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오슬로 피오르드 초입인 보르게 지역의 톰타에 있는 오두막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세 형으로부터 보살핌을 받았고, 가족 소유의 조선소에서 뱃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 어린 시절 그는 수공업자가 되고 싶어 했으며, 조선소에서 일하는 늙은이 올센에게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올센은 그에게 머리와 손 중에서는 머리가 더 쓸모 있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손과 머리를 다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고 한다.
이후, 그의 가족이 오늘날의 오슬로인 크리스티아니아로 이주하였고, 그의 아버지는 정치에 입문하여 왕실 관리가 되었다. 그는 9세에 김나지움으로 진학했으나, 학교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14살 때이던 1886년, 영국과 노르웨이 사이의 바다를 항해하던 아버지가 사망했다. 형들은 집을 떠나 독립하여 각각 상인과 선원으로 일을 하였고, 그는 어머니와 단둘이 지냈다. 1887년, 영국 해군 존 프랭클린 경의 탐험 보고를 손에 넣고 탐험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캐나다의 빙해 연안을 연구했던 프랭클린 제독의 일대기는 15살 소년을 사로잡았으며, "그의 일대기를 읽었을 때, 내가 느낀 열광적인 흥분은 나의 생애에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1890년 그는 오슬로의 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어머니가, 그가 의사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탐험가가 되고 싶어 했지만, 어머니가 그것을 원치 않았고, 의사가 되길 바랬기 때문에 의대에 진학했던 것이다. 정작 본격적으로 탐험가의 길에 들어선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의 일이었다.
1893년에 어머니가 갑작스러운 폐렴으로 사망하자, 그는 의학 공부를 중도에 포기한다. 배우다 말기는 했지만, 이때 얻은 의학 지식은 그의 탐험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20세기가 되자 노르웨이 해군에 수병으로 입대했는데, 그의 징병신체검사를 맡았던 해군 군의관은 어릴 적부터 꾸준히 스키와 축구로 단련한 그의 강인한 피지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 다른 장교들을 불러서 구경하게 했을 정도였는데, 너무 감탄한 나머지 이들은 그가 근시라는 것은 간과하고 합격 처리해 버렸다. 그렇게 그는 군 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수병장으로 제대했다.
그는 해군 시절에 1891년에서 1892년까지 미합중국 해군의 로버트 피어리 제독과 함께 북 그린란드를 횡단했던 에이빈 아스트루프의 강연을 듣고, 크게 감명받기도 했다.
노르웨이의 탐험가. 지구의 두 극점을 모두 최초로 정복한 인물이었으며 인류 최초로 북서항로를 개척하고, 최초로 북극점 상공 비행에 성공했던 우리가 아문센으로 기억하는 본명, 로알 엥겔브렉트 그라브닝 아문센(Roald Engelbregt Gravning Amundsen)의 이야기이다.
1894년에 아문센은 바다표범 포획선 막달레나 호에 고용되었다. 그 뒤에는 발보르그 호에서 항해사 시험에 합격했다. 선원 생활을 하면서도 탐험 의욕을 유지하면서 노르웨이의 고지대인 하르당에르비다 고원을 가로지르는 스키 투어에 참가했다. 하지만 스키 투어를 하던 중에 눈에 묻혀 죽을 뻔했다가 구출되고, 1896년까지 발보르그 호, 레온 호, 훌라 호, 얀센 호, 론 호를 거치면서 선원 경험을 쌓았다.
1895년에 조타수 시험에 합격하였고, 병역 의무를 마쳤다. 이 무렵에도 아문센은 계속 탐험에 미쳐 있었다. 물개잡이 배 '야손 호'를 타고 항해하고 있을 때, 야손 호가 영국령 그림스비에 도착하자 동료들은 선원을 위한 유흥 장소로 달려갔지만, 아문센은 항해 중 북서 항로에 관해 의견을 나누며 친분을 쌓은 선장과 함께 개인 도서관과 국립 도서관을 돌면서 북서 항로에 관한 고문서들을 모으고 정리하였다고 할 정도였다.
아문센과 야손 호 선장은 레오폴드 맥클린톡 제독의 보고문과 존 프랭클린 경을 찾기 위한 그의 수색 과정에 관한 자료들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아문센은 이 자료들로부터 북서 항로는 지금까지 탐험가들이 선택했던 것보다 더 남쪽에 위치한 루트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결정적인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1897년에 항법과 당시 해상 공용어였던 프랑스어 수업을 받았다.
