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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Oct 18. 2021

증기기관의 최초 발명가라는 명성도 못 얻었어도,

세계 최초로 증기 기관차의 아버지로 인정받다.

1771년, 영국의 콘월주 일로건에서 출생하였다. 광산가 집안에서 태어나 볼턴-와트 상회에서 증기기관의 운전·조립을 담당하다가 자신의 기술을 발전시키겠다고 독립하여 기계공장을 설립하였다.


1800년에 빔 연접봉형(連接棒型)의 고압복동기관(高壓複動機關)을 처음으로 제작하여 권양기(winch)가 필요한 콘월의 광산에 설치하였다.


1801년, 저 유명한 조지 스티븐슨에 앞서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한 도로용 증기차를 설계하여 ‘칙칙폭폭 악마(Puffing Devil)’라는 이름을 붙인 차량으로 출시하여 런던에 전시하고 도로 시운전에 성공하는데, 런던을 한 바퀴나 돌았지만, 증기의 열을 견디지 못해 고장 나고 만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명백하게 증기로 움직이는 교통수단의 첫 시범 케이스로 널리 인정받았다.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1802년 다시 빔형의 실험 양수기관(揚水機關)을 만들었으며, 드디어 운명적인 주문을 받게 된다.

바로 1803년, 페니다렌에서 가장 가까운 운하로 철을 운반하는 데 사용할 기관차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 것이다. 1년여의 시간을 들여 직접 모든 작업을 체크했다.

그리고 드디어 1804년 2월 21일, 슈롭셔에서 페니다렌 증기기관차(Penydarren locomotive)는 철공장에서 머틸 카디프(Merthyr-Cardiff)운하까지 10톤의 철과 70명의 승객 그리고 5대의 왜건을 철로로 운반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최초의 철도용 증기기관차는 9마일을 여행하는 동안 시간당 거의 5마일 속도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레일은 웰리엄 제솝(William Jessop)과 동료들이 개발한 주철 레일이 사용되었는데, 이 레인은 증기기관차의 중량을 견디지 못해 얼마 안 가 금방 파손되었다. 


이렇게 약해서는 탈선의 위험을 반드시 해결하지 않고서는 실용화할 수 없다는 맹점이 드러났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증기기관차의 상용화에는 실패한다.

결국 그는 세계 최초의 증기 기관차라는 타이틀과 증기 기관차의 가능성만을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이 기관차는 공식적으로 최초의 철도용 증기기관차로 인증받는다. 영국에서 ‘증기기관차의 아버지’라고 인정받는 발명가 리처드 트레비식(Richard Trevithick)의 이야기이다.

그 후 나머지 생애는 증기로 움직이는 기계와 최초의 바위 굴착 기계 등 증기 엔진 연구에만 평생을 바쳤다. 1812년 콘월식의 이름으로 알려진 양수용(揚水用) 고압 기관을 발명하였다. 그 효율성이 매우 높았기에 19세기 말까지 상수도용으로 보급되었다. 그 밖에 1815년의 플랜저 폴 기관(특허)이나 탈곡·제분 등의 농업용 기관도 제작하였으나 그의 관심은 증기 기관차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발명 이후 실용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사람들이 통 관심을 가지지 않자 그는 실망하고 증기로 가동하는 세계 최초의 바위 굴착기계로 눈을 돌린다.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아 남미로 이주하여 광산 기술자로 근무하기도 한다. 그나마도 일이 잘 풀리지 않자 그는 다시 영국으로 귀국, 고향의 빈민구제 시설에서 보호를 받아가 1833년 돌보는 가족들도 없이 불우하게 세상을 떠난다.


증기기관차의 아버지라고 하여, 당신이 떠올렸을 사람은 트레비식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신이 어린 시절 위인전을 통해 보았던 인물은 ‘증기기관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이었을 것이니 말이다.


