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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Oct 15. 2021

귀족 집안의 금수저로 태어나 온갖 방탕을 다 겪고 나서

그 모든 방탕함과 오만함에 무릎 꿇고 대문호로 거듭나다.

1828년 러시아 제국 툴라현 크라피브나군의 야스나야 폴랴나(Ясная Поляна)에서 부유한 지주 귀족인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 백작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2세 때 어머니 마리야 톨스타야 백작부인(Графиня Мария Николаевна Толстая)은 막내 여동생 마리야를 낳고 사망하여 ‘숙모’라고 부르던 먼 친척 아주머니 밑에서 자랐다. 숙모라 불린 친척 타티야나 예르골스카야(Татьяна Александровна Ергольская)는 어머니와 다름없어 그의 훗날 성장과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사실 그의 부모가 결혼하기 전부터 ‘숙모’와 그의 아버지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자신보다 부유한 여성을 만나기 바라는 마음으로 청혼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래서 양모를 자처한 이유도 있었다. 그의 생모가 사망하자 그의 아버지 니콜라이 일리치가 다시 청혼하지만 아이들과의 사이가 어색해질 것을 걱정해서 다시 거절하고 대신 평생 아이들의 엄마 노릇을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정작 7년 후, 그의 아버지 니콜라이 일리치는 그가 9세 때, 갑자기 사망하고 만다. 그래서 큰고모가 후견인이 되었다가 14세 때 큰고모도 사망하여 작은 고모가 후견인이 되었다. 나름 대지주의 귀족 가문이었기 때문에 그런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의 가문 영지내에 있는 그가 살던 저택

그는 1844년에 외교관이 되려고 카잔 대학 동양어학과에 입학했다가 다시 농민을 위해 일하겠다고 마음을 바꿔먹고 법학부로 전과하였다. 하지만 학업에 열의가 없고 자기 관심 분야 외의 책은 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탓에, 수업태도 불량으로 유급했고 결국 자퇴한다. 1847년에 야스나야 폴랴나로 돌아온 그는 위의 형 셋과 달리 당시 귀족들의 진로인 문관이 되거나 군인이 되거나 중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농촌에 틀어박힌다.

 

이때 잠시 농촌생활에 열의를 가지고 농노들에게 교육이라든가 의료를 제공하고 온정적인 지주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농민들의 차가운 반응과 불신으로 실망하고 다시 도시로 나오게 된다. 이후 그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학사 검정고시로 학사 학위를 따긴 하지만,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상류사회의 사교계에서 방탕한 생활로 세월을 보낸다.


어머니가 2살 때 죽어 일종의 콤플렉스를 가지게 되면서 여자에 집착하게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거액의 도박 빚을 지는 등, 계속 무분별하게 살아가던 그는 결국 그러한 삶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맏형 니콜라이가 복무하던 캅카스 전선으로 여행을 간다. 여기서 그는 농노 제도 없이 사는 카자크들의 삶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의 언어와 문화 풍속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 느낌과 감상을 글로 써, 잡지에 발표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한다.

<부활> 양장본 표지

러시아와 서양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대문호이자, 도덕적, 종교적 사색가이며 기독교적 아나키스트였던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Гра́ф 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의 이야기이다.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에는 그를 “사실적인 소설의 거장이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가 중 한 명인 러시아 작가”라고 설명하고 있다.

너무도 유명한 작품으로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 등이 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거장으로 현재까지 존숭 받는 대작가로, 종교와 인생관, 육체와 정신, 죽음의 문제 등을 작품 속에서 다루는 폭넓은 인식의 깊이를 보여준 대가였다.

 

톨스토이 초상화(1873년)

정작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당시 러시아는 캅카스 지역을 병탄하기 위해 그곳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톨스토이는 호전적인 소수민족이던 체첸인을 상대하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입대하게 되는데, 당시 귀족들처럼 유년 군사학교나 사관학교 출신이 아닌, 포병 하사관부터 시작하여 공을 세워 현지 임관한다.


복무 중 틈틈이 그의 성장기가 반영한 소설을 썼는데 <유년 시대(Детство)>(1852), <소년 시대(Отрочество)>(1854), <청년 시대(Юность)>(1857) 시리즈가 바로 그 작품들이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서려고 전역 신청을 했는데 정작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전역을 거부당하고 크림 전쟁에도 참전하게 된다. 전투에 능했던지 세바스토폴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공을 인정받아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고, 중위로도 진급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잔혹한 전쟁에 대한 체험이 톨스토이가 평화주의로 기울게 되는 전환점을 제공하게 된다. 톨스토이는 1856년 군에서 제대하고 1857년부터 1861년까지 서유럽을 두 차례 여행한다. 그곳에서 교육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톨스토이는 영지로 돌아와 농민의 자녀를 위한 학교를 열고 신문 <야스나야 폴랴나>를 발간해서 자신의 교육관을 실현하고자 노력한다.

