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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03. 2021

혁명에 실패하고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쳤지만...

실패 속에서 자신을 가다듬어 대륙의 국부로 거듭나다.

1866년 광둥 성에 있는 췌이헝이라는 마을에서 빈곤한 농가에서 5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곳은 포르투갈령이었던 마카오로부터 불과 3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동양과 서양의 두 문명이 접하는 지역이었다. 아버지가 54세에 낳은 늦둥이여서 6세 때부터 소작농이던 부친을 돕던 빈곤한 삶을 살았다.

그의 아버지 초상화

그러다가 9세가 되던 해 동네 서당에 들어가 전통적인 교육을 받던 도중 1879년 장남 쑨메이(孫眉)가 거주하던 하와이로 건너간다. 하와이에서 영국 성공회 미션스쿨인 이올라니 학교(‘Iolani School)에서 기독교 교리와 서구식 교육을 받게 되지만 하와이 원주민 출신 아이들과 싸우고 중국 전통 문장을 낭독하는 등의 생활로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그는 서구 문물에 대한 익숙함과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동시에 가지게 된 듯하다. 이후 1882년 이올라니 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해 하와이 왕국의 칼리카우아 왕으로부터 기념품을 받는 등 뛰어난 성적을 보였고 이때 처음으로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에 입문하고 싶다는 아들을 아버지가 반대하며 다음 해 아들은 억지로 고향으로 소환된다. 서양식 생활에 익숙해진 아들은 결국 기독교적 사고를 가지고 우상 숭배를 타파한다고 마을의 수호신인 목상(木像)을 절단하는 사건을 일으켜, 마을에서 쫓겨나 고향에 돌아온 지 반년도 지나지 않아 홍콩으로 도피하고 만다.

 

17살, 33살때와 1915년 결혼사진

홍콩에서 역시 영국 성공회 계열의 발췌서원(拔萃書院)에서 의술을 공부하게 되면서, 선교사 찰스 헤이거(C. R. Hager)에게서 세례를 받고 큰형의 소개로 만난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 한편으로 큰형은 동생에게 자신의 사업을 잇게 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그 제안을 거부하고 홍콩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1880년 광저우에서 공부하던 당시

이후 1884년 청불 전쟁이 발발하고 여기서 청나라가 전투에서 이기고도 협상에서 손해를 본 패배에 가까운 졸전을 벌이는 상황을 보며, 전통 체제에 불만을 품게 된다. 이후 1886년 광저우에서 박제의원(博濟醫院)에서 동서양 의술을 공부하는 동안 청나라 체제에 불만을 품는 정스량(鄭士良) 등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본격적으로 민족주의적 혁명의 발상을 구축하게 된다.

청나라의 정치사상가 겸 의사이자 중화민국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중화민국의 초대 임시 대총통을 지낸 쑨원(孫文)의 이야기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진시황 이래 2천년간 이어져 온 천자 제도를 최초로 전복시킨 혁명의 선행자(先行者)로서 존경받고 있다. 소위 삼민주의로 통칭되는 현대 중국의 이념적 뼈대를 세운 사람으로, 중화권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꼽히는 유일한 인물이다. 호(號)는 ‘중산(中山)’으로 일본에 있을 때 사용한 가명인 나카야마(中山)에서 유래하였는데, 자신의 고향인 중산시(中山市)에서 가져온 것이다.

 

현대 중국인들에게는 쑨중산(孫中山, Sūn Zhōngshān)이라는 경칭으로 불리고 있다. 영미권에선 쑨원의 호 ‘이셴(逸仙)’의 광둥어식 발음 ‘얏센(Yat-sen)’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쑨얏센(Sun Yat-sen)은 중국 광저우 중산대학의 영어 명칭 ‘Sun Yat-sen University’로도 쓰인다.

 


 

의술을 몇 년 동안 공부한 쑨원은 1892년 서의서원(西醫書院) 1기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며 의사 면허를 취득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1893년 마카오에서 중서약국을 열지만, 마카오 면허가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광저우에서 약국을 열며 청나라(만주족) 타도를 결의하는 모임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그의 혁명사상은 구체적인 사상적 바탕을 가지고 있었다기보다 그저 젊은 혈기의 기존 체제의 변혁을 꿈꾸는 것이었고, 그것을 성공시킬 수만 있다면 방법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등 다소 엉성하고 위험한 수준에 그쳤었다.

리홍장

1893년, 청 황실의 무능과 부패에 더해 외국의 침략에 느낀 자신의 분노를 정리하여, 당시 개혁의 상징적 인물로 꼽히던 리홍장에게 중국의 개혁에 관한 자신의 생각과 함께 상소문으로 올린다. 그러나 리홍장으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결국 이 상소문은 상하이의 영자신문에 실리는 것으로 초라하게 실패를 맞는다. 


