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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01. 2021

자동차 레이싱 말고는 아는 것도 없는 고집불통이었지만,

그 고집으로 명품 슈퍼카를 최초로 세상에 내놓다.

1898년 이탈리아 북부 모데나 3남중 막내로 태어났다. 10살 때인 1908년 볼로냐에서 자동차 레이싱 경주를 처음 본 것이 그의 인생의 모든 방향을 그쪽으로 맞춰버리고 말았다. 13세 때부터 운전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스포츠에 상당한 재능을 보여 15세 때 스포츠신문에 축구 기사를 기고하며 이탈리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1915년 자신이 글을 기고하던 신문의 기사에서 이탈리아인 디 파르마가 미국 최대 레이싱 대회인 인디아나 폴리스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을 보고 나서, 과거 자신의 꿈이었던 레이서가 되기로 결심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스무 살도 되기 전에 포병으로 입대하여 전쟁을 경험하게 된다. 1916년 아버지 알프레도 시니어와 형 알프레도 주니어가 독감에 걸려 사망하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소년가장으로 내몰린다. 돈도 벌어야 했지만 꿈을 접을 수 없었다. 그렇게 20세가 되던 해, 꿈을 이루기 위해 자동차 회사의 트럭 운전사로 취직한다.

 

그러던 중 하루가 멀다 하고 구경 다니던 경기장에서, 이탈리아 최고의 레이서 중 한 명으로 꼽히던 펠리체 나자로(Felice Nazzaro)를 만나게 되고, 그의 소개로 스포츠카 메이커인 밀라노의 CMN(Costruzioni Meccaniche Nazionali)사로 직장을 옮기는 행운을 잡게 된다. 행운이라 함은 트럭 운전을 하며 갈고닦은 실력으로 그곳에서 운전실력을 인정받아 레이싱에 데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첫 출전한 레이싱은 50km 산길 레이싱이었는데, 종합 11위를 기록한다.

1920년대 알파로메오의 레이서였으나, 1929년 마구간을 뜻하는 ‘스쿠데리아 페라리’라는 자신만의 레이싱팀을 창단하게 된다. 이것이 그 유명한 ‘페라리’라는 전설의 시작이라고 마니아들은 칭한다. ‘마구간’을 의미하는 단어의 뜻을 표시하기 위해 엠블럼에 말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다.

오늘날 페라리 엠블럼의 ‘SF’는 이 팀 이름의 약자를 그대로 쓴 것이다. 레이서팀을 만들고 나자마자 두각을 나타내다 마침내 이탈리아 명문인 피아트 팀까지 누르며 그렇게 꿈꾸던 일인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이 팀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레이싱 팀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레이서이자 기업인으로, 페라리의 창립자이자 F1 자동차 경주팀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창설자인, 우리에겐 엔초 페라리로 익숙한 풀네임, 엔초 안셀모 주세페 마리아 페라리(Enzo Anselmo Giuseppe Maria Ferrari)의 이야기이다.

 

1939년 알파로메오 측에서 자신의 레이싱팀 스쿠데리아를 흡수하고 자신을 내쫓으려는 의도를 알아챈 페라리는 알파와 결별하고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40년 4월의 밀레 밀리아 (Mille Miglia) 경주에 참가하기 위한 2대의 자동차를 4개월 만에 만들게 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규정된 양산 차량의 섀시를 베이스로 해야 하기에 피아트 508C Ballila를 기초로 했다.

4기통 1.1L 엔진의 Ballila 실린더 헤드를 토핑하여 출시된 첫 생산 차량인, Tipo 815였다.

815는 8기통 1.5리터의 용량을 의미한다.

복원된 최초의 페라리, Tipo 815

그러나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알파로메오와의 전속계약조건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딴 자동차를 생산할 수 없었다. 1947년에는 계약이 풀리자마자 드디어 페라리의 진가가 그랑프리와 르망 24시 레이스에서 본격적으로 발휘하기 시작했고, 이후 1988년까지 무려 5,000번의 우승 타이틀을 거머쥘 정도로 스쿠데리아 페라리를 막강한 팀으로 성장시켰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와 형의 이름을 따와서 지은 이름의 아들, 알프레도 페라리를 끔찍이 아껴 차량을 만드는데 수많은 의견교환을 나눴다. 하지만, 지병으로 알프레도마저 먼저 세상을 떠나자 그 이후 생산된 모든 페라리 V6 차량에 아들의 별명인 '디노'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만, 노는 엄밀히 따지면 페라리가 아니다. 이유는 페라리 엔진이 아닌 피아트사의 엔진을 탑재하고 출시되었기 때문에 페라리 이름으로 판매하지 않은 데 기인한다. 그런데 이것도 애매한 게 디노 308 모델의 경우 후기 모델부터는 페라리 마크를 붙여서 팔았다. 때문에 디노는 엄밀히는 페라리는 아니지만 사실상 페라리로 인정한다는 묘한 이론이 성립된다.

