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Oct 28. 2021

12살에 고아가 되고 18개월 동안 병마에 시달리고도

조국 영국을 위한 신화를 창조한 판타지의 아버지가 되다.

1892년, 현재 남아프리카의 남쪽 오렌지 프리 주의 불룸폰테인에서 은행 지점장인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영국 국적임에도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났던 이유는, 당시 그의 아버지가 은행의 불룸폰테인 지사장으로 승진 발령이 나면서 영국을 떠나게 된 탓이었다. 2년 뒤 남동생도 그곳에서 태어났다. 은행 지점장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하인들을 두고 살았다. 집에서 일하던 하인 한 명이 그가 너무 예쁜 백인아이라는 이유만으로 부족에 자랑하기 위해 그 촌락에 데려갔다가 이튿날 데려오는 사건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3살 되던 해, 류머티즘 열병으로 사망했는데, 당시 어머니는 동생과 함께 영국에 장기 방문 중이었다. 가장을 잃고 졸지에 홀로 된 그를 위해 어머니는 급히 그를 외할아버지에게 보내게 된다. 그 후 그들은 우스터셔 마을로 이주하게 된다. 이 시골 마을은 후에 그의 작품에 아주 큰 영감을 주는 배경으로 작용하게 된다.

 

어머니는 두 아들을 직접 가르쳤는데, 그가 식물을 좋아한다고 판단하여 그에게 식물학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사실 어린 시절 그는 풍경과 나무 그리는 것을 좋아는 했지만 정작 최대 관심사는 언어였다고 한다. 특히 그의 어머니가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라틴어의 기본을 가르쳐 주었는데 4살이 되던 해에 글을 읽기 시작했고, 곧 자연스럽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에게 많은 책을 접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는 <보물섬>이나 <피리 부는 사나이>등의 이야기는 싫어했으나, 루이스 케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심란해하면서도 빠져들 정도로 즐겼다고 한다. 특히, 조금 자라서는 조지 맥도널의 판타지 <레드 인디언>과 앤드류 랑의 <페어리 북>을 좋아했는데 후에 그의 작품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하지만, 마땅한 수입원이 없이 외가의 지원에 의지하던 생활은 어머니가 가톨릭으로 종교를 정하게 되면서 가족들의 재정적 지원이 끊겨버린다. 그 영향 때문이었을까, 4년 후 그의 어머니는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나이 불과 12세였다. 그의 생각에 어머니의 가톨릭 입교와 그로 인해 끊어진 재정적 지원으로 인한 죽음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순교했다는 인식이 생겨, 가톨릭 신앙이 그의 인생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어머니는 어린 두 아들의 후견인으로 신부님을 지목하고 눈을 감았다. 형제는 졸지에 고아가 되어, 페로트 폴리와 빅토리아 풍 건물인 지역 급수소 근처에 살았다. 이들은 그가 이후 작품의 배경을 구상하는데 기반이 된다. 특히, 돈이 없어 관람했던 버밍엄 박물관의 무료 전시된 그림들은 모두 로마풍의 중세 그림들이었다.

 

1911년 그는 스위스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이 여행은 빌보가 미스티 마운틴으로 떠나는 여정에 직접적인 착상으로 연결되었다고 전해진다. 그해 10월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 엑스터 칼리지에 입학하게 된다. 고전을 공부하게 되지만 결국 전공을 바꾸어 영어언어학을 공부하고 1915년 졸업을 하게 된다.

영국의 작가, 언어학자. 판타지 세계를 정립한 <반지의 제왕>을 쓴 작가로 유명하며, <호빗>, <실마릴리온> 등으로 이어진 작품세계를 통해, 이후 나오게 되는 모든 판타지 소설·게임 등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인정받아, ‘판타지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통칭 J.R.R. 톨킨, 풀네임 존 로널드 루엘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의 이야기이다.

 

그의 팬덤은 ‘톨키니스트’라고 불리는데, 일부 열성 톨키니스트들에게 그는 거의 신앙 수준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판타지 문학뿐만 아니라 영문학계에서도 높이 인정받는 대문호이며 2008년 영국의 대표적인 신문 더 타임스에선 전후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6위로 그를 선정했고, BBC 투표에서는 지난 천 년 동안 가장 위대한 영어 작가 6위로 뽑힌 전설이다.


