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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것 좋아하여 변변찮은 스펙의 미국 이민자였지만,

경영 정점에 오르지 않고서도 전설의 IT 창업자 대열에 들어서다.

by 발검무적

1978년 타이완의 타이베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를 따라 8세 때 가족 모두가 미국의 시카고로 이민을 떠나왔고, 미국인으로 거듭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손님이 두고 간 잡지에 실린 프로그래밍 언어 베이직에 빠져 생애 최초의 프로그램을 짰다. 고교 시절 수업은 뒷전이고 술과 담배를 가까이하느라 성적은 바닥권이었다.


다행이었던 것은, 나쁜 친구들과 거리로 나간 것이 아니라, 컴퓨터에 꽂혀서 밤을 새워 게임을 만들기도 하면서 그쪽으로 자연스럽게 자신의 인생 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 성적이 워낙 훌륭했던(?) 터라 일리노이 대학에 들어가 원 없이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하며 신나게 논다. 졸업을 한 학기 남기고, 1999년에 당시는 벤처기업이자 이름도 없던 ‘페이팔’에 15분간의 온라인 면접 후 남은 대학 생활을 과감하게 접고 중퇴를 한 후, 단돈 200달러를 들고 실리콘밸리로 달려갔다.

낡은 담요 한 장을 덮고 아파트 거실 바닥에서 자야 했던 실리콘밸리 생활은 고되긴 했지만 행운도 따랐다.


페이팔(PayPal)은 관리자 인원수를 대폭 줄이고 엔지어니가 주도하는 운영시스템을 만들었다. 벤처기업의 장점을 살린 이 형태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서로를 잘 파악하고 있어 따로 윤활유가 필요 없었다. 페이팔이 크게 성장하기 전, 그는 엔지니어와 디자이너가 긴밀하게 협력하는 이곳의 업무방식을 좋아했다. 새로운 기능이 생각날 때마다 주저 없이 디자이너들에게 제안했고 디자이너들은 그에 따라 설계 화면을 만들고 다시 엔지니어들과 의논했다. 이런 메커니즘 속에서는 어떤 새로운 기능도 3~4일이면 현실화할 수 있었다.

그렇게 페이팔에서 일하며 만난 회사 동료 채드 헐리 및 자베드 카림과 함께 2005년 유튜브를 설립하고, CTO로 일했던 스티브 첸(중국어: 陳士駿, 영어: Steve Chen)의 이야기이다.


그는 2006년 10월 16일, 16억 5천만 달러(약 2조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받고 구글에 유튜브를 매각한다. 물론 세 사람이 공동창업자였기 때문에 그의 몫은 당시 주식 기준으로 3000억 상당의 구글 주식을 받게 된다.


하지만, 전 세계 IT 업계를 통틀어 학교를 중퇴하고 창업하여 억대 부자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마이크 델, 제리 양, 스티브 첸, 마크 저커버그 이렇게 딱 6명뿐이라는 점과 그나마 명문대학에 갔던 머리도 좋고 집안도 괜찮았던 다른 5명에 비해 그의 수준이 가장 객관적으로 낮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 그를 당신에게 소개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공동창업자 채드 헐리와 함께

유튜브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첸, 채드 헐리, 자웨드 카림은 모두 페이팔의 초기 멤버였다. 채드 헐리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페이팔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할 때 정말 많은 것은 느끼고 배웠습니다. 비즈니스 관련 학위가 없어도 전체 프로세스를 볼 수 있으니까요.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시작 단계의 회사가 하는 모든 일이 아주 의미 있음을 배웠습니다.”