현실의 벽에 막힌, 스물여덟의 쑨원은 바로 하와이로 갔고 거기서 흥중회라는 조직을 만들게 된다.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청 황실을 무너뜨릴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고 홍콩으로 돌아와 흥중회를 비밀 결사조직으로 다시 결성했다. 그러나 광둥에서의 봉기 계획은 발각되었고 함께 했던 동지들은 모두 잡혀 처형당하게 된다. 그렇게 그는 목숨만 건져 일본으로 도망친다.

광저우에서 비밀결사 조직하던 당시

일본에 숨어든 그는 혁명을 위한 재정을 마련하겠다며 서구를 돌기 시작한다. 그는 코밑수염을 기르고 서양식 옷을 입고 일본인 행세를 하며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런던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청의 첩자에게 잡혀 중국으로 이송될 뻔하기도 했으나 옛 스승 제임스 캔틀의 도움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이 사건의 전말을 기술한 <런던 조난기>를 쓴 것을 계기로, 서양에서도 명성을 얻게 된다. 당시 그는 런던에서 대영 박물관의 도서관을 드나들며 마르크스와 헨리 조지 등의 저술을 탐독하며 정치적 지식을 성장시켜 나간다.

 

이후 량치차오와 교류하며 그와 합작할 계획을 꾸미기도 했지만 그의 스승인 캉유웨이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1900년에는 후이저우에서 봉기를 일으켜 2만 명의 세력을 확보했지만 일본의 타이완 총독부가 당초의 지원계획을 통수 철회하면서 보급 부족으로 11일 만에 어이없이 자진 해산하고 말았다.

 

1901년경부터 쑨원은 후일 국민당의 혁명론인 삼서론을 최초로 구상시키는 등 자신의 사상을 점차 체계화시켰다. 이후 도쿄와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다시 세력을 규합한 쑨원은 1905년 7월 도쿄에서 흥중회와 다른 세력들을 규합시켜 중국 동맹회를 창설시킨다.

 

이 무렵 쑨원의 사상은 민족, 민주, 민생주의라는 삼민주의로 구체화되었고, 후에 그것은 동맹회의 사상적 바탕이 됐다. 그러나 도쿄의 쑨원 추종 세력이 크게 불어나자 청은 일본 당국에 압력을 가해 쑨원을 추방하게 했다. 한편 중국으로 돌아간 유학생들은 청에 저항하기 위한 단체들을 조직했고, 1907년에서 1911년 사이에 이들 쑨원 지지자들은 중국 남부에서 번번이 봉기를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혁명이 일어났을 때, 정작 쑨원은 외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 중국이 아닌 미국에 있었다. 게다가 막상 봉기가 일어나던 타이밍에는 너무 피곤해 그다음 날이 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혁명에 대한 대응에 나섰다.


1911년 10월 우한에서 시작된 혁명파들의 봉기는 양쯔강 유역 전체로 번져갔다. 그리고 단 한 달만에 거의 모든 성이 호응을 해 독립을 선언했다. 이러한 성과는 혁명운동의 지도자들도 예상 못한 일이었다. 그들은 당시 중국을 중흥할 현실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있지 못했고, 강력한 영도자도 없었다.

 

그는 이후 미국과 유럽을 순방하면서 혁명군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고 본격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청조에 대한 차관 지원을 중단시키는 데는 성공하였다.


1911년 12월 25일, 쑨원이 상하이로 돌아왔을 때, 중국인들은 그를 떠들썩하게 환영했다. 12월 29일, 14개 성에서 온 대의원들이 난징에서 그를 임시 정부의 대총통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다음 해 1월 1일 쑨원은 임시 대총통에 취임했고, 중화민국의 성립을 공포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쑨원은 위안스카이(원세개)가 청의 황제를 퇴위시키고 공화국 정부 형태를 받아들인 후, 수도를 난징으로 옮긴다면 자신의 대총통 자리를 이양해 줄 수 있다고 선언했다. 쑨원의 혁명군은 위안스카이를 대적하기에는 너무도 힘이 부족했다. 더군다나 전쟁이나 내란은 외국 열강의 개입을 불러일으킬 것이 자명했다.

위안스카이와 마지막 황제 푸이

쑨원의 제안이 있은 뒤 위안스카이는 황실에 압력을 가했고, 2월 12일 황제 푸위가 퇴위했다. 여섯 살 난 푸이에게는 황제 칭호의 유지와 엄청난 양의 연금이 약속되었다. 황제의 직계 가족들도 특별한 대우를 약속받았다. 중국 최후의 왕조 청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2월 13일, 쑨원은 약속대로 대총통 자리에서 물러났고, 3월 10일, 위안스카이가 새로운 대총통으로 취임했다. 몇 달 뒤, 쑨원은 전국철로전권이라는 직위를 맡았다. 그는 철도 운송이 중국의 발전에 매우 중요하다고 확신했고 전국을 돌며 일했다.

