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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04. 2021

나라없이 접착제 팔며 연명하고 다른 나라에서 축출당해도

도시규모로 당당하게 아시아를 대표하는 나라의 국부로 인정받다.

19세기 싱가포르로 이주한 중국 광둥성 출신의 객가인 화교 가문에서 1923년에 상당히 부유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이 이미 오래된 사업을 통해 꽤 부를 갖추었던 덕분에 그 역시 좋은 가정환경에서 훌륭한 교육 코스를 밟을 수 있었다.


부유한 환경과 별개로, 본인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여, 1935년 싱가포르 최고의 명문학교인 래플스 칼리지에 수석 입학했고, 1940년 졸업시험에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전체(영국령 말레이 연방)에서 최우수 성적을 받는 성과를 보여준다. (당시 수석은 그의 아내가 차지했고, 그는 차석이었다.) 다시 말해, 영국 식민통치 기간에 그의 가문은 일종의 현지인 중에서 인정받는 부유한 엘리트 집단인 셈이었다.

 

그런데 그가 10대 후반이던 1941년,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싱가포르를 침공, 영국 대신 식민지의 주인이 된다. 그가 동양인도 백인(서양)을 이길 수 있다는 묘한 희열을 느끼기도 전에, 일본의 가혹한 식민지 정책이 벌어지는 것을 보며 일본에 적대감을 갖게 된다.


현역일 때는 국제관계 때문인지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반일감정에 대해, 이후 쓴 자서전들에서는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반감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나중에 자서전을 통해 밝혀진 일이지만, 싱가포르가 나라로 인정받게 되면서 만났던 일본 수상들에게 대놓고, 일본의 극우 세력들을 청산하고 제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조언을 임기 내내 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났을 때 이미 그의 조국은 영국의 식민지였고, 친영주의적 성향을 띨 수밖에 없던 부유한 현지 엘리트 가문의 특성이 있어,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부모 밑에서 컸기에, 영국의 싱가포르 통치는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여기며 성장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는, 백인이 아시아인을 지배하는 상황은 자연적 이치와도 같다고 생각했는데, (자서전에서 그가 표현한 그대로 쓰자면) 못생기고 이상하게 생긴 일본인들이 무적이어야 할 영국군을 무찌르면서 싱가포르를 점령하자 백인이 항상 강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에서야 깨달았다고 한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에 영국군이 싱가포르로 돌아왔지만, 이제 한번 주인이 바뀌고 식민지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인지하게 된 싱가포르인들이 영국인을 존경하는 최면된 감정은 더 이상 전쟁 전과 같을 수 없었다. 그 경험은 결과적으로 그에게, 그의 조국 싱가포르가 더 이상 영국에 의지하지 않고 독립해야 한다는 너무도 당연한 상식을 깨닫게 만든다.

싱가포르의 정치가로 말레이시아령 싱가포르 주 총리를 지낸 뒤, 독립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로 취임하여 무려 26년간 장기 집권한 리콴유(Lee Kuan Yew; 李光耀)의 이야기이다.

 

싱가포르의 국부(國父)로 불리며 싱가포르를 동남아 제일의 경제 강국으로 성장시키는데 기여한 지도자이다.

 

리콴유는 총리 시절 유교적 철학에 바탕을 둔 '아시아적 권위주의'로 유명했으며, 개발독재를 펼쳐 '독재자'와 '싱가포르를 눈부시게 발전시킨 공로자'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았다. 연평균 경제성장률 10%를 달성하는 등 고도성장을 이뤄내, 싱가포르를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하나로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부패행위 조사국(CPIB)에 막강한 권력을 부여해 공직자 부정을 엄단하는 한편, 공직자 급여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상해 싱가포르를 아시아에서 가장 부정부패가 적은 나라로 만들었다.


