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Oct 29. 2021

수학에 낙제하고서도 수학 전공으로 석사논문까지 쓰고서

수학능력을 바탕으로 그래픽 소프트웨어 시장의 절대강자로 우뚝 서보이다.

1940년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중학교 때 수학에서 낙제를 받을 만큼 성적이 나빴다. 고등학교 때 받은 적성검사의 결과는 대학을 진학하지 않는 편이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왔다. 엔지니어링 분야의 진학을 원한다고 꿈을 밝히자 상담교사는 그 분야에 진학해서 성공할 확률이 거의 0%라며 포기할 것을 대놓고 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낙제생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1958년 올림푸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이 낙제받았던 과목을 전공으로 유타 대학교에 진학해서, 수학과 철학으로 학사학위를 받고, 수학 전공의 석사 학위과정에서, 1956년 미국의 수학자 네이선 제이콥슨이 처음 제기하였던 ‘제이콥슨 라디칼의 선형 변환 행렬을 풀 수 있는 정리의 증명’이라는 수학계에서는 이례적인 성과를 거둔 논문을 발표하며 학계의 주목을 받는다.


수학 낙제생의 한을 풀었던 것인지 새로운 것에 눈이 트였던 것인지, 박사과정에서는 전기공학(컴퓨터 공학)으로 분야를 확장한다. 유타 대학교에서 그는 베타 세타 파이 동호회의 감마 베타 지부의 회원이었다.

 

박사과정 중, 그는 자신의 지도교수가 설립한 컴퓨터 그래픽 및 상호 작용 디자인이라는 팀에 합류한다. 지금이야 컴퓨터에서 그래픽이 출력되는 것이 당연시 여겨지지만, 당시 컴퓨터는 흑백 화면에 문자만 출력되는 것이 고작인 단계였다.

 

그는 컴퓨터 화면에서 이미지를 표현하는 기술을 연구한 후 박사 학위 논문으로 ‘워녹 알고리즘’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출했다. 컴퓨터가 그래픽을 표현할 때 여러 이미지가 겹치면 숨겨진 면을 어떻게 표시해야 하는지 그 방법이 담긴 알고리즘이었다. 이를 통해 당시 컴퓨터의 그래픽 표현은 더욱 진일보한 발전을 이룰 수 있는 획기적인 발명에 해당하는 연구결과였다.

워녹 알고리즘

워녹 알고리즘 논문은 표지, 목차, 주석 등을 제외하면 고작 25장에 불과했다. 유타대 박사학위 논문 역사상 가장 짧은 논문이었지만, 그 유용함과 가능성을 높게 평가받아 아무런 문제 없이 통과되었다. 1969년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이후 그는 ‘컴퓨터 사이언스 코퍼레이션’이라는 회사를 거쳐 1972년 ‘일리악 4(ILLIAC IV)’라는 슈퍼컴퓨터의 프로그래머로 참여하게 된다. ‘일리악 4’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인류를 달이나 우주로 보내기 위한 우주선을 제작할 때 이용하기 위해 제작한 시뮬레이션용 슈퍼컴퓨터였다.


그곳에서 경험과 기술을 더욱 업그레이드시킨 그는 1978년부터는 자신의 본업인 컴퓨터 그래픽 업계로 돌아왔다. 자신의 지도교수였던 데이비드 에반스와 그래픽 사용자 환경(GUI)을 개발한 이반 서덜랜드가 함께 설립한 컴퓨터 그래픽 회사 에반스&서덜랜드에 합류하게 된다.

미국의 컴퓨터 사업을 세계 1위로 선도한 1세대 프로그래머이자, 찰스 게스케와 더불어 그래픽 및 출판 소프트웨어 기업 어도비 시스템즈의 공동 설립자이자, 포토샵과 PDF를 자신의 회사 상품으로 론칭시킨 혜안을 가진 미국의 컴퓨터 과학자, 존 에드워드 워녹(John Edward Warnock)의 이야기이다.

