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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Oct 27. 2021

가요제 예선도 통과 못하고, 대마초 피우다가 처벌받고서

이 시대의 마왕, 대중음악계의 교주로 추앙받다.

1968년 5월 6일 서울 중구 회현동에서 2살 위 누나를 둔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약대를 졸업한 아버지가 그가 태어나던 즈음 약국을 그만두고 시작한 사업이 잘되어 상당히 유복하게 자랐다. 늘 남자답게 의젓하게 커야 한다는 교육을 받아 막내라기보다는 장남을 강조하는 교육 탓에 응석을 받아주는 집안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E여대 국문과 출신의 어머니 덕분에 문학적 감성 DNA를 충분히 받고 자랐다고 한다. 4살 때부터 배운 피아노는 학원 선생이 포기할 수준이었지만, 미술을 전공했던 삼촌, 외모 등이 있던 외가의 영향 탓이었는지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머니는 그를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 브라스밴드에 넣는다. 거기서 클라리넷을 시작했지만, 역시 소질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 음악 성적 최하위를 달린다. 노래실력 역시 마찬가지여서 노래를 시작하기만 하면 반 아이들이 모두 뒤집어져서 끝까지 노래를 불러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국민학교 5학년을 마칠 즈음, 이른바 ‘헤비메탈 사운드’에 심취(?)하기 시작한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노래와 음악을 못한다는 것에 대한 반발심리가 적용해 무의식적으로 그런 음악을 듣는 데 더 열중한 것 같기도 하다고.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 악기나 노래는 포기했어도, ‘스콜피온스’ 등 유명 해외 헤비메탈 그룹의 이름을 하나둘씩 들먹이는 수준으로 성장한다. 그렇게 듣는 음악으로 빠지기 시작한 그는 라디오 인기 음악프로를 빼놓지 않고 듣는 건 물론이고 청소년층에 인기가 있다는 음악잡지란 음악잡지는 모조리 섭렵하며 물불 안 가리고 대중음악 지식을 축척(?)하기 시작한다.


그즈음에 잘 나가던 아버지가 친구의 채무 연대보증을 서준 게 잘못돼 사업 파산의 수순을 밟았고, 그의 가족은 집 한 칸만 가까스로 건지는 어려움으로 추락하게 된다. 산동네 단칸방으로 쫓겨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전에 누렸던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때 철이 든 그는 학업만이 부모님의 시름을 덜어드릴 일이라고 여겨 학업에 집중하여 중학교 시절 내내 1~2등을 차지한다. 내내 헤드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어도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전혀 터치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상황은 그가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면서 확 바뀌게 된다. 반에서 얼굴도 잘생겨 주목받던 친구가 교외에서 그룹 활동을 하며 베이스 주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할 게 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친구를 따라간 그룹 연습실의 허름함에 실망하고 돌아서던 그의 앞을 막고 또 다른 두 명의 친구가 들어선다. 낯익은 국민학교 동창들이었다. 그렇게 노래도 못하고 기타는 통기타 코드만 잡는 수준이었던 그는 각시탈의 멤버로 친구들과 어울리게 된다.

대한민국의 가수, 싱어송라이터, 음반 프로듀서, 라디오 DJ이자 사회운동가, 우리에게는 ‘마왕’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그룹 N.EX.T의 리더 및 메인 보컬, 신해철의 이야기이다.

 

록 음악부터 시작해서 일렉트로니카(테크노), 재즈, 국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시도했고, 전공을 살려 일반적 대중가요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철학적 노랫말을 많이 지었으며, 평단의 호평과 함께 상업적으로도 상당한 성공을 거둔 뮤지션이다.


또한 작사, 작곡, 편곡, 악기 연주는 물론 프로듀싱과 엔지니어링 및 음악 작업을 위한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까지 한 만능의 뮤지션이었다. 또한 대한민국 컴퓨터 음악(소위 미디 음악)의 선구자 겸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싸이, 서태지, 이현도 등도 신해철에게 샘플러를 비롯하여 각종 미디 음악 장비 사용법 등을 배웠다.

