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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02. 2021

촌놈이라 명문대 입학도 거절당하고 삼류대에 갔어도

‘화학’이라는 학문의 토대를 마련한 화학의 아버지로 거듭나다.

1834년 2월 8일 러시아 동시베리아의 ‘토볼스크(Тоболск)’라는 깡촌에서 무려 1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학교 교장이었고, 어머니는 유리공장 집 딸이었는데, 특히 어머니는 당시 여성들에겐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전근대적인 사회상에 저항해 오빠들의 공부를 훔쳐보는 것으로 배웠을 정도로 학식은 물론 사상적으로 깨어있는 인물이었다. 막내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부친이 두 눈을 실명하여, 그 시점에 어머니가 친정의 유리공장을 물려받아 육아는 물론 경영까지 떠맡았음에도 자식들의 뒷바라지에 전혀 소홀함이 없이 어머니로서 가장 역할까지 충실히 해냈다. 특히,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덕분에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서도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막내아들은 공부는 그럭저럭 열심히 했으나 고교 시절까지도 공부에 재능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못했다. 15살이 되었을 때, 앞이 보이지 않았던 아버지가 끝내 투병 끝에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운영하던 유리공장마저 화재로 전소되는 바람에 살림이 어려워지게 되자, 어머니는 이 모든 상황들을 타개하기 위해 막내와 드미트리와 그 손위의 누나만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상경했다.

어머니 마리아의 초상화

고등 교육기관인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 자녀들을 입학시키고자 했으나, 당시는 타 지역 출신에 대한 입학 제한 규정 등이 존재했던 시대였던 터라 시베리아 깡촌 출신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학과 의학 학교에도 신청하였으나 역시 시베리아 깡촌 출신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결국, 명문대 문턱에도 넣을 수가 없어 마지못해 막내아들은 교원 양성소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교원 양성소에 들어간 지 10주 만에, 막내아들을 훌륭한 대학에 넣어주려고 그렇게 노력했던 어머니가 심장병으로 세상을 뜨고 만다.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으나, 사랑하는 아들의 성공은 고사하고 대학을 졸업하는 모습조차 보지 못한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슬픔을 겪으면서 막내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어머니가 원하던 훌륭한 학자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다.


후 그는 오로지 학문에만 매진하여, 우수학생에게 수여되는 금메달을 받고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이때 본격적으로 ‘화학’이라는 학문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원소들이 가진 규칙성에 따라 원소들을 나열한 표인, 주기율표를 최초로 고안한 러시아의 화학자이자, 현대 화학의 기초를 갖춘 인물로, 물리학에 아이작 뉴턴이 있다면 화학에는 멘델레예프가 있다는 농담 아닌 농담의 주인공,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멘델레예프(Дмитрий Иванович Менделеев)의 이야기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가 최초로 원소를 질량 순으로 나열하는 시도를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부 조잡한 수준이었고, 제대로 사용할 만한 연구라고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원소들에 모종의 규칙성이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추측하던 것이지만, 이걸 제대로 파악하여 제대로 된 표로 정리한 것은 멘델레예프가 최초였다.


게다가 그가 이 화학계의 혁명을 일으킨 원소 주기율표를 발표했을 때가 고작 35세에 불과했다.

멘델레예프는 원소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나열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발견되지 않은 원소의 성질까지도 예측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현대 화학의 기초를 모두 다진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기율표가 정립되기 전의 화학은 연금술의 연장이었을 뿐, 제대로 된 과학 취급조차 못 받았다.

1855년, 건강이 안 좋아 러시아 남부의 오데사로 자청해 발령을 받고 교원 생활을 시작하며 동시에 본격적인 화학 공부를 하기 위해 준비하여 이듬해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왔고 다시 1년 후인 1857년에 드디어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에 입학했다.


2년 후인 1859년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 국비 유학하여, 카를스루에 학회(1860년 9월)에서 이탈리아의 화학자 스테니슬라오 칸니차로를 비롯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화학자들과 교류하면서 분자량과 원자량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그들의 주장을 다양하게 공부하게 되면서 자신의 학문을 정립하는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61년에 귀국했으나 마땅한 일거리가 없어 과학 교재 관련 저술 및 편집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1864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공업연구소 화학 교수로 처음 발령, 3년 뒤엔 일반화학 교수가 되었다.