그렇게 일본 식민지 시기에 대학을 다니는 것을 포기한 채 타피오카를 이용해 만든 ‘스틱 파스’라는 접착제를 암거래하거나 그렇게 혐오하던 일본군 보도부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전쟁이 끝난 뒤 심리적으로 친숙한 영국으로 유학, 1946년 런던 정경대학교(LSE)에 입학 후 1947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법학과로 옮긴다. 유일하게 자신에게 2등의 굴욕을 주었던 동문이던 콰걱추(柯玉芝)와 영국 유학까지 함께 했으며 1950년 결혼한다.

마가렛 대처와 그의 아내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싱가포르로 돌아와 노조, 학생운동과 연관된 소송 일을 맡게 된다. 특히 다양한 인종과 언어, 민족, 문화가 복잡하게 얽힌 싱가포르에서 소송 합의와 중재를 하며 의미 있는 소송들에서 좋은 성과를 얻어내면서, 1950년대에 이미 좁은 싱가포르에서는 물론 당시 통합되어 있던 말레이시아에까지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 식민 당국도 리콴유를 주목하게 된다.

 

1954년 10월 인민행동당(People Action Party, 현 집권 여당)을 창당하고, 정치활동을 본격화한다. 인민행동당의 처음은, 리콴유를 중심으로 한 영국 유학파 출신의 인텔리와 노동운동가 중심의 이른바 ‘좌익성향’의 연합정당이었다. 리콴유는 뼛속까지 영국의 영향을 받은 탓에 당연히 친서방주의자이며 비공산주의자였음에도 왜 이들과 좌익성향의 정당을 설립했는가 의문이 갈 것이다.

이 즈음, 그는 이미 정치적인 센스랄까 약은 속내를 감추는 것에 익숙했다. 당시 정계 진출이 목적이던 그가 분석한 바에 의하면, 당시 대중적인 지지의 흐름은 좌익에 있었고, 자신이 원하는 정계 데뷔와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대중적인 기반 없이 정치적 성공을 얻을 수 없다는 철저한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 초기엔 당내 좌파에 의해 잘려나갈 뻔도 했지만 이후 불어닥친 반공 바람에 힘입어 리콴유와 당내 우파는 인민행동당을 장악하게 된다. 그렇게 그는 눈에 띄는 대중적인 정치활동을 통해 점차 주민들의 지지를 확보, 1959년 5월 주민선거에서 PAP가 자치의회 의석 43석 중 41석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당수인 리콴유를 자동으로 싱가포르 자치정부 수반에 올리게 된다.

 

자치 정부 수반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지금도 그렇지만 나라라고 부르기에도 너무 왜소했던 리콴유 정부는 이웃 대국이던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해서 활로를 모색하고자 했다. 싱가포르는 자원도, 인구도, 내수시장도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말레이시아를 활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말레이시아도 해외 교역의 관문으로의 지리적 가치와 리콴유 정부의 친서방 성향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싱가포르를 받아들였지만, 중국계 화교가 압도적인 싱가포르에서 벌어진 공산화 운동 등을 보며,

위협적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결국 말레이시아에서 1965년 8월 일방적으로 싱가포르를 연방에서 축출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그나마 싱가포르를 버리지 말아 달라며 애원하고 절규했던 리콴유는 일방적으로 툰쿠 압둘 라만 말레이시아 총리에게 불려 가 축출 통보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싱가포르의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 이때 영상을 찾아보면 리콴유는 정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통해하며, 직후 인터뷰에서 자신은 일생동안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통합을 꿈꿔왔다고 하며 울먹이다가 기자들에게 인터뷰를 잠깐만 중단해달라고까지 한다.

현재로 보면, 덩치 크고 낙후한 동남아 나라들 중 하나로 멈춰있는 말레이시아보다 싱가포르가 훨씬 앞서 있는 듯 하지만, 국가로서의 규모도 그렇고 자신이 원하는 나라의 형태를 키우기 위해서 말레이시아는 꼭 필요한 바탕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도 그날의 결정이 천추의 한이라고 말버릇처럼 얘기했다. 중국계에게 나라를 먹혀버릴까 봐 두려워했던 말레이시아로서는 불가피한 결정이라는 점도 이해는 간다.

 

리콴유의 자서전을 보면, 강제 독립 당시의 싱가포르가 얼마나 최악이었는지 그 절망적이었던 상황이 절절하게 묘사되어 있다.

