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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Sep 15. 2021

배워본 적도 없는 벽화를 천장에 그려내라고 명령받아도

좋다! 누구보다 뛰어난 작품으로 대답해주마.

1475년, 이탈리아 카센티노의 카프레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루도비코 디 레오나르도 디 부오나로토 시모니는 읍의 행정관이었고, 어머니는 그가 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나, 그는 어느 석공의 아내인 유모에게 맡겨져 키워진다. 유모의 남편이 석수장이였다는 점은 그가 조각가로의 천부적 재능에 눈을 뜨게 하는데 있어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그의 아버지는 영민한 아들에게 몰락한 집안을 일으켜 세울 '학문'을 하기를 원했지만, 그는 학교에서 오직 데생만을 했다. 집안에서 예술가가 태어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아버지와 삼촌들은 그를 때려가면서까지 훈육했지만, 결국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결국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낸 그는 13세 때, 당시 피렌체의 뛰어난 화가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로 들어가 도제수업을 받는다. 하지만 스승은 천재를 제자로 담을 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다. 겨우 일 년 정도 스승 밑에서 배우던 그는 그림에 싫증을 내고, 좀 더 '영웅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한 조각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래서, 그는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데 메디치가 산 마르코 성당 정원에서 가르치는 조각 학교에 입학한다. 예술가들의 후원으로도 유명한 메디치 가의 로렌초 공은 소년을 눈여겨보았고, 그의 배려로 피렌체의 뛰어난 학자와 미술 수집품을 보고 공부하면서 급격한 성장을 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그는 연습작들을 몇 개 조각하게 되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판의 얼굴>과 <큐피드(혹은 에로스)>이다. 이 2가지 작품은 현재 모두 유실된 상태이다. 하지만 기록에 남겨진 묘사를 보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담대함과 미숙하지만 재능있는 실력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작품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작품 <판의 얼굴>은 그가 메디치 가의 눈에 들게 되는 가장 큰 계기가 되는데, 로렌초가 이 작품을 보고 미켈란젤로를 크게 칭찬하면서 '판은 나이가 들어서 이가 성하지 않을 텐데'라고 중얼거리자, 그는 기뻐하면서 다시 한번 끌로 뭔가를 조각했다. 로렌초가 무얼 또 수정하냐고 물어보니까, 바로 판의 이에 충치를 조각해서 마무리지었다고 대답한다.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본 로렌초의 배려로 메디치 가에서 몇 년 동안 지내게 된 소년은, 로렌초 및 그의 아들들과 함께 식사를 할 정도로 파격적인 우대를 받았다. 로렌초의 아들들을 가르치기 위해 초빙된 당대의 유명인사들과 학자들을 만나 플라톤 철학을 배우고, 그들에게서 수준 높은 토론을 경청했으며, 라틴어·문학에 대해서도 굉장히 수준 높은 소양을 갖추게 된다. 특히, 그는 단테의 <신곡>을 좋아했는데, 훗날 조각과 회화뿐만이 아니라 건축, 시 등 그의 예술 작품 전반에 걸쳐 자신의 예술작품에 고통과 순교, 그리고 구원의 주제를 늘 나타냈다.

 

그러나 로렌초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는 직감적으로 메디치 가문을 떠나야 한다고 판단하게 된다.

미켈란젤로의 초상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조각가이자 건축가, 화가 그리고 시인. 흔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산치오와 함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거장 3인방 중 한 명으로 불리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그 유명한 천재 미켈란젤로의 이야기이다.

 

다방면에서 걸작들을 남겼는데, 자신이 늘 주전공이라고 말했던 조각분야에서는 <다비드>, <피에타>가 있으며, 부전공 정도라며 말했던 회화에서는 시스티나 소성당에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등을 남겼고, 그저 배워서하는 거라며 손을 댔던 건축에서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디자인하였다.

 

1915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유명한 소설가 로맹 롤랑은, 미켈란젤로의 평전을 쓰면서 그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천재를 믿지 않는 사람, 혹은 천재란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미켈란젤로를 보라!”

