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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08. 2021

천재라고 하더니 나이 많다고 미군 장교시험에 떨어지고도

국방부 장관이 직접 찾아와 조언을 구하는 천재중 천재로 인정받다.

1903년 부유한 유대인 은행가 가문의 삼 형제 중 장남으로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헝가리식 이름은 한국어처럼 성씨가 이름 앞에 오는데, 1913년 그의 아버지에게 귀족 작위가 수여되면서 이름에 귀족임을 뜻하는 ‘폰(von)’이라는 글자가 들어가게 되었다.


유대인이던 아버지가 자녀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삼 형제는 어렸을 때부터 개인 가정교사를 통한 사교육을 시작했다. 수학과 더불어 모국어인 헝가리어 외에도 외국어를 배워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가르쳤고, 당연히 문학이나 수학 등 다른 학문에 대해서도 다양한 조기교육을 시켰다.

그래서 그는 8세의 나이에 이미 미적분을 마스터했고,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도 마스터했다. 특히, 역사학에도 흥미를 가져 빌헬름 옹켄(Wilhelm Oncken)의 세계사 시리즈를 많이 읽었는데, 전집 44권을 통째로 외워버렸다.


그의 아버지는 장남의 이런 능력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해서 파티를 열 때마다 특별한 이벤트를 열어 아들 자랑을 했다고 한다. 파티에 초대된 수십 명의 사람들에게 아들이 인사를 하며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물어보게 했고, 파티가 끝나 사람들이 돌아갈 때쯤, 배웅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정확하게 다시 확인해주며 사람들을 놀래켰다고 한다. 이런 아들을 기특하게 여긴 아버지는 방 하나를 개조해서 아들만을 위한 개인 도서관으로 만들어주었다.

 

8세에 루터회 학교인 퍼쇼리 에벙겔리쿠시 김나지움(Budapest-Fasori Evangélikus Gimnázium)에 입학하였는데 이 학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교육 수준이 높은 것으로 유명했던 엘리트 학교였다. 하지만 그는 수업 내용 대부분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예습 없이 수업에 참여해 다른 급우들을 압도하는 능력을 보여 준다. 여기서 훗날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되는 유진 위그너를 만나 친구가 되어 그에게 정수론을 따로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당시 김나지움의 선생은 노이만의 수학적 재능에 대해 주목하여 일반적인 교육 수준은 오히려 그의 재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며 그의 아버지에게 별도의 영재교육을 권한다.


하지만, 정규 교육과정을 생략하는 데에는 부정적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부분적으로 선생의 조언을 받아들여, 뛰어난 학자를 개인교사로 받아들여 교육시키는 것에 찬성하였고, 당대에 유명했던 헝가리의 수학자인 세괴 가보르(Szegő Gábor, 1895~1985)를 초빙하여 고등 미적분학을 아들이 배울 수 있게 해 준다.

여담이지만, 그를 처음 만나 가르치던 날 세괴는 집으로 돌아와 그의 수학적 재능에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렸다고 그의 아내가 증언하였다.

 

김나지움에서의 그의 학습능력은 체육 한 과목만을 빼곤 거의 기존의 성적에 대한 기록을 모두 경신했다고 한다. 김나지움 졸업 이후 19세에는 서수(ordinal number)에 대하여 논문을 냈다. 22세에 부다페스트 대학교 수학 주전공에 물리, 화학 부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수학자보다 공학자가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 것이라는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박사 학위와 동시에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ETH Zürich)에서 화학 공학 석사 학위를 또 받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 출신으로 수학자, 물리학자, 화학자, 컴퓨터과학자이다. 1938년 미국으로 국적을 바꾸고, 양자역학, 함수 해석학, 집합론, 위상수학, 컴퓨터과학, 기하학, 수치해석, 경제학, 통계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 걸쳐 업적을 남겼으며 연산자 이론을 양자 역학에 접목시킨 최초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천재들이 인정한 유일무이한 천재, '20세기의 다빈치'라고 불리는, 존 폰 노이만으로 널리 알려진, 독일어로 요한 루트비히 폰 노이만(Johann Ludwig von Neumann), 정작 자신의 모국어 이름으로는 기억되지 못한, 너이먼 야노시 러요시(Neumann János Lajos)의 이야기이다.