2002년 7월 페이팔이 상장된 지 다섯 달 후, 이베이(eBay)는 페이팔을 인수하게 된다. 이후 6개월 동안 최고경영자 맥스 레브친이 떠났고, 부회장 리드 호프먼도 떠났다. 이베이의 관리방식은 페이팔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스티브 첸이 그중에서 가장 판이하여 못 견뎌했던 것은 엔지니어의 발언권이 없어졌고 단지 위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만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경영진이 개발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스스로 참신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지 못하는, 혁신 없는 조직의 모습을 이베이에서 확인했다. 그토록 활력이 넘치고 늘 떠들썩한 재미있는 회사였던 페이팔도 이베이에 인수되고 나서는 답답한 운영 방식의 틀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2005년 초에 스티브 첸은 이베이를 떠난다. 2005년 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친구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런데 그는 모임이 끝난 후 함께 찍은 동영상을 공유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일이 전달하기가 너무 귀찮았던 스티브 첸은 친구들과 직접 동영상 사이트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가 창업을 결정하게 된 이유이고 계기였다.

“모든 성공이 소설에 등장하는 것처럼 어떤 엄청난 계기로 인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아주 '작은 아이디어'나 '작은 필요'에 의해 '충동적'으로 시작되고 '지속적인 보완'과 '개선의 과정'을 거친다. 유튜브의 시작도 그랬다.”

창업을 위해 스티브 첸을 비롯한 채드 헐리, 자웨드 카림이 뭉쳤다. 그와 자웨드는 엔지니어이므로 사이트 설립 초기에 필요한 개발 작업을 감당할 수 있고, 채드는 우수한 웹 디자이너로서 뛰어난 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창업 후에 한 달이 넘는 토론 끝에 그들은 3가지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첫째, 누구나 동영상에 관심이 있다.

둘째, 사이트는 이용하기 쉬워야 한다.

셋째, 친구를 사귀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소셜 미디어 사이트에 이름을 붙여 주기로 했다. '유튜브'라는 이름은 완성되기까지 단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탄생한 유튜브는 후에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You는 ‘모든 사람’을, Tube는 ‘TV’를 의미했다. 두 단어를 함께 놓으면 모든 사람이 시청자이자 제작자라는 뜻이 되고 더 구체적으로는 ‘당신의 동영상 플랫폼’이란 뜻을 나타낸다.

2005년 2월 14일 'www.youtube.com'이라는 도메인을 샀고, 2005년 4월 23일 자웨드가 유튜브에 19초짜리 첫 번째 동영상 'Me at the zoo'를 올리면서 역사는 시작됐다.

최초 업로드 영상

처음에 유튜브를 이용하는 사람은 창업자들뿐이었다. 그들은 친구들은 동원해 사이트를 홍보하고 심지어는 선물 이벤트까지 벌였지만 실제로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변화가 생겼다. 사이트의 정의를 사용자에게 맡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사용자들의 자발적인 선택에 맡기면서 유튜브는 어느덧 콘텐츠를 생산하는 사이트로 변모하게 된다.


그러면서 2005년 6월에 그들은 하나의 결정을 내렸다. 사용자들이 다른 사이트에 유튜브의 콘텐츠를 얼마든지 퍼 나를 수 있게 시스템을 유도한 것이다. 주변 전문가들은 유튜브의 ‘공유하기’ 기능이 자살 행위라고 평가했다. 사용자들이 유튜브에 로그인하지 않고도 동영상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커뮤니티는 유튜브의 명성을 전파하는 도구가 되었고 중요한 공짜 광고 수단이 되었다. 인터넷 세상에 전파되고 재생되는 동영상에 유튜브라는 마크와 링크 주소가 늘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영상을 보고, 전파하고, 공유하고 싶다면 유튜브로 오세요’가 회사의 모토가 되었다.

유튜브는 독립된 품질평가 시스템을 아예 두지 않았다.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유튜브에서 테스트팀은 시간 낭비에 불과했고, 결과물에 문제가 생겼을 때 직원 간에 책임을 떠넘기는 빌 미가 될 뿐이었다. 그 결과 직원 모두가 공동의 책임 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으면 주저 없이 말하는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었다.

2006년 10월, 유튜브는 16억 5,000만 달러에 구글에 인수되었다. 당시에는 기업 구성원 모두가 매각을 찬성했다. 너무 지쳤기 때문이다. 유튜브 직원들은 매주 100시간 이상 일했다. 하루에 14시간을 일한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진행 중이던 아시아, 유럽 시장 진출 등 일부 프로젝트가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막강한 데이터 센터가 필요했고 더 많은 대역망과 서버가 필요했다. 그래서 대기업의 도움이 절실했다.