 

세밀한 자료 조사를 통해 미켈란젤로를 연구했던 로맹 롤랑은 미켈란젤로의 예술혼대한 일화를 소개하며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약간의 빵과 포도주를 들고 나면 일에 파묻혀 잠도 몇 시간밖에 자지 않았다. 볼로냐에서 율리우스 2세의 동상을 만들 때, 그와 세 사람의 조수를 위하여 마련된 침대는 하나뿐이었다. 이때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장화를 신은 채 잤기 때문에 한때 다리가 부어 장화를 칼로 찢어야만 했다. 무리하게 장화를 빼면 다리의 살점까지 함께 묻어나올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미켈란젤로는 1564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도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제작하고 있었다. 만년에는 병상에서 일어나 작업을 하기 위해 비를 맞으며 성 베드로 성당으로 달려가다 하인의 등에 업혀 오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기도 했다. 항상 병치레를 하면서 '식사할 시간도 없이' 일에 몰두하며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고통의 삶 속에서도 그가 장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술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초인적인 열정 때문이었다.


메디치 가를 나온 후 2년이 지나 미켈란젤로는 오랜만에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아서 저택을 찾게 된다.

그 때 정원에 있는 잠자는 큐피드 상을 보고 지나가던 조각가가 '땅 속에서 찾은 것처럼 만들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한 말에 아이디어를 얻은 미켈란젤로는 그 조각상을 똑같이 만들어 땅속에 묻었다가 파낸 후, 그을리게 만들어 마치 발굴된 로마시대 조각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밀라네제’라는 로마의 골동품상에게 판다. 밀라네제가 이를 포도밭에서 발굴된 로마 조각상이라며, 고위 성직자인 리아리오 추기경에게 팔면서 사건이 진다.


후일, 위작에 사기당한 걸 알게 된 리아리오 추기경은 이 조각상을 만든 작가의 솜씨에 감탄하며 전령을 시켜 고작 20세였던, 젊은 미켈란젤로를 부르게 된다. 이 잠자는 큐피드 사건은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입성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리아리오 추기경이 미켈란젤로의 첫 후원인이 되면서 성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를 만드는 계기로 이어진다. 그렇게 그는 24세 때, <피에타>로 순식간에 거장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성모상에는 재미있는 점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미켈란젤로의 작품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그의 이름이 조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미켈란젤로가 이 조각으로 일약 스타가 되고 나서도, 사람들이 정작 그것을 조각한 사람에 대해 궁금해하며 자신을 찾지 않자, 열 받아서는 밤에 몰래 성당으로 가서 자신의 이름을 조각하는 기행을 벌인다. 성모 마리아의 옷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레이스 옷깃을 자세히 보면 라틴어로 ‘MICHAEL. ANGELVS. BONAROTVS. FLORENT. FACIEBAT(피렌체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었다)’라고 조각되어 있는 것을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당시 상황을 고려해보면 너무나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고 한다. 조각가가 조각에 자신 스스로의 사인을, 그것도 성모 마리아의 옷깃에 조각으로 남기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화에 의하면, 그렇게 <피에타>에 자신의 서명을 남기고 밤중에 길을 나섰는데 밤하늘을 보자 너무 아름다워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고 한다. 그는, ‘세상을 이렇게 아름답게 만든 신은 당신의 작품 어디에도 서명을 넣지 않았는데, 나는 고작 조각 하나에 오만하게 서명을 넣다니 너무도 부끄럽구나’라고 생각하고는, 그 이후 다시는 자신의 작품에 서명을 넣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다비드>(1501~1504) 무게 6톤, 높이 5.17m

이런 잘나가던 천재 예술가에게 어떤 실패와 좌절이 있었겠느냐고 묻고 싶은가?

자아, 그럼 유난히도 고단했던 그의 삶속으로 다시 들어가보자.

