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Oct 20. 2021

18살에 감독에게 속아 전신 누드신을 찍고 나서도,

세계 최고의 미녀이자 와이파이 기술을 발명한 대배우로 기억되다.

1914년 헤드윅 에바 마리아 키슬러라는 이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비엔나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대인으로 렘베르그(현재 우크라이나 리비브)에서 태어났고 성공한 은행장이었다. 어머니인 트루데는 피아니스트로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상류층 가정 출신이었다. 트루데는 유대교를 따르지 않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연기에 관심을 보였고 극장과 영화에 매혹되었다. 12살 때 이미 뛰어난 미모로 비엔나의 미인대회에서 우승하였다.

 

1920년대 후반 영화 제작자인 막스 라인하트에게 여배우로 발탁되어 베를린에 오게 된다. 연극 수업을 받고 비엔나로 돌아온 그녀는 영화계에 감독의 비서로 입문한 지 얼마 안 되어 배우로 활동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급속도로 유럽에서 스타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머니 온 더 스트리트>(1930년)에서 엑스트라로 출발하여 <유리잔 속의 폭풍>(1931년)에서 작은 역할을 맡게 된다. 이후 월터 아벨과 피터 로어와 함께 <미스터 O.F. 의 트렁크>(1931년)에서 좀 더 비중 있는 역할로 나오게 되었고 결국 칼 보에세가 감독한 코미디 <월요일은 필요없어>(1932년)에서 주연으로 발탁된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스물이 되기도 전인 1933년 초, 자신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주게 되는 운명적인 영화, <엑스타시>를 찍게 된다.

이 영화는 오르가즘의 고통 속에 있는 그녀의 얼굴과 잠깐의 전신 누드 장면을 보여줌으로 유명세와 악명, 모두를 그녀에게 안겨준다.


영화사에 있어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이 장면은, 감독과 제작자가 고성능의 망원 렌즈를 가지고 그녀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촬영한 것으로 결과적으로는 그녀가 속아서 찍은 장면이었다.

 

18살이던 그녀가 이 배역에 지원할 때 그녀는 영화에 대해 경험도 짧고 이해도도 낮았다. 그저 주인공 배역을 따고 싶어서 극본도 읽지 않은 채 서둘러 계약을 맺었는데 야외 촬영에서 감독이 가운을 벗으라고 하자, 그녀는 이런 촬영이라면 그만두겠다고 거부했지만 감독은 지금 그만두면 이제까지 촬영에 들어간 비용 전부를 배상해야 한다며 협박했다.


실랑이 끝에 감독은, 선정적인 전 장면을 롱샷으로 찍을 것이며 내밀한 디테일들은 나오지 않는다고 그녀를 설득했다. 프라하에서 시사회를 할 때 감독 옆에 앉았던 그녀는 망원 렌즈를 사용한 다수의 클로즈업 장면들을 보고 자신이 속았다며 감독에게 소리를 지르고 울며 극장을 떠났다. 그녀는 저런 모습을 보고 부모님을 포함한 지인들이 도대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웠고, 겨우 시작한 배우로서의 경력이 그대로 끝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워낙 유명한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친구들은 기억을 못 하겠지만, 요즘 세대가 그녀를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라떼 세대들에게는 그 유명한 육감적이자 뇌쇄적이면서도 선한 데릴라 역할로 유명해진 <삼손과 데릴라>(1949년)로 기억되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배우이자 발명가였던 헤디 라마르(Hedy Lamarr), 본명 헤트비히 에파 마리아 키슬러(Hedwig Eva Maria Kiesler)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1949년 찍은 <삼손과 데릴라>에서 데릴라 역을 맡으며 근 10년간을 할리우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배우로 장기 집권을 한 절세가인형 여배우였다. 너무 예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백설공주>를 그릴 때 모델로 삼을 정도였다.


