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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05. 2021

그가 왜 독립운동가인지 모른다는 후손들이 있음에도...

그가 왜 독립운동가인지를 새겨, 이 시리즈의 100번째 위인으로 기리노라

1917년 중국 만주 북간도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서 유복한 집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나고 자란 곳이 중국이라고, 그를 중국인(조선족)이라고 묘비 경계석에 ‘조선족’이라 새기고 헛소리하는 중화주의적 발상이 분노를 산 일이 있다.

 

그가 태어난 명동촌은 1899년 함경북도 출신의 조선인들이 네 가문, 식솔 140여 명과 함께 집단 이주해 세운 한인 마을로, 북간도 한인 이주사에 이정표를 마련한 곳으로 중국에서 살던 조선족의 마을이 아니다. 특히, 마을의 정신적 리더였던 김약연은 목사이자 그의 외삼촌이었는데 공산당은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항일과 통일운동으로 유명한 민족주의자 문익환 목사도 바로 이 명동촌 출신으로 윤동주와 함께 자랐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안중근 의사도 거사 전 이 명동촌에 머물며 사격 연습을 하며 기거했다고 알려져 있는 역사적인 마을이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 때부터 북간도로 이주해왔다. 이민 초창기 북간도 자동이라는 곳으로 이주한 그의 증조부는 부지런히 농토를 일구어 제법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자수성가하였다. 이후, 1900년 조부가 명동촌으로 이사하면서 한인 마을의 한 식구로 합류하게 된다.


명동촌은 일찍부터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인 선구자의 마을이었다. 북간도 최초의 신교육기관으로 1906년 10월경 이상설(李相卨) 등이 용정(龍井)에 설립한 서전서숙(瑞甸書塾)이 있었는데, 이듬해 4월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떠난 지 몇 개월 안돼 문을 닫고, 그 뒤를 명동촌의 명동서숙(明東書塾)이 이었다.

용정 명동촌 그의 생가

1908년 4월 문을 연 명동서숙으로 출발한 명동학교는 1909년 정식 체제를 갖추면서 신학문과 민족의식을 가르치는 신교육기관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게 된다. 명동학교에서 정재면은 학생들에게 신학문뿐만 아니라 성경을 가르치고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그리하여 부임 첫 해에 명동교회가 설립되고, 이후 마을 사람 거의 모두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된다. 1910년 명동학교에 중학교 과정이 만들어지고, 이듬해 여학교가 설립되면서 명동촌은 북간도 민족교육의 거점으로 떠올랐다.

 

그의 아버지 윤영석이 15세 나이로 명동학교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정재면이 교사로 부임해 마을에 새로운 변화를 몰고 온 1909년이었다. 이듬해 명동학교 교장 김약연의 이복 누이동생인 김용과 결혼한 윤영석은 1913년 3월 문재린 등과 함께 중국 북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돌아와 모교인 명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래서 그가 태어날 당시 그의 집은 명동촌에서도 벼농사를 하는 몇 안되던 집 가운데 하나로, 넉넉한 가정형편을 갖춘 편이었다.

 

사방이 숲으로 아늑하게 감싼 형태의 명동촌에서 그는 28년 생애의 절반인 14년을 보내며 시인으로서의 감수성을 키워나갔다. 교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자식 셋에게 이름에 ‘해’ ‘달’ ‘별’을 차례로 붙여 한글 아명을 지어주었다. 그의 아명은 ‘해처럼 빛나라’는 뜻인 ‘해환(海煥)’을 그의 동생은, 달이 한글이라, 음차하여 ‘달환(達煥)’, 그 밑에 갓난애 때 죽은 동생에게는 ‘별환’이라는 아명을 지어준 것이다. 그의 시집명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던 것은 우연이 아닌, 그가 어린 시절 감수성을 키웠던 그곳에서 아버지의 가르침과 사랑을 중시하는 가정 분위기에서 잉태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대한민국 문학사를 대표하는 시인 중 한 명이자 조선 독립의 문학적 상징이었던 윤동주(尹東柱)의 이야기이다. 직접적인 무장투쟁을 한 것은 아니나, 그렇게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반성과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저항시, 삶의 고뇌에 대한 시를 적었다.

