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한성부 서서 인달방 사직동계 사직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던 아버지 김연창(金演昌)과 어머니 박세창(朴世昌)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곧바로 몰락한 양반인 백부의 집으로 입양, 유교적인 가풍 아래 한문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양어머니(백모)는 아들을 낳지 못해 남편에게 구박받던 스트레스를 조카이자 양아들인 그에게 풀었으며, 그를 입양한 지 얼마 안 되어 친아들이 태어나자 이후엔 아예 대놓고 홀대하였다고 한다. 백부 또한 어린 조카를 입양했으면서도 아들로서가 아닌, 영특한 머리로 가문을 일으킬 인재로만 생각하여 항상 엄격한 모습으로만 대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어서 길바닥에 버려져 있던 목단 열 끗을 똑같이 그려내어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고도 하고, 자 없이도 직선을 긋는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그는 화가가 되고 싶어 했지만 백부가 ‘세태가 바뀌어도 기술자는 배를 곯지 않는다. 하지만 가난한 환쟁이만은 안 된다’라고 강하게 반대해서 결국 백부의 바람대로 보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 고등 공업학교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조선총독부의 건축 기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한국의 시인, 소설가, 수필가이자 건축가였던, 우리에게는 ‘이상’이라는 필명으로 더 잘 알려진 본명 김해경(金海卿)의 이야기이다.
1930년대 국내에서는 선구적인 모더니즘 작가로서 약 6년간 2,000여 점의 작품을 집필하며 한국 근대 문학이 국제적·선진적 사조에 합류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초현실주의와 심리소설의 개척자로도 높이 평가받는 반면, 인간의 인식 가능성을 부정한 극단적인 관념론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생전에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고 경제 사정도 불우했다. 초현실주의 실험작인 <오감도> 등을 발표했을 때에는 독자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당시에는 오직 그의 지인들만이 천재라고 평가했으나 사후 해방과 함께 자타공인의 한국 문단계의 천재로 인정받은 인물이다.
조선총독부 건축기사 시절
이상에 대해 파격적인 진보주의자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과 전혀 다르다.
한문교육을 받고 전형적인 양반가의 교육을 받아서였는지 보수적인 가치관이 기본적으로 있어서, 당시 신세대들이 몰고 온 변화의 바람이 탐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로서 본인도 이러한 성향을 많이 고민했는지, 말년에 이상이 도쿄에서 김기림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암만해도 나는 19세기와 20세기 틈바구니에 끼여 졸도하려 드는 무뢰한인 모양이요. 완전히 20세기 사람이 되기에는 내 혈관에는 너무도 많은 19세기의 엄숙한 도덕성의 피가 위협하듯이 흐르고 있소 그려."
'이상'이라는 필명은 총독부 건축 기사로 일하던 당시 한 인부가 김해경을 '긴상(김 씨)'라고 불러야 할 것을 김 씨와 이 씨를 헷갈려 실수로 '이상'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정설이 아니다.
보성고보 시절부터 절친했던 친구 구본웅이 선물로 준 오얏나무(李 : 오얏나무 리)로 만들어진 화구 상자(箱: 상자 상)를 받고 친구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서 ‘이상’이라는 필명을 정하게 되었다는 설이 정설이다. 그 근거는 보성고보 시절 직접 디자인한 졸업 앨범에 ‘이상’이라고 서명한 것이 발견되었으니 굳이 상세한 설명은 불필요할 듯하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가 재학당시
1930년, 조선지에 연재된 장편 소설 12월 12일로 문학계에 데뷔했다. 이듬해인 1931년 7월 '이상한 가역 반응', '파편의 경치', 'BOITEUX·BOITEUSE', '공복' 등의 일본어 시들이 수록된 <이상(異狀)한 가역 반응>이라는 첫 시집을 냈다. 그 해 8월 일본어로 쓴 시인 '조감도(鳥瞰圖)'와 '삼차각 설계도'를 <조선과 건축>에 발표했다.
같은 해에 백부가 죽자 이상은 친가로 돌아오게 된다. 친부는 사고로 손가락을 잃은 가난한 전직 이발사였는데, 양반이라는 자존심이 강했던 백부의 집에서 자란 이상은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본래의 가족에게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였다. 이상은 이 당시 자신의 모습을 <슬픈 이야기>라는 수필에서 묘사하고 있다.
출판사 창문사 사무실에서, 뒤는 소설가 박태원
1932년 '비구(比久)'라는 가명으로 소설 '지도의 암실', 시 '건축무한 육면각체'를 내면서 문학 활동이 점차 활발해지던 차에 새로 부임한 일본인 상사와의 마찰로 스트레스를 받던 이상은 1933년 심한 각혈 증세를 겪고, 병원에서 폐결핵 진단을 받는다. 폐결핵을 진단받은 이상은 기다렸다는 듯이, 건축기사일을 그만둔다.
회사를 그만둔 후 이상은 요양차 갔던 온천에서 '금홍'이라는 기생을 알게 된다. 요양에서 돌아온 이상은 종로 1가에 다방 <제비>를 차리고 금홍을 불러들여 그녀를 마담 자리에 앉힌 후 금홍과 동거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다방은 잘 되지 않았고 심심해진 금홍이는 외박을 하는 일이 빈번해진다. 그러자 이상은 "예전 생활에 대한 향수"가 났냐며 금홍을 몰아세웠고 이에 금홍은 가출을 하거나 이상을 심하게 때리기까지 하였는데 이상은 이에 크게 경악한다. 결국 금홍은 몇 번의 가출 끝에 이상의 집을 완전히 나가버리고 다방 <제비>는 폐업한다.