 


 

헤비메탈의 흉내조차 낼 수준이 못되던 그룹 ‘각시탈’에서 처음 일렉기타를 접하고 고1 여름방학에서야 중고로 된 자기 일렉기타를 사서 끼고 살기 시작한다. 노래라면 주눅이 들어 제대로 끝내지도 못했던 그가 2학년 그룹 리더가 된다. 음악생활에 빠지고 아버지의 약국 개업으로 인해 집안 살림이 다시 조금씩 나아지면서 그의 성적은 바닥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용납할 그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어느 날 연습실에서 돌아온 그의 눈앞에 박살난 통기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아버지가 무서워 대들지도 못하고 집 앞에서 그 기타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면서 음악에 대한 마음을 더 강하게 다졌다.

하지만, 대입을 앞두고 고3 면담을 하게 된 그의 어머니는 담임에게 지금의 성적으로는 4년제 대학을 가지 못할 것이라는 선고를 받게 된다. 서울대 의대를 지망했다가 후기로 성균관대를 가야만 했던 그의 아버지의 바람대로 서울대는커녕 4년 제도 어렵다는 선고는 집안을 발칵 뒤집었다.

결국 스스로의 표현처럼 신해철은 겉멋에 대학물은 한번 먹어봐야지 싶어서 그 겉멋대로 선택한 서강대 철학과에 87학번으로 입학하게 된다. 어쨌거나 서울 안의 4년제에 들어갔다는 당당함으로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제 세상 만난 듯 그는 오로지 각시탈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하며 발성연습과 기타 연습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87년 여름에 그가 너무 혼자서 나댄다는 이유로 팀에 불화가 커져서 팀은 해체를 결정하게 된다. 그러다가 마침내 다시 그룹을 조직해 활동을 하겠다고 결정한 것이 1학년 말이었다. 그렇게 뜻을 같이하며 뭉친 이들이, ‘음악과 함께 무한히 비상하고 싶다.’는 의미의 그룹 무한궤도의 창단 멤버들이었다.(모두 서울대와 연대 출신들로 그의 학벌이 가장 안 좋았던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게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등학교도 아니고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손찌검을 당하고 가출까지 하면서 그는 부활의 김태원을 찾아가 기타를 가르쳐달라고 하면서 음악에 미쳤다는 말까지 듣게 된다. 이 계기가 그에게는 그간 막혀 있던 그의 성장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그의 말을 빌자면, “웬만한 곡의 기타 플레이는 한 번만 듣고도 그 자리에서 내 것으로 소화시킬 수 있을 만큼 귀도 뻥 뚫리고 음악적 감각도 예민해지는 것 같았다. 이전과는 정말 비교가 안될 정도로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늘기 시작했다. 악상도 수시로 떠올라 작곡도 하루에 한 곡씩 해낼 정도였다.”라고 했다.


그러니 그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했고, 그 오만함은 이제 데뷔만 안 했을 뿐, 당대의 그룹 멤버들과 음악적인 의견을 교감할 수 있는 막내의 자리까지 독차지한 상태였다.


그러던 그에게 무한궤도가 아닌 한양대를 다니던 친구가 음악을 작곡했다면서 곡을 하나 가지고 온다. ‘기다림은 사랑의 시작이야’라는 록발라드 곡이었는데, 그 곡이 너무 마음에 들었던 신해철은 그 자리에서 자신이 가사를 써서 음악에 끼워 맞춰 바로 몇 달 남지도 않았던 88년 강변 가요제에 출사표를 덜컥 던진다.


이 정도면 충분히 1등은 찜 쪄먹을 수 있을 거라는 오만함이 그득한 도전이었다. 그렇게 ‘아기 천사’라는 이름의 그룹으로 참가했던 MBC <강변가요제>에 본선은 고사하고 최종 예선에서 떨어지며 고배를 맛보게 된다.


당시 언더그라운드를 장악하던 맹주, '부활'의 형님들과 음악적인 교류까지 하고 있었다는 그 자만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고 만다. 행여 음악을 평생 업으로 가지고 갈까 봐 걱정하던 아버지와의 첨예한 대치는 계속되던 상태였기에 그는 더 조바심이 나고 분해서 잠을 잘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금상의 이상우(왼쪽) 대상의 이상은(오른쪽)

그해의 강변가요제 1위는 이상은의 ‘담다디’, 2위는 이상우의 ‘슬픈 그림 같은 사랑’에게 돌아갔다. 결코 만만한 상대들도 아니었고 변변찮은 이들이 수상한 것도 아님을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절치부심. 결국 본래 자신이 리드싱어로 꾸준히 연습했던 무한궤도로 무작정 대학가요제 참가 지원서를 제출한 신해철은, 심사위원들을 단번에 사로잡을 곡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미리 준비한 것도 아니고, 시간이 많아 준비가 철저한 상황도 아니었다.