 

“당시 싱가포르는, 군대도 없고, 자원도 없고, 땅도 없고, 구성원이라고는 다국적으로 돈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 타밀인들이 서로 갈등하며 싸우기만 하며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도시국가에 불과했다. 다른 아시아나 남미, 아프리카 등 싱가포르처럼 막 독립한 제3국들은 지하자원을 서방으로부터 뺏길까 봐 걱정이라도 했지만, 싱가포르는 뺏길 자원조차도 전무한 상황이었다.”

 

리콴유는 독립 이후 체제를 정비하고 군비를 확장하면서 말레이시아 혹은 인도네시아의 침공을 제일 두려워하였다. 싱가포르가 쫓겨날 때도 모든 말레이시아 정치인들이 싱가포르의 축출을 원했던 것은 아니고 중국계를 몰아내고 싱가포르 땅을 차지하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싱가포르는 식수조차도 말레이시아로부터 구입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말레이시아가 독하게 마음만 먹는다면 싱가포르로의 식수 공급마저 중단해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그 이후 초고속의 경제성장을 겪으면서도 리콴유는 내내 식수공급의 중단을 두려워해야만 했다.

독립 후 리콴유는 우선순위를 정하여 국가개발에 힘을 쏟았다. 말레이시아에서 축출될 당시에 말레이시아 정치인 가운데에는 싱가포르가 합병되길 원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는데, 이들의 생각은 중국인들을 내쫓고 말레이인만 있는 싱가포르를 흡수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가장 먼저 축출되는 것은 중국계인 자신이었기 때문에 리콴유는 필사적으로 합병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장 리콴유는 군대 양성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주변국들에 비해 인구가 너무 적은 데다가 이전에 주둔해 있던 군대는 대다수가 말레이시아로 옮겨가고 남아있는 군대도 말레이 민족의 특색이 강했던 터라 여러모로 싱가포르의 정체성을 갖춘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데 그 군대마저도 일정 기간 동안 영국군의 보호 아래에 있어야 하는 굴욕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장교단을 불러 군대를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실행한다. 영국과 밀접한 관계였음에도 굳이 이스라엘을 택한 이유는 싱가로프와 비슷한 주변국과의 대치 상황 군대조직을 급조해본 경험이 있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와 동시에 인재양성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본래 자식 교육에 열성인 것은 중국 남방인들의 특징이기는 하지만, 현재의 싱가포르가 얼마 안 되는 인적 자원을 가지고서도 현재의 수준까지 성장할 수 있던 배경은, 리콴유가 그렇게 강조했던 ‘모든 것은 상위 10%가 중요하다.’는 철칙 때문이었다.

싱가포르의 시험 치는 전경

그는 모든 국민이 뛰어날 수는 없고, 특히 모두가 잘해서 모두가 복지를 누리고 다 함께 잘 사는 방법은 자원이 많거나 역사가 깊은 나라에나 가능한 것일 뿐, 싱가포르 같은 나라에서는 말도 안 되는 것이라며 늘 싱가포르의 태생적 불리함을 학력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분리한 상위 10%에 교육을 집중 투자하는 방법으로 이겨내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리콴유는 자국의 학생들 전국 모의고사에도 전체 평균 따위는 상관없다며 오직 상위 10%가 얼마만큼의 절대적 성과를 올렸는가만 관심이 가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 기준에 맞추어 교육체제를 정비했다.

그리고 지금의 싱가포르를 있게 한, 경제발전 전략이 이때 탄생한다.

싱가포르는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잘 나가는 항구이자 태평양과 인도양의 거점으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에서 축출당한 시점에 이미 싱가포르는 교역항으로의 이점을 잃어버렸다. 싱가포르를 대체할 항구들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집중적 산업화 육성 정책을 펼치기로 한다. 인종 통합에 골치를 썩으며 정부의 부패에 휘둘리던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허우적거리는 동안, 싱가포르는 리콴유의 독선적이지만 효율적인 정책을 통해 원자재를 수입하여 가공품을 되파는 무역의 거점이 되어 경제성장에 피치를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중개무역에만 집착한 것이 아니라 금융업의 허브로서의 기능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홍콩, 도쿄와 더불어 금융의 중심지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작지만 인프라가 잘 구축된 관광지로서의 이미지를 얻은 것도 전략적 성공을 가져왔다.