논란이 되었던 영화 <엑스타시>(1933년)를 포함하여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잠깐의 영화 활동을 했던 헤디 라마르는 오스트리아 무기 제조업자인 부유한 남편을 피해 파리로 달아났다가 이후 런던에 가서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MGM) 영화사 대표인 루이 B. 메이어를 만나 할리우드 영화 계약을 제안받고 이후 1930~1950년대에 걸쳐 스타로 활동하며 다수의 히트작을 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무렵, 발명가로서 작곡가 조지 안실과 함께 연합군 어뢰의 무선 유도 체계를 개발했다. 이 체계는 대역 확산과 주파수 도약 기술을 사용하여 추축국의 전파 방해 위협을 극복했다. 미 해군은 1960년대까지 이 기술을 채택하지 않았지만, 특허가 공개되면서 그들의 작업 원리는 현대의 와이파이, CDMA 및 블루투스 기술에 통합되어 왔으며, 이 엄청난 작업을 해냈다는 명성으로 인해 2014년 국립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전신 누드라는 당시 영화 장면으로서는 경악할만한 경험을 한 라마르는, 배우라는 직업에 환멸을 느꼈으나 정작 이 영화로 로마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면서 이 영화와 함께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유럽 전역에 걸쳐 이 영화는 예술 작품으로 여겨졌다. 여담이긴 하지만, 유럽에서 예술작품이었던 이 작품이 정작, 자유를 목 높여 주장하던 미국에서는 지나치게 선정적이라며 부정적인 평을 받았고, 당시 급격하게 보수화되는 독일에서 상영이 금지까지 당하였다.

 

이후 라마르는 영화가 아닌 다수의 연극에도 출연하였는데, 비엔나에서 제작된 오스트리아 여제 엘리자베스에 관한 <씨씨>로, 평론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당시 어마어마한 인기를 구가하던 그녀에게 ‘프레드리히 맨들’이라는 전설의 무기상이 집착에 가까울 정도의 대시를 하게 된다. 전설이라 표현한 이유는, 당시나 지금이나 무기상이자 군수품 제조업자라고 하면 천문학적인 부자인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세 번째 가는 부자로 사교계에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유대계였던 부모는, 그가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지도자인 베니토 무솔리니, 그리고 후에 독일의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지만, 그녀는 금세 그의 엄청난 물량공세를 바탕으로 한 구애에 빠져들었다. 1933년 18살의 나이로 그녀는 33살의 그와 결혼하게 된다.

 

무기상이었던 남편 맨들은 라마르를 데리고 군사기술 관련 과학자들과 전문가들의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녀에게 응용과학 분야를 접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이후 과학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966년 그녀가 발간한 자서전, <엑스타시와 나>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맨들은 매우 지배적인 성향이었으며, 정작 그녀를 알게 해 준 영화 <엑스타시>에서의 오르가즘 연기를 매우 싫어했고, 그녀의 배우 생활을 계속하지 못하도록 막아, 거의 체코 국경에 있던 집, 슈바르제나우 성에 사실상 갇혀 살았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녀는 남편, 그리고 조국을 떠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녀는 맨들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보석들을 치장하고 저녁 파티에 가겠다는 허락을 받은 후 사라져 버리듯 과감한 탈출을 감행한다.


그렇게 도망치듯 1937년 런던에 도착한 라마르는 유럽에 배우 스카우트차 와 있던 MGM 영화사 대표인 루이 B. 메이어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이 당찬 도망녀는 자신에게 주급 $125을 주겠다는 처음 제안을 거절하고 몰래 그가 타고  뉴욕행 여객선 표를 끊어 동행한다. 미국에 도착하기까지의 여행 기간 동안 그녀는 메이어에게 배우로서의 성공확신을 주어 주급 $500에 전속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메이어는 <엑스터시>에 나온 배우라는 평판에서 거리를 둘 수 있도록 그녀 이름을 ‘헤드윅 키슬러’에서 다른 이름으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름이 바로, 무성영화 시대의 아름다운 여배우였던 바바라 라마르의 성을 딴 이름이 되었다.


메이어는 1938년 그녀를 할리우드로 데리고 와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홍보했다. 메이어는 라마르를 프랑스 영화 <망향>(1937년) 미국판 리메이크작 <알지어즈>(1938년) 제작자인 월터 와그너와 연결시켜 주었다.