무장투쟁을 하지 않았다고 전술하였지만, 무장투쟁에 투신하려고 모색 중이었던 것이 기록으로 확인되었고, 그의 남모를 기개는 2010년에 세상에 공개된 당시 일제의 재판 관련 문서에서 기록으로 입증된 바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심약하고 섬세했던 시인으로서의 모습이 아닌, 당당한 독립투사의 모습으로 당시 악명 높았던 일제 재판정에서 자신의 독립관과 소견을 밝혀 당시 대한국인의 기개를 보여주었다. 일본 형사 앞에서도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과 대책을 열정적으로 토로하기를 마다하지 않아 그를 만난 모든 이들은 감화되었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그를 유죄로 판단한 일제의 당시 판결문을 보면,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구체적인 운동 방침을 논의했다는 사실이 적시되어 있어, 그가 그저 문학정신만으로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은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명동 소학교 시절의 윤동주는 유순하고 눈물 많은 소년이었다. 동기동창으로 윤동주 집에서 석 달 먼저 태어난 동갑내기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와 김약연의 조카로 윤동주와 외사촌간이었던 김정우, 그리고 문재린 목사의 아들인 문익환 등이 있었는데, 모두 문학 방면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문학이라는 공통 취미를 갖게 되었다. 그 무렵 윤동주는 직접 잡지를 등사하여 발간하기도 했다.

 

1931년 늦가을 윤동주의 집은 명동촌에서 소도시 용정으로 이사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무장단의 출몰이 잦아지자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신변안전이 보장되는 도회지로 이주한 것이다. 윤동주의 아버지는 인쇄소를 차리고 도회지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내 실패하고 그 뒤 포목점을 비롯한 다른 사업에도 손을 댔지만 연이은 사업의 부진을 면치 못해 가세는 점차 기울어갔다.

 

하지만 중학교에 진학한 윤동주는 활동적인 학창 시절을 보냈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교내 잡지를 내느라 밤늦게까지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고, 또 옷맵시를 내느라 혼자 재봉틀까지 돌렸다.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 1등 상을 받기도 하고, 문학적 취향에 걸맞지 않게 기하학에 흥미를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은진중학교 4학년에 진급한 윤동주는 집안 어른들을 설득해 그 해 여름 숭실중학교 가을학기 편입시험을 보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한 학년 아래인 3학년으로의 편입자격밖에 얻지 못하는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1935년 9월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윤동주는 객지 생활 7개월 동안 시 10편, 동시 5편 해서 무려 15편의 시를 쏟아냈다.

 

그런데 윤동주의 숭실중학교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1936년 1월 일제 총독부 당국이 신사 참배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윤산온(尹山溫, George S. McCune) 선교사를 교장 직에서 파면하자 일어난 학생들의 항의 시위로 학교가 무기 휴교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1936년 3월 문익환과 함께 용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용정에서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였다. 하지만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격으로, 그들이 편입한 광명학원은 대륙 낭인 출신의 일본인이 경영하던 친일계 학교였다. 그것을 모르고 편입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이후 진학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1938년 2월 광명중학을 졸업한 윤동주는 의과 진학을 고집하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다. 송몽규는 앞서 군관학교에 입교하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 1936년 4월 제남에서 체포 압송되어 본적지인 함북 웅기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석방된 전력이 있었다. 1937년 4월 대성중학교 4학년에 편입한 그는 이듬해 학교를 마치고 연희전문 문과 별과 시험에 합격하여 윤동주와 다시 동문수학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영화 <동주>에서 몽규가 주목받는 조연이었던 것은 이러한 오래된 우정 때문이었다.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강하늘)와 송몽규(박정민)

연희전문에서 윤동주는 최현배 교수의 조선어 강의와 손진태 교수의 역사 강의를 들으며 민족문화의 소중함을 재확인했고, 이양하 교수의 문학 강의를 들으며 자신의 문학관을 정립해 나갔다. 연희전문에서의 4년간은 윤동주에게 있어 오롯이 시 세계에 몰입할 수 있는 시기였다. 그에게 있어 제대로 된 시공부는 현실에 눈을 뜨는 것이었고, 이미 그 현실 안에 있었지만, 시에 정신을 담아야 한다고 배우고 다시 돋보기를 대고 들여다본 참담한 민족의 현실은 그가 자신만의 시 세계를 만들어가는 처절한 몸부림의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특히 그가 연희전문에 입학한 1938년은, 일제가 국가총동원법을 조선에도 적용해 한민족 전체를 전시총동원체제의 수렁으로 몰아넣던 시기였다. 때문에 그의 고뇌와 번민은 더욱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즈음 시작(詩作)의 즐거움을 알게 해 준 동시 짓기를 그만둔다.