1897년 6월에서 1899년 5월에 걸쳐서 첫 탐험에 나섰다. 벨기에 탐험대에 일등 항해사로 참가하였으며, 이때 탐험선은 아드리안 드 게를라슈(Adrien de Gerlache)가 지원하는 벨지카 호였다. 아문센은 최초로 남극 썰매 여행을 체험하고, 남극 탐험의 야영지 생활을 경험했다.
벨기에 남극원정대 합류 당시, 오슬로에서
하지만 남극해가 얼어붙는 바람에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다. 이때 탐험대는 굶주림과 괴혈병으로 몰살당할 뻔했다. 아문센은 선의(船醫)였던 미국인 프레드릭 앨버트 쿡과 상의해 펭귄과 바다표범을 잡아 식량으로 삼아서 위기를 넘겼다.
1900년에 아문센은 선장 면허를 취득했고, 6개월 동안 독일에 머물며 함부르크에서는 게오르그 폰 노이마이어 교수에게 지자기를 공부했으며, 빌헬름스하펜과 포츠담에서는 각각 뵈르겐 교수와 슈미트 교수에게 기상학 관련 지식을 배웠다. 이렇게 끝없이 배우고 익힌 지식 덕분에 아문센은 팀 내에 또 다른 전문가를 영입하지 않고도 기상 자료와 지자기 자료를 전문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아문센 본인은 자서전에서 '어떠한 경우든 한번 해상으로 출범했다고 하면 탐험대는 이미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의 리더 아래 놓이게 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후에도 그는 비행기를 사용하게 되면 직접 비행기 조종을 배우는 등 최대한 지도자를 나누지 않고 하나로 통일해서 하려고 노력했다.
1901년에 청어잡이 배였던 이외아 호를 구입했다. 이외아 호는 29년이 된 배로, 당시 아문센 자신과 나이가 같았다. 5개월 간 바다표범 사냥을 하면서 최초로 배를 지휘하였다. 1902년에는 다시 독일로 가서 빌헬름스하펜, 함부르크, 포츠담에서 연구 활동을 했다.
1903년 6월에서 1906년 10월까지, 아문센은 자신의 탐험대를 이끌고 북서항로 탐험에 나선다. 이외아 호에 여섯 명의 탐험대가 이번 탐험에 나섰다. 6월 16일 아침, 사실 아문센은 경제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채권자가 찾아와서 24시간 안에 찾아오지 않으면 배를 저당 잡고 사기죄로 감옥에 넣어 버리겠다고 위협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섯 명의 동료들과 상의한 아문센은 그날 자정에 오슬로를 출발해 버렸다.
이 항로는 북대서양에서 캐나다 북부를 거쳐 알래스카에 이르는 항로인데, 워낙 항해하기 어려워서 존 프랭클린 탐험대를 비롯한 많은 탐험대가 실패를 맛보았다. 그러나 아문센은 극지방에 사는 원주민들에게 극지방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등의 철저한 준비를 통해 난관을 극복하였고, 마침내 북서항로를 개척하게 되었다.
영국은 아문센의 북서항로 정복에 대단히 불쾌해했고, 북서항로를 개척한 사람에게 주기로 했던 상금도 아문센이 아닌 존 프랭클린 수색대에게 줘버렸다. 하지만 북서항로 정복 후 아문센은 강연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고, 채권자들에게 졌던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북서항로를 정복한 아문센은 북극점 탐험을 기획했다. 1907년, 아문센은 난센으로부터 '프람 호'를 넘겨받았고 다음 탐험을 준비했다. 준비 과정에서 프람 호에는 디젤 엔진이 장착되는 개조가 이루어졌고, 3개월간 북해와 대서양을 항해하는 테스트를 하면서 성능을 입증하였다. 1908년에는 공식적으로 목표를 '북극'으로 잡았고, 미국으로 강연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1909년, 그가 탐험에 착수하기도 전에 미국의 피어리 제독이 먼저 북극점에 도달했다고 보도되었던 적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문센은 적잖이 분노했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남극점 탐험을 하고 쓴 책인 <남극>에서조차 '어릴 적부터 북극점 탐험을 꿈꿔왔던 내가 정반대 방향에 있는 곳에서 영광을 얻었지만 세상 누가 이런 정반대 방향의 꿈을 이룬 것을 더 좋아할까?' 라면서 자신의 실망감과 아쉬움을 드러낼 정도였다.
이처럼 어릴 적부터 노르웨이에서 남극보다 더 가까운 북극점을 가장 먼저 가보고 싶어 하던 그였기에 그 안타까움과 좌절의 크기는 엄청났다.