 

위안스카이는 처음에는 약속을 지키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공화제를 근간으로 하는 헌법을 채택하는데 동의했고, 1912년 중에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키로 했다. 그 해 여름 옛 동맹회의 일원이었던 쑹자오런이 국민당을 조직했고, 1913년 2월 선거에서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공화당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원내 다수당이 되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와 국민당의 싸움은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끝이 났다. 3월 상하이의 기차역에서 쑹자오런이 암살당한 것이다.

두 번째 부인 송미령과 함께

1911년 신해혁명은 그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쑨원은 다시 정치로 돌아와 위안스카이에게 대항할 세력을 모았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예정된 수순을 밟아 나갔다. 1913년 11월, 위안스카이는 국민당을 불법화하고 의회를 해산했다. 쑨원에게는 이러한 불법적 조치에 대항할 현실적 수단이 없었다. 그 해 9월, 쑨원에게 체포 명령이 떨어졌다. 쑨원은 다시 일본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쑨원은 다시 위안스카이를 무너뜨리기 위한 일을 준비했다. 1914년 7월, 쑨원은 살아남은 동지들을 모아 중화 혁명당을 조직했다. 하지만 정작 위안스카이는 쑨원에게서가 아닌 자신의 욕심으로 무너져버렸다. 점차 독재 권력을 굳혀간 위안스카이는 이제 새로운 황제를 꿈꾸기 시작했다. 1914년, 그는 새로운 왕조를 선포하고 그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의 계산은 오산이었고, 그를 따르던 장군들조차 그에게 등을 돌렸다. 1916년 3월에 그가 황제가 될 계획이 없다고 재차 발표했음에도 힘을 얻지 못한 그는 좌절감을 견디지 못한 채 몇 달 뒤 병사했다.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후, 10년간 중국은 무정부 상태의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모든 것이 힘으로 해결되는 시기가 왔다. 10여 개의 군벌이 서로 물고 물리는 세력 다툼을 하는 군벌의 시대가 전개된 것이다.

 

두 번이나 군벌들에게 쫓겨나 도피생활을 하면서 쑨원은 군사력이 없는 자신들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다시 기회가 온다. 러시아 혁명의 발발과 연이은 소련의 해외 기득권 포기 및 약소민족 지원 선언이었다. 


물론 그것은 당시 공산주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한 소련의 노림수가 있었다. 소련의 특사 마링(Maring)은 중국 안에 공산당 세력을 키우기 위한 파트너를 찾고 있었는데, 그 대상으로 국민당과 쑨원을 선택한 것이다.

이후 1923년 북벌군을 재조직해 광저우를 회복한 이후 쑨원은 육해군 대원수로 취임해 임시적인 정부로 삼았다. 이후 소련과의 논의 끝에 제1차 국공합작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공산당원들의 국민당 입당이 허가되었고, 쑨원은 국민당의 자체적인 군사력 강화에도 착수했다. 하지만 여전히 광둥성에 남아있는 몇몇 군벌들과의 싸움은 지속되었고, 쑨원 본인은 2년 안에 베이징을 공격할 수 있다고 했지만 현실성은 아무래도 떨어졌다.

 

이런 와중에 펑위샹이 정변을 일으켜 돤치루이를 축출하고 전후 처리를 위해 쑨원을 초빙하자 대원수 직위를 후한민에게 맡기고 북상하였다. 도중에 일본에 들러, 대아시아주의에 대해서 연설한 것이 나름 유명하다. 


다만 그 연설의 백미라고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일본은 세계 문화의 미래를 위해 서양 패도의 번견이 될 것인가, 동양 왕도의 아성이 될 것인가’라는 부분은 당시 연설이 아닌, 이후 기록할 때 첨부된 것이다. 그러나 베이징에 도착하기 직전 병으로 쓰러진 쑨원은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곧바로 입원하였다. 당연히 전후 협상은 쑨원을 사실상 배제한 채 이루어지고 말았다.

 

1925년 1월, 사실상 그의 죽음을 예감한 수행원들이 유언을 남길 것을 권유했지만 쑨원 본인은 “유언을 남기면 뒷사람들이 그것을 악용할 것이기 때문에 안 남기는 것이 좋다.”라고 거절했다. 이후 한 달간을 더 앓던 쑨원은 3월 11일 마지막 유언을 남기게 된다.