 

그렇게 그는 1988년, 90세를 일기로, 이탈리아 마라넬로에서 그가 그렇게 기대에 마지않던 회심의 마지막 역작, '페라리 F40'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결국 보지 못한 채 심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페라리 F40

멋지고 쿨하게 90살 한 평생을 잘 나가며 산 것 같은데 무슨 실패가 있었고, 무슨 좌절이 있었느냐고 묻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마음 알겠다.

아직 그의 실패 이야기는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다. 조금 더 참고 끝까지 들어봐라.

 

엔초 페라리는 열 살에 레이싱을 보고 사랑에 빠진 이후, 평생을 레이스에 바친 진정한 레이서였다. ‘아들이 태어나면 (위험하니) 레이스를 그만두겠다’고 아내에게 맹세해놓고 실제로 아들 알프레드(디노) 페라리가 태어난 뒤에 직접 차를 모는 일은 포기했지만, 그 소중한 아들이 레이스용 엔진을 설계하다 죽고, 아내가 이제 레이스는 지긋지긋하다고 절규해도 결코 레이스에서 멀어지거나 후회하는 일이 90 평생 없었다고 한다.

 

‘페라리’라는 자동차 기업을 만든 것도 엔초 페라리가 레이스에 참가하기 위해, 정확히는 레이스에 참가하는 데 필요한 바디를 만들어 경비를 줄이기 위함이었고, 동시에 레이스에 참가할 경비를 벌어들이기 위해 만든 업체였다. 당연히 엔초 페라리는 레이스 외의 모든 요소들을 불순물로 취급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 불순물에는 페라리의 공장 직원들에게 지불해야 할 임금도, 엔초의 독재적인 가족경영에 반발하는 창업 공신들도, F1에 출전해 목숨 걸고 차를 모는 드라이버들의 항의까지도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1950년대의 페라리는 F1부터 르망, 밀레 밀리아까지, 당대의 유명한 레이스들에 전부 출전한 명실공히 레이싱카 제작의 명가였다. 하지만 모데나의 본사는 이미 그때 휘청거리고 있었다. 1959년에 등장한 페라리 256F1은 당대 최고의 머신이었지만 정작 직원들이 파업하는 바람에 차량이 정비되지 않아 영국 그랑프리에는 출전조차 하지 못했고, 페라리는 메뉴팩쳐러 타이틀을 영국의 쿠퍼-클라이막스에게, 드라이버 타이틀은 잭 브라밤에게 내줘야만 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 사태로 1959 월드 챔피언 자리를 놓친 페라리의 에이스 드라이버 토니 브룩스는 도저히 그 상황을 참지 못하고 반월로 팀을 이적해버리는 일까지 생겼다.

 

1961년에는 창업공신급 부서장과 임원 8명이, ‘제발 업체를 글로벌한 회사처럼 경영하라’고 연명 상소 의견을 올렸지만, 페라리는 항의자 전원을 해고하는 것으로 응수했고, 이에 모두가 도저히 그와 함께 갈 수 없다며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나버렸다.


계속해서 오직 레이싱만 생각하는 그의 옹고집 때문에 갖가지 문제가 속출하는데도 엔초 페라리라는 사람은 조금도 변할 생각을 하지도, 후회하지도 않았다.

 

“더 빠른 차를 만들어서 우승해야 하는데 왜 밤샘 작업을 하지 않고 급료가 밀리는 것 따위를 신경 쓰지? 그런 놈들은 페라리에서 나가라, 너희 아니라도 페라리에서 일하고 페라리 머신을 타려는 사람은 많다!”

 

페라리가 아무리 레이스에서 연전연승한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 회사가 제대로 굴러갈 리 없었다. 페라리가 내분으로 흔들리는 동안 라이벌 회사들은 치고 올라왔고, 페라리의 차량 판매고도 곤두박질치기 시작한 것이다.