 

미켈란젤로는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교황의 지시를 받아 작업을 진행했다. 그 중에서도 율리우스 2세와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에 가까웠다. 둘의 관계는 마치 형제처럼 다정했다가 불화가 반복되는 미묘한 관계였다. 천재에게 운명처럼 따라다니는 동료 예술가들의 질투로 인한 이간질로 둘 사이가 틀어져 바티칸 궁을 떠났다가 되돌아오는 일이 반복된 일상이 될 정도였다.


율리우스 2세는 청동의 주조법을 모른다고 하는 미켈란젤로에게 청동 동상을 주문한다.

미켈란젤로는 ‘처음부터 배워서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청동 주조법을 배워 동상을 제작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벽화의 기법을 전혀 모르던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둥근 천장에 그림을 그리라고 명령한다.


미켈란젤로의 평전을 쓴 로맹 롤랑은, 천재를 질투한 브라만테가 교황의 총애를 받는 미켈란젤로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일부러 이 작업에 추천했던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브라만테의 의도는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한번도 배워보지 못한 벽화기법으로 그것도 천장에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리가 없을 것이라 예상하고, 그에게 망신을 주기 위해 꾸민 일이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같은 해에 역시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가 바티칸 궁전의 벽화를 그려서 대성공을 거둔 바 있었기 때문에 이 주문같은 명령은 미켈란젤로에게 있어 일종의 시험이자 시련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를 추천하고 자신은 자연스레 빠져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만큼 고집이 셌던 교황은 그의 청을 거절하게 되고, 결국 1508년 5월 10일, 이 역사적인 작업이 막을 올리게 된다.

미켈란젤로 연구자들은 이 시기가 천재의 90년 인생 중에서 가장 힘들고 '숭고한 세월'이었다고 평가한다. 이 시절에 미켈란젤로는 이런 편지를 쓴다.

 

"나는 완전히 의기소침해 있습니다. 벌써 일 년이나 교황에게서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청구하지 않았습니다. 일이 너무나 진척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수를 받으리라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일이 늦어지는 것은 이 일이 어렵고 내 본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간만 자꾸 헛되이 지나갑니다. 신이여. 도와주소서!"

 

그림에 진척이 전혀 없어 힘들어하던 그에게 설상가상으로 집안 문제까지 터진다. 자꾸 돈을 요구하는 아버지와 동생들과의 문제에서부터 경제적인 곤궁함, 나날이 나빠져가는 건강 문제 등 이 시기에 미켈란젤로는 정말로 죽어버리고 싶은 절망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좌절하고 무너지지 않았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화는 4년이 넘는 긴 세월을 거쳐 1512년 11월 1일, 마침내  사람들에게 공개된다.

40.5x14m규모의 시스티나 천장화

그 4년이 넘는 세월동안 별의별 일들이 미켈란젤로의 숨통을 조이며 괴롭혔다.


하루는, 작업중이던 그에게, 교황이 도대체 언제 작업이 끝나느냐고 물어왔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완성되는 날에 끝난다.”라는 우문현답을 던진다. 무슨 그따위 답이 있느냐며 화를 내는 교황을 본 그는, 바로 집으로 뛰어가 로마로 떠날 차비를 하였다고 한다. 아차 싶었던 율리시스 2세는 급히 사자를 보내 사과하고 돈까지 챙겨보냈고 그는 못이기는 척 사과를 받아들였다.그렇게 우여곡절이 많았던 시스티나의 일이 끝난 것을 보고 만족했던지 율리우스 2세도 선종했다.

 

이 천장화와 더불어 시스티나 성당에는 벽화 <최후의 심판>이 있다. 1533년 피렌체에서 메디치 묘의 작업을 하고 있던 미켈란젤로에게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의뢰가 들어온 것이다. 클레멘스 7세가 세상을 떠나자, 1535년 파울루스 3세가 다시 이 작업에 대한 명령을 내려 <천지창조>에 이은 <최후의 심판> 작업이 시작되었고, 역시 엄청난 노력으로 1541년에 기어이 완성해낸다.

그렇게 대작의 연이은 작업으로 60대를 맞은 미켈란젤로는 심신이 파김치 상태로 넉다운되고 만다.

