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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Oct 26. 2021

시한부 판정받고 살아왔더니 수백억 빚만 남은 회사에서

일본 최고를 넘어,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환골탈태시키다.

1957년 일본 사가현 도스시에서 재일 한국인 3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대구에서 농사를 짓던 가난한 농민이었는데, 1930년대 일본 육군이 항공대 비행장을 만들면서 농사지을 토지를 잃었다고 한다. 그때 그의 아버지가 태어났고, 먹고살 길이 막막하여 돈벌이를 위해 가족을 이끌고 일본으로 떠났다.

광복 이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살림살이는 여전히 어려워 1년도 채 못 버티고 다시 일본의 규슈지역으로 떠나 정착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광산 노동자로 일했고, 할머니는 리어카에 음식물 쓰레기를 담아 가축사료로 쓰곤 했는데, 어렸을 때 그는 아버지, 어머니 모두 밖에 나가 일하느라 잘 볼 수 없었고, 할머니가 끄는 리어카를 타고 놀면서 자랐다고 한다. 그러한 할머니의 고생 이야기를 하며 할머니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던 이야기를 하고, 공석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그런 집안이 재산을 불린 것은 그의 부모 대에서였다. 그의 아버지는 소액 대출업을 했고, 파칭코 사업으로 재산을 불렸다. 부친은 사업 감각이 뛰어났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였느냐하면, 자신이 운영하던 파칭코 주차장에 유료 낚시 게임장을 만들어 '붉은 잉어를 낚으면 보너스 만엔'이라며 호객행위를 했는데, 파칭코로 잃은 손님은 낚시에서 돈을 따려했고 보너스를 딴 손님은 다시 파칭코로 가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아버지의 사업이 번창하는 동안, 그는 1964년 조금 큰 도시였던 키타큐슈시로 이사하여 시립 소학교를 다닌 뒤, 1970년 히키노 중학교 재학 도중 규슈의 가장 대도시였던 후쿠오카시로 이사하면서 중학교 학업을 지속한다. 그가 채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어 피를 토하며 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그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족을 건사하겠다는 마음에, 사업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어릴 적 꿈은 교사, 화가, 정치인 등 꿈이 다양했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조센징 소리를 들으며 동네 아이들이 던진 돌에 머리를 맞을 정도의 경험을 하고 나서는 외국인으로서는 성공하기 어려운 직업을 다 접고, 상대적으로 국적의 영향을 덜 받는 사업가의 길을 선택하였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그의 아버지의 입버릇처럼 그에게, ‘너는 천재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사실이어서 그랬는지 아들의 기를 살려주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도 그런 소리를 듣다 보니 그조차도 자신이 정말 천재인가 보다고 믿었고, 그것이 훗날 자신감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후 사업을 키우고 자신의 회사와 제휴를 맺고자 하는 상대방에게 ‘저는 천재입니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상대방 측에서도 하도 자연스럽게 그가 그런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을 들으니, 정말로 그는 천재인가 보다는 인식들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인이자. 일본 최고의 부자. 한국계 일본인 사업가로 재일교포 3세이다. 소프트뱅크의 창립자 겸 소프트뱅크 그룹 대표이사 사장, 소프트뱅크 대표 집행역 사장 겸 CEO,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오너 등을 맡고 있는 신화적인 기업가, 우리에게는 손정의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손 마사요시(孫正義; そんまさよし)의 이야기이다.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주변인들과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결정하게 된다. 미국 유학을 결심하게 된 스토리도 특이하기 그지없었다. 1973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쿠루메대 부설고교에 들어갔지만 2년 만에 자퇴하고, 유학을 덜컥 결정한다. 하지만 막상 미국에 가서 뭘 배우면 좋을지 몰라 무작정 도쿄로 상경해 일본 맥도널드의 설립자 후지타 덴 회장을 찾아간다. 당연히 수차례 문전박대 끝에 겨우 그와의 대면기회를 극적으로 갖게 된다.


‘미래에 세계적 CEO가 되려면 뭘 배워야 하느냐?’는 그의 당돌한 질문에 후지타는 ‘컴퓨터 관련을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대답해준다. 이후, 일본에서 크게 성공하여 후지타 덴을 식사에 초대했고, 당시 감사했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그때 그 고등학생이 자네였나?’라고 놀라며 함께 기뻐해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당찬 해프닝을 벌인 그는 정말 미국으로 혈혈단신 날아간다. 지명도도 없는 ‘홀리 네임즈 칼리지’의 ESL 과정에 다니고, 후에 2년제 대학교였던 홀리 네임즈 칼리지를 졸업한 후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 경제학부 3학년에 편입하여 경제학과 컴퓨터 과학을 공부하며 1980년 경제학 학사를 땄고, 동시에 마이크로칩을 활용한 번역기를 만들어 1980년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에 ‘유니손 월드’라는 벤처기업을 설립하는 등, 사업가로서의 수완을 보이기 시작한다. 당시 본인이 직접 낸 특허를 SHARP에게 팔아 사업 밑천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는 학부 당시 높은 성적 덕에 모교인 UC 버클리는 물론 하버드, 스탠퍼드, MIT 같은 학교들로부터 학비와 생활에 필요한 모든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원 과정을 밟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지만, 대학만 마치면 반드시 일본으로 돌아오겠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19세 때 세웠던 인생 50년 계획의 첫 단추를 꿰기 위해 1980년 3월,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말하는 그가 세웠다는 인생 50년 계획은 이제 그를 상징하는 전설이 되어버렸다.