톨킨이 16세의 나이로 대학 기숙사에 익숙했던 해, 톨킨은 자신보다 3살 연상이던 이디스 메리 브렛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의 후견인이었던 모건 신부는 톨킨이 개신교(성공회) 여인과 사귀는 것에 놀랐고, 그녀가 결국 톨킨의 학업을 방해하는 문제가 될 것이라고 보고, 21살이 되기 전까지 그녀를 만나지 말라고 금지령을 내린다. 톨킨은 결국 한 번의 반항도 없이 이 조건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정말로 딱 5년이 지난 후, 21세가 되던 생일 아침에 마치 5년간 연애를 했던 사람처럼 이디스에게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여 자신과 결혼해달라고 편지를 쓴다. 톨킨이 자신을 잊은 것으로만 여기고 다른 남자와 약혼까지 했던 이디스는 약혼을 파혼하고 톨킨의 사랑을 받아들여 그 둘은 1916년 결혼하게 된다. 문제가 되었던 그녀의 종교는 톨킨의 설득으로 그녀가 가톨릭에 귀의하는 것으로 해결된 후였다.

여담이긴 하지만, 톨킨과 이디스의 관계는 그의 작품 <실마릴리온>에서 몇 안 되는 해피엔딩으로 끝난 베렌과 루시엔으로 투영된 것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그는 2년 먼저 눈을 감은 아내의 묘비에 ‘루시엔’이라고 새기고 자신이 죽으면서 유언으로 묘비에 ‘베렌’이라고 새겨줄 것을 당부하였다.

결혼 직후 톨킨이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쟁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28], 이디스가 그를 위해 발랄하게 춤을 추었다. 이를 본 톨킨은 실마릴리온의 전반적인 스토리와 이 작품의 여주인공 요정 루시엔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톨킨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자원입대하게 된다. 11개월간의 훈련을 받고 프랑스 전장으로 통신장교의 보직으로 투입되는데, 많은 신참 장교들이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나가는 것을 목도하고 전쟁의 참혹함을 지옥 같은 현장에서 경험하게 된다.

 

사실 제1차 세계대전의 사망자들은 전쟁의 총칼로 인해 사망한 이들보다, 전장의 비위생적인 참호의 환경으로 인한 질병과 부상 처리 때문에 죽는 이들이 훨씬 많았다. 실제로 그것을 ‘참호열(Trench Fever)’이라는 이름까지 붙일 정도였다. 그가 참호열에 시달려 후방으로 후송되는 일이 발생한다. 그저 단순히 열이 나는 차원의 증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무려 18개월이나 병마에 시달리며 생사를 오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가 병으로 후방에 호송된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전투로 인해 그가 속했던 대대가 전멸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당시 영국 육군은 Pals(팔스, 지역연대)라고 하여, 한 부대에 같은 지역/구역 출신 사람들을 몰아서 배치하는 게 보통이었다. 

즉, 그가 18개월 만에 병상에서 살아 돌아왔을 때, 그가 살던 지역의 장정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병원에서 나온 후에도 건강상태가 양호하지 못했던 톨킨은 요양을 위해 스태퍼드셔 그레이트 헤이우드의 시골집에서 보내게 된다. 그는 요양 중에 <The Book of Lost Tales>를 쓰게 된다. 톨킨이 킹스턴에 배치되었을 때 톨킨과 이디스가 만개한 독미나리 숲을 거닐고 있을 때 이디스가 톨킨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귀엽게 춤을 추며 그를 위로했다는 일화는, 앞서 언급한 베렌과 루시엔의 설정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현대인들이 판타지 문학을 통해 정서적 도피처를 찾듯, 젊은 톨킨도 전장의 아픈 기억과 두려움을 잊기 위해 이때부터 그의 일생을 결정짓는 장편 대작 판타지의 집필에 온 정신을 쏟게 된다.

 

그가 군에서 전역하고 민간인 신분으로 학교에 돌아와 처음 했던 일은 <옥스퍼드 사전>의 편찬 작업이었다. 톨킨은 주로 독일 기원의 단어들의 역사와 어원을 W부터 작업을 했다고 한다.


1920년 톨킨은 리즈 대학에서 영어 언어학 조교로 대학에 출강하게 됐고 1924년 정교수로 승진하게 된다. 당시 최연소 교수였다. 리즈 대학에서 그는 E.V. 고든과 <A Middle English Vocabulary>와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Sir Gawain and the Green Knight)>의 최종판을 작업하였다. 1925년 톨킨은 모교인 옥스퍼드 대학교로 돌아와 교수직을 맡게 된다.

 

톨킨이 펨브룩에 있을 때 <반지의 제왕>의 프리퀄이라고 할 수 있는 <호빗> 2부작을 쓰게 된다. 동시에, 그는 1936년 강의 때 사용하기 위해 <베오울프 : 몬스터와 비평( Beowulf : the Monstars and the Critics)>이라는 대학 교재를 집필했다. 이 베오울프에 대한 연구는,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는 훌륭한 연구로 평가받고 있다.

<호빗>의 초판본, 경매에서 2억 5천만원가량으로 낙찰.