여담이긴 하지만, 이후 과학자와 탐험가들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피어리가 인류 최초로 북극점에 갔다고 알려져 있으나 후일 그는 북극점에 40km 떨어진 곳까지밖에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고, 결국 북극점 최초로 도달했던 것은 아문센이었다는 것이 정설로 결론이 난다. 정작 이 사실을 아문센은 죽기 전까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고나서도 그는 결코 꿈을 접지 않았다.
1909년 9월 15일에 남극 정복을 위한 훈련을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담배를 끊었고 정복이 완수될 때까지 한 대도 피우지 않았다. 여간 저런 사정 때문에 할 수 없이 아문센은 계획을 변경하여 남극으로 배를 돌렸고, 같은 곳을 목표로 삼았던 영국 해군 장교인 로버트 스콧 대령과 경쟁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세계 최강인 영국과 반대로 1905년 독립한 약소국이자 유럽 최빈국이었던 노르웨이의 자존심 대결로 이어졌다.
특히 아문센은 극지방 현지인들을 신사적으로 대한 것으로 유명했고, 다른 얄팍한 탐험을 빙자한 약탈자들처럼 결코 그들을 이용해 돈 벌어먹는 짓 따위를 저지르지 않은 것으로 탐험가들 사이에 명성이 올랐다. 게다가 아문센은 개인적으로 사냥을 즐기지도 않았고 동물은 자연 상태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 더 아름답다고 여겼다. 남극점 탐험 도중 햇빛이 강렬한 오전에 푹 쉴 때, 할 게 없어서 지루해진 탐험대원들이 사냥에 재미 붙여서 필요 이상으로 동물들을 잡겠다고 했을 때도, 불필요하게 동물을 잡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다고 했을 정도였다.
1923년 51세의 아문센
1910년 6월 2일,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와 마우드 왕비가 프람 호를 방문하였다. 1910년 8월 9일, 아문센은 프람 호에 19명의 승무원을 싣고 남극으로 출발했다. 처음에는 목적지를 북극이라고 하였고, 선원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1912년 1월 26일, 99일의 기간 동안 1,400마일의 행군을 한 끝에 아문센 일행은 새벽 4시경 무사히 남극 기지 프람하임에 도착했다.
아문센은 1911년 12월 14일에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했고, 단 한 명의 대원도 잃지 않고 생환했다.
그러나 영국의 스콧 대령은 한 달 뒤인 1912년 1월 18일에야 남극점에 도착했고, 거기서 아문센이 남기고 간 노르웨이의 국기와 편지를 봐야 했다. 기진맥진한 스콧 탐험대는 무거운 발을 끌며 귀로에 올랐지만, 이들은 모두 사망했다. 추위와 식량부족에 시달리며, 길까지 잃고 눈 속을 걷다가 차례차례 죽어간 것이다.
그렇게 준비성이 철저했던 그였지만, 정작 1928년 북극점 탐험에 나선 햇병아리 이탈리아의 노빌레가 조난당한 것을 구하러 갔다가, 선두에 서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던 차에 프랑스 측에서 뒤늦게 라탐 47형(Latham 47) 비행정을 제공하자, 프랑스 팀 구조대장으로 나서서 구호품을 두둑이 비행기에 싣고 노르웨이 트롬쇠를 떠나 기꺼이 북극점으로 갔다가 무리하게 극지방 비행을 강행하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맡게 된다.
1928년 6월 18일 오후 4시쯤, 바렌츠 해에서 그가 탄 비행기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아문센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나이 향년 55세였다.
굳이 이렇게까지 길게 그의 이야기를 소개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는 평생을 탐험가로 살다가 탐험가로 생을 마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라이벌에 해당하는 이들을 모두 젖히고 결과적으로 두 극점을 최초로 정복한 인물로 인정받는 것은, 그가 철저한 준비 끝에 모든 대원들을 데리고 생환했기 때문에 더더욱 가치를 갖는다.
아무리 최초의 극점을 정복했다고 하더라도 대원들이 다 죽어버리거나 정작 자신이 죽으면 허망하기 그지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그가 얼마나 많은 준비를 차곡차곡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조금 길지만 그의 준비과정을 일일이 보여주었다. 사실 북동항로의 개척과 북극횡단 비행은 설명하지도 않았다.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어머니의 소망을 꺾지 않으려고 의대를 진학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자기가 원하던 탐험가로 나서면서도 그의 의학 공부는 탐험의 가장 기본적인 생명유지에 아주 큰 공부이자 준비였다.
