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Sep 16. 2021

논문을 탐정소설같이 썼다며 심사에서 호된 지적을 받아도

50이 다 되어 세계적인 소설가로 데뷔하다.

1932년 이탈리아 서북부의 피에몬테주 알레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변호사가 되길 원했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토리노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세 철학과 문학으로 전공을 선회, 1954년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미학적 문제〉라는 논문으로 철학 학위를 취득했다. 이 학위논문을 발간함으로써 문학비평 및 기호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62년 토리노대학교와 밀라노대학교에서 미학 강의를 시작했으며, 최초의 주요 저서인 <열린 작품 Opera apertas>(1962)을 발간해 현대미학의 새로운 해석 방법을 제시했다. 이어 <제임스 조이스의 시학 Le poetiche di James Joyce>(1965) ,<예술의 정의 La definizione dell'arte>(1968) 등 새로운 이론서를 발표해 문학비평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966년 상파울루대학교와 피렌체대학교에서 시각커뮤니케이션을 강의했으며, 1967년 <시각커뮤니케이션 기호학을 위한 노트>를 출간했다.


1968년 인간의 사고와 문화행위, 이념 구성 등에 다양하게 관련되어 있는 기호를 개념, 유형, 의미론, 이데올로기 등으로 명쾌하게 분석 정리한 <텅빈 구조(La struttura assente)>를 발간했으며, 이어서 <내용의 형식(Le forme del contenuto)>(1971)을 발간한 후 이 두 저서의 내용을 증보해 영문판 <기호학 이론(A Theory of Semiotics)>(1976)을 발간함으로써 세계적인 기호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1971년 볼로냐대학교의 기호학 조교수로 임명되었으며, 세계 최초의 국제 기호학 잡지 <베르수스>의 책임자로 활동했다. 1974년 밀라노에서 제1회 국제 기호학 회의를 주관했으며, 1975년 볼로냐대학교의 기호학 정교수 및 커뮤니케이션·연극학 연구소장으로 임명되었다.

 

기호학과 미학의 세계에 열중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출판사에 근무하는 여자 친구의 권유로 소설을 집필하게 되었다. 당시 세기말적인 위기를 문학으로 표현해보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그는 2년 반에 걸쳐 집필을 완료해 1980년 첫 번째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 Il nome della rosa>을 발표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논리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경험주의 철학과 자신의 기호학 이론을 유감없이 발휘한 이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영화화까지 되어 대박을 쳤던 <장미의 이름>

이어 1988년 두 번째 장편소설 <푸코의 진자 Il pendolo di Foucauilt>를 발표해 프랑크푸르트 북페어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았으며, 1994년 자전적 작품인 세 번째 장편소설 <전날의 섬 L'isola del giornoprima>을 발표해 작가로서의 재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20세기 인문학계의 거두. 기호학자인 동시에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 언어학자, 심지어 소설가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다방면으로 활동했던, 본업은 대학교수였던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이야기이다.


이탈리아 볼로냐대학교 교수였으며, 활동 분야는 기호학, 고문학, 언어학, 철학, 미학, 건축학, 평론, 역사학, 인류학 등 인문학 전반이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이래 최고의 르네상스적 인물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전설이기도 하다.

 

'지식계의 T-Rex'로 불릴 만큼 엄청난 양의 독서에서 비롯된 깊이 있는 비평과 수필로도 유명하다. 그의 저서들은 스스로 밝히길 상당 부분 기존의 저작물에 나오는 문장과 단어들을 재구성한 2차 창작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에는 결과물의 퀄리티가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에서는 주로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의 면모만 강조되는 경향이 있지만, 정작 본업인 학자이자 교수로서의 위상은, 그가 저술학 기호학 저서가 바이블 수준의 텍스트로 사용되고 있다. 그의 기호학 이론은 그의 스승인 루이지 파레이손의 '해석' 이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따라서 소설은 독자에게 주어지는 순간 독자에게 해석 권한이 넘어간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소설에 대한 질문에조차 가급적 대답을 하지 않았다.