톨스토이는 34살이 되어서야 뜨거운 사랑을 하고, 늦깎이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의 아내는 18살밖에 안되었던 친구의 딸,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였다. 그의 늦깎이 사랑의 주인공 소피야는 그를 충분히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고, 그의 걸작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에 아내를 모델로 한 주요 인물을 등장시키게 했다.


그리고 그는 1869년의 필생의 역작 <전쟁과 평화>를 완성시켰다. 나폴레옹 전쟁의 러시아 원정을 소재로 한 이 역사 소설에서 톨스토이는 실제로 특출 난 사람이나 영웅(소설에서는 나폴레옹)은 정작 역사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자신만의 독특한 역사관을 피력하며 ‘위대한 영웅’에 의한 역사관을 중시했던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던진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7번이나 격전지를 답사하고 생존자들을 직접 찾아 인터뷰하는 등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밀착 취재를 하고 다녔다고 한다. <전쟁과 평화>는 소련 시절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공산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인원동원이 간편했기에 보조출연자로 연인원 총 75만을 동원해 거대한 전투 장면을 찍어 기네스북에도 기록을 올렸다.

 

톨스토이는 1873년부터 1877년까지 집필한 두 번째 걸작 <안나 카레니나>를 1878년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지금 보기에는, 단순히 불륜을 다룬 듯한 이 소설은, 1870년대의 귀족계급과 러시아의 사회, 도덕, 철학에 대한 문제,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들, 특히 간통에 대한 상류계급의 위선적인 태도와 개인의 삶에 있어서의 종교적 신념의 역할 등을 강하게 고발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높은 평가를 받는다.

 

<안나 카레니나>를 쓰고 있던 해에 톨스토이는 갑자기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톨스토이는 도덕적 자기 점검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고통스러운 물음을 <고백>(1879)라는 에세이에서 하고 있다. 는 정신적 위기와 함께 급격하게 변화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정교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자신의 교회 사상을 발전시켜 <신의 왕국은 그대 안에 있다>(1894)라는 에세이에서 ‘어떤 폭력이나 무력의 사용은 해로운 것이며 폭력에는 비폭력으로 맞서야 하고 정부로 대표되는 무력이나 종교, 사유재산, 맹세 등 모든 형태의 강제적인 힘에 반대한다’는 사상을 펼쳤다. 이는 후세에 ‘톨스토이 주의’라는 사상 형태로 발전한다.

실제로 말년의 그는 <인생론>, <참회록>을 저술하고 스스로 재산과 영지를 포기하고 스스로 농부처럼 일하는 금욕적인 삶을 선택하겠다고 결심한다. 귀족으로 평생 살았던 한참 어린 아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엄청난 부부싸움에 돌입한다. 심지어 소작농들마저 쇼라면서 그를 비웃었다. 톨스토이는 1881년 이전에 쓴 모든 소설의 저작권까지 소피야에게 양도했지만 소피야의 화는 풀리지 않았다.


결국, 톨스토이는 에세이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에서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해 회심하기 전에 쓴 모든 작품을 부정한다. 이 책에서 톨스토이는, ‘모든 예술은 사람들의 윤리적인 교화를 도와 사람들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또한 예술이 가진 사상은 어떤 무지한 사람에게라도 전파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기준에 따라 톨스토이는 이전에 쓴 자신의 모든 작품들이 보통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헛된 목적으로 쓴 '귀족의 예술'이라고 수치스럽게까지 여겼다. 이 에세이는 러시아 문학계에 엄청난 파장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을 시작으로 다시 소설 쓰기로 돌아갔다. 이 작품을 읽고 표트르 차이콥스키는 ‘톨스토이는 동서양 최대의 작가’로 극찬한다. 이때부터 러시아 민담과 설화에 관심을 가진 톨스토이는 민담 형식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들려줄 수 있는 <바보 이반>, 조이스가 세계문학이 아는 가장 위대한 이야기로 극찬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등을 저술한다.

 

한편. 톨스토이는 두호보르파(Духоборы)들의 구명을 위한 자금 모금을 위해 장편 소설 연재도 시작했는데 이 소설이 바로 톨스토이의 마지막 걸작인 <부활>이다. 톨스토이는 두호보르파의 캐나다 이주 비용을 <부활>의 인세로 지원해준다. 이후, 작중에 등장하는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 때문에 톨스토이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당했다. 이런 면에서는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던 도스토옙스키와 대비되곤 한다.

결국 자신의 모든 저작권과 판매료를 사회에 환원하고자 했던 톨스토이의 바람을 귀족적 특권을 포기하지 못했던 부인 소피야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사상의 변화로 인해 부부싸움의 골이 깊어만 가던 중, 80을 넘긴 나이로 그는 정말 농민과 같은 삶을 살겠다고 막내딸 알렉산드라를 데리고 가출을 감행하였으나, 아스타포보 기차역에서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83세.


이 아스타포보 역은 톨스토이를 기리기 위해 1918년 ‘레프 톨스토이’ 역으로 개칭되었다. 이 역은 2014년 폐쇄되었지만, 역사는 그대로 남아있는데, 역사 안의 시계가 톨스토이가 사망한 시간인 6시 5분으로 맞춰져 있다.