 

워녹은 그의 첫 임기 2년 동안 어도비의 사장이었으며 나머지 16년 동안은 의장이자 CEO를 역임하였다. 워녹은 2001년 CEO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여전히 게스케와 더불어 이사회 공동 의장으로 남아있다. 워녹은 그래픽스, 출판, 웹, 전자 문서 기술의 개발을 주도해왔으며 이로 말미암아 출판, 시각 소통 분야에 큰 변혁을 일으켰다.

 

이후, 존 워녹은 컴퓨터 그래픽 및 전자 문서 기술 개발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많은 과학 기술상을 받았다. 1989년 미국 컴퓨터 학회에서 수여하는 ‘소프트웨어 시스템 상’을 받았고, 2000년 광학기술협회(OSA)로부터 상을 받았다. 2004년 영국 컴퓨터 협회의 러브레이스 메달을, 2008년 전기전자기술자협회(IEEE)의 컴퓨터 기업가 상을 받았다. 2009년에는 미국 오바마 정부로부터 국립 기술 혁신 메달을 받았다.

 


 

지도교수였던 사장의 회사에 재직하면서 존 워녹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컴퓨터에 출력되는 그래픽을 그대로 출력할 수 있다면 고가의 인쇄기를 구매하지 않아도 사용자들이 손쉽게 문서를 출력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당시에도 컴퓨터 그래픽을 출력해주는 장비는 존재했다.


하지만 이것을 사용하여 출력을 하기 위해서는, 전용 소프트웨어와 이에 연동되는 출력기를 갖추고 있어야만 했다. 높은 비용 때문에 일반 사용자는 물론 회사조차 이러한 기기를 갖추고 있기가 쉽지 않았다. 존 워녹은 모든 출력기에서 연결만으로 이용할 수 있는 통합 그래픽 프로그래밍 언어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이를 위해 근무하던 회사를 떠나 당시 최신 컴퓨터 기술의 산실이었던, ‘제록스 팔로알토 연구소(Xerox PARC)’로 이직했다. 자신의 아이디어에 가장 적합한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 새로운 기술을 원할만한 회사로 서로 성장할 수 있는 곳을 찾은 것이었다. 이후 자신의 아이디어에 포스트스크립트라는 이름을 붙이고 상용화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제록스의 경영상 방향이 다르다는 문제가 생기면서 포스트스크립트의 상용화는 무산되어 계획 자체가 백지화된다.

지원해줄 회사가 없다면 자신의 회사를 만드면 된다고 이 고집불통은 결정을 내린다. 그렇게 존 워녹은 동료 프로그래머였던 찰스 게스케와 의기투합해 1982년 전설이 될 회사 ‘어도비(Adobe)’를 설립한다. 회사의 이름은 팔로알토에 위치한 자신의 집 뒤에 흐르는 자그마한 하천인 어도비 강(Adobe Creek)에서 따왔다.

그런데 고작 두 명의 프로그래머가 설립한 이 자그마한 기업에 창업하자마자 큰돈을 제시하며 매입하겠다며 눈독을 들인 인물이 나타난다. 바로 그 유명한 스티브 잡스 되시겠다. 잡스는 당시 GUI를 갖춘 세계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리사’를 개발하면서, 자연스레 컴퓨터 그래픽에 관한 확실한 원천 기술을 확보하길 원했다. 20년 가까이 컴퓨터 그래픽을 연구하고 포스트스크립트라는 아이디어를 낸 존 워녹의 어도비는 GUI 기반의 컴퓨터를 만들길 원하는 잡스 입장에선 확실하게 잡아야 할 대어였다.


잡스는, 500만 달러(54억 원)라는 1980년대의 입장에서 보면 어마어마한 거금을 제시하며 어도비를 인수하고자 했다. 하지만 자신만의 회사를 이끌어나가고 싶었던 고집불통, 존 워녹은 고민도 하지 않고 이 제안을 거부했다. 그 대신 자신의 회사가 갖는 가치과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준 그와 전략적 동맹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우겠다는 약은 제안을 한다.