 

움베르토 에코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서 컴퓨터 분야에 이르기까지 기호학·철학·역사학·미학 등 다방면에 걸쳐 전문적 지식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를 비롯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그리스어, 러시아어, 에스파냐어까지 통달한 언어의 천재였다.

거기에 80년대까지만 해도 본인이 재직하던 볼로냐 대학교 도서관의 모든 책 위치를 알고 있었을 정도의 기억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괴물이었다. 책의 위치뿐만 아니라 한번 읽은 책은 내용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았다는 초능력 수준의 기억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학자와 교수로서의 명성 때문에 전 세계 유수 명문대학에서 객원교수로 초빙되었었는데 그저 놀러 다닌 여타 객원교수들과는 격이 달랐다. 컬럼비아 대학교, 예일 대학교, 콜레주 드 프랑스, 하버드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소르본 대학교,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등에서 정식 강의는 물론이고, 그쪽의 석학들과 콜라보를 통한 더 새로운 학술적 성과를 불러일으키고 다닌 것으로 유명하다.

볼로냐 대학교에서는 2007년 75세의 나이로 은퇴하였다. 은퇴 이후에도 미학, 기호학, 문학, 에세이, 문화 비평 등의 영역에서 이론과 실천의 경계를 넘나들며 저술 활동을 펼쳐 전성기가 언제인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2016년 2월 19일 자택에서 오랜 암 투병 끝에 사망하였다. 가장 고통스럽다는 췌장암이었다. 향년 84세. 장례는 밀라노에서 거행되었는데, 많은 시민들이 나와서 인문학계 거장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했다.

자아, 이쯤 되면 또 질문을 던지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23살에 박사학위를 딴 20세기를 대표하는 인문학계의 거두께서 무슨 실패를 했으며 무슨 좌절이랄 것이 있었겠느냐고.

 

다시 그가 학계에 데뷔하던 박사학위 논문 심사장으로 돌아가 보자.

그의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박사논문 심사를 보던 교수들이 논문을 탐정소설처럼 썼다고 지적한 것에 대해, 그는 당당히 이후 모든 논문은 이렇게 써야 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썼다고 대답하는 당찬 모습을 보인다.


당시는 지금과 같은 석박사가 분리되어 있지 않았던 시절이고 이탈리아의 학제가 혼재되어 있을 시기였긴 했지만, 논문을 소설 형식으로 쓴 당당함도 기가 차지만, 그런 공격성 짙은 심사평에 대해 그 정도로 당당한 예비 학위자는 드물다. 예나 지금이나 학위논문 심사장은 심사위원 교수들이 심사자들을 난도질하는 곳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학벌을 중시하는 대학, 즉 상위 명문대학으로 갈수록 심하다.

그 역시 은 그렇게 했지만, 학계에 발을 딛기 직전이던 20대 초반의 초짜 연구자 입장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 자명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실제 그가 그리 당당했다면 그는 20대에 정말 소설을 썼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저 학자의 길을 걸었고, 소설 같은 논문을 썼다는 말을 되새기며 50이 되기까지 소설을 단 한편도 쓴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보따리 장사(강사)에서 시작하여 볼로냐에 교수로 자리 잡으면서 그야말로 기호학계를 최초로 확립한 학자로 우뚝 섰다.


그러고 나서 50이 되던 해, 슬쩍 지적 일탈을 감행한다. 그가 자신의 책 속에서 고백한 내용에 따르면, 우연한 기회에 출판사에 근무하는 여자 친구의 권유로 소설을 집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자 친구 역시 그의 전공서적보다 그의 박학다식하면서도 재치 있는 말과 글에서 그가 소설을 쓰면 어떻게 나올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이다.