 

“내가 이번에 베이징에 온 것은 지반을 포기함으로써 평화통일을 꾀하고, 국민회의에 의해 새로운 구가를 건설하여 삼민주의와 오권헌법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중략) 십수 년에 거쳐 국가를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면서 품어온 주의를 결국 완전히는 실행하지 못하였다. 동지 제군이 고군분투하여 국민회의를 하루라도 빨리 성립케 하여 삼민과 오권의 주장을 달성하기 바란다. 그렇게 하면 나는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자신의 유해를 난징 쯔진산에 묻고 그것을 영구보존해달라고 당부한 뒤 그다음 날인 3월 12일 오전 9시 30분 쑨원은 향년 58세의 나이로, 환갑도 맞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광저우에 있는 중산기념당

쑨원은 그의 행적이나 사상, 상징성 등으로 인해 여러 측면에서 높게 평가되고 중국에서 현재까지도 유일하게 국부(國父)라고 존경받는 인물이다. 대륙에서조차 쑨원의 묘를 중산묘가 아닌 중산릉(中山陵)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그가 현대 중국사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본래 그의 본명은 쑨떠밍(광동어; Syūn Dāk-mìhng)인데 이후 스스로 ‘문(文)’이라 이름을 바꿨다. 공자가 존경한 고대 문명국 주나라의 초대 왕이 무왕(武王)이고 그의 아버지가 문왕(文王)이며, 중국 유학의 종통이 상징적으로 문왕-주공-공자로 이어지기 때문에,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문(文)’이란 시호가 아무에게나 쓸 수 없는 최고의 시호라는 사실을 알리려고 지은 것이다. 이름을 ‘문’으로 바꿨을 때부터 그는 자신이 새로운 공화국 문명의 시조가 되겠다는 남다른 포부를 자신의 가슴에 심은 것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어려서부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다거나 훌륭한 인성을 갖추고 쭉 성장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중국인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기독교 교리와 서양학문을 배우며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을 거의 외국에서 보냈다는 점에서 그에게 전통을 말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어 보인다. 특히, 그는 전통의 논리가 아닌 서구의 학문과 논리로 자신의 사상 기반을 다졌다.

 

첫 혁명이랍시고 동지들과 일을 벌였지만, 절친을 비롯해 자신을 제외한 모든 동지들이 사형을 당하는 큰 실패를 겪고 목숨을 부지하겠다고 일본으로 도망친다. 그런데 그의 일생을 이렇게 쭉 펼쳐놓고 차분히 읽다 보면, 그렇게 철없고, 그저 반발심에 불타던 젊은 혈기의 혁명론자가 어느덧 공부를 갖추고 수양을 갖추고 사상적 기반을 갖추는 과정을 겪었다는 것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몇 번이나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양한 선생과 동지들에게 배움을 얻으면서 그의 삶은 천천히 하지만 끊임없이 다듬어져 갔다.

 

심지어 그가 이뤘다고 당신이 세계사 책에서 배웠던 신해혁명도 그가 선두에 있지 않았고, 심지어 중국 현지에 있지도 않았으며, 대총통이 된 것도, 얼굴마담 역할이었을 뿐 그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거나 결정권을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그는 혁명의 완수를 마치지도 못하고 간암으로 쓰러져, 자신의 사상이 기반이 된 통일된 공화국을 보지도 못하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내가 제대로 쑨원을 알지 못하고 기억하던 당신에게 그의 인생을 다시 소개하는 것이다. 좌충우돌 실패 투성이에, 외국으로만 겉돌고 제대로 된 사상적 기반도 없이 혁명을 꿈꾸던 어설픈 이가 어떻게 성장하였고 어떻게 공부하였고 어떤 인생의 부침을 통해 역사를 움직인 큰 사람이 되었는지를 당신이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말이다.


당신이 지금은 턱없이 부족하고, 노력도 하지 않으며, 그저 하루하루 특별한 목적이나 꿈조차도 없이 연명하는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덜 여물었던 그가 자신의 이름을 아무나 붙이지 못하는 시호로 바꾸면서 그는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바꾸겠다고 하였고, 실제로 자신을 그 정점으로 올려두었다.

 

어쩌면, 그저 꿈만 꾸지 않고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뛰어들어 노력하고 끊임없이 공부하고 더 많이 알려주고 깨우쳐주는 이들을 만나 끊임없이 배움과 가르침을 청한 그의 삶은 그를 위인전에 오를 인물로 만들었다.

 

당신의 삶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지 않는가?


돈이 많은 집도 아니고, 귀족 집안에 훌륭한 인맥이 가득한 이도 아니었지만, 그는 그렇게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여 자신의 이름에 걸맞는 사람이 된 것이다.


당신도, 당신의 삶을 충분히 더 높은 가치에 어울리는 삶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쑨원의 그 젊은 날의 실패투성이의 삶을 보면서, 예순도 채우지 못하였지만 정점에 올랐던 것을 보면서 그 역동하는 삶 속에서 이루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당신이 못할 것 없지 않은가?

 

시작하라. 
담대한 꿈을 당신의 가슴에 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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