미국에서 운영하던 사업 ‘유니슨 월드’는 친구이자 동업자였던 홍 루에게 넘긴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1년 6개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의 일생을 걸 40여 개의 사업 아이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다. 그가 내린 결론은 역시나 소프트웨어 사업. 자신의 전공을 살려 소프트웨어를 직접 개발할 수도 있었지만, 이미 소프트웨어 시장은 미국의 거대 개발업체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그는 소프트웨어 개발 대신에 ‘인프라(유통)’라는 틈새시장을 선택하게 된다. 무려 1년 6개월간의 시장조사와 연구, 칩거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1981년 9월, 그의 고향과 가까운 후쿠오카 현 오도시로 시에 위치한 허름한 2층 건물에서 직원 2명과 함께 ‘소프트뱅크’를 창업, 소프트웨어 유통, 컴퓨터 서적 출판 등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컴퓨터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관련 제품 전시회인 ‘컴덱스(COMDEX)’에 출품한 소프트웨어가 ‘대박’을 치는데, 이때부터 일본 벤처기업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승승장구하며 파소나의 남부 야스유키, H·I·S의 사와다 히데오와 함께 ‘벤처 삼총사’라고 불렸다.

 

1983년 봄, 그는 몸에 이상을 느끼자 회사 건강검진으로 건강검진을 받는다. 진단 결과는, ‘만성간염’ 5년 시한부 인생을 의사로부터 받게 된다. 그는 병상에서 10대 시절 자신에게 큰 감명을 주었던 메이지 유신의 주역, 사카모토 료마의 삶을 각색한 역사소설 ‘료마가 간다.’를 읽으며 다시 한번 부활을 꿈꾸게 된다.

사카모토 료마 코스프레를 하고 찍은 사진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메이지 시대가 오기 불과 2개월 전 암살을 당해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꽃같은 생을 마친 사카모토 료마의 인생을 다시 되새기며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 인생 동안 무엇인가 인생을 불태울 수 있는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삶의 의지를 불태우며 극적으로 건강을 되찾아 3년간의 투병생활을 마치고 1986년 5월, 회사로 복귀한다.

 

하지만, 이미 그가 자리를 비웠던 3년 동안 회사는 고객들과 거래처 등에게 신뢰를 잃었고, 1984년에 자회사를 통해 시작한 상품 가격 데이터베이스화 사업 실패로 인해 은행 융자 10억 엔의 빚과 더불어, 신뢰해 오던 직원 20명이 동시에 사표를 내고 자기들끼리 따로 회사를 차리는 짓까지 벌이는 최악의 상태를 목도하게 된다.


하지만, 죽다 살아온 그는 회사를 기어코 정상화시키고야 만다. 이때 손정의는 회사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1980년대 초반 일본 게임계의 아이콘이었던, ‘허드슨 소프트’의 독점유통권을 따내기 위해 죽을 고생 끝에 마침내 성공하게 되는데, 그것이 초기 소프트뱅크 성장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되어 회사는 부활하게 된다.

 

사업이 어느 정도 정상궤도에 오르자, 손정의는 다음 아이템을 구상하게 된다. 당시 막 자유화된 전화 서비스가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의 전화서비스의 구조는, 고객이 새로 설립된 전기 통신 회사를 이용하려면 추가로 번호를 눌러야만 했다. 지역과 회사마다 요금도 다 달랐기 때문에, 싼 회선을 찾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전과 같은 번호를 쓰면서 자동으로 가장 싼 회선을 찾아주는 시스템을 개발하면 큰돈을 벌 수 있겠다고 확신하게 된다.