 

이후 윤동주는 1940년 12월까지 1년 이상 자의에 의해 절필을 한다. 1940년 12월경에 쓴 <팔복>의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는 시 구절처럼, 이 기간에 그는 민족의 처절한 수난에도 아무런 응답 없이 침묵을 지키는 신에게 대들었다. 이 무렵 그는 자신의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고 현실을 구제하지 못하는 신학에 절망하기에 이른다.

이런 오랜 고뇌와 번민의 터널을 지나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반이 되는 1941년 그 모든 내적인 방황과 자신을 짓눌렀던 역사의 무게를 시로 승화시키기 시작하였다. 졸업을 앞둔 그 해 11월 윤동주는 그때까지 써놓은 시 중에서 18편을 뽑고, 여기에 한학의 전통으로 <서시>를 붙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엮었다.


그는 자신의 시집 원고를 3부 필사해 1부는 자신이 갖고, 1부는 이양하 교수에게, 또 1부는 함께 하숙하던 후배 정병욱에게 주었다. 1부를 이양하 교수에게 바친 것은 출판을 주선해달라는 것이었는데, 그에 대한 이 교수의 답변은 출판을 보류하라는 것이었다. 일제 관헌의 검열을 정식 출판을 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의 신변에 위험이 따를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5살 어렸던 정병욱과 함께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로 앞당겨진 학사일정에 따라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立教大学) 문학부 영문과에 선과로 입학하였다.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오른 고종사촌 단짝 송몽규는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사학과에 선과로 입학하였다.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떨어진 채 유학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윤동주가 진학한 릿쿄대학은 성공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 유학 초기 윤동주는 이국 땅에서 적잖이 향수병에 시달렸다. 그래서인지 릿쿄대학에 진학한 지 한 학기만인 그 해 10월 윤동주는 단짝 친구 송몽규가 있는 교토의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전입학을 한다. 도지샤대학은 윤동주가 가장 좋아한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로, 일본 조합 교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


전시 체제하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윤동주는 도지샤의 자유로운 학풍을 호흡하고, 송몽규를 비롯한 벗들과 어울리며 유학 초기에 비해 한결 안정된 유학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던 1943년 7월 윤동주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에 송몽규 등과 함께 일본 특고경찰에 체포되었다. 중국 군관학교 입교 전력 때문에 ‘요시찰인’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던 송몽규와 함께,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이었다.


특고경찰은 이것을 ‘재쿄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여 사건화한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1944년 3월과 4월 교토 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2년의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1945년 2월 16일 원인 불명의 사인으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서른 살도 못 채운 29세의, 짧지만 굵은 생을 마감하였다. 일본이 패망 선언을 하고 광복 만세를 부르기 불과 반년 전의 일이었다.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아버지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후쿠오카 형무소에 도착해 송몽규를 면회했을 때, 송몽규는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감옥에서 정체불명의 주사를 계속 놓아 자신도 윤동주도 그렇게 되었다는 증언을 한다. 윤동주의 죽음이 ‘생체실험’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은 이 구체적인 정황에서 나온 것이다. 정작 그 증언을 하고 20일 남짓 지난 3월 7일 송몽규도 윤동주의 뒤를 따라 옥중 순국하였다.

윤동주의 유해는 3월 6일 문재린 목사의 집례로 북간도 용정 동산의 중앙 장로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해 6월 그의 무덤 앞에는 집안사람들의 정성으로 ‘시인 윤동주 지묘’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윤동주의 유시는 해방 후 연희전문 시절 절친한 벗이었던 강처중이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유고와 후배 정병욱이 가지고 있던 필사본 시집 등 31편의 시를 모아 1948년 1월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을 붙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출간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1968년 11월에 유작 <서시>가 새겨진 <윤동주 시비>가 모교인 연세대 교정에 건립되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8월 15일이 돼서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연세대 교정 내의 시비

윤동주는 독립투쟁의 일선에서 장렬하게 목숨을 던진 투사도 아니었고, 독립시인이라고 불리기에는 시의 내용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당대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인도 아니었다.


맞다.

그래서 그가 과연 독립운동가가 맞느냐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그러한 이유로 내가 오늘 이 시리즈의 100명째 도대체 누구의 삶을 소개하는 것이 의미 있을까를 며칠간 고민하다가 그의 삶을 내놓게 된 것이다.

일단, 당신이 몇 편 되지도 않는 그의 시집을 온전히 읽고 나서도 그런 생각이 드느냐고 묻고 싶다. 하여, 일부러 대표적인 시들을 그의 인생 사이사이에 당신에게 소개하였다.

