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은 계약부수도 못 채우고, 남편이 바람을 피웠어도

기어코 추리소설의 여왕으로, 전 세계에 마니아층을 거느리다.

by 발검무적

1890년 영국 남서부 토키에서 미국인 사업가였던 아버지, 프레드릭 밀러와 영국 귀족이었던 어머니. 클라라 보머의 중상류층 집안에서 늦둥이로 태어났다. 그녀가 말년에 쓴 자서전에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은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이라며 기록된 것처럼 울창한 숲과 넓은 정원이 있는 애쉬필드 저택에서 유머가 풍부한 아버지, 사고방식이 독특한 어머니, 그리고 11살 위의 언니 마가렛, 10살 위의 오빠 몬티와 함께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엄마와 함께한 어린시절

아버지는 썩 잘 나가는 사업가는 아니었지만 선대의 유산으로 비교적 풍족하게 생활했다. 그러나 투자 실패로 가정 형편이 흔들리고 건강까지 나빠지자 온 가족을 데리고 남프랑스로 간다. 그녀는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프랑스어를 배우고 귀국 후에는 피아노를 비롯한 음악 공부에도 열중한다.


책 읽기도 즐겼는데 고전은 물론, 언니가 읽던 셜록 홈즈 시리즈 등을 접하면서 서서히 추리소설의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한편, 빚을 갚으려고 동분서주하던 아버지는 추운 날씨에 심리적 부담까지 겹쳐 그녀가 11살이던 1901년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다. 이로 인해 가정 형편이 악화되지만 다행히 친절한 재산관리인과 이듬해 결혼한 언니 남편의 원조로 그녀는 애착을 가졌던 애쉬필드의 저택에서 계속 살 수 있었다.


절약하는 생활 속에서도 음악이나 독서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다. 10대 초반에는 시와 단편소설을 잡지에 투고하기 시작했으며 15세 때부터는 처음으로 학교생활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해 겨울, 성악가를 목표로 프랑스 파리의 기숙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일류 성악가들에게 사사했으나 귀국 후 뉴욕 메트로폴리탄 극장 관계자에게서 ‘오페라에 나서기에는 성량이 부족하다.’는 혹평을 받고 바로 성악가의 꿈을 접는다.

그렇게 꿈을 접고서 기분 전환 겸 어머니의 요양차 이집트 카이로 여행을 다녀온 그녀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여행 중 얻은 소재로 쓴 습작 소설을 이웃에 살던 유명 작가 이든 필포츠에게 보여주고, 호의적인 평가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가스통 르루의 <노란 방의 수수께끼>를 읽고 언니와 추리소설 창작과 관련해 논쟁을 벌이며 추리작가를 목표로 설정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영국을 대표하는 여류 추리소설가의 최고봉이던 소설가이자 극작가였던 애거서 크리스티, 본명 애거서 메리 클러리사 크리스티 맬로언(Agatha Mary Clarissa Christie Mallowan)의 이야기이다.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20세기 초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계 추리 소설을 상징하는 최고의 전설이자 ‘미스 마플’과 ‘에르퀼 푸아로’라는 캐릭터의 창조자다. 막대한 판매량과 독창적인 서술 기법으로 후대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며 그녀의 소설은 현재에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읽는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1955년 미국 미스터리 작가협회의 최고상인 그랜드 마스터 상을 최초로 수상했으며 1956년 3등급 대영제국 훈장(CBE)을 받았다. 1967년 여성 최초로 영국 추리협회 회장이 되었으며, 1971년에는 문학에 대한 공로로 2등급 훈장(DBE)으로 승급되어 ‘데임(Dame; 여사)’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영국 역사상, 추리소설 작가 중에는 코난 도일과 그녀 단둘만이 기사 작위를 하사 받았다.

크리스티 부부

1912년 22살이 된 크리스티는 한 댄스파티에서 영국 육군항공대 입대를 지원한 장교 아치볼드 크리스티(Archibald Christie)와 만난다. 그녀에게는 이미 ‘레지 루시’라는 약혼자가 있었으나 입대를 앞둔 아치볼드의 열렬한 구애에 약혼을 파기하고 그와 결혼을 결심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경제 사정을 걱정한 어머니는 결혼을 말렸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아치볼드는 프랑스에 참전하고 크리스티는 육군 병원의 자원봉사 간호사로 약국에서 근무한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하는데 크리스티의 어머니는 두 사람이 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결혼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약사 조수로 일하던 모습

크리스티는 글쓰기가 취미였고, 잡지 등에 투고도 했지만, 처음부터 전업작가가 되려는 확고한 의지 같은 것은 없었다. 프랑스로 떠나는 남편을 배웅하고 병원 약국으로 돌아온 크리스티는 언니와 추리소설 쓰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언니가 “내가 결과를 예측 못 하는 소설을 너는 쓸 수 없을 거야”라고 한 말에 발끈하여, 크리스티는 ‘독약을 사용하는 추리소설’을 3주간 구상한 끝에, ‘에르퀼 푸아로(Hercule Poirot)’라는 탐정이 등장하는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을 탈고한다.