기생 금홍과 함께
제비가 폐업한 직후 이상은 다방 제비에 드나들던 문학가들의 추천으로 1934년 구인회에 가입하여 명사들과 교제하기 시작했으며 박태원의 신문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하융(河戎)'이라는 가명으로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구인회에서 그는 특히 같은 병을 앓고 있던 소설가 김유정과 친하게 지냈다고 하며, 심지어는 동반자살을 권유하기도 했다.(다행히 김유정의 거절로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한편 이상은 금홍과 헤어지고 다방 <제비>가 망한 후에도 1935년에 다시 인사동에 카페 <학>, 종로 1가에 다방 <69>을 차례로 개업했으나 모두 대차게 말아먹는다. 돈을 벌고 싶은 열정은 강했으나 능력이 부족했다고 스스로 자인한다. 결국 그 사이 가족들은 빈민촌으로 이사 가게 된다.
1936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변동림과 결혼한 이상은 서구화된 문물에 익숙해지고 새 출발을 하기 위해 1937년 어느 날, 무작정 도쿄로 여행을 떠났으나, 이내 도쿄에 실망하고 서울로 돌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도쿄에 도착한 후 폐결핵이 악화되었고, 새 출발의 발판 기점으로 삼으려고 했던 도쿄에 대한 환멸감을 느껴 자괴감에 시달리게 된 이상은 조선에 ‘다른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다.’라는 편지를 보낸 후 햇빛도 들지 않는 싸구려 방을 얻어서 홀로 은거해 버린다. 그리고 몇 달도 지나지 않은 1937년 2월, 도쿄에서 불령선인(사상 불온 혐의)으로 체포되어, 도쿄 니시칸다(西神田) 경시청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그러나 심한 병(폐병) 때문에 병보석으로 한 달 만에 석방됐고, 동경제국대학 부속 병원에서 4월 17일 새벽 4시에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이상의 부고를 듣고 급히 도쿄로 온 변동림이 그의 유해를 화장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었으나, 돌보는 이가 없다가 6.25 전쟁 후 미아리 공동묘지가 사라지며 유실되었다.
경성고등공업학교 동기 원용석과 함께
일단, 식민지 치하에서 활동했던 우리 문인들에게 실패니 좌절이니 하는 것이 어떤 것이 있었는지를 묻는 것은 상당히 무식하고 결례가 되는 질문이다.
자기 나라의 입장이 어떤가에 대해 충분히 사태를 분석할 만큼 공부를 한 이들에게, 나라를 잃은 국민으로서의 자괴감과 그들이 매국을 하거나 친일을 하지 않으면 어떤 희망도 바라볼 수 없었던 그 시기의 슬픔과 절망감은 그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전통 한학 교육을 받았고, 그림에 소질이 있었으며, 영어와 프랑스어까지 공부했던 이상이 스스로를 다방면에서 천재라고 생각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가 다닌 경성 고등 공업학교는 일제강점기 때임에도 경쟁률이 매우 치열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전신에 해당하는 최고 수준의 학교였다. 게다가 이상은 입학 이후 졸업 때까지 수석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학업성적이 탁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적 성과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익힌 공부와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경제적, 가정적으로도 무너졌으며 설상가상으로 당시 불치병이었던 폐결핵을 앓는 치명적인 고통까지 겪게 된다. 그 유명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라는 표현은 자조적인 표현에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 자살도 생각했고, 만신창이처럼 기생과 방탕한 생활도 해보았다.
엄청나게 세월을 낭비하며 산 것 같지만, 외국에서 죽음을 맞이한 당시 그의 나이 27세.
그가 죽고 그의 아내는 이 유명한 작품의 유부남 김환기와 살림을 차려 다시금 장안은 떠들썩하게 만든다.
지금의 스물일곱 청년들은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이일 것이다. 그 나이에 그는 이미 인생의 모든 역정을 다 거쳐버리고 세기의 천재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뭐가 그리 급했는지 이역만리 타지에서 병사하였다.
그가 해방된 조국에서, 자신의 능력을 맘껏 펼칠 수 있었더라면 그의 비상한 머리로 나왔을 수많은 작품들과 그림, 그리고 기획들을 후세의 사람들은 마음껏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저 시절의 탓을 하거나 무능하게 무너진 조선왕조를 욕하며 술에, 혹은 약에 빠져 지내는 삶을 보내지 않았다. 그와 그의 친구들이 겪었을 그 무력함과 시대의 아픔을 글로 작품으로 그림으로 체화하여 탄생시켰다. 당시에는 이상하다고, 욕을 먹고 항의를 받았지만, 끝내 그는 그가 가고 나서야 문학계의 걸출한 천재로 인정받았다.
지금 당신의 조국이 일본의 치하에 있는가?
당신이 양반가의 교육을 받고 친가로 돌아오니, 양반가는커녕 손가락이 잘려진 가난한 이발사 아버지가 계시는 현실 괴리를 맞이했던가? 지금 당신이 사는 세상은 먼저 간 천재, 이상이 그리도 꿈꾸던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맘껏 펼치고 날아오를 시대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럼에도 당신이 자신의 능력을 키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시대를 탓하고, 정부를 탓하고, 부모를 탓하고, 그렇게 남의 핑계만을 대가면서 자신의 실패한 인생이라고 광고를 하고 다니고 싶은가?
아니다.
당신이 이제까지 잘못 생각했다면, 고치면 된다.
노력이 부족했다면, 노력하면 된다.
스물일곱 꽃다운 나이에 그 모든 것을 접고 병사해야만 했던 천재의 삶을 반추해보며, 당신의 남아 있는 삶이 그가 살았던 삶보다도 훨씬 더 남아 있음을 생각한다면, 당신이 그가 이룬 것을 그가 이루고자 했던 것을 못할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