브런치에 시를 쓴다고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문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글쓰기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 시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시 쓰는 흉내만 내는 이들이 거개더라. 그래서 더더욱 그들에게 윤동주의 삶을, 온통 실패와 좌절과 번뇌로 가득했던 그의 시를 통해 당신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앞서 설명했던 바와 같이, 의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바람을 무시하고 그는 제대로 된 문학을 제대로 된 선생님들에게 오롯이 4년을 쏟아부으며 공부하고 쓰고 또 버리고 다시 거듭났다.


이전에 그가 당신처럼 시를 쓸 줄 몰랐던 것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문예지까지 만들어 문학을 즐기던 친구들과 그 뜻을 함께 하였다. 그런데 제대로 읽고 제대로 공부하고 그리고 난 후에 시를 쓰려하니, 이전에 자신이 쓴 것이 모두 낙서 수준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제서야 1년이나 절필하고 자신이 무엇을 써야 하는지, 왜 써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이후에 발견된 기록들을 보면, 그 역시 무장 독립운동에 투신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구체적인 준비까지 마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상황을 자세히 보면, 그가 정작 유학을 일본으로 떠나 생활이 안정되어 있을 즈음에 그러한 열망이 더더욱 구체화되어 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장 총을 들어 조선총독부 간부들을 죽이는 것도 효과적인 독립투쟁임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글을 좀 쓴다고 하는 이들, 이른바 식자층이자 여론을 선도할 수 있는 이들이 하는 역할은 하나의 총탄보다 훨씬 더 강하다.

맞다.

그가 쓴 시가 출판되어 수많은 이들에게 읽힌 것도 아니고, 그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로 증명되는 그의 삶이 독립운동가의 그것에 못지않게, 아니 더 위로 존경을 받아야 하는 것은, 그가 생의 마지막을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마쳤기 때문만은 아니다.


일제는 굳이 자신의 나라까지 유학을 온 한국의 식자층을 체포하거나 구금하거나 핍박하지 않았다. 게다가 조선의 한복판이나 만주도 아닌, 자신들의 나라 한복판에서 유학생 신분의 그들을 체포했을 때는 그들이 자신들의 체제에 위협을 가한다는 위협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은 총탄 하나를 고위 간부의 머리에 박아 제거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위험이기 때문에 그러했다. 물론 송몽규의 전적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더 주목했던 것은 윤동주였다.

 

자기가 기분 나쁘고 좋은 것을 글에 반영하는 것도 시라고 할 수 있겠으나, 당시의 현실, 생활, 쓰는 이의 삶에 대하 자세가 우러나오지 않은 것은 시가 아니고 문학이 아니다.

이것은 전 세계 문학을 공부하고 논했던 이들의 공통된 정의에 다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윤동주는 자신의 시와 삶을 일치시키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그의 시는 곧 그의 삶을 대변한다. 하여, 내가 앞서 당신에게 그가 남긴 얼마 안 되는 그 피로 아로새긴 시로서 그의 생각을 읽어 보고 나서 판단하라 한 것이다. 그는 내내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길 위에서 길을 잃은 것 같다고 느꼈고, 젊은이들이 조국의 독립을 외치며 죽어나가는 그 모진 현실의 풍파 속에서도 함께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했고, 두렵고 무서웠지만 그들과 함께 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다.

알량한 지식인이라며 변절하고, 목숨이 중한데 그까짓 글 좀 써서 천황을 숭상한다고 적는다고 내 마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떠벌여대는 그들과 대놓고 친일을 하며 일본어로 농담 늘어놓으며 깔깔거리고 지냈던 그들과는 격이 다른 삶을 살아갔던 시대의 양심이었단 말이다.


내 나라의 독립을 진정으로 희망하는 마음으로 내 민족을 사랑했고, 자신한테 주어진 길을 기어코 걸어가겠다며 그 한 몸을 민족의 제단에 제물로 바쳤다.

 

당신이 시를 쓰던 그저 감정의 찌그러기를 배설하는 수준의 낙서를 하던 내 알바 아니다.

허나, 윤동주가 왜 독립운동가인지, 독립시인이지도 모르고, 그저 유명한 시인이려니 하고 알고 있어서는 그가 그렇게 희망했던 독립을 맞은,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민족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본다.


당신이 그 시대의 식자층이었다면 당신은 당당히 일제에 맞서 그 시대의 양심이라고 나설 수 있겠는가? 윤동주와 장렬히 피 같은 젊은 희생을 통해 지금 우리의 당당한 현재가 있을 수 있었음을 정작 우리가 알지 못한다면, 가슴에 담고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에게 어떤 미래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덧. 표지의 사진은 당시 흑백 사진을 현대의 기술로 컬러를 입혀 부활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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