스티브 첸은 직접 쓴 자서전에서 구글에서 일하게 될 줄 정말 몰랐다고 고백한다.


“내 대학 스펙으로는 전혀 가망 없는 일이었다. ‘구글맨’들은 대부분 하버드, 스탠퍼드, MIT, 카네기멜론 출신으로 박사 또는 석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유튜브맨’들은 대학 중퇴자가 대다수다. 우리는 구글에서 새삼 인생의 행운을 만끽했다.”

그는 당시 언론에서 구글이 유튜브를 인수한 일을 ‘바가지를 썼다.’고 표현한 것에 억울해하며 이렇게 표현한다.

“왜 그들은 모르는 걸까? 유튜브가 구글에 인수합병 될 때 기술 책임자가 4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걸! 그 4명이 세계에서 트래픽이 가장 많은 사이트를 구축하고 유지했다는 걸! 뿐만 아니라 직원이 80명도 안 되는 소기업이고 대부분 중퇴생들이지만 고학력자로 이루어진 구글 동영상팀을 제압했다는 걸!”

유튜브의 무대가 세계로 확장되면서 더 많은 사용자가 몰려들었다. 2010년 5월에는 일일 검색 횟수가 20억 회를 넘어섰다. 유튜브의 하루 동영상 검색량은 미국 3대 방송국 서비스 분량을 모두 합친 것과 맞먹게 되었다.

그저 꼴통에 컴퓨터 게임밖에 모르던 꼴통 이민자가 이렇게 잘 나가기만 한 했는데 뭐가 실패였고 뭐가 좌절이었냐고 묻고 싶은가?

그는 가장 잘 나간다고 할 때마다 크나큰 실패와 위기를 맞았다. 정말 그랬는지 그의 터닝포인트를 확인해보기로 하자.


실제로 그가 창업하고 2005년 말에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유튜브에 업로드된 SNL과 나이키 광고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하지만 사용자가 갑자기 늘어나는 게 서버를 운영하는 신생 주소 업체에게는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서버 이용료가 엄청나게 증가하는 바람에 스티브는 개인 신용카드 한도까지 여러 번을 늘려 빚을 져야만 했다. 신나서 자발적으로 그렇게 했다고는 하지만 하루에 14시간이나 일에 몰두하던 직원들도 제때 월급을 받지 못한 채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게 되며 슬슬 지쳐갔고 불만이 터져 나오기 직전의 위기에 몰리게 된 것이다. 원래 급성장을 하기 시작하는 스타트업에는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결국 한계에 다다랐다고 느낀 스티브 첸은 회사를 매각하기로 결정한다.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사용자에 대해 데이터 센터, 서버와 인터넷망 확충 등 대기업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 투성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스티브는 회사 매각을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가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은 것은 엔지니어를 대하는 문화였다. 유튜브 직원의 80%가 엔지니어였기 때문이다. 구글은 엔지니어들에게 업무시간의 20%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배려해 주는 엔지니어 중심의 문화였다면 야후는 경영진 대부분이 비즈니스 전문가였다. 양사의 문화 차이는 스티브의 선택을 쉽게 만들어줬다. 심지어는 여우같이 두 회사를 경쟁에 붙여 구글에 더 좋은 조건으로 회사를 넘기고 자신은 억만장자에 등극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지금까지 왔으니 괜찮은 것 아니냐구?

아니다. 아직 좌절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구글과의 인수합병으로 억만장자가 되어 성공을 만끽하려던 그 역사적인 순간에 ‘뇌종양’ 선고를 받고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어야 하는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그는 2007년 7월 23일 미국 CNN과 함께 유튜브를 이용한 민주당 대통령 선거 공개토론을 진행하면서, 버락 오바마, 힐러리 클린턴 등 대통령 후보자들이 출연한 유튜브 방송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던 비행기 안에서 뇌종양으로 갑자기 쓰러졌다.