그래서 애플에 포스트스크립트와 어도비의 차세대 프로젝트에 관한 라이선스를 5년 동안 제공하는 계약을 맺는 것으로 하드웨어 쪽의 확실한 동맹군이자 선생님으로 스티브 잡스와의 인연을 맺어둔다. 이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어도비는 설립 1년 만에 영업 이익을 낸 최초의 실리콘밸리 기업으로, 단숨에 업계의 주목을 받으며 도약한다. 어도비의 시총은 2017년 기준으로, 약 862억 7000만 달러가 조금 넘는다. 우리 돈으로 약 100조 원 가까이 되는 회사로 성장한 것이다.

1984년 존 워녹은 자신이 개발하던 포스트스크립트를 드디어 시중에 공개한다. 포스트스크립트를 읽을 수 있는 프로그램만 있으면 컴퓨터 기기와 출력 장치의 종류에 관계없이 그래픽과 문서를 출력할 수 있게 된다는 그의 아이디어가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가장 먼저 포스트스크립트의 라이선스를 공식적으로 인계받은 애플은 1985년 이 언어를 해석할 수 있는 레이저 프린터 ‘레이저 라이터(Laser Writer)’를 시중에 출시했다. 이후 애플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에서 나온 프린터도 포스트스크립트를 해석할 수 있는 기능을 탑재하기 시작했고, 포스트스크립트는 컴퓨터 그래픽 출력을 위한 표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포스트스크립트 덕분에 사용자와 기업은 전문 인쇄소가 아닌 사무실 책상에서도 많은 문서를 빠르고 손쉽게 출력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구나 자신의 문서를 간행물로 출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업계와 학계에서는 이러한 디지털의 변화를 ‘탁상출판(Desktop Publishing)’이라고 이름 짓게 된다.

애플 레이저라이터

존 워녹과 어도비는 포스트스크립트를 활용해 1987년 벡터 이미지(수학적 공식을 이용해 만든 이미지)와 디지털 글꼴을 제작할 수 있는 프로그램 ‘일러스트레이터(Illustrator)’를 발표했다. 출시 이후 30년의 긴 세월 동안 ‘일러스트레이터’는 지속적인 버전업을 통해 벡터 이미지 편집 업계의 사실상 글로벌 스탠더드로 군림하며 어도비라는 회사의 입지를 확고히 다지게 된다.

어도비는 ‘일러스트레이터’를 출시한 이후 종합 컴퓨터 그래픽 기업으로 거듭나는 성과를 내고 있긴 했지만, 한 가지 태생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벡터 이미지 편집 분야에선 독보적인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래스터 이미지(픽셀을 이용해 만든 이미지) 편집 분야 관련 기술이 부족했던 것이다. 누구보다 개발의 선두에 섰던 존 워녹이 이 불안한 진실을 시한폭탄처럼 계속 안고 있을 리 만무했다. 자신이 처음 창업할 당시, 잡스가 자신에게 했던 헌팅을 보고 그대로 배워 자신도 필요한 기술이지만 직접 개발할 수 없던 그 획기적인 기술을 활용한 원천기술을 가진 프로그램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발굴하여 사들여 지금의 어도비의 간판 모델이 된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바로 ‘포토샵’ 되시겠다.

 

포토샵의 원형은, 워녹이 그러했듯 1987년 토마스 놀이 박사과정 연구를 진행하던 도중 태어났다. 논문 준비를 위해 애플 매킨토시 플러스 컴퓨터를 구매한 토마스 놀이 컴퓨터 모니터에서 흑백 이미지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프로그램을 개발하게 된 것이 그 역사의 시작이었다.


루카스필름에 근무하면서 특수효과 기사로 일하던 그의 동생 존 놀은 이 프로그램의 가치에 대해 바로 알아보고 형과 의기투합하게 된다.  루카스필름에 근무하면서 접했던 그래픽 편집 전문 기기와 유사한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놀 형제는 프로그램에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 형식으로 변환할 수 있는 기능과 감마 보정 도구 등을 추가해 '이미지 프로(Image Pro)'라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냈다.