그렇게 라마르는 찰스 보이어의 상대역 여주인공으로 발탁되었다. 헤디 라마르에 관한 책을 저술했던 스테판 마이클 쉬어러는 이 영화가 ‘미국 전역에 센세이션을 불러왔다’고 표현했다. 워낙 타고난 미모와 육감적인 몸매는 그녀를 처음 보는 미국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후 할리우드 영화들에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이국적인 전형적 글래머의 역할로 이미지가 고정되었다. 간혹 말아먹는 영화도 나오긴 했지만, 클라크 게이블, 클로데트 콜버트, 스펜서 트레이시와 함께 출연한 <붐 타운>(1940년)이 5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성공을 거두면서 클라크 게이블과 다시 호흡을 맞추며 코미디 <엑스 동무>(1940)를 찍고, 역시 대성공을 거둔다.

<엑스 동무>(1940)의 클라크 게이블과 헤디 라마르

이국적인 외모 때문에 베트남 여인이나 매혹적인 원주민 여인 등으로 출연하며 연이은 히트를 기록한 그녀의 미모는 할리우드에서 어느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는 부동의 1위였다.

그 때문에 오히려 아름다움과 관능성의 소유자였지만 비교적 대사는 적은 역만 맡게 되고, 그 이유가 연기력이 떨어진다는 비난으로 이어지면서 그녀를 괴롭혔고 이를 견디기 위해 발명이라는 전혀 다른 관심거리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고 한다.

 

헤디 라마르는 힘이 장사인 성경 속의 인물 삼손의 이야기를 다룬 세실 B. 드밀의 영화 <삼손과 데릴라>에 빅터 메이처와 출연하여 그녀 영화 사상 가장 큰 성공을 거둔다. 이 영화는 1949년 수익을 가장 많이 올린 영화였고, 오스카에서 프로덕션 디자인상과 의상상, 두 개의 상을 받았다.

<삼손과 데릴라>(1949년)의 빅터 메츄어와 헤디 라마르

하지만, 정작 정점을 찍고 난 후, 라마르는 여러 역으로 출연하며 제작도 맡았으나 수백만 달러를 손해보고 만다.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적은 없고 거의 독학이다시피 했지만 라마르는 여가 시간에 여러 가지 취미 활동과 발명을 했는데, 이중에는 신호등 개량이라던가 물에 넣어 탄산수를 만드는 정제 등이 있었다. 그녀의 비밀스런 발명 취미를 알고 있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는 항공계의 거물 하워드 휴즈가 있었다. 그녀가 하워드 휴즈와 사귀는 기간 동안 그녀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취미활동에 그를 활용했다. 하워드 휴즈는 그녀에게 과학기술자팀을 붙여주었고 그녀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도와주라고 지시해주어 그녀의 발명과 연구를 지원했다.

2차 대전 당시 라마르는 새로이 개발된 무선 조종이 가능한 어뢰를 전파방해를 통해 손쉽게 방향을 바꿔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주파수 도약 시그널을 통해 추적되거나 전파방해가 불가능하도록 하는 방식을 고안했다. 친구이자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인 조지 앤테일과 함께 그러한 장치를 개발하고자 했는데 그는 그녀를 도와 소형 자동 피아노 방식을 통해 무선 신호를 동조화하는 장치를 개발했다. 그들은 주파수 도약 시스템의 초안을 만들어서 특허청에 등록했다.

 

이들의 발명은 1942년 8월 11일 미국 특허로 정식 등록되었다. 하지만, 이 기술은 응용이 쉽지 않았고 당시 미 해군은 군 밖에서 유입되는 기술들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사태 당시 이들의 고안을 진전시킨 기술이 마침내 해군 병기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반전은 한참 뒤인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CDMA와 와이파이 기술의 기반이 되는 발명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되게 된다.

1997년 라마르와 엔 테일은 일렉트릭 프론티어 파운데이션의 개척자 상과 함께 예술, 과학, 기업, 발명 분야에서 사회에 큰 기여를 한 이들에게 주는 공로상인 벌비 나스 스피릿 동상을 수여했다.

 

라마르는 여섯 번 결혼하고 이혼하였으며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주로 돈이 많은 재벌이었고 결혼기간도 그리 길지 못했다. 심지어 마지막 결혼한 사람은 그녀의 이혼 담당 전담변호사였다.


마지막 이혼 이후, 세상을 떠나기까지 35년 동안 그녀는 외롭게 지냈던 중 2000년, 플로리다주의 카셀베리에서 심장병으로 85세에 사망했다. 그녀의 아들 앤소니 로더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그녀의 유골을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숲에 뿌렸다.