그렇게, IT기업인 포벌(Forval)사를 창업한 오쿠보 히데오와 함께 ‘NCC BOX’라는 것을 개발하게 된다. 미국에서 먼저 나온 유사품보다 훨씬 싸고 작았으며 기능은 더 우수했다. 이 기기로 당시 일본의 통신 비용이 크게 줄었고, 소프트뱅크는 그간의 사업으로 진 빚을 갚고도 남을 20억 엔의 로열티를 받게 된다. 미국의 거대 소프트웨어 업체들과의 긴밀한 제휴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그는 당시 벤처기업에 머물렀던 마이크로소프트와 노벨, 시스코 시스템즈 등을 발굴하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PC계의 천재’라고 불린 아스키의 니시 카즈히코와 비교되면서 ‘PC계의 신동’이라는 별명도 얻게 된다. 1980년대까지 ‘아시아의 빌 게이츠’라는 호칭을 갖고 있던 니시 카즈히코에게서 1990년대를 맞이하며 자연스레 그 호칭을 가져오게 된다.

 

1990년대 들어서는 기존 사업에서 더 나아가 공격적이고 미래지향적인 M&A를 통해 엄청난 도약적 성공을 이루게 된다. 1994년 7월, 주식 공개에 성공하여 2000억 엔이라는 거금을 쥐게 된 소프트뱅크는, 이 돈으로 당시 세계 최대 IT 전시회인 컴덱스와 당시 세계 최대 IT 미디어 그룹인 지프 데이비스의 출판 부문을 인수하고, 미국 내 2위 규모의 IT 전시회 부문인 인터롭을 인수하는 3100억 엔 규모의 공격적 M&A를 성공시킨다. 주식 공개로 2000억 엔을 손에 넣은 지, 불과 1년 6개월 만의 일이었다.

덕분에 소프트뱅크는 당시 세계 최대 IT 전시 및 출판 그룹을 소유한 세계적인 기업으로 도약하게 된다. 그는 막 인수한 지프 데이비스의 출판 부문 사장에게 “인터넷 시대가 본격화되면 없어서는 안 될 회사에 투자하고 싶다”라고 밝혔고, 그의 소개로 ‘야후!’라는 벤처기업을 소개받게 된다. 전업 투자가 본업이 아니었음에도 이때부터 ‘일본의 워런 버핏’이라 불릴 정도로 미래에 투자하는 황금손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투자 당시 직원 15명밖에 안되던 야후를 비롯하여, 투자 당시 직원 20명 정도의 작은 회사의 CEO였던 마윈의 프레젠테이션을 듣다가 6분 만에 내렸다는 2,000만 달러(한화로 약 230억 원) 투자 결정은 투자업계의 전설로 통한다. 이후 추가로 몇 차례 더 투자하여 현재 알리바바 지분의 20% 정도를 보유하고 있다. 약 230억의 투자로 현재, 약 150조 원의 지분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한국인들에게는 조금 낯선 슈퍼셀도, 2013년 15억 달러에 지분 51% 그리고 2015년 22% 추가 지분 인수 후 불과 3년 만인 2016년 텐센트에 약 73억 달러에 판매했다.

 

일본 경제가 버블 경제로 붕괴되었을 때나, 최근 코로나 때에도 언론에선 틈만 나면 그의 경영능력에 의구심을 품는 공격을 하여 여론 악화를 주도했지만, 그는 늘 언론의 혹평을 이겨내고 과감한 투자와 사업 센스로 다시 기업을 일으켜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버블경제위기 당시 손정의는 몸을 피하기보단 주주를 회사로 직접 불러 설득 작업에 나섰는데, 한 거물 투자가가 그의 설명을 듣고 나서 “내 돈을 되찾을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당신이라면 믿을 수 있겠다.”라며 돌아간 일화는 일본 업계의 전설로 남았다.

사실 그는 엄밀하게 말해 한국인이 아니다. 아니, 엄밀하지 않게 말해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르고, 1974년 자신의 성을 ‘야스모토'(安本)’에서 ‘손'(孫)’으로 바꾼 것도, 특별히 한국에 대한 끈끈한 애국심 같은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성을 바꾸고 싶지 않다는 고집 때문이었다. 정작, 어려서부터 조센징이라는 놀림과 핍박을 내내 받으면서도 바꾸지 않던 국적을 사업하는데 장애가 된다는 판단이 선 1990년에 전격적으로 일본으로 귀화한다. 당시 일본에는 손 씨가 없다는 이유로 귀화를 받아주지 않자, 두 살 연상이던 일본인 아내의 성을 손 씨로 바꾸는 편법을 써서 기어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성이었던 손 씨 성을 지키며 귀화하는 데 성공했다.

유학 당시 만나 결혼했던 아내와 함께

이 시리즈에는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등장한 바 있다. 그가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는 국뽕식 신파는 손톱만큼도 쓸 생각이 없다. 일본인이지만 당신의 인생에 도움이 될만한 인물의 이야기라면 그것을 보고 읽고 느끼고 배우면 그만이다.


당신은, 20대를 다 쏟아부어 만든 회사가 이제 좀 굴러가려고 하는데 5년짜리 시한부 판정을 덜컥 받아버리면 어떻게 했겠는가?