그러나, 무명작가의 작품이 쉽게 출간될 리 만무했다. 런던의 여러 출판사에서 계속 거절당하고 약 4년이나 세월이 흐른 뒤, 보들리 헤드 출판사의 편집장 존 레인의 눈에 띄게 되어 겨우 계약할 수 있었다.


이후 추리소설의 여왕으로 인정받았던 그녀였지만, 두 번째 작품을 쓰면서도 데뷔작이 책으로 출간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출간 후에도 2천 부까지 판매했으나 계약서 규정(2,500부 판매까지는 인세를 받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에 따라 당시 그녀가 번 돈은 단돈 26파운드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음 작품인 <비밀 결사>(1922), 뒤를 이은, <골프장 살인사건>(1923)이 호평을 받으면서 미스터리 작가로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1926년 걸작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발표한다. 이제 고전의 자리에 올라가 있는 이 작품의 결말을 놓고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마니아들에게는 숱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 무렵, 버크셔 주 서닝데일에서 딸 로절린드를 키우며 행복하게 살던 그녀에게 갑작스러운 불행이 닥친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1926년 12월 돌연 실종된 것이다. 그녀는 가족들에게 “잠시 드라이브를 하고 오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자가용으로 집을 떠났는데, 정작 그녀의 차는 서리 주 뉴렌즈 코너의 석회 채굴 광산에서 발견되었고, 크리스티는 남편이 업무상으로 만나던 여성의 이름으로 자택에서 400여 km나 떨어진 헤러게이트 호텔에 묵고 있었던 것이다.


헤러게이트 호텔에서 발견됐을 당시 그녀는 자신에 대한 거의 모든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으며, 호텔에 도착하기 전 백화점에서 고가의 쇼핑을 하고, 신문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닐 가족들은 연락 주세요.’라는 기묘한 광고까지 싣었다. 정신과 의사들은 크리스티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남편에 대한 의부증 등으로 신경쇠약과 배회증을 앓고 있었다고 진단했다. ‘스트레스에 의한 기억 상실증’이라는 진단이 정설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스트레스의 원인이었던 남편의 외도로 그녀는 상처를 회복하지 못한 채, 이혼하게 된다.

크리스티가 고고학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1928년 바그다드 여행 이후였다. 그때 자신의 열성팬이었던 발굴 대장, 고고학의 권위자 레너드 울리 경의 아내 캐서린을 알게 되었고, 그녀의 초대로 다시 메소포타미아에 왔을 때, 젊은 고고학자 맥스 맬로원(Max Mallowan)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크리스티가 귀국할 때 맬로원에게 동행하라고 ‘명령’한 사람이 바로 캐서린이었다.


두 사람은 이 귀국길 열차 안에서 사랑을 싹 틔운다. 여담이지만, 크리스티와 맬로원의 나이 차이는 14살로, 40세이던 크리스티는 결혼 증명서에 37세로 기록하고, 26세였던 맬로원은 31세로 기록해 서류상으로는 6살 차이로 줄여놓았다.

두 사람은 매년 발굴 여행 때 함께 했으며,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오리엔트 특급 살인>(1934), <메소포타미아의 살인>(1936), <나일강의 죽음>(1937) 등을 썼다. 결혼 생활은 크리스티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46년간 지속되었다. 그와 크리스티는 각각 그들 자신의 업적으로 기사 작위를 수여받은 부부이기도 하다.


그녀는 1976년 1월 12일 윈터 브룩에 위치한 집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85세.

그녀는, 고향인 콜시의 성 마리아 성당 교회 마당에 묻혔는데, 그녀의 남편 말로완은 2년 뒤 그녀의 뒤를 따랐고 그녀의 옆에 묻혔다.

그녀의 묘비

브런치에 ‘작가’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 이들 중, 대다수는 책을 출간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책을 내는 것, 사실 1인 출판부터 자비출판에 이르기까지 책을 출간하는 것은 예전처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돈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책이 기념품이냐 정말로 많은 이들이 돈을 주고 사서 열독할만한 가치가 있는 글이냐 하는 것이다.


내일의 작가를 꿈꾸는 당신이 오늘 본 그녀의 삶은 어떠하였는가?

그녀의 주옥같은 작품들은 이미 60여년 전의 작품들임에도 수차례 리메이크되고 전 세계에서 각색 등의 다양한 형태로 재창작되고 이야기되고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다.

그런 그녀도 초판 인세를 받기로 한 계약 당시 조건인 판매부수 2500부를 넘기지 못해서 고작 26파운드의 인세만 받고 작가로 데뷔했다.