비엔나 중앙묘지에 있는 헤디 라마르를 기념하는 무덤

정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녀였다.

배우를 꿈꾸던 소녀는 18살에 감독에게 속아 누드로 오르가즘을 가장했던 연기로 일약 세계적 스타가 되어 세계를 누볐다. 10년여를 세계 최고의 미녀 배우로 아성을 지켰지만, 영화 제작이 실패하면서 심리적 불안 때문이었는지 절도로 기소되기도 하고 기복이 심하고 부침이 심한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 21세기의 기술을 선도하는 CDMA와 와이파이의 기술을 이미 2차 세계대전 당시에 발명해내는 천재적인 머리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 공을 인정받아 여성 최초로 ‘발명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발명가 협회의 벌비 나스 스피릿 공로상을 받았다.


사실, 정말 예쁜 배우들은 전 세계에 많다. 배우가 아니더라도 미인대회나 얼굴이 예쁜 것으로 재벌의 처가 되거나 한 나라를 뒤흔들 정도의 경국지색으로서의 이름을 날리며 화려한 인생을 산 이들은 많이 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고 전혀 배우지도 못했던 분야의 기술을 자신의 아이디어만으로 현재까지 활용되는 기술을 발명하는 것은 그저 운이 좋아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만큼 그녀는 자신의 삶에 진지했고, 모든 것을 내거는 심정으로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공부했다.

 

당신이라면, 당신은 18살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져 노력해본 적이 있었나? 경국지색의 외모로 성에 살 정도로 부유하고 보석으로 온몸을 치장할 수 있는 삶을 버리고 자신이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겠다고 탈출하듯 이혼을 할 수 있겠는가?

그 시대에 그 미모를 가지고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꿈을 향해 그렇게 용기 있게 성큼성큼 걸어갈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물론 그녀가 결혼생활에 실패하고 아이까지 제대로 돌보지 못해 아이를 다른 가정에 보내는 기행까지 벌이긴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삶에 있어 평생 당당하고자 했고 실제로 그렇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만약 그녀가 변호사를 통해 자신의 특허를 억지로라도 쥐고 있으려고 했다면 그녀는 억만장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녀 덕분인지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편하게 접속하며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아름답던 미모의 배우가 그 최첨단 기술을 개발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 당신에게 이 아름다웠던 그녀의 치열했던 삶을 소개한다.

당신의 삶이 주목받지 못하는 삶이라고, 당신이 주연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주연이라 주목받아 사는 삶이 재벌들의 삶뿐이라고 여긴다면 당신은 그저 평생 그들의 삶을 바라보는 엑스트라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신의 삶을 당신만의 삶으로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결코 돈도, 주변의 평판도 아니다. 당신의 삶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당신 한 사람밖에 없다.

당신이 그럴 마음과 의미만 있다면 말이다.


당신의 삶을 빛낼 수 있는 수많은 요소들과 기회는 아직 당신이 걸어 나갈 당신의 삶의 앞에 쭈욱 펼쳐져 있다. 왜 제대로 바라보며 걷지도 않으면서 남이 걷고 있는 길에 널려진 보석에 침을 흘리느냔 말이다.


정신 차리고, 당신이 이제까지 만들어온,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나가야 할 그 길을 정면으로 당당히, 똑바로 응시하란 말이다.

이 당신의 삶을, 당신이 걸어갈 그 길에 번쩍이는 보석을 찾아 그 앞날에 화려하게 까는 것 역시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당신 이외에 주인공을 할 사람, 누구를 찾겠는가?

조만간 원더우먼의 갤 가돗이 그녀의 삶을 연기한 영화가 제작된다고 하니 기쁜 마음으로 그녀의 인생을 다시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는 날을 기다려도 되겠다.

그리고 그녀의 삶을 통해 다시 한번 앞으로 더 빛날 당신의 삶을 만나게 되길 바란다.

 

 


 

<공주마마와 벨보이>(1945년)에서 헤디 라마르

 


 

1944년, 헤디 라마르

매거진의 이전글 증기기관의 최초 발명가라는 명성도 못 얻었어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