일단 작곡을 맡은 신해철은 강변가요제 경험을 기초로 전략의 핵심을 이렇게 메모한다.

첫째, (어차피 밴드가 대상을 받긴 어려울 테니) 대세인 발라드보다는 록 밴드답게 쿵작거리는 비트가 강한 축제성 노래일 것. 둘째, 심사위원이 객석에 있으므로 객석의 반응을 공략해야 할 것. 셋째, 어차피 하룻저녁에 모든 게 끝나는 일회성 행사이므로 곡이 시작하는 순간부터 확실하게 튀어 듣는 이들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것. 넷째,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코드와 리듬으로 가되 기존의 국내 음악 족보엔 없는 팝 또는 록 스타일의 복잡한 편곡으로 갈 것.


그래서 여러 대의 신디사이저를 이용해 성대하고 화려한 전주를 완성했다. 또한 그해 열린 강변가요제에서 이상은의 '담다디'가 참가자들 사이에서 우승 후보로 점쳐지던 이상우의 '슬픈 그림 같은 사랑'을 제치고 대상을 받는 광경을 보면서 그 흐름을 살려, 신나는 곡이 좋겠다는 전략적 연구의 결과에 따른 판단이었다.

 

그 연구전략을 토대로, 아버지의 눈을 피하고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동네 문방구에서 산 멜로디언과 스펀지로 뮤트 시킨 통기타를 이용해 하룻밤 만에 곡을 쓴다. 불멸의 트랙으로 남을 바로 그 곡 ‘그대에게’의 탄생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무한궤도의 키보드 주자, 효성 그룹 조현문 변호사

빠바 바바 바바 밤~ 팡파르 같은 신시사이저 소리로 노래는 도입부부터 웅장함을 뽐냈다.(여담이긴 하지만, 당시 이 획기적인 신디사이저 연주를 맡았던 조현문(당시 서울대 2학년 재학)은 그 유명한 효성그룹 둘째 아들 재벌 3세이다) 이어 등장하는 드럼 연주는 곡을 묵직하게 느껴지도록 했다. 몇 초 뒤 템포를 올려 빠르게 나아가는 진행을 통해 경쾌함도 내보였다. 마무리는 발라드 형식으로 꾸며서 독특함까지 갖췄다. 지루할 틈이 없었으며, 확실히 비범했다.


그렇게 그룹 '무한궤도'는 리드 싱어 신해철이 만든 '그대에게'로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거머쥐게 된다.

그렇게 그는 잘 나가지 않았냐구?

겨우 강변가요제 한 번 떨어진 게 실패고 좌절이냐고 묻고 싶은가?

그럴 리가 있나? 아직 좌절은 시작하지도 않았다.


신해철은 그렇게 대상 수상 직후 본격적인 활동을 앞두고 매니지먼트의 필요성을 느끼던 차에 여러 프로덕션 대표들로부터 같이 일해보자는 제의를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한결같이 그룹 전체를 받아들이겠다는 게 아니고 리드보컬이었던 그 만을 솔로로 독립시켜 활동을 하게 하는 조건이었다.

 

그때마다 그는 그런 방식에는 절대 응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그것은 그룹 친구들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보다는 음악적 훈련이 덜 된 자신이 섣불리 솔로로 나가기보다는 그룹 활동으로 음악 실력을 닦는 게 더 낫겠다는 철저히 전략적인 판단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첫 그룹 앨범 제작에 들어가 6개월여 만에 마침내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를 타이틀로 한 그룹 앨범을 선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고대하던 그룹 앨범이 발매되고 눈시울을 붉혔던 그룹 멤버들은 앨범이 나오자 이제 그렇게 달렸던 목표를 달성했다고 느꼈던지 급격하게 그룹 전체적으로 음악에 대한 열정이 떨어졌다.

그 분위기에 신해철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몇 번이나 자신을 다잡았지만 생각 같지 않았다. 그렇게 그룹은 해체의 수순을 밟게 된다.


그렇게 음악을 끝낼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가 선택한 것이 어리석기 그지없는 대마초였다.