1967년 레이싱 경기장을 찾은 엔초 페라리

‘레이스 성적이 곧 광고다’라며 홍보조차 거부하던 엔초 페라리도 레이스를 할 돈이 말라 가는 상황 앞에서는 고집을 부릴 수 없는 지경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고집을 꺾었느냐구? 설마. 사람은 안 변한다. 그의 결정은 과거 같으면 생각도 하지 않았을 ‘저렴한 차를 만들어보자’는 정도로 현실적 타협안을 내놓는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은 하나같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 전형적인 예가 ASA 1000GT였다. ‘페라리의 기술이 들어간 소형 스포츠카라면 페라리를 동경하지만 구입하지는 못했던 사람들이 줄을 설 것이다.’라는 택도 없는 자신감으로 기획된 차였지만, 그의 알량한 자존심에 얼마나 만들기 싫었는지 페라리라는 브랜드 엠블럼조차 붙이지 않고, 품질은 엉망에 가격도 동급 스포츠카들에 비해 월등히 비쌌다. 당연히 이 차는 폭망했다.

 

여전히 레이싱 대회에서 페라리 머신들은 여전히 선두권을 달렸지만, 레이스를 위해 차를 개발하고 돈을 벌어야 할 회사의 경영상태는 파산 직전까지 몰리게 된다. 수익은 줄어가고, 경영은 악화일로로 치달아, 유능한 인재들은 하나둘 회사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더는 견디지 못한 엔초 페라리는 결국 자신의 경영권을 보장해달라는 조건과 페라리의 레이스 활동을 보장한다는 조건만을 내걸고, 페라리를 매각하기로 결심한다.

포드 2세

이때, ‘필요하면 사람을 사다 쓰고, 업체를 사다 쓰는 게 낫다’는 사고방식으로 무장한 포드 2세가 1960년에 포드 회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자신이 원하던 고성능차 브랜드를 손에 넣기 위해 페라리를 사러 달려온다.

 

두 사람 모두 레이스광이다 보니 기본적인 이해는 일치했고, 무엇보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제공해 줄 수 있었다. 포드는 돈은 넘쳤지만 브랜드 밸류를 올리기 위해 레이스에 참여하고 싶어 했고, 페라리는 레이스에는 정말 최고였지만, 정작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초기의 협상은 그렇게 급물살을 타며 진행되었다. 포드는 페라리가 원하는 것 이상의 돈을 줄 의향이 있었고, 페라리의 경영권에 간섭할 의향도 없었다. 모터스포츠 부분의 모든 결정을 엔초 페라리가 내린다는 페라리 측의 무리한 요구까지도 거의 받아들이면서 싸인 직전까지 가는 듯했다.


그러나, 싸인만 하면 되는 그 순간, 엔초 페라리가 갑자기 식사나 해야겠다며 협상 테이블에서 일어섰고, 그렇게 그 전설적인 계약은 깨지고 만다.

미국 레이스(특히, 데이토나 2000 등)에서 포드가 여전히 페라리와 경쟁해야 한다는 포드 측의 주장에 엔초 페라리가 격분한 것이었다. 포드가 페라리에 홍보용 스폰서 마킹을 달고 레이싱에 임해야 한다는 조건에서 물러서지 않은 것이다.

 

그 말에 격분한 엔초 페라리가, 감히 미국인 주제에 무슨 슈퍼카를 만들겠다고 거들먹거리냐며 특유의 독설로 대놓고 디스 하는 바람에, 포드는 열이 받을 대로 받아 결국 걸작 스포츠카를 만들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그렇게 포드는 그 유명한 미국의 스포츠카 ‘포드 GT’를 직접 만들게 된다. 이 유명한 영화 같은 일화를 정말로 영화로 만든 것이, 2019년 개봉했던 영화 <포드 V 페라리>이다.

영화 <포드 V 페라리>

그때 싸인이 이루어졌다면, 지금의 전설 페라리는 사라지고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일설에 의하면 결정적인 순간, 미국에 이탈리아의 자존심을 팔 수 없다며 마피아의 검은 돈이 투자되면서 회사가 기사회생했다는 설도 있긴 다.


이런 일화가 보여주는 특성들 때문에, 엔초 페라리는 다른 의미로서의 '슈퍼카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그가 최초의 슈퍼카를 만들어낸 레이서 출신의 슈퍼카 사장이라서도 그렇지만, 그의 성격이 아주 불같고 특유의 자존심에서 나오는 독설이 지독하기로 유명해서, 안티를 양산하여 그를 누르고 싶은 이들이 이후 슈퍼카 시장에 뛰어들게 촉매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트랙터와 슈퍼카 사이의 페루치오 람보르기니

지금의 슈퍼카 ‘람보르기니’를 출시하게 만든 것도 그의 독설이 시작이었다. 당시 트랙터 등 농기계업체였던 람보르기니의 대표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타고 다니던 차 중에는 페라리의 250GT가 있었다. 그러나 250GT는 너무 시끄럽고, 드라이빙이 굉장히 민감해서 일반도로나 비포장도로에서는 운행이 어려운 모델이었다. 특히 250GT의 클러치가 계속 오작동하는 정비상의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페루치오는 원인을 알아보고자 차를 직접 분해했고, 람보르기니에서 생산하던 트랙터의 클러치와 페라리가 사용하던 클러치가 같은 제품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페루치오는 엔초를 만나 직접 회사 대표이자 자동차 마니아의 동질감을 가지고 해당 클러치의 문제점을 알려주기 위해, 엔초를 만나겠다고 페라리 본사까지 간다.