1945년 톨킨은 옥스퍼드 머튼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고, 1959년 은퇴할 때까지 교직을 지켰다. 그리고 1948년 드디어 집필 아이디어를 다듬기 시작한 지 10년 만에 대작 <반지의 제왕>을 탈고한다. 집필 시기에 전쟁이 터졌고, 워낙 방대한 분량 때문에 3부작으로 각 2권으로 되어 3부작 총 6권으로 되었다. 


특히, 마지막 3부의 제목 ‘왕의 귀환’이 너무 내용을 스포일링 한다고 ‘반지의 제왕’으로 하자고 제안했지만, 출판사로부터 거부당하고 이후 전체를 가리키는 제목이 되었다. 그렇게 탈고하고 나서도 6년이나 지난 1954년 판타지의 전설이었던 그 작품은 출판된다.

 

사실 그는 이 작품이 이렇게 소위 ‘초대박’이 날 줄 몰랐다고 고백했다. 팬들의 관심이 자신에게 너무 집중되자, 톨킨은 전화번호부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게 된다. 결국 톨킨 부부는 영국해협의 풀만(灣)에 면해 있는 한가한 본머스로 이주하였다.

 

1972년 1월 톨킨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대영 제국 훈장 3등급을 지명받고, 1972년 3월 28일 버킹검 궁전에서 훈장을 받게 된다. 1971년 11월 톨킨의 아내 이디스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21개월 후에 1973년 9월 톨킨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향년 82세.

말년의 톨킨 부부와 그들의 사랑을 작품화한 <베렌과 루시엔>


요즘 당신이 보는 판타지 소설, 게임에 등장하는 배경과 캐릭터, 예컨대, 엘프, 드워프, 오크, 호빗, 트롤, 발록 등은 모두 그가 만들어내고 개념화한 창조물들이다.

톨킨은 오랜 이민족들의 침입과 기록 미비로 잃어버린 영국의 신화를 대체하는 새로운 신화를 자신이 직접 만들고자 하였으며, 관심이 많던 유럽, 아랍 등의 신화적 존재들을 일일이 정리하고 그 이미지를 창조하여 자신의 세계에 도입, 그만의 새로운 신화, 레젠다리움을 만들어내었다. 언어학자이자 대학교수였던 그가 왜 <반지의 제왕>을 집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그의 집필 의도는 그의 고백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사랑하는 내 조국의 빈곤이 슬펐습니다. 그곳에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적어도 내가 추구하는 수준의 이야기, 다른 나라의 전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희랍어와 켈트어, 로망스어와 그리고 독일어, 스칸디나비아어, 핀란드어로 된 이야기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싸구려 책자에 나오는 초라한 것을 제외하면 영어로 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맞다. 그는 제대로 된 신화가 갖지 못한 조국의 신화를 자신이 써서 만들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가상의 이야기를 제멋대로 써내는 것이 아니라 연구를 토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학자로서의 역량을 동원하여 영국을 대표하는 신화를 남기고자 했다. 그리고 그는 그 자신이 신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작품은 전체로 한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게다가 어마어마한 분량뿐만 아니라 디테일에도 상당한 퀄리티를 유지한 것으로 유명한데, 반지의 제왕을 비롯하여 자신이 쓴 글들의 번역을 위해 ‘각국 언어별 번역 지침’을 작성해두기까지 하였다. 이 언어 지침이 작성된 이유 인즉은, 자신이 쓴 <반지의 제왕>, <호빗>, <실마릴리온> 3부작은 자신이 ‘번역’한 것이지 ‘쓴’ 것이 아니라는 그야말로 어이없는 고백 아닌 고백을 남겼다.

 

그의 이야기를 하면서, 빼먹지 말아야 할 이야기가 한 가지 더 있다.

그는 결국 그 방대한 자료들을 모두 정리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정작 그가 미처 정리되지 못했던 원고들은 셋째 아들이며 편집 작업을 맡았던 크리스토퍼 톨킨이 정리하여 <실마릴리온>,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 <가운데 땅의 역사서>, <후린의 아이들>, <베렌과 루시엔> 등으로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그는 그 모든 이야기를 혼자서 서재에 틀어박여 집필했던 은둔형 작가이거나 엄숙하기 그지없는 전형적인 영국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좋아한 자상한 아버지였다고 아들은 기억한다. 처음 아이들에게 들려주던 옛날이야기를 하나의 플롯으로 정리한 것이 바로 <호빗>이었다.

톨킨의 셋째 아들 크리스토퍼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전쟁의 트라우마가 있던 자신이, 아들 크리스토퍼 톨킨을 다시 제2차 세계 대전에 그것도 가장 위험하다는 공군 조종사로 내보내야만 했다. 아들을 위해 <호빗>을 지을 정도의 자식들을 끔찍이 사랑했던 아버지 톨킨은, 하루하루가 끔찍한 나날이었다.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아들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며 아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의 작품 세계를 완성시켜 나가게 된다. 