심지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듯, 남자들이 결혼을 할 때 자기보다 똑똑한 여성들과 결혼을 해야 한다는 이론을 정책으로 지원했다. 어느 한 개인의 똑똑함을 교육으로 극복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결국 유전자가 좋아야 한다는 이론에 입각하여 진행한 것이다.


이 무식하기 그지없는 우생학적 정책은, 대졸 이상의 엘리트 여성이 출산을 3자녀 이상할 경우에만 지원을 해주는 정책을 시행한다. 학력이 떨어지는 여성은 해당되지 않는 정책으로 이른바 고학력자들은 애를 많이 낳고 저학력자들은 애를 많이 낳지 말라는 정책까지 시행하며 나라를 강국으로 키우고 싶어 했다.


반발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정책은 지지와 성공을 거듭하여 현재 아시아에서 엘리트들의 집약도로만 놓고 보면 싱가포르가 손꼽을 만한 나라가 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이 싱가포르의 분석이다.

 

교육을 그렇게 강조하며 노래하였으니 교육제도도 개편하고 대학도 열심히 손봤다. 그런 덕분에 싱가포르 국립대학은 아시아 1위 대학이자 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는 명문대로 거듭나게 된다.

1959년 자치정부 수반으로 선출된 이래 26년간 총리로 재직 후, 1990년 11월에 퇴임하고 2004년까지 선임장관(Senior Minister)을 맡았다. 후임 고촉통(吳作棟) 총리가 퇴임하자 아들 리셴룽(李顯龍)을 총리에 앉혀 사실상 부자세습에 성공했다. 이후 리셴룽 총리 시절에는 고촉통이 선임장관 지위를 물려받고 리콴유 자신은 고문장관(Minister Mentor)을 맡아 살아있는 내내 싱가포르 정부를 사실상 좌지우지했다.

아들 리셴룽(李顯龍)총리

죽기 4년 전인 2011년에야 고촉통과 더불어 물러난 것도 그 해 총선에서 집권당인 인민행동당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지고 야당인 노동당이 사상 최다 의석을 확보한 데 따른 데 대한 위기의식의 발로로 아들을 위한 연기를 했다는 비판을 많이 받는다.

그렇게 그는 2015년 갑작스러운 폐렴으로 향년 91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이미 이 시리즈를 연재하며 수차례 언급했던 바와 같이, 내가 당신에게 소개하는 이들은 존경받을만한 위인들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때문에 리콴유가 재임 기간 중 권위주의적 개발독재 정치체제를 확립하고 자신이 다시 계속 총리직에 올라 장기집권 체계를 유지하려고 했다거나 자식과 며느리를 필두로 한 친인척들로 국영기업진을 꾸리고, 말만 자유국가이지 언론통제와 탄압으로 인터넷에 비판 글만 나와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내용들을 검열 삭제한다는 식으로 자신의 왕국을 만들었다는 비판도 받는 것은 그대로 그가 받아야 할 잘못일 뿐이라고 판단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그가 도대체 어떤 실패를 겪었고 그 실패를 어떻게 극복했는가 하는 것이 이 시리즈의 주안점이니 헷갈리지 말길 바란다는 충고를 다시 한번 강조한다.


전형적인 장사꾼 집안이니 나라를 장사꾼들이 원하는 형태로 만든 것도 그의 재주였다. 그의 인생을 살펴봐서 알겠지만, 그의 역사가 지금의 싱가포르의 역사이고, 지금 싱가포르의 국영기업부터 그가 그렇게 말했던 상위 10%의 정점에는 모두 그의 자식과 친인척으로 채워져 있다. 훌륭한 독재자라고 그를 칭찬하는 말이 아니다.