 

그 유명한 맨해튼 계획과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참여하였고, 게임 이론과 셀룰러 오토마타의 개념을 공동 개발하였다. 또한 디지털 컴퓨터의 발달에 관여하여 최초의 컴퓨터 매니악을 탄생시켰고, 최근에서야 바람이 부는 인공지능에 기초적인 이론은 모두 닦아놓은 천재 중의 천재 되시겠다.

 

일생 동안, 폰 노이만은 150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순수 수학 60편, 물리학 20편, 응용 수학 60편이었다. 심지어 그의 마지막 작품인 ‘컴퓨터와 뇌(The Computer and the Brain)’는 사망 직전 병원에서 집필되었는데 집필 도중 그가 사망하면서 미완성의 원고로 남게 되었고 훗날 책의 형태로 출판되었다.

독일의 교수자격시험인 하빌리타치온을 최연소(25세)로 통과한 기록을 세웠다. 20대에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나 《집합론의 공리화》, 《에르고드 이론의 연구》, 《실내 게임의 이론》 등을 저술해 당대 최고의 수학자 중 한 명이 되어 1933년 문을 연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아인슈타인과 함께 최초의 종신교수 4명 중 1명(당시 유일한 20대)으로 추대되었다.

동료이자 절친이던 아인슈타인과 함께

특히 최초로 힐베르트 공간을 양자 역학에 도입한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는 아직까지 이 분야의 베스트셀러 전공서로 판매되고 있다.

1928년부터 베를린 대학교에서 객원 교수(Privatdozent)로 근무하였다. 1927년 한 해 동안 폰 노이만은 수학에 관한 주요 논문 12편을 발표하였고, 29년 말까지 주요 논문 36편을 발표했다. 1930년에 그는 미국의 뉴저지에 있는 프린스턴 대학교에 가게 된다.

 

1930년, 27세의 폰 노이만은 마리에트 코베시(Mariette Kövesi)와 결혼하였다. 딸 마리나가 태어나지만, 불과 7년 뒤 두 사람은 성격차이로 인해 이혼했고, 그는 부다페스트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직전에 만난 여성인 클라라 댄과 재혼했다.

나치 독일이 탄생하면서, 유대인이었던 폰 노이만은 가족 모두를 데리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당시 폰 노이만은 이름을 미국식 이름인 존(John)으로 개명했으며 독일식 귀족 이름인 'Von Neumann'을 택하게 되면서 미국인이 된다.

 

그가 1928년에 출판한 수학에 기초를 둔 ‘게임이론(game theory)’은 냉전 시절 미국과 소련의 관계를 ‘제로섬(zero sum)’으로 규정했다. 이 이론은 기존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개인의 최대 이익이 곧 전체의 최대 이익’이라는 고전 경제학의 입장을 완전히 뒤엎는 계기가 된다. 이후, 1944년 《게임 이론과 경제 행동》을 경제학자 오스카 모르겐 슈테른과 함께 저술했다. 이후로 게임 이론의 연구를 통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인물이 여러 번 나올 정도의 이 연구하나만으로도 기념비적인 연구였다.

《게임 이론과 경제 행동》와 경제학자 오스카 모르겐슈테른

맨해튼 프로젝트(2차 대전 당시 미국의 비밀 핵무기 개발 계획)의 구성원으로서, 플루토늄의 내파 비율(implosion rate)에 관한 그의 계산 방식은 원자탄을 개발한 핵 과학자들이 과거 수 차례나 실패한 실험을 교정해 주는 역할을 했다.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에서 있던 중 1943년부터 고폭발성 렌즈를 발명하기도 했다. ‘폭축 렌즈’라고도 하는데 이는 플루토늄을 이용한 팻 맨의 발명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었다. 2차 대전 중에는 영국 수학자 G.I. 테일러와 함께 폭발파(Blast wave)에 대해 최초로 연구했다.