그러한 과정이 있었기에 자신이 집필하지도 않았음에도 내용을 모두 파악한 아들 크리스토퍼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실마릴리온>등을 편집하고 보충해서 출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들도 작년 1월 95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말년의 크리스토퍼

어떤가, 원래 소설가도 아니었던 학자가, 제대로 된 신화 하나 가지고 있지 못한 대영제국을 위해 자신이 수양하고 쌓은 지식과 경험을 모두 바쳐 만들어낸 작품이 바로 <반지의 제왕> 유니버스의 비하인드 스토리이다. 


특히, 그 작업의 시작이 되었던 것은 말을 이제 배우기 시작한 아이를 위해 밤마다 들려주던 옛날이야기를 책으로 묶어줘야겠다는 의도에서 시작한 <호빗>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처음부터 그가 대단한 판타지 문학의 아버지가 될 생각도 없었고, 무엇보다 어마어마한 인세가 들어와 재산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팬들의 관심이 늘어나 집을 한적한 시골로 옮길 지경이 되어서도 자신의 작품이 왜 그렇게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솔직한 인터뷰를 남길 정도로 소박한 사람이었다.

 

당신이라면, 그저 책 한 권 내는 게 소원인 당신이라면 그와 같은 원대한 꿈을 담아낼 수 있었을까? 그의 시작 역시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밤마다 들려주던 옛날이야기를 아들을 위해 책으로 엮어봐야겠다는. 책으로 돈을 벌겠다는, 유명해지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어깨뽕이 가득하여 제대로 만년필을 집을 수도 없는 당신의 지금 모습과 비교했을 때 어떠하냔 말이다.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았을 과거에 누구는, 아들을 위해 옛날이야기를 엮어주겠다고 시작하여, 정작 변변한 신화 하나 가지고 있지 못한 조국이 안타까워 제대로 된 신화를 자신이 만들어내겠다며 아무도 시키지 않은 작업을 10년간이나 계속 해왔다. 전쟁이 터져도 썼고, 강의가 바쁜 와중에도 썼으며, 쓰다가 이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한 권 분량의 책을 모두 화롯불에 태우고 다시 썼다.

 

그저 말도 안 되는 자신의 상상을 짜내 되나 가나 쓰는 만행은 저지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신화학에 정통해 있었고, 언어학자로서 고대 산스크리트어, 페르시아어 등을 배워 능통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고대 신화 원서를 다 읽은 영국 학자 중에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베어울프> 등의 고대 서사시와 신화는 전공이었단 말이다.


그 모든 공부가 농축되고 집약되어 그의 소설로 탄생한 것이다. 지금 적당히 만화 쓰듯이 웹소설에서 한번 읽고 버리는 수준의 잡서가 아니란 말이다.

 

책은 고사하고 짧은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그 글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수많은 책들과 공부가 녹아들어가 있어야 한다. 그저 내 감상을 이야기하거나 어디서 주워들은 내용이나 다른 책에서 슬쩍 가지고 온 이야기는 말 그대로 그저 혼자서 싸지른 것에 불과할 뿐 작품이라고 논할 가치조차 갖지 못한다.

 

당신이 글을 쓴다면, 당신이 쓰는 글의 가치를, 의도를, 그리고 그 글을 쓰기 위해 당신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수양과 훈련을 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봐라. 그런 것이 전혀 되어 있지 않고 당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당신의 정신 승리를 위해서 쓰는 거라면, 남에게 당당히 내보이는 만행을 저지르지 마라.

 

아들을 위해 이야기를 만들고, 신화가 없는 조국을 위해 자신이 직접 신화를 정리해서 집대성하겠다는 노력으로 평생을 자신의 본캐도 아닌 부캐로 글쓰기를 했던 분에게 모욕되는 일은 하지 마라.

당신도 정말 정도를 걷고 싶다면, 공부하고 또 공부해라.


누구나 글은 쓸 수 있다. 누구나 밥은 먹고 산다. 누구나 숨도 같이 쉰다.

하지만, 산다고 다 똑같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당신도 이미 알 나이가 됐다.


사람의 가치는 모두 같지 않다.

현격하게 다르다.

그리고 그 다름을 정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지금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고 있는가로 결정된다.

하물며, 글쓰기에 말해 무엇하랴?

불과 100년도 되지 않은 그 어느 날 그가 글쓰기를 왜 했는지를 고백하는 말을 당신에게 들려주며 오늘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나는 거대한 우주 기원에 관한 것에서부터 낭만적인 동화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 서로 연결된 전설의 체계를 만들 생각이었고…… 이것을 오로지 영국, 나의 조국에 바치고자 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요제 예선도 통과 못하고, 대마초 피우다가 처벌받고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