면서 가정형편은 더욱 힘겨워진다. 그래서 그녀는 바느질을 하여 누비이불을 만들어 팔러 다니게 된다.

그러다 길에서 우연히 대학에서 강의를 듣던 대학교수와 마주치게 되는데 교수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쯧쯧, 법관이 되고 싶다고 하더니 너도 별 수 없구나.”

 

그 말에 충격을 받은 그녀는 이불을 팔러 다니면서도 법전을 구해 법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항일운동, 인권운동, 민주화운동에 큰 기여를 한 사회운동가였던 이태영 변호사의 이야기이다.

도산 안창호의 연을 통해 남편 정일형과 결혼한 후 일제를 상대로 모진 고문을 받는 등 광복 당시까지 항일활동을 했다.


해방 이후 법 공부를 원했던 본인의 뜻을 이뤄 1952년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홍일점으로 합격하였다. 이후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의 추천으로 최초의 여성 판사가 될 뻔하였으나 남편이 야당 의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승만이 반대하여, 결국 판사로 임용받지 못하고 변호사가 된다.


이후 한국 가정법률상담소를 설립하여 가정 내의 법적 분쟁 해결에 힘썼으며, 가정법원 설립 청원, 호주제 폐지운동, 동성동본 결혼 가능 운동 등을 직접 주도하며 당시 전국에 만연해있던 여성차별과 불평등의 해소를 위한 수많은 사회운동들을 이끌었다.

그러한 공로로 아시아의 노벨상이라는 막사이사이상을 1975년에 수상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1980년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때는 김대중의 증인으로 출석해 군 검사를 향해 호통을 치는 패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5만 원권 인물 선정 작업이 한창 이루어질 즈음 여성 국회의원을 상대로 한 여성인물 적격성 설문에서 여성의원들의 선호 후보로 신사임당을 이어 2위를 기록한 인물이기도 하다.


해방이 되면서 남편이 감옥에서 풀려났고, 그녀는 남편에게 법 공부를 제대로 해보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아이가 넷인 30대의 연령에도 불구하고 1946년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법 공부를 시작한다. 1949년에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지만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즈음 얼마 안 있어 전쟁이 터진다. 하지만 그녀는 전쟁에도 굴하지 않고 공부를 계속하여 결국, 1952년, 사법 시험에 여성 최초로 합격하게 된다.

당연히 높은 성적으로 판사로 임명되길 기다렸던 그녀는, 여성에게 불평등한 사회 분위기와 남편이 야당 국회의원 신분이라는 점을 핑계로 들어 반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압력으로 인해 판사로 임명되지 못한다.

그렇게 그녀는 변호사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고 최초로 여성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불평등한 사회를 바꾸고 억압받는 여성들을 위해 일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야당 국회의원의 아내라는 프리미엄 때문에, 소박맞은 아내, 첩, 시국사범들이 그녀의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오게 되면서 사무실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이태영은 이들을 변호하면서 법률이 남성들에게만 유리하도록 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는, 그 불평등을 고치는데 평생을 바쳐  여러 운동에 앞장서며 1994년까지 활동하다가 은퇴한다.


아들 역시 유명한 정치인이었던 정대철 의원인데, 1996년에 당선을 장담했던 아들이 9시 뉴스 앵커 출신의 신한국당 박성범 후보에게 패해 낙선하자 심한 충격과 함께 노환까지 겹치면서 알츠하이머가 와서 2년간 가족도 못 알아보고 지내다가 1998년 12월 17일에 사망했다. 향년 84세.

그녀는 단순히 여성운동 전문 변호사로만이 아니라, 남편 정일형과 함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앞장섰다. 독재 정권에 저항하다가 구속된 사람들을 위해 무료로 변호를 해 주었고, 1974년에 시민단체 ‘민주회복 국민회의’를 만드는 데에도 참여하여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1976년에는 3·1 민주 선언에 참여했다가 77년 실형을 받아 변호사 자격을 빼앗기기까지 하였는데, 다행히 1980년 복권이 되면서 변호사 자격을 되찾게 된다. 장면, 남편 정일형과 함께 김대중의 최대 후원자이자 정치적 선배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이다.

민주당 대변인으로 활동하다가 5.16 군사정변으로 의원직을 상실해 폐인처럼 지내던 김대중에게 자신의 후배이자 비서 이희호와의 결혼을 주선한 사람도 바로 이태영이었다.

김대중군, 이희호양 내외와 함께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 이의 삶은 고단하고 힘겹고 버거우며 서글프기 마련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처음 그 길을 개척하여 갔었기에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이 나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후배들이 그 길을 걸으며 더 나은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남편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꿋꿋이 그의 옥바라지를 하는 것은 독립운동가의 어머니나 아내가 많이 해왔던 강인한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이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아이가 넷이나 달린 30대의 아줌마(지금의 사회적 나이로 치자면, 40대 중반 이후라고 봐야 할 것이다.)가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다시 입학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하여 패스하는 것은 지금의 아이 엄마들에게 하라고 해도 엄두를 못 낼 일이었다.