살겠다는 의지만으로 병마마저 극복하고 겨우 회사로 돌아왔는데, 같이 회사를 키웠던 직원 놈들이 모두 의기투합해서 등에 칼을 찌르듯 주요한 아이템과 기술들을 모두 가지고 나가 다른 회사를 옆에 버젓이 세워 키득거리고 있다면 어떤 기분이었겠는가?


게다가 회사는 텅 빈 껍데기만 남아, 천문학적 빚만 잔뜩 쌓여있는 상황이라면 어땠겠는가 말이다. 아마도 없던 병도 다시 생겨 가까스로 멈췄던 시한부 시계가 다시 돌아가는 소리가 귀에 들려오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좋아했다는 사카모토 료마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서 이 시리즈를 통해 소개하긴 하겠지만, 그는 료마의 이야기에서 살아야 할 힘을 얻어냈고,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냈다. 지금도 특별하게 사치스러운 취미도 없는 그는, 료마가 남긴 유물이나 그 시대 관련 인물들의 손때가 묻은 서간이나 물건들을 모으는 취미를 갖고 있다. 그에게 있어 그것이 돈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이 용기를 얻고, 살고자 하는 의지를 얻었던 보이지 않는 그 운명의 힘을 직접 느끼고자 함에 다름 아니라고 한다.

소프트뱅크 26층에 위치한 료마의 사진

병으로 인해 곧 당신이 죽게 된다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무너진다. 죽는 것은 사업이 망하거나 돈이 없어지거나 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내 존재가 없어진다는, 다시 무언가를 해볼 여지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회사를 차려 돈을 벌어도 수십수백억을 버는 것이 대단하다 할 텐데 그 정도의 빚이 있을 정도로 사업을 말아먹은 상태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고 달려들 정상적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자. 그와 같은 일본 제일의 부자가 될만한 사람이 그리 많겠는가?

그 모든 것을 극복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말도 안 된다고 손사래 치는 일을 해냈기에 그가 지금의 그 자리에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그가 어쩌다 발견한 행운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그저 그렇게 숨만 쉬다가 아등바등 죽기 전에 당신의 명의로 집 한 채를 갖네 못 갖네 하는 따위의 수준의 삶이라면 지금 여기서 화면을 얼른 덮어라.

하지만, 당신도 한번 사는 인생, 당신의 삶을 그 인생을 제대로 크게 판을 키워 어느 누구에게도 내 삶이 결코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할 기백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신의 삶을 바꿔볼 생각을 해라. 단번에 당신이 대기업을 키울 수도 없을 것이고, 손정의를 찾아가서 대면해달라고, 돈 좀 꿔달라고 들이닥친들 경비원에게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일 것이다.


아주 작은 하나, 당신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지만 사소한 것에서 출발한다. 아침에 규칙적으로 조금 일찍 일어나는 것, 쓸데없는 시간을 줄이고 매일 새벽 운동으로 당신의 몸을 최상의 상태로 만드는 일, 당신이 이제까지 했던 당신의 능력과 환경적 조건을 고려하여 당신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아이템을 찾아내는 일 등이 바로 그것이다.


늙었다고? 아줌마라고? 가방끈이 짧다고? 집안에 모아둔 돈이라고는 돼지저금통밖에 없다고? 그저 은퇴를 앞둔 아저씨일 뿐이라고? 한번 창업했다고 호되게 말아먹고 월급쟁이로 근근이 살아가는 개발자라고? 손주나 봐주며 시간을 보내는 할머니라고?


그게 뭐가 됐, 그 변명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그러면, 당신이 그 정도밖에 안되니까 그냥 지금 접시물에 코 박고 이번 생과 이별할 것인가?

왜냐구?

얼른 망친 이번 생을 접고 다음 생에 잘해봐야 한다고 ‘GAME OVER’를 지우고 동전을 다시 넣어야 할 거 아닌가?


늙은 호박에 이빨도 들어가지 않을 헛소리 그만해라.

모든 것은 당신이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달려있는 것이지, 지금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당신의 곁에 도와줄 누가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책 한 권을 읽어도, 글 한 줄을 읽어도, 글 한 줄을 쓰더라도 잘 생각해봐라.

당신의 그 안일함이 지금의 당신을 그렇게 방치하고 고모양고꼴로 만들어놓은 것은 아닌지.

괜찮아 다 잘될 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금 살던 대로 고대로 살면서?

풉! 당신도 알지 않은가?

아니다, 그거.

 

알았으면 바꾸면 된다.

실수라고 스스로 인정했다면 고치면 된다.

모르면 다시 배우면 된다.

다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내가 이 글을 써서 당신의 얼굴 앞에 들이미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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