당시, 맘에 드는 쓸만한 교재가 없어서 자기 손으로 500쪽짜리 <화학 원론>이란 교재를 집필했는데, 이게 세계적으로 히트하면서 갑작스럽게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졌고, 그 책을 저술하면서 당대 화학자들의 화두였던 원소들의 분류체계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64년에는 영국의 화학자 존 뉴랜즈가 음표를 써서 원소를 배열하면 8개를 주기로 비슷한 원소들이 나타난다는 ‘옥타브의 법칙’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불완전한 연구들을 접하면서도 드미트리뉴랜즈와 직접 교류하며 원소의 규칙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 자신의 이론을 정립할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최초 발표된 주기율표

1869년 3월 6일, 그는 자신이 그간 준비했던 내용들을 《원소의 구성 체계에 대한 제안》이란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 논문에는 수직으로는 원자량이 증가하는 순서로, 그리고 수평으로는 유사한 성질을 가진 원소들이 배열되어 있었다. 이때 멘델레예프의 나이, 불과 35세였다.

 

하지만, 당대 과학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몇몇 원소들의 배열이 당시까지 널리 활용되고 있던 내용들과 달랐던 것이다. 게다가 아무런 원소도 적혀 있지 않은 빈칸까지 있어 마치 미완의 실패한 연구를 인정하는, 명백한 오류처럼 보였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기존 연구들이 원자량 측정을 잘못한 것이며, 일부러 비워둔 칸의 원소들도 곧 나타나게 될 것이라면서 자신감을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과학자들이 비웃고 허무맹랑한 소리였다는 비아냥을 그는 그대로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한다.

 

1875년 프랑스의 화학자 부아보드랑이 갈륨을 발견한다. 드미트리는 갈륨의 발견은 자신이 ‘에카 알루미늄’이 존재할 것이라고 예측한 내용대로라고 주장했고, 부아보드랑은 갈륨을 발견한 실제 연구는 자신이 한 것인데 드미트리가 헛소리를 한다며 첨예하게 대립했다.


드미트리는 부아보드랑이 발표한 갈륨의 데이터를 훑어보고는 바로 일부 측정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갈륨의 밀도와 질량이 드미트리가 이전에 예측한 값과 미묘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재실험 결과 그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자 부아보드랑은 자신이 발표한 데이터를 철회하고, 드미트리의 예측을 뒷받침해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그리고 5년 후 1882년 독일의 화학자 클라멘스 빙클러가 저마늄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드미트리가 예측했던 것과 수치상에서도 오차가 거의 없는 성질과 원자량을 갖고 있었다. 이처럼 그의 이론이 점차 모두 사실로 확인되고 그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화학분야도 함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고, “멘델레예프 덕분에 화학이 정말로 과학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라는 말이 학계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초기 발표에서 비어있던 칸의 주기율표도 시간이 지나면서 빠진 부분이 채워지고 그의 이론은 개선되었다.

 

그러나 시베리아 촌놈이라고 모스크바 국립대에 입학을 거부당한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러시아에서 그가 받은 대우는 비참했다. 1880년 제국 과학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될 수 있었지만 임명되지 못했고, 10년 뒤인 1890년에는 부조리 척결을 주장하는 학생들의 요청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물러나 더 이상 강의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드미트리가 관여하게 되면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이 우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1891년 중화학제품에 대한 새로운 수입관세 체계를 만드는 일을 맡았고, 1893년에는 도량형국 국장이 되었다. 이때 멘델레예프는 보드카의 표준 도수를 40도로 정했다. 그렇게 그는 말년까지 조국의 냉대를 받다가 폐렴으로 1907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에서는 수많은 학생들이 그의 원소 주기율표를 들고 따랐다.

위의 이유로 보드카 광고에 그가 등장한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실명하고, 자신을 그렇게 사랑해주시던 어머니가 자신을 명문대에 넣으려고 고생하다가 자신이 결국 변변찮은 교원양성소에 들어간 지 석 달도 되기 전에 돌아가시는 것을 보며, 그는 그제서야 눈을 뜨게 된다.