그의 처음 목적은 제대로 된 자신만의 나라를 갖자는 것이었을 뿐이다. 다만, 그가 똑똑하지만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었고, 권력이라는 것의 특성상 오래 고이게 되면 썩는다는 것을 그가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이 만든 그 나라를 다른 누군가가 다시 망가뜨릴지도 모른다는 과대망상을 가졌던 것이 그의 인생의 마지막을 아름답지 못하게 했을 뿐이다. 그것 또한 그의 한계이니 그가 안고 가면 그만일 뿐이다.

그가 자신의 나라를 자신의 것처럼 여기고 땅도 없고, 자원도 없고, 특별한 우방의 지원도 없이 지금의 싱가포르로 만들어내기까지의 그 우여곡절은 분명히 인정받을만한 업적이다.

말레이시아라는 발판만 제대로 있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나라를 만들 수 있었을 거라며 죽는 그날까지 아쉬워했던 그 탐욕스러운 눈빛에는 그의 인생 전체를 대변하는 꿈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당신이 그의 독재에 대해서 욕하기 전에, 그가 살아온 그 과정들을 보고, 그가 어떻게 해서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다른 나라에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했던 그 피눈물을 보았다면 당신의 마음속에서도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도 그런 군바리가 있었다고 기시감이 드는가?

그의 딸이 만사를 제쳐두고 리콴유의 장례에 참석한 것이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가?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아시아 정치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둘의 공통점이 많이 있다고도 본다. 하지만 비슷할지언정, 가장 큰 차이가 하나 있다.


리콴유는 나중에 권력이 오래 고이게 되면서 썩어간 것이지, 총칼로 권력을 쟁취하고 선거를 조작하면서까지 정권을 잡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정권의 말미로 갈수록 더욱 지능적으로 야당이 불리한 판을 설계하기는 하였으나 그를 견제하는 야당세력이 그의 독재를 막을만한 계기가 없었다.


우리는 그 불합리에 대해, 공부하는 학생들이 항거하였고, 많은 희생을 치러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자유를 찾았다. 물론 어리석게 그때를 회상하는 노친네들이 그의 딸을 다시 왕좌에 앉혀놓기는 했지만, 결국 문제가 있는 집안의 DNA는 또 국민들에게 검열되어 콩밥을 먹으러 가게 만들었다.


즉, 그렇게 똑똑하게 키운 싱가포르는 아직까지 그 독재 집안과의 합리적 동거를 아슬아슬하게나마 용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당신이라면 그나마 곁에 붙어 발판 삼아 나라를 부강하게 키우고 싶은데, 코딱지만 한 나라 같지도 않은 도시 가지고 정권을 잡든 뭐하든 해봐라.라고 짤려서 강제로 독립을 당해버리는 입장이 된다면 그때부터 어떻게 그 나라를 일으켜 세워 부강하게 만들 것인가?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국 싱가포르를 ‘국가’로 인정받았다. 앞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지만, 싱가포르를 UN에 가입시킨 것도 그와 같은 궁여지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무도 말레이시아에서 축출당한 싱가포르가 지금과 같은 국가로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것을 만든 한 사람이 있다. 그래서 그는 독재의 실수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의 국부로 불린다. 어느 누구도 그 호칭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당신이 지금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처해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열악한 상황을 포기하고 그저 도망쳐버릴 수 없는 상황이라면,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과 열정으로 그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 그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최상의 정점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100여 년 전의 객가인이 보여주었다.


나라도 만들고 변모시키는데 당신 한 사람이 겪고 있는 상황 하나 반전시키지 못하겠는가?

할 수 있다.


당신이 정말로 마음먹지 않아서 그랬을 뿐, 이제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고 그다음을 당신의 머리와 마음에 새기는 지금 이 순간, 당신은 그것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화투 시리즈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니나, 400번째 올리는 글을, 내일이면 100명째가 되는 <실패한 대가들의 이야기 시리즈>로 장식하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 오늘의 연재 순서를 조금 바꿨습니다. <실패한 대가들의 이야기> 100명 축하와 브런치 5개월 차의 중간보고는 내일모레 하기로 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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