묘비하나 없는 그의 무덤

톨스토이는 현실주의 소설의 대가였다. 그의 쓴 두 가지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만으로도 소설 역사상 쓰여진 가장 훌륭한 소설들로서 인정받는 소설가이다.

그런데 오늘 내가 당신에게 이 대문호를 소개한 것은 그의 뛰어난 소설 작품이나 그의 능력 때문이 아니다.


19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매튜 아놀드는, ‘톨스토이의 작품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삶의 파편이다.’라고 말했다. 영국의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톨스토이를 이 세상 모든 소설가 중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단순히 그의 소설가로서의 능력에 주목해서 나온 평들이 아니다.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금수저였다. 굳이 구분하자면 금수저 중에서도 상류층에 속했다. 대귀족인 신분으로서 하층민들의 삶을 이해해가며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말이 쉽지 실행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많은 상류층 사람들은 톨스토이를 만났을 때 불편함을 느꼈다고 한다.


자신들이 미처 내뱉지도 않은 사상들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처럼, 그들의 욕망과 비뚤어진 의식을 꿰뚫어 보는 그 시대의 양심 같은 모습들이 그들에게 느껴졌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글은 시대를 반영한다. 그리고 글쓴이의 사상과 의식을 오롯이 드러낸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사상이 변화하고 자신이 젊었던 날들의 방탕한 세월과 지나친 성욕으로 인해 여자에 탐닉했던 그 모든 것들을 회개하고 자신의 글을 통해 고해성사하는 듯 양심을 쏟아내고 거듭났다.

실제로 자신의 모든 재산에 해당하는 저작권 등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톨스토이를 자연과 순수한 활력의 현신으로 보기도 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를 세상의 양심의 화신으로 보았다고 한다.

당신이 그 두껍고 복잡한 그의 사상이 담긴 책을 읽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목만 그저 듣고 문학개론 수업에서 그저 주워 들었던 것이 다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인생을 먼저 보여준 것이다. 그의 인생에서 좌절이 있었느냐고? 실패가 있었느냐고?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 이가 없길 바란다.


당신이라면, 당신이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금수저였다면 당신은 그 특권을 던져버리고 당신의 사상을, 당시 시대를 장악하고 있는 이들을 모두 뒤집어엎어가며 하층민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작품으로 써서 발표할 수 있겠는가?


결국 러시아 정교회에서 축출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그들의 잘못된, 허황된 특권의식에 대해 바른 소리를 낼 수 있었던 그만의 당당함은 그 어디에도 아닌, 그가 어려서부터 젊은 날, 그 모든 잘못되고 삐뚤어진 삶에서 실패하고 좌절하면서 결국 직접 몸으로 겪고 영혼을 푹 담갔었기에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평생 헤비 스모커로 살다가 폐암으로 죽음을 맞이한 이주일 선생이 죽기 전 자진해서 금연광고를 찍었다. 그가 담배를 평생 물고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면 그의 절절한 광고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에게 공포를, 그 살 떨리는 체험을 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온몸으로 글을 써낸 사람이었다. 그가 경험했고 그가 체험했으며 그가 실제로 모두 겪어보고 목소리를 높였고 실질적인 대안을 실천에 옮겼기에 그가 대문호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이란 말이다.


자신이 금수저라 아니라서, 사회를 바꿀 힘이 없다고 생각하나?

한 학기 휴학하고 한 학기를 벌어야만 한 학기 등록을 할 정도로 힘겨운데 무슨 문학이고 무슨 사회를 잡겠느냐는 말을 하냐고 버럭 하고 싶은가?


정말로 돈이 없는 이들은, 당신이 말하는 그 등록금도 내지 못해서 대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10년도 일하지 않고 50억을 퇴직금으로 받는 서른 갓 넘은 어린애도 있는데, 요즘 돈이 없어 대학을 못 다닌다는 게 말이 되냐고 되묻고 싶은가?


아직 한국에는 급식비를 내지 못해서 급식을 먹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고, 동생과 먹을 게 없어서 라면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불쌍한 애들이 적지 않다. 생리대가 없어서 운동화 깔창을 쓰는 애들이 아직도 있는데, 그 큰 다국적 기업인 생리대 회사는 그 아이들을 위해 기부라는 건 절대 하지 않는 사회에 당신이 살고 있단 말이다.

 

당신이 지금 초록창을 보며 아프리카 애들한테 가는지 안 가는지도 모르는 돈을 보낼 때가 아닐 정도로 우리나라의 사정이 아직 그렇단 말이다.

당신의 상황이 불우하다고 착각하지 마라.


그리고 설사 조금 불우한 정도로 세상 원망하는 짓 따위도 어설프니 하지 마라.


당신이 당신의 두 주먹으로 바꿔라. 바꿀 수 있는지 없는지 당신이 해보고 나서 말해라.


그러려면 일단 지금 엎어져 주저앉아 있는 불쌍한 꼬락서니부터 바꾸자.

훌훌 털고 일어나서 다시 한번 제대로 세상을 바꿔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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