그가 언더 세계에서 잘못 주워들은 정보로, 그 이전까지만 해도 ‘귀를 뚫리게 하고 자신의 능력 이상의 음악성을 발휘하기 위해서 대마초를 피운다.’는 가요계 주변의 이야기를 미친 소리라고 치부했던 그가 그 유혹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었다.


결국 불구속 입건되긴 했지만, 잠시였긴 하더라도 철창에 갇히는 당시의 경험은 그에게 뼈저린 실수를 각인시켜준다. 결국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도 그의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의 따뜻한 격려였다.


그리고 그는 홀로서기의 어려움을 극복해가며 솔로 첫 앨범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를 선보인다. 그 타이틀 곡이 어디서 왔는지 알겠는가? 맞다. 88년 그해 여름 그에게 처음 좌절을 맛보게 해 준 그룹 ‘아기천사’로 참가했던 그 강변가요제 참가곡 ‘기다림은 사랑의 시작이야’를 조금 손보고 제목을 바꾼 것이다.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가 타이틀 곡인 1집앨범

굳이 그가 처음 데뷔하고 솔로로 홀로서기에 성공하기 가지만을 당신에게 이야기하는 이유를 알겠는가? 이후 그가 사회성 있는 발언으로 이슈메이커가 되고, 남들이 하지 않는 음악을 도전하고 뜬금없이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자신의 격을 더 높이기 위해 그 귀중한 시간을 할애했던 것 등등은 이미 당신이 미디어를 통해 봐 왔던 마왕의 흔적이기에 굳이 상술하지 않고 생략한다.

 

당신이라면, 악기도 제대로 못 다루고, 노래는 제대로 하지도 못했던 그 청춘에 음악을 하겠다고 모든 것 젖혀두고 몸을 던질 수 있었겠는가?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는 연주인도 아니고 기가 막힌 가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처음 음악을 시작했을 때부터, 우리 곁을 떠나는 그즈음까지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한 음악인이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악기를 못하고 노래를 못했기에 듣기 시작했던 음악이었고, 무수한 시간 귀가 트이도록 들었던 음악과 그 소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일렉기타를 안고 잘 지경까지 직접 연주해보면서 체득한 그 코드 진행과 음악적 하모니와 무엇보다 그것을 만들어낸 이들의 의도를 읽어내는 수련과 수양의 연속이었다.


그러고 나서 정점에 있는 음악을 하는 선배들에게 어느 한 가르침을 들어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만들었고, 그저 베끼지 않았고 적당히 시대의 트렌드에 묻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자신만의 그 무언가가 확실하게 있어야 한다는 가치관이 분명했다.


당신이라면 그렇게 살아가는 내내 당신 스스로를 성장시키는데 미쳐서 자신을 온전히 바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악기를 못 다뤘고, 그가 노래를 못했기에 가능한 노력이었고 오기였다. 잘난 척을 하고 싶고 과시욕이 심했기에 그저 근거 없이 그렇게 하면 쪽팔리니까 끊임없이 공부했고 더 부족한 자신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달렸던 것이다.

 

당신은 그러한가?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은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고, 그저 밥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정작 하고 싶은 것이 뭐냐고 물으면 움찔할 텐가? 당신에게 꿈이라는 것이 있었는지 다시 당신 자신에게 물어봐라. 그리고 그것을 위해 당신이 얼마의 시간을 쏟아부었는지 얼마나 당신의 영혼을 그 안에 투자했는지 물어봐라.


부끄러운가? 차마 물을 용기조차 안 나는가?

그렇다면 지금부터 다시 그 빈 당신의 영혼을 채우도록 해라.

다른 누구에게 보이기 위함도 아니라 당신 스스로의 인생에 부끄러움이 없는 노력을 당신이 눈감게 되는 그날까지 해라.


당신이 눈감는 날은 당신이 정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이 눈감는 그날까지 당신의 꿈을 향해 당신의 온 영혼을 모두 쏟아붓는 것은 당신만이 할 수 있다.

더 많은 것을 하고 싶었고, 더 많은 것을 잘난 척하고 싶었던 그는 정작 그럴 기회를 잃었다.

 

그가 걸었던 모든 삶, 특히 그렇게 어이없는 수술을 결정하고 허망하게 간 것에 대해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오늘만큼은 그런 얘기까지 꺼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 것이 7년 전 바로 오늘이다.


그의 제사상에 글쟁이인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

이 글 한 편, 향 대신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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