그래서 그녀가 실망하고 좌절하였던가?

아니다. 그녀는 보란 듯이 더 많은 더 훌륭한 작품들을 쏟아냈다.

시작부터도 당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추리소설을 사랑했고, 추리소설 마니아이던 언니의 도발에, 내가 훨씬 더 괜찮은 추리소설을 쓰겠다는 것이 그녀가 펜을 들게 된 이유였다.

그렇게 시작한 글쓰기는 그녀의 인생에 평생을 함께한 동반자였다.

1974년 그녀의 집필실 책상에서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혼자까지 있는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불타는 사랑으로 결혼했던 남편이, 자신이 작가로 등단하고 글을 쓰는 것을 시답잖게 여기며 바람을 피우고 자신에게서 마음이 떠났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해 온 것이다.

그 아린 순간에도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것은 글쓰기였다.

그리고 아픈 사랑을 다시 감싸 안아준 것도 사랑이었다. 그녀가 만난 무려 14살 연하의 남자는 그녀를 다시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었고, 그녀의 글쓰기가 원숙헐 수 있도록 충분한 외조를 해주었다.


그녀가 두 번째 남편을 만나고부터 쏟아진 걸작들, 그리고 그것이 모두 두 사람이 함께 했던 여행에서 얻은 아이디어와 경험들이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그녀에게 있어 사랑은 곧 글쓰기였고, 글쓰기는 곧 그녀에게 있어 사랑이었다.


그저 자신의 생각을 적고, 일상사를 적는 하찮아 보이는 글쓰기에서 시작했더라도, 거기에서 멈추지 말고 계속 공부하고 생각하고 많이 읽고, 흉내 내고, 필사하고, 거듭된 습작을 써 내려가는 작업을 통해 작가는 탄생한다.


그저 일상을 끄적거리는 수준의 글쓰기를 반복하는 것으로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착각을 하지 말기 바란다. 브런치의 ‘작가’가 ‘진정한 작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 것이다.


그저 자신의 아픔을 내보이고 자신의 일상을 끄적거리는 글쓰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것도 글쓰기의 일환이니 자신의 영혼을 가다듬는 독백으로 나쁘지 않다고 본다. 게다가, 쓸데없는 종편 연예 프로그램을 보는 일보다는 한층 가치 있는 일이니 권장한다.


하지만, 진정한 ‘작가’가 되는 길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마냥 꽃길이지 않다.

잉크를 대신해 자신의 눈물과 피로, 노력을 거듭하고 거듭하여 그 결정체로 나오는 것이다.

크리스티의 작품이 60여 년이 지나도 고전으로 인정받는 것은, 단순히 운도 아니고, 그녀가 타고난 글쟁이였기 때문도 아니다. 그녀에게는 작가수업에 준하는 엄중하고도 다양한 인생수업이 있었고, 그 과정마다 그녀는 그것을 글로, 기록으로, 그리고 다시 창작으로 이어나가는 훈련을 끊임없이 해왔던 ‘진짜 작가’였다.


마치 자극적인 제목으로 조회수를 끌어내려는 인터넷 뉴스마냥 호기심에 누른 클릭수가 많아지고 제대로 곱씹어 보지도 않는 구독자가 많아지는 것을 보며, 정말 작가라고 착각하며 작가를 꿈꾸는 것이라면 얼른 그 꿈에서 깨거나, 아예 그 꿈에서 깨지 말길 바란다.


하지만, 진정 당신이,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과 전혀 무관하게, 글쟁이, 진정한 작가를 원한다면 제대로 공부하고 제대로 써나가기 시작해라. 제대로 하나하나 꼭꼭 씹어 영양분이 되는 글만 읽고, 한 줄을 쓰더라도 자신이 나아가는 길에 도움이 되는 글쓰기를 하라.


적당히 클릭해주고 구독해주며 아픔에 동조해주는 좋은 친구 말고, 내 글의 문제점을 명확하고 혹독하게 해부해서 어떻게 고쳐야 더 발전할 수 있는지 직언해줄 수 있는 이에게 찾아가 질정하라.


80이 넘는 동안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 있던 수많던 부침을,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추리소설에 어떻게 녹여냈는지 읽어내지 못할 수준이라면, 오늘부터 그녀가 쓴 책을 다시 정독하기 시작해라.

쉼 없이 배우고 공부하다 보면, 전세계가 왜 그녀를 '추리소설의 여왕'이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될 것이고, '진정한 작가'라고 하는 이들이, 자신의 인생을 담금질해가며 만든, 날이 시퍼렇게 선 칼날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글을 함부로 쓰지 못할 것이며, ‘작가’라는 말을 쉬이 입에 올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된 것이다.

그때부터 그 마음가짐으로 다시 시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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