사실 수많은 대단한 업적 중에서도 그의 최대 업적을 꼽으라면 현대의 컴퓨터 모델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덧셈, 뺄셈 같은 단순한 선형 문제를 푸는 것을 넘어서 다양한 변수가 포함된 복잡한 수학적 문제들을 계산해 실질적으로 사용 가능한 컴퓨터를 그가 최초로 개발한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1946년의 미국에서 내로라하던 두뇌집단인 프린스턴 대학의 학자들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던 혁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컴퓨터 연구에 뛰어든 이후로는 프로그램 내장 방식, 디지털, 이진법이라는 기본적인 이론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며, 순서도와 서브루틴, 몬테카를로 법을 최초로 사용했다. 지금도 전산학과에서 기본으로 배우는 병합 정렬(merge sort)을 1945년에 만들었고, 최초로 컴퓨터 기반의 pseudorandom process를 연구했으며 그 결과로 Middle-square method를 창시했다.

현대 컴퓨터의 CPU개념의 최초 설계

이러한 컴퓨터 기술을 연구하면서, 기상학과 관련해, 최초로 컴퓨터를 이용해 기상 예측을 시작한 사람 역시 폰 노이만이었다.

 

당시, 폰 노이만의 연구는 거의 미국의 군사기술 파트에서 비용을 지원했다. 그러나 폰 노이만은 전자두뇌(컴퓨터)의 능력을 군사기술이 아닌 진정한 현대 기술에서 구현하고 싶었다. 컴퓨터 개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IBM과 손을 잡게 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IBM은 그를 고문으로 채용한다.


이때부터 그의 컴퓨터 기술은 급진보를 맞이하게 된다. 1953년 세계 최초로 대량생산이 가능한 컴퓨터인 ‘IBM 650 자기 드럼 계산기’를 개발했다. 상표명 ‘빅 블루(Big Blue)’라는 이 신형 컴퓨터는 그 해만 450대가 팔렸고, 그가 죽고 난 뒤인 1961년까지도 컴퓨터 시장에서 80%가 넘는 점유율을 기록했다.

폰 노이만은 이외에도 물리학 생물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시간적이 문제로 증명과 활용범위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DNA, RNA의 구조를 최초로 예견하는 천재성을 보였다. 특히 1950년대에 이미 인공 생명을 이론적으로 연구하여, 생명체를 자기 자신을 복제해 번식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보고 순수하게 정보이론적 입장에서 ‘자기 복제’가 무엇인가를 연구했다.


말년에는 인공 지능과 인공 생명에 관한 초기 연구를 남겼다. 그는 간단한 원칙만으로 스스로 진화하는 복잡한 프로그램을 구상했고 이를 오토마톤이라고 칭했다. 1949년에 일리노이 대학교 어배너-섐페인에서 오토마톤에 대해 처음으로 강의를 했으며 나중에 Theory of self-reproducing automata를 발표했다. 폰 노이만이 만든 이 자기 복제 컴퓨터 프로그램은 세계 최초의 컴퓨터 바이러스라고 평가받는다.

폰 노이만은 1955년 어깨를 다치면서 자신이 골수암에 걸려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국방에 관한 여러 위원회에서 활약하고 있었으므로, 혼수상태에서 기밀을 누설할 경우에 대비해서 1급 기밀을 다룰 자격이 있는 공군 직원에게 간호(감시)를 받아야만 했다. 죽음은 폰 노이만에게 대단히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천재인 그는 자신의 병이 치유 불가능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자신이 곧 생각이라는 것을 못하게 될 것이라는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평생 불가지론적이었던 그가 진지하게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신부에게 도움을 구했다. 그러나 종교가 그에게 평안을 주지는 못했다. 또한, 그는 병의 영향으로 종종 치매상태에 빠졌고, 그것을 몹시 괴로워했다.


그가 죽기 얼마 전까지도 그의 병실에서는 회의가 열렸다. 그의 침대 주위에 그의 마지막 충고와 지혜를 한 마디라도 더 듣기 위해 국방부 장관과 각료들, 군 참모총장들과 보좌관들이 둘러서 있었다고 한다. 폰 노이만은 1957년 2월 그렇게 눈을 감았다. 향년 그의 나이 불과 53세였다.