그렇게 쓰러진 그는 이후 여러 차례의 뇌종양 발병으로 그때마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다행히 그는 1년 6개월의 투병 끝에 뇌종양 수술을 받아 완치에 성공했다.


그리고 2008년 유튜브코리아(Youtube Korea) 프로모션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여, 당시 구글코리아(Google Korea) 상품 마케팅 매니저로 일하던 연상녀 한국인 박지현 씨를 만나 데이트 3번 끝에 청혼을 하고 온라인으로 2년의 교제 끝에 2010년 결혼을 하게 된다.

그의 아내가 미인이 아님에도 야수의 그의 외모가 아내를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

그렇게 멀쩡히 억대 연봉을 받던 그는 결혼 직전인 2009년 말 구글에서 나왔다. 하는 일 없이 구글에서 많은 연봉을 받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고 동업자 채드 헐리와 함께 ‘아보스’라는 회사를 세웠다. 그는 아보스를 통해 불특정 다수의 개인이 함께 만드는 온라인 잡지를 구상해서 론칭했다. 인터넷에 정보가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지만 정작 쓸모 있는 정보를 찾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팀인 구글 벤처스의 사내기업가(EIR)로 합류하여 새로운 기업의 론칭을 위해 일했다가, 이제 자신의 가치를 최고로 대우해주는 타이완 정부 측 초대로 대만 국가개발 기구(NDC)와 일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경영자로서 미국에서의 한계를 느낀 그가, 실리콘밸리를 비롯해 해외에서 성공한 인재들을 유치하기 위한 타이완의 프로그램 중 하나인 ‘고용 골드 카드’를 제안받고 얼른 그쪽에 둥지를 튼 것이다.

그는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저한테 와서 한참 아이디어를 설명하고 나서는 이렇게 말해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아니 어떻게 해야 하다니요? 정답은 분명하거든요. 그냥 직장 그만두고 나와서 회사를 만들면 됩니다. 해답은 뻔해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못해요. 실패할까 무섭거든요. 그래서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실패할까 두려워하지 말고 일단 한번 해보라고 말이죠.”


말이 쉽지 그게 어디 쉽냐며 그저 억만장자 남의 이야기를 듣고 있듯 손사래를 치고 있을 당신에게 묻는다.

벤처창업으로 돈을 벌었던 사람들이 모두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있고, 중퇴라고는 하지만 명문대학에 들어가서 천재 친구들이 곁에 많았었고, 아주 부자는 아니지만 부모나 주변 사람들이 투자를 해줄 정도의 돈이 있었다고 착각하는 당신에게 말이다.

당신이 정말로 당신만의 일이라고 벌일 생각이 있는 아이템이 있고,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남에게 월급을 받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왜 주저하는지를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라.


코로나라서 지금 있는 직장에서 짤리지 않는 것도 어디냐며 몸을 움츠리고 회사에 나가지 않고 집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 노트북으로 재택업무 입네라는 것을 하면서 당신이 행복하다면, 그리고 오십도 되지 않아 당신의 그런 무사안일주의를 눈뜨고 볼 수 없다며 회사에서 적당히 꺼져달라고 하는 말을 듣고 그제야 동네에서 치킨집이나 해볼까 하고 인생 패배자로 전락하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 인생이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굳이 참견하지 않으마.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당신도 당신의 제대로 인생을 살아보고자 한다면 끊임없이 공부하고 또 공부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란 말이다.


놀기만 하고 스펙이라고는 내세울 것도 없었던 허접한 나라도 아닌 곳 출신의 그가 미국인으로 교육받으며 깨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렇게까지 되었는데 자랑스러운 IT 강국,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당신이 못할 것이 뭐 있겠느냔 말이다.


그가 한국 부인을 얻었다고 인터뷰에서 한국 젊은이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뭐냐고 했더니 남긴 말을 당신에게 전해주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너무 심오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너무 재지 마세요. 마음 가는 대로 한 번이라도 해보라는 거죠. 틀리면 어때? 다시 하는 거지 뭐! 이런 자세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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