그런데 당시 엔초 페라리는 나름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느낌을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 신비감과 위압감을 조성하기 위한 의도로, 본사에 그를 만나러 온 사람들을 무조건 몇 시간씩 기다리게 하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몇 시간을 그저 멍하니 기다리게 하자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몇 시간이나 기다린 끝에 만난 엔초 페라리는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고 친구가 되겠다고 찾아온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트랙터는 잘 모는 모양인데, 진짜 페라리는 평생이 걸려도 제대로 몰지 못할 거다”

 

이에 열받을대로 받은 상태에서 격분한 페루치오는 회의실을 박차고 나오며, 엔초 페라리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스포츠카 사업에 뛰어들게 되고, 슈퍼카를 대표하는 ‘람보르기니’를 창업하게 된다. 심지어 대놓고 건 람보르기니사의 철칙이 ‘페라리보다 빠른 차를 만들라.’였다.

 

그렇게 슈퍼카 시장이라는 것이 형성되고 그들은 경쟁하면서 더 위로 올라가게 된다.

당신이라면, 어느 하나에 미쳐, 자신이 위험한 것은 생각도 안 하고 그저 그것만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자식이 죽었는데, 그 자식을 잃은 슬픔에 아무것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차에 대해 함께 의논하던 아들을 기념하기 위해 엔진을 개발하고 차를 만들어 아들의 영전에 바치는 짓을 할 수 있었겠는가?


많이 배운 것도 아니고 공학자 출신도 아니었으며 엔지니어 출신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좋아서 빠졌던 차에 대해 부딪혀가며 공부했고 경영이라고는 공부는 고사하고 제대로 운영할 줄도 몰랐다. 그래서였을까? 후계자 역시 이탈리아 명가들이 가족에게 넘기는 것과 다르게 그를 보좌하던 아들 같던 몬테제몰로에게 물려줬고, 몬테제몰로는 누구보다 엔초 페라리의 이념을 제대로 계승하여 지금의 왕좌자리를 지키는데 자신의 평생을 바쳤다.

2014년까지 페라리를 이끈 몬테제몰로(오른쪽)의 젊은 시절

당신이 무엇 때문에 할 수 없다고 구시렁거리며 그저 주저앉아있을 동안 저 바다 건너 이탈리아의 옹고집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위해 자신이 모르는 것을 배웠고, 안되면 될 때까지 몸으로 부딪혀갔고, 정 자신이 할 수 없으면 빚을 내서라도 전문가를 모셔왔다.


그의 독설이 단순히 뭣 같은 성질의 이탈리아 꼰대의 것이라고 치부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실제로 그의 삶 전체로 증명했던 실적과 성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엄청난 부잣집의 도련님이라 사업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 인연이 있어 그를 뒤에서 엄청나게 후원해준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일 하나를 하기 위해 다른 것들을 전혀 살피지 않았고, 그것이 대강대강이 아닌 정말 모든 것을 바친 삶이었기에 지금의 명품, 명가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가 자동차를 만들어 수익을 내고, 부자가 되고 싶었다는 마음을 가지고 슈퍼카 업계에 뛰어들었다면 결코 얻기 어려웠을 일이란 말이다.


그에게 명품이라는 칭호와 부와 기타 것들은 말 그대로 부수적인 것으로 따라온 것일 뿐, 그는 그저 레이싱에서 가장 빠른 차를 직접 만들려는 그것 하나만으로 90 평생을 살아왔고, 그랬기에 전설을 쓸 수 있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 정말로 원하는 일이 있는가?

당신이 무엇을 원했었는지조차 잊고 그저 하루하루 연명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이 그렇게 원하던 삶이 있었다면, 모든 것을 쏟아붓고 뼈를 깎는 노력을 보여봐라. 그러면 당신이 그렇게 원하던 돈, 명예 그 따위 것들은 부수적으로 따라오게 될 것이다.

 

정작 미디어 앞에서는 과묵하기 그지없던 엔초 페라리에게 쭈욱 늘어선 이제까지의 제품 라인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페라리가 뭐냐고 기자가 물었다. 그가 뭐라고 답했을 것 같은가?

다음에 나올 차

 

그의 시선은 이미 저 앞에 계속 달려가고 있었다.

당신도 마땅히 그런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아직도 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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