노이만이 어느 정도 천재였는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일화가 남아 있지만, 두 가지 증언 정도가 그의 수준을 가늠하게 해 준다. 같은 헝가리 출신으로 10대 때부터 평생 폰 노이만과 가깝게 지냈던 유진 위그너는 노벨상을 받으며 기자에게 헝가리에 왜 그렇게 천재가 많으냐는 질문을 받자,(당시 헝가리 과학자들이 노벨상을 휩쓸던 시절이었다) 정색을 하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헝가리에 진정한 천재는 단 한 명뿐 폰 노이만 뿐입니다!”


당대 천재들을 모아놓았다는 프린스턴 연구소의 동료였던 골드슈타인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연구소에서는, 폰 노이만은 사실 반신(半神)인데, 사람들을 잘 관찰해서 인간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라고들 했다.”

 



도대체 이런 천재가 무슨 실패를 했고, 좌절을 했느냐고 묻고 싶겠지?

그가 모든 분야에서 천재적이긴 했지만, 특히 베이스를 수학에 두고 있다는 것은 이미 당신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런 수학의 천재가 겪은 실패를 어떻게 대처했는지 알려주마.

 

1920년대의 많은 수학자와 논리학자들은 수학의 논리적 기초를 확립하고자 노력했다. 러셀과 화이트헤드는 역작 ‘수학원리'를 통해 이 문제를 제시하고 탐구했다. 힐베르트는 소위 ‘힐베르트 프로그램’을 통해서 모든 수학적 진술은 올바른 방법으로 형식화되고 다루어진다면 반드시 참과 거짓을 결정하는 알고리듬이 존재할 것이라고 제창했다. 힐베르트 사단의 젊은 스타 폰 노이만도 당연히 이 문제를 파고들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1931년 빈의 한 젊은이가 발표한 결과가 그 모든 논의를 종식시키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젊은이는 바로 폰 노이만과 국적이 같고, 빈에서 공부한 쿠르트 괴델이었다.


괴델은 1931년 “참과 거짓을 판별할 수 없는 올바른 수학적 진술이 반드시 존재한다. 즉, 수학의 체계는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유명한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했다. 누구보다도 명민한 폰 노이만은 괴델의 증명이 갖는 의미를 바로 깨달았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이 이룩한 또 하나의 거대한 승리이면서, 동시에 폰 노이만이, 그리고 모든 수학자가 추구했던 이상이 무너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후 폰 노이만은 다시는 수학 기초론을 연구하지 않았으며, 괴델을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최고의 논리학자’라며 존경했다. 아마도 그 존경심에는 자신의 실패에 대한 실망감도 깃들여 있었을 것이다. 괴델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가 문을 연 1933년부터 고등연구소와 관련을 맺었고, 오스트리아가 제3제국에 병합되자 빈을 떠나 프린스턴으로 찾아와서 1940년부터 연구원으로 지냈다. 괴델이 고등연구소의 교수가 된 것은 1953년에 이르러서였는데, 고등연구소가 설립될 때부터 교수였던 폰 노이만은 종종 “괴델이 교수가 아니라면, 우리 중 누가 교수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곤 했다.

 

또 1937년, 미국 귀화 시민이 되고 나서 그는 당시의 2차 세계 대전에 도움을 주기 위해 중위 시험인 미국 육군의 장교 준비 제도 이사회(USAR)의 간부시험에 지원하였다. 그는 쉽게 시험을 통과하지만, 결국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최종 탈락하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34세였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연구를 인정받아, 폭발물 분야의 수학적 연구 전문가로 미국 해군에 대한 컨설팅 작업을 해달라는 요청을 역으로 받게 된다. 이 분야에서 그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큰 폭탄에 의한 피해는 폭탄이 지상에 떨어지기 전에 폭발했을 때 더 커질 것’이라는 것이 있다. 이 이론은 당신이 알다시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 폭탄에 바로 적용되었다.