그의 데뷔작 <장미의 이름>에 대한 서평

말이 그렇지, 50이 되어 소설을 내기 2년 반전, 그는 소설을 쓰겠다고 작정하고 철저한 사전 조사와 구상을 통해 소설 내의 세계를 완벽히 만든 다음 집필을 시작했다. 데뷔작이자 인생작 <장미의 이름>의 경우, 캐릭터들뿐 아니라 주무대인 수도원의 구조, 인물들 스케치 등을 2년간 했고, <푸코의 진자>를 쓸 때는 몇 달간 소설의 주무대인 곳을 지나다니면서 아이디어를 녹음하곤 했다.

 

그의 소설이 갖는 절정의 매력은, 그가 교수라는 본캐로 50이 되도록 쌓은 그 엄청난 내공이 엑기스만으로 농축되어 과연 이게 픽션인가? 하며 계속 두리번거리게 만드는 데 있다. 같은 직업이랍시고 그 훌륭한 결과물을 시대만 조선시대로 바꾸고 적당히 베껴와 소설가로 이름을 날린, 최순실 딸 사건으로 때문에 깜방까지 가고 대학에서 잘린 누구와는 격 자체가 다름을 여실히 증명한다.


그러한 이유로, 그의 소설을 좋아하고 탐독하는 이들은 상위 식자층 고급독자 마니아들로 채워져 있다. 그냥 술술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경성제대 논문 심사장에서는 논문을 다 써놓고서도 교수들에게 짓밟혀, 살면서 경험해보지 못했던 치욕을 맛보고는 차라리 학위를 포기하겠다며 심사장을 박차고 나가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공부하고 논문 쓴 게 아깝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빈번하게 일어났더랬다.(일제 식민지예요? 이런 바보 같은 리액션, 하지 않길 바란다.)


움베르트 에코가 아니고서라도 고상한 학술계에서 추구하고 있 논문체는 소설체와는 분명히 구분된다.


학자가 되겠다고 논문을 쓴 학생에게, 심사위원인 교수가 이거 탐정소설처럼 썼네?라고 하는 것은 대놓고 다시 써가지고 오라는, 엿 먹으라는 말에 해당한다.


치사하고 더럽지만, '다시 고쳐서 써오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신이라면,

에코처럼 당당히, 이후의 논문은 이래야만 한다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할 수 있었을까?


그가 50이 넘어 소설가로 데뷔한 이후에도 그의 본캐 에너지 레벨 게이지는 쭈욱 풀이었다. 그는 본캐 위에 어지간한 프로에 준하는 부캐를 하나씩 더 얹고 더 얹어가며 영역을 넓혀갔다.


그럼에도 그는 70세에 낸 자전적인 책, <젊은 소설가의 고백>을 출간하며, 책 제목을 그리 지은 것은 자신은 이제 소설가로 데뷔한 지 20년도 채 되지 않은 ‘초짜 소설가’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후덜덜덜...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다.


당신에게 그와 같은 천재성을 발휘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이렇게 살다 간 사람도 있단 말이다.

그런데 지금 본캐는 고사하고 단 하나의 보조캐도 완성하지 못한 당신이 실패가 어떻고 좌절이 어떻고 하며 인생 다 산 사람마냥, 내일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소주잔을 기울일 때가 아니란 말이다.


당신의 그 피 같은 소중한 삶이 양초가 다 들어가듯 소진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정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도서관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파묻혀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봐라.

물론 처음엔 하루에 한 권 읽는 것도 힘들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당신의 정신 근육을 매시간 매일 단련하고 단련하라.

그리하면 그 책들이 당신이 나아갈 길을 인도해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당신의 영혼을 책으로 단련시키는 그 과정 중에는 제발 허튼 생각 따윈 하지 마라.

당신이 허튼 생각을 하며 책을 읽어낼 정도의 수준이라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지금 그 모양으로 휘청대지도 않았을 거다.

그저 한 가지라도 제대로 해내고 싶다면, 묵묵히 당신이 가려는 길을 향해 계속 전진해라.

당신의 젊음은 더 이상 당신의 방황을 받아줄 만큼 젊지 않다.

이전 03화 배워본 적도 없는 벽화를 천장에 그려내라고 명령받아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