물론, 증기기관차 시대를 연 철도 기술자 조지 스티븐슨은, 성능 좋고 효율 높은 증기 기관차를 만든 발명가로 그의 아들과 함께 철도 가설 사업에 매진했고 이런 사업의 성공으로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그 역시 상당히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학교도 다니지 못했고, 가족 중에서 글을 읽거나 쓸 줄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14살부터 탄광촌에서 일하는 아버지 옆에서 탄광 일을 돕게 되고 17살이 되던 해 엔지니어로 일하는 기회를 얻는다. 그렇게 증기기관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증기기관차가 있었으면 꿈꾼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스티븐슨이 아닌 그 전의 바탕만을 마련하고 부를 축적하는 것은 고사하고 시설에서 가족의 보호도 없이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 트레비식의 인생과 그 처절했던 실패를 당신에게 소개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이 시리즈를 계속해서 읽어온 당신이라면 대강 눈치를 챘겠지만, 앞서 전화기를 발명한 발명가를 다루면서 처가의 백그라운드를 등에 없고 부를 축적했던 그레이엄 벨이 아닌 실제적인 기술을 발명했던 엘리샤 그레이의 삶에 주목했던 이유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앞에서 살펴본 것과 마찬가지로, 증기기관차를 처음 발명한 것은 ‘명백히’ 1804년의 리처드 트레비식이었다. 다만 그의 시대엔 기존의 마차를 위한 선로가 증기기관차를 버티지 못하여 상용화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한편 스티븐슨이 처음으로 증기 기관차를 만든 것은 불과 10년이 지난 1814년이었다.

 

그 과정을 먼저 면밀하게 당신에게 설명해줄 필요가 있겠다.

 

증기기관은 당시 가장 뜨거운 기술 중 하나였다. 증기기관을 최초로 발명한 사람은 영국의 기술자 토마스 뉴커먼(Thomas Newcomen)이다. 뉴커먼은 1712년 수증기를 이용해 힘을 만들어내는 엔진 증기기관을 만들었다. 뉴커먼의 증기기관은 광산에서 배수용으로 사용된다.

 

이후 영국의 기계기술자 제임스 와트(James Watt)가 나타나 뉴커먼의 증기기관을 실용적인 수준으로 올려놓는다.

 

제임스 와트(James Watt)는 뉴커먼 기관의 문제점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후 1769년에 분리 응축기로 특허를 받았다. 와트는 1776년에 자신의 증기기관을 상업화하며 1783년에는 회전식 증기기관을 완성한다. 이 증기기관은 엔진이 왕복운동에서 회전운동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단순한 탄광용 펌프를 넘어 만능 동력원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비록 와트가 증기기관의 개선에 혁신을 가져왔지만 자신의 디자인으로 상업적 이득을 얻는 것을 누구에게도 허용하지 않아 비슷한 디자인을 가지고 증기기관을 만든 여러 명의 엔지니어들과 대규모의 법적 소송이 벌어졌다. 이는 빠르게 성장하는 영국의 산업에 강력한 특허 보호의 중요성을 확신시켰다.

 

그런데 정작 법적인 문제로, 와트의 특허가 1800년에 만료되자, 많은 발명가들이 증가로 구동되는 기관차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로 뛰어들었는데, 리처드 트레비식은 이 기회를 잡은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동일한 무게와 크기의 기관차로 전보다 훨씬 더 많은 동력을 만들 수 있는 혁신적인 고압 증기기관을 개발하였다.

 

조지 스티븐슨은 트레비식의 증기기관차를 보고 큰 흥미를 느낀다. 자신이 트레비식의 발명을 잇는 증기기관차를 만들 것이라고는 그때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스티븐슨에게 의뢰가 하나 들어왔다. 광산에서 채굴한 석탄을 운반하기 위한 증기기관차를 제작해보겠냐는 제안이었다.


이후 1820년, 버틴쇼어(John Birinshaw)가 개발한 15피트 길이의 연철 레일에 대한 특허가 유아기의 철도 시스템에 중요한 돌파구가 되었는데, 이 레인은 기관차와 열차의 움직이는 하중을 견딜 수 있었다.

결국 제대로 된 철도가 설치된 것은 그 이후에도 10년이 더 흐른 1825년 9월이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스톡턴-달링턴 구간을 운행하는 세계 최초 공공 철도가 개설됐다. 스티븐슨은 향상된 제철 기술을 이용해 선로를 튼튼하게 제작했기에 자신이 있었다. 


새로운 증기기관차인 ‘로코모션(Locomotion)’도 선보였다. 그가 직접 운전한 로코모션은 석탄과 밀가루 80t을 싣고 시속 39km 속도로 달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전에 선보였던 블뤼허보다 6배 빠른 속도였으며 더 많은 화물을 싣는 것도 가능했다.

자아, 이 과정을 살펴보고서도 당신은 조지 스티븐슨이 최초 증기기관차의 아버지라고 읽히는가? 물론 그 역시 노력하였고, 시대의 흐름이 마치 그를 도와주듯 그 시대의 흐름과 발을 맞춰 어마어마한 부를 거머쥐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지만, 내가 만든 어느 한 가지만으로 세상이 변화하는 경우는 없다. 구두 하나가 발명되기까지는 구두굽이 있어야 하고 가죽을 제봉할 수 있는 수공 기술이 받쳐줘야 하며, 그것이 발전하면서 인체공학적으로 인간이 신고 걷기에 점점 편해지는 쪽으로 발전해야만 한다.