선장이 탐험의 주도권을 갖던 시대라, 조타수 공부를 했고, 선장 면허를 땄으며, 비행기 면허를 땄고, 스키는 선수 수준이었으며, 지리학 공부에서 심지어 프랑스어 공부까지 탐험에 필요한 것이라면 그게 어떤 것이든 그는 쉼 없이 준비하고 또 준비했다.
그가 준비한 것이 단순히 배움을 위한 갈망이 아닌, 자신이 원하던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준비과정이었음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그는 스키 투어를 감행하다가 눈에 파묻혀 죽을 뻔도 하고, 결승점을 100미터 앞두고 폭설로 다시 길을 되돌아가는 경험과 실패를 통해 매번 그다음을 준비했다.
탐험 중에 어미 북극곰 한 마리에게 습격당해 쓰러졌을 때도 데리고 다니던 개가 아문센을 구해주는 사건을 겪기도 했는데, 당시 입은 어깨 부상이 상당히 심각해서 3년 뒤에 시애틀에서 진단을 했을 때는 팔을 못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았음에도, 몇 달 동안 재활 훈련을 통해 극복했다.
항해 도중에 스웨덴제 파라핀 램프의 결함으로 가스중독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도 했다. 그렇게 가스 중독으로 죽다 살아난 그는 심장에 통증을 느끼지 않고 활동할 수 있기까지 몇 달의 회복기간을 소요해야만 했다.
개썰매보다 획기적이라며 겁도 없이 북극곰을 조련하여 북극곰 썰매까지 만들 계획을 하고 실제로 조련까지 마치는 훈련을 했고, 런던에서 한 심장 전문의에게 오래 살고 싶으면 탐험을 그만두라는 말까지 들었지만 9달 뒤에 개썰매를 끌고 알래스카 횡단에 나서 눈 속에서 하루 50마일을 달려 총 800마일을 행군했다.
이 모든 그의 행동은 단순히 무모했다거나 탐험에 미쳤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해내고 더 탐험을 하겠다고 나섰다가 죽음을 맞이한 그의 나이가 겨우 50대 중반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에 얼마큼이나 당신을 내던져보았는가?
당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에 필요한 그 모든 공부와 작업을 위해 얼마나 미친 듯이 매달려 그것을 이뤄내기 위해 노력해봤는가 말이다.
고작 좋은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누구나 다 하는 공부를 하면서도 투덜대고 힘들다고 징징대는 자가 그 이후에 갑자기 대오각성하여 자신의 꿈을 위해 매진할 리가 없지 않은가?
당신과 똑같은, 한번 사는 짧은 인생이었다.
아니, 실제로 그의 죽음에 환호하고 비아냥거렸던 그 영국 족속들의 코를, 당시 약소국에 해당하던 노르웨이 출신의 그 한 사람이 짓눌러버렸다는 사실을 당신은 분명히 기억해야만 한다.
대영제국의 온갖 지원을 다 받았던 스콧보다 빚쟁이들에게 쫓겨 배를 띄워 바다로 도망치듯 탐험을 감행했던 아문센이 훨씬 더 대단한 성과들을 냈다는 것은 바로 이 글을 생각 없이 읽으려 들었던 당신에게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당신이 100세 인생에도 이루기 어려운 일을 그는 반백년 안에 모두 이뤄냈다.
당신이 위의 글을 통해 살펴본 그가 천재에다가 집안이 금수저에 왕족 출신이라 그랬던가?
아니지 않은가?
시대를 막론하고 의대까지 진학한 그가, 어머니가 그리 싫다하셨던, 돈도 되지 않는 탐험가를 하면서 그것에 모든 인생을 다 바치면서 그가 누구에게 등 떠밀려, 가족을 먹여 살릴 기술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랬던 것 같은가?
아니다.
그는 미친 듯이 했던 자신이 선택했던 일이 너무도 좋아 어쩔 줄 몰라 일생을 바쳤던 것이다.
매번 배를 타고 바다를 나설 때마다 죽음을 생각하며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그 모든 것들이, 그는 누가 뭐래도 좋았던 것이다.
당신의 길지 않은 그 인생에서 당신이 미치도록 좋아하는 일을 찾아내고 그것을 위해 매진할 수 있는 열정이 아직 당신의 안에서 용솟음치고 있지 않은가?
그저 그렇게 살다가 가는 인생들에게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기백이 당신에게는 없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