포토샵에 들어있는 토마스 놀과 존 놀 형제의 초상화

 동생이 형에게 이미지 프로를 상용화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여러 소프트웨어 업체에 접촉했지만, 어떤 회사도 그들의 아이디어와 프로그램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개 이미 진행 중인 프로젝트와 비교해 수준이 낮다고 평가절하하거나, 자사의 제품군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형제가 존 워녹을 찾았다. 워녹은 이미지 프로를 보고 그 자리에서 바로 놀 형제의 아이디어와 프로그램을 사들이기로 결정했다.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놀 형제의 이미지 프로는 어도비의 태생적 약점을 해결해주고, 어도비가 벡터 이미지와 래스터 이미지라는 두 가지 컴퓨터 이미지 분야에서 주도권을 쥐게 해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던 것이다.

 

놀 형제와 어도비는 2년 동안의 연구 개발을 진행해 이미지 편집계의 전설 포토샵을 완성하여, 드디어 1990년 시장에 선보이게 된다. 포토샵은 출시와 함께 래스터 이미지 편집 업계를 평정했다. 이후 현재까지 포토샵은 세계 제일의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이라는 입지를 다졌다. 일러스트레이터는 코렐 드로우 등 경쟁 프로그램이 시장에 존재하지만, 포토샵에겐 경쟁 프로그램 같은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를 예견한 존 워녹의 높은 안목이 이 같은 성과를 만들어냈다.

사실 존 워녹과 어도비가 1988년 처음 계약을 맺으며, 포토샵에 대한 모든 권리를 인수한 것은 아니다. 잡스에게 배운 대로 워녹은 처음에는 일부 권리를 사들인 후 개발 비용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론칭 후 확신이 든 시점이던 1995년 어도비가 포토샵에 대한 모든 권리를 취득하는 계약을 맺게 된다.

 

포토샵을 성공리에 시장에 선보인 존 워녹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다음 해 새로운 전자 문서 규격을 만들기 위해 ‘카멜롯 프로젝트(The Camelot Project)’라는 것을 시작했다. 카멜롯 프로젝트는 컴퓨터 시스템이나 프로그램이 다르면 보이는 결과물도 다른, 기존 전자 문서의 단점을 해결하기 위해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존 워녹은 기기, 소프트웨어에 관계없이 동일하게 보이는 문서를 만들어 문서 공유와 출력이 더욱 효율적으로 진행되길 원했다.

 

존 워녹과 어도비의 연구 끝에 1993년 ‘PDF(Portable Document Format)’라는 새로운 전자 문서 형식이 시장에 공개되었다. PDF는 DOC, HWP 같은 편집 위주의 전자 문서와 달리 열람, 출력, 보관에 최적화된 전자 문서였다. 어떤 기기와 프로그램에서 열람하든 동일한 결과물을 보여준다.

존 워녹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마케팅 기술을 과감하게 선행한다. 바로 문서의 모든 사양을 무료로 공개해, 문서 작성 프로그램 개발사가 별도의 라이선스 비용 없이 문서 작성 프로그램에 PDF 형식을 추가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지금은 당연해 보이지만 모든 문서 관련 프로그램들이 라이선스 비를 판매하고 있던 당시로서는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베팅은 주효했다. 이 파격의 마케팅은 결국, PDF가 당시 여러 가지 파일 형식이 난립하던 열람용 전자 문서 업계에서 경쟁자를 몰아내고 독점적 지위를 구축할 수 있게 만든다. 편집용 문서는 다양하게 DOC, XLS, PPT로 작성하지만 결국, 보관용 문서를 PDF로 작성하는 세상으로 업계의 판이 재편된 것이다.