 

자신의 분야도 아닌, 역사학에 있어서도 그의 지식은 웬만한 대학교수나 전문가들을 넘어서 있었다. 물론, 수십 년 살았던 그의 집 주방에 접시가 어디 있는가라던가 연구실부터 집에 이르기까지 엮어둔 열쇠 꾸러미 중에서 맞는 열쇠를 못 찾아 다시 발길을 돌리는, 자기가 관심이 없는 분야에 있어서는 백치미를 자랑하기도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후 역대 최고의 천재라고 나 역시 인정하는 폰 노이만은 천재이기 이전에 인간이었다. 아버지를 기쁘게 했던 기억으로 인해, 프린스턴 연구소에서 누구보다 파티 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아버지의 쭉 빠진 정장이 너무 맘에 들어, 그랜드 캐년을 놀러 갔을 때도 정장을 입고 갈 정도의 집착을 보인 허당미 넘치는 천재였다.

 

천재적 수학자들이 20대에 이미 천재성을 발휘하고 사그라드는 것에 반해, 그는 53세의 짧은 인생 내내 거의 전분야의 과학에 있어 3,40년은 앞선 기술을 세상에 내놓고 예견했다.

 



그의 삶을 모두 들쳐보고서도 그가 그저 당신이 범접할 수 없는 천재였다고만 느낀다면 당신은 앞서 이 시리즈 100편을 통해, 아무런 문해력의 발전도 거두지 못한 셈이니 다시 1편부터 공부할 것을 권한다.

 

물론 그가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였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열심히 자신의 재능을 갈고닦고 공부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 수많은 성과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단순한 천재적인 암기력만으로 그 모든 업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은, 지금의 인공지능이 아무리 데이터가 많아도 응용을 통한 훨씬 더 진보된 기술이나 연구를 내놓지 못하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는 부단히 보이지 않는 분야에서 노력했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이 더 부족한 것을 알게 된 수학에 몰입했고, 군 장교로 지원했으나 어이없이 나이 제한에 걸려 입대를 거부당했을 때도 더 노력해서 자신의 능력을 확실하게 피력했다.

당신은 어떤가?

당신의 능력을 조직에서, 그 상사가, 아니면 주변에서 알아주지 않는다고 쉽게 바로 접어버리지는 않았는가? 당신이 정말로 출중한 능력을 발휘했다면 당신이 그들의 눈에 들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그들이 당신을 찾게 된다.

언제나 차분히 돌이켜보면, 문제의 원인은 남에게 있지 않다.


당신이 폰 노이만처럼 천재적인 업적을 남길 수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당신이 당신의 한계를 긋는 순간, 당신은 그저 일반인 이하로 전락할 뿐이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당신의 능력으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당신이 늘 누군가에게 능력을 인정받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당신의 노력이 쌓인 것은 그 어디로도 갑자기 사라지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은 차곡히 쌓여 어느 순간 뾰족하고 높아 어디서 보더라도 눈에 띄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것은 어느 한순간이 아니다. 아주 많은, 그리고 꾸준한, 때론 지겹고 힘겨운 시간과 노력이 하염없이 들어갈 수 있다. 심지어 다른 높은 성과물에 가려져 안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당신이 어렵게 쌓은 그것은 결코 없어지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그 과정이 지난했을수록 그것은 더욱 견고하고 더욱 튼실하게 그 위용을 자랑하게 된다.


당신이 결코 그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그것을 지속 해내갈 수 있는 배짱과 용기와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지, 남들이 당신을 금세 알아봐 주지 않는다거나 시대가 당신을 알아봐 주지 않고 버린다는 문제는 내 짧지 않은 인생과 내 적지 않은 독서량에도 한 번도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당신만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게임이 끝났다고 막을 내릴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당신이 당신의 꿈과 당신의 지금 그 지루하고 힘든 노력이 결코 가치 없는 것이 아님을 잊지 않길 바라며 오늘 당신을 앞서간 천재 선배의 조언을 여기 두고 간다.

젊은이! 수학적으로는 자네는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네. 단지 익숙해지는 것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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