그러나 그는 이후에도 쉼없이 30여년을 달렸다.

“영혼은 신에게, 육체는 대지로 보내고 그리운 피렌체로 죽어서나마 돌아가고 싶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미켈란젤로의 폭풍우 같았던 인생은 90세가 되어서야 막을 내리게 된다. 눈을 감기 직전까지도 <론다니니 피에타>를 완성해야한다며 대리석을 만지던 그였다.

미켈란젤로의 무덤, 피렌체 산타 크로체 대성당

미켈란젤로가 90살까지 살았다고 하면 다들 어떻게 그 시대에 그렇게 장수할 수 있었느냐고 감탄한다. 하지만 그것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르네상스를 버티는 한 기둥이었던 그의 예술인생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 자들의 말이다.


이탈리아에 가서 그의 작품을 모두 감상하게 되면, 아니, 모두도 필요없다. 바티칸 시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과 같은 그림을 보면 비록 현장에서 그 작품을 감상한 자들은 말할 것도 없이, 그거 화보로 만든 카피 작품만 보더라도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것이 과연 한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었는가 하는 경탄을 금치 못하기 마련이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그는 자신의 주전공이 조각이라고 수차례 밝힌 바 있다. 주전공인 조각상을 보면서도 느끼지만, 부전공이라는 그림을 통해 느껴지는 그의 천재성에는 인간이 뭐라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거룩함마저 느껴진다.

돔을 미완성으로 남겼던 성 바오로 성당

당신에게 오늘 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천재를 소개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당신이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제대로 된 천재를 단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천재라고 자타가 공인할만한 수준의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내가 인정하는 천재는 전세계 인류 역사를 통틀어 따져보더라도 한 손가락에 꼽는다.

그중에 미켈란젤로가 들어가는 이유는 하나이다.

그는 명실공히 타고난 천재였다.

천재의 기본 요건은 제대로 배우지 않아도 제대로 배운 사람보다 훨씬 단기간에 프로의 수준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천성탓에 천재는 게으르기가 쉽다.


그런데 그런 천재 중에 노력을, 그것도 피나는 노력을 거듭하는 이가 수세기에 걸쳐 한 명정도씩 나오는 경우가 있다.

미켈란젤로가 바로 그 경우에 해당한다.

그래서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로 인정받는데 아무도 이견을 제기하지 않는다.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은 천재인가?

그래서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겐가?

아니면, 당신이 천재가 아닌 둔재라서 그저 이번 생은 버리기로 해서 그렇게 대강 사는 건가?

당신이 지금 불만섞인 얼굴로 그래도 나도 ‘나름’ 노력했다라며 입술을 씰룩거리는 것이, 적당히 그저 그렇게 꼴찌 인생 소리는 면하지 않았는가하는 뭐 그런 소리를 하고자 함인가?


아니다.

당신은 처음 생각부터 잘못 하고 있는 것이다.


달리기를 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의 최고기록을 측정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숨이 턱까지 차도록 뛰고 헥헥거리는 것이 최선이었을까?

뒤에 땅이 무너지고 있는데,

뒤에서 막 동물원을 탈출한 백두산 호랑이가 달려들려 하는데 그저 헥헥거리며 뛸까?

당신은 아직까지 당신의 한계를 잘 모른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목숨을 예술에 걸고 살았기에 90까지 자신의 예술혼을 불사를 있었다.

그는 적당히 히트한 몇 가지 작품만 가지고서도 평생 귀족 흉내를 내며 살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고, 실제로도 그의 인생은 그리 유유자적한 삶이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후회했을까?

아니. 그의 머릿속은, 눈을 감기 전까지도 그저 자신이 완성하지 못한 조각상 생각뿐이었다.

 

지금 당신의 삶에 대한 태도와  나태해진 생활을 보라.

그리고 다시 미켈란젤로의 삶이 오롯이 투영된 그의 작품을 바라보라.

스스로가 부끄러워 당당히 볼 수 없어야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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