실제 그녀가 서울대에서 법을 공부하던 시절, 아이가 젖을 먹어야 했기에 독립운동가에 정치인이던 남편이 아이를 업고 학교까지 가서 아이의 젖을 먹일 수 있도록 외조를 했다는 이야기는 그녀가 ‘여성 최초’라는 타이틀을 딴 것이 그녀만의 공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맞다.

그녀에게는 성리학을 운운하며, 여성을 비하하고 여자가 무슨 공부를 하냐던 시대에, 여자도 똘똘하고 공부만 잘하면 대학도 보내준다고 지원해주며 자신감을 키워주셨던 어머니가 있었고, 아이 넷 가진 엄마라도 공부할 수 있다면 도와주겠다며 젖먹이 아이를 들쳐업고 서울대 캠퍼스를 들락거리며 외조한 남편이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그러한 가정교육과 외조를 받을만한 의지가 그녀에게는 분명히 있었다.

자신이 밤새 책을 보며 공부한 것이 아니라, 바느질해서 만든 누비이불을 짊어지고 서울 한 복판에서 만난 교수의 한 마디를 듣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을 그녀를 상상해본다.


당신이 지금 돈이 없고, 빽도 없으며, 여자이고, 아이까지 넷 달려있어 호구지책이라 당장 바느질을 해서 이불을 길가에 내다 팔아야만 먹고살 수 있는 상황이라면 당신은 법전을 사 들고 와서 바느질을 하면서 서울대 법학과에 가겠다고 할 수 있었겠는가?


쉬는 시간에 강의실에서 뛰어나와 남편이 업고 온 젖먹이 아이의 젖을 물리고 다시 뛰어들어가 젖이 새어 나오는 윗옷을 눌러가며 옆에 앉은 편안하게 공부만 하면 되는 도련님들과 경쟁하며 사법고시에 패스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유리천장이 어떻고, 여자가 절대적으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가면을 뒤집어쓰고 나와 여성 아이돌 그룹의 노래를 가투에서 부르는 진혼가처럼 부르는 철딱서니 없는, 요즘 여대 캠퍼스에서 튀어나오는 꼴페미들에게 그녀들의 한참 위의 선배가 정작 여성평등을 위해 발에 피가 나도록 투쟁한 이 역사를 듣고서도 그런 한심한 짓밖에 못하겠느냐고 되묻고 싶다.

굳이 많은 젊은이들이 모르고 있던 이태영의 삶을 오늘 소개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변호사 신분이던 그녀가 가족법 개정안 진정서를 들고 당시 초대 대법원장이던 김병로를 찾아가자 김병로가 이렇게 일갈했다고 한다.

“1,500만 여성들이 불평 한마디 없이 다 잘 살고 있는데, 법률줄이나 배웠다고 건방지게 법을 고치라고 나서다니!”

정작 그는, 사법고시에 그녀가 패스했을 때, 최초의 여성 판사를 삼아야 한다며 추천했던 인물이었다. 그런 자마저도 머릿속에는 그런 불평등이 가득했던 시절 그녀는 같은 법률가로서 실행으로 답했다.


그녀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가정법원이라는 것이 세워졌고, 이후에도 가족법 개정운동을 추진하여 이혼녀의 재산분할 청구권 인정과, 기존의 친척 관계를 모계·부계 혈족을 모두 8촌 이내로 축소할 것을 그녀는 당당히 요구했다.

 

당신이 지금 여자라는 이유로, 이미 나이가 먹은 아줌마라는 이유로 주저앉고 싶다면,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조선인이라고 멸시받는 것에서 시작하여, 여성이라는 불평등을 온몸에 짊어지고서도 당당히 자신의 삶을 살아낸 아이 넷 달린 서른 넘은 아줌마가 전쟁의 화약냄새가 가시기도 전에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을 상황을 떠올리길 바란다.


어이없는 이유로, 법대에 바로 진학하지 못하고, 정작 법대를 졸업하고서도 전쟁이 터져 바로 사법고시를 응시하지 못하고, 남편이 감옥에 들어가 있는데 아이들은 배고프다고 우는 그 전시상황에서 자신의 꿈을 위해 달려 나갔던 당신의 선배를 기억하라.


같은 여자라는 이유 말고서도, 사회의 불평등은 개선되어야 한다고, 군바리들이 장악하는 삐뚤어진 사회는 바로 세워야 한다며 민주화 운동까지 힘썼던 그녀의 삶의 앞에서, 지금 당신이 볼멘소리를 하는 것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깨달으란 말이다.

 

당신이 여자라면 더더욱, 아니 여자도 해냈는데, 하물며 불알 두쪽 달고 세상에 나온 사내자식이 그런 정도 실패에 비틀거리며 아무것도 못할 거냐고 껄껄 웃었을 이태영 변호사의 모습이 그리워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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