단지 시베리아 출신 촌놈이라는 출신 때문에 명문대학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는 변변찮은 교원양성소를 들어가서야 각성했고 학문에 뜻을 두었다. 더 이상 그가 있는 대학의 레벨은 그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그는 지금의 화학이 있게 한 주기율표를 3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완벽하게 완성시켜 세상에 내놓는 대학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실패와 좌절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주기율표가 과학계의 혁명적인 연구임에도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이다. 1906년 노벨 화학상 후보에 올랐으나, 플루오린의 분리에 성공한 무아상에게 ‘단 1표 차’로 밀려나 수상에 실패한 것이다. 당시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원소의 주기성을 파악해 정교하게 원소를 나열한 것이었을 뿐, 원소가 왜 주기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제대로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탓에, 획기적인 발견이었음에도 그 가치가 널리 인정받기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일설에는 그가 유럽 출신이 아닌, 러시아인이었기에 차별을 받았다는 말도 있다. 게다가 1907년에는 사망한 이후라 더 이상 상을 수상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주기율표를 발표한 지 30년이나 지나 후보에 올랐을 정도로 그 30년 동안 다양한 화학자들이 그의 주기율표가 얼마나 획기적인 연구였고 선구적인 연구였는지를 증명해서 그나마 후보에 오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찌 보면 그의 연구는 이미 너무 앞서 있었다는 반증에 다름 아닌 역설적인 현실인 셈이다.

원자기호 101번은 그의 이름을 딴 멘델레븀

항공학에도 관심을 기울여 과학관측용 풍선기구를 만들기도 했으며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의 비행 가능성을 주장했다. 화학자답게 석유화학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유조선과 송유관을 설계하고 저장 탱크도 만들었다.


심지어 그는 ‘석유는 태워버리기엔 너무 귀한 물건이다.’라는 발언도 하였다. 당시만 해도 석유화학은 막 발전하기 시작한 단계여서 석유 가공품도 대부분 경유나 등유 등의 연료 제품이었는데, 이미 그는 석유를 이용한 각종 화학 합성수지의 가능성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어려서부터, 얼마나 많은 차별과 실패와 좌절을 겪었는지를 당신에게 이야기해주면서 꼭 강조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그가 주기율표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고 유럽의 모든 화학자들이 그의 업적에 대해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 지위에 올라서도 그는 결코 교만하지 않았고, 조국의 비뚤어진 모습에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충분히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평생 약한 자의 편에 서서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거칠고 볼품없는 옷을 입고, 여행을 할 때도 늘 기차에서 3등 칸을 탔다. 때문에 그런 그에게 보고 배운 학생들은 따를 수밖에 없는 스승이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관행이나 부조리에 저항했던 어머니의 영향이라고 그는 기억했다. 그래서였는지 진보적이고 사회 개혁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냐고 묻고 싶은가? 그는 자신의 삶에 전환점을 맞았던 그 시기 어머니가 남기신 유언을 머리와 가슴에 새기며 살아갔다.

 

“미망에 빠지지 말아라, 말이 아니라 행동을 앞세워라. 신성한 진리와 과학 탐구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라.”

 

어머니가 남긴 이 유언은 그의 삶을 바꿔놓았고, 그 증거로 그는 훗날 자신의 논문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는 어머니의 유언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는 구절을 직접 적어 넣기까지 했다.

 

당신은, 당신의 어머니에게 부끄럽지 않게 어머니의 소망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당신이 잘 되는 것만을 바라고 소망하고 걱정하시는 그분의 소망대로 당신은 그분의 바람대로 훌륭한 인물로 살고 있는가 말이다.


아들을 명문대에 입학시키는 대신 아들의 가슴이 큰 꿈을 던져주고 한 학문의 도대를 닦는 세계적인 학자로 만든 러시아의 어머니만큼이나 당신의 어머니도 충분히 훌륭하시고, 충분히 당신에게 모든 것을 다 내주신 분이란 말이다.


어느 누구의 어머니라도 다를 것인가?

드미트리를 대학자로 만들고, 그 모든 실패와 어려움에서 일어설 수 있게 만드는 어머니가 당신에게도 계시지 않은가?


그분에게 당신이 보이고 싶은 모습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더 후회하기 전에 반드시 그 모습으로 당신도 거듭나라.


당신이, 세상에 내어주신 분이 당신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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