물론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최초’가 누구였는가에 대한 유치한 논쟁이 아니다. 물론 최종 승자는 스티븐슨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모든 부와 명예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 시리즈에서 늘 강조하듯 나는 당신이 트레비식이 평생 노력을 기울였던 그 노력을 가벼이 보거나 행여 그것을 비아냥거리듯 언급해서는 안될 것임을 이야기하고 한다.

그는 시대를 앞서갔고, 그의 기술은 스티븐슨이 종합 정리할 그 모든 것을 남겨주었다.


세상은 그렇다. 

저 혼자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없는 것처럼 내가 무언가를 해냈을 때, 내 앞에서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었을 그들의 피와 땀이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사이사이에 길을 놓아준 것이고 내가 겪을 실패를 미리 겪어 내 시행착오를 줄여준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기억해주지도 않고 기억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당신이 가장 마지막에 있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떡이며 그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스쳐 지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마지막에 그 모든 성과물을 취합하여 완성된 무언가를 만들어 부와 명예를 차지하게 되는 이는, 사실 그것을 갈급하고 그것만을 평생 생각해서 그렇게 되는 경우가 상당히 드물다.


말인즉은, 당신의 삶과 노력이 맨 마지막에 있는 자가 아닌 중간 과정에 놓여있을 확률이 가장 크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아니,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트레비식의 삶과 노력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단 말이다.


그의 노력과 피와 눈물이 없었더라면 스티븐슨은 이름을 남기는 것은 고사하고 그 막대한 부와 명예를 쌓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당신에게 말하는 것은 최후의 최후에 될 자가 되라고, 줄 잘 서고 뽑기 잘하라고 일러주는 말이 아니다.


누가 가장 최후의 서게 될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엘리샤 그레이의 삶에서 봤던 것처럼 모든 과정에 섰던 사람들이 불우한 끝을 보지는 않는다. 트레비식 역시 삶의 어느 부분에서 운이 안 좋았거나 큰 실수를 했을지는 모를지언정, 증기기관 외에도 그의 발명이 시대에 곳곳에서 그의 피와 땀이 남은 결과물이 있음은 역사의 이견이 없다.

 

지금 당신이 달리고 있는 삶이, 당신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노력하는지 갑자기 멍해지고 이제까지의 인생이 모두 헛 달려온 것 같아 허망하기 그지없는 번아웃을 겪고 있을 수도 있다.


코로나 이후 어떻게 삶을 꾸려야 할지 망연자실해진 자영업자들도 그러할 것이고, 코로나의 영향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대기업에서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을 받다가 이른 명예퇴직을 강요받은 사람도 그러할 것이며, 멀쩡하게 비행기를 조종하고 비행기에서 생활하다가 졸지에 무급휴직에서 직장에서 떨려 날 위기에 맞은 젊은 인생들도 그러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들이 이제까지 피땀 흘리며 노력하고 쌓아온 것이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파도에 쓸려가 버리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지금 좀 힘들고 당신이 모든 것이 무너져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도 그것은 끝이 아니다. 당신이 이제까지 그렇게 노력하고 살아온 인생을 무시하고 날려버릴 수 있는 것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존재만으로도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당신의 가족들이 있으며, 무엇보다 당신을 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해 주신,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시지만, 반드시 당신이 당신의 인생에서 무언가를 해내고 이 좌절을, 이 어려움을 극복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또 믿어주시는 부모님이 계시단 말이다.


설혹 부모님이 지금 이 세상에 안 계신다고 하더라도, 그분들은 결코 당신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늘 당신의 곁에, 당신의 심장에 함께 하시며, 당신이 이 정도의 시련에 좌절하고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절대적인 믿음을 전해주시고 계시다.


하니, 결코 지금 당신을 덮친 그 하찮은 위기에, 실패에, 어려움에 굴복하지 마라.

트레비식이 10년을 더 기다리며 절치부심했다면, 스티븐슨은 결코 그 어마어마한 부와 명예를 독차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운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승자가 최후에 남는 것이 아니다.

최후까지 서 있는 자가 승자인 것이다.


잊지 마라.

당신의 부모님과 나는, 그리고 당신의 사랑하는 이들은 당신이 다시 일어설 것이라 믿고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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