어도비는 2008년 존 워녹의 뜻을 이어받아 PDF에 관한 대부분의 권리 포기하고 국제표준화기구(ISO)에 PDF 관리 권한을 넘겼다. PDF는 이제 더 이상 어도비만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이 된 것이다. 그가 이익을 창출하는 경영자 마인드보다는 컴퓨터 공학자로서의 마인드를 더 강하게 가지고 있다는 그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

그는 흔히 말하는 장사꾼 마인드가 아니라 개발자이자 공학자 마인드로 자신이 개발하던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창업에 나섰고, 이후 꾸준히 컴퓨터 그래픽 관련 신 기술을 발표하며 회사를 경영했다. 돈을 벌기 위해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연구하다 보니 그 독보적인 기술력 덕분에 알아서 돈이 들어온 케이스라 하겠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2001년 어도비의 최고경영자 자리를 후임에게 넘겨주고, 최고 기술 책임자를 거쳐 찰스 게스케와 함께 어도비의 공동 회장을 맡았다. 2017년 1월부터는 회장 자리도 자신의 후임인 샨타누 나라옌 어도비 최고경영자에게 물려주고 자신이 하고 싶은 분야에만 관심을 쏟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자아, 당신이 수포자였다면, 감히 수학을 공부해서 수학과로 진학하겠다고 할 수 있었겠는가? 수학을 포기해서 이과를 포기하고 문과로 전향했다는 수많은 수포자들의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수학을 낙제해서 더 열심히 해서 수학전공으로 수학계가 주목할만한 논문을 발표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봤을 것이다.


그만큼 수학은 첫 발이 중요한 과목이고 호오가 분명한 과목이라는 반증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낙제받았던 수학을 더 열심히 공부했고, 그것을 전공으로 택해서 그것을 기반으로 당시에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던 새로운 길이던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고, 오랜 시간 다져진 수학적 재능을 십 분 활용하여 그래픽 소프트웨어 시장의 절대강자로 우뚝 섰다.

 

어떤 회사들은 성공하기 위해 적절한 시기를 만나 첨단기술혁명의 물결을 타고 일어난다. 하지만 어도비 같은 회사는 바로 그 물결 자체가 되어 흐름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격이 다른 것이다. 그는 80년대 초반에 이미 ‘데스크톱 퍼블리싱’이라는 물결을 만들어냈다. 자세히 행간에 숨겨진 비밀을 읽었는지 모르겠으나, 그 바탕은 그의 수학적 능력에 기반한 것들이었다. 왜 그래픽 기술에 수학적 능력이 기반이 되는지 공학적 강의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는 것도 대단하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의 약점을 강화시켜 그것을 강점으로 만드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힘들고 아무도 그 선택을 하지 않고 피해 가기 때문에 대단하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당신에게도 어려서부터 지적받고 부족하다고 비판받고, 늘 스스로 생각하게 취약하다고 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너무 많아서 어느 하나 지적할 수 없을 정도일 수도 있겠다.

당신의 약점에, 당신의 단점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더 많은 노력을 쏟아부어 그 분야에서 어느 누구도 당신에게 감히 지적할 수 없을 정도의 성과를 낸다는 것.

상상만으로도 가슴 울렁거리는 일이지 않은가 말이다.


내가 원래 못하는 부분이니까, 나는 원래 그런 건 못하니까, 다른 잘하는 걸 노력하는 게 빠르니까 등등으로 당신은 조금 더 편하고, 조금 더 비굴하고, 조금 더 약삭빠른 길만을 선택하며 요리조리 살아왔다.


그래서 당신의 삶이 훨씬 더 위로 올라갔나? 더 대단해졌나? 당신이 조금 더 잘하는 걸 한다고 해서 그 분야에 정점을 찍었는가 말이다.


절실함은, 나 스스로에게 느꼈던 모멸감을 극복하겠다는 그 의지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하고 뜨겁고 오래간다.

당신에게 그러한 마음이 없다면, 그러한 의지가 없다면, 당신의 삶은 이미 죽어있는 것이다.


남의 삶을 보면서 '우와 대단하다, 근데 내가 그런 걸 어떻게 해?'라고 말하는 것이 당신의 인생이라면 당신은 평생 무대 위로 올라오지 못하는 것은 고사하고, 관람객석에조차 들어서지 못하고 멀리서 밖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자위할 수밖에 없다.


당신이 정말 고작 그것밖에 안 되는 사람은 아니지 않나?

당신이 지금이라고 주먹 꽉 쥐고 이를 악물고 새로 거듭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길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12살에 고아가 되고 18개월 동안 병마에 시달리고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