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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10. 2021

창업만 하면 말아먹어 CEO도 하기 싫었지만...

그래도 창업에 창업 끝에 '공유' 네트워크의 해결사에 등극하다

1976년 미국 캘리포니아 노스리지에서 태어났다. 20세기 초 미국으로 이주한 비엔나 유대인 출신이던 아버지는 매체에서 소매 광고 일을 했다. 부모세대에 오스트리아에서 이민 왔던 어머니는 토목 기사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했다. 10대에 이미 방문판매 회사의 칼을 팔러 다닌 경력이 있었다. 18살 때 생애 첫 창업을 했다. 미국 수학능력시험을 앞둔 동네 후배에게 수학을 가르쳤는데, 그 학생의 점수가 400점(당시 만점은 1600점이었다) 이상 오른 것이 계기였다. 


그 소문을 들은 학부모와 학생들이 너도나도 가르쳐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고 그는 결국 이름도 거창하게 ‘New Way Academy’라는 보습학원을 차렸다. 사업을 제안해 공동 창업한 사람은 한국인 친구의 아버지였다.

 

명문 UCLA에 입학하여 컴퓨터 공학과 경영 경제학을 전공하게 되지만, 중퇴한다. 그가 졸업을 하지 않고 중퇴했던 이유는 재학 시절 단행했던 창업의 실패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이어 ‘스카우어(Scour)’라는 회사를 설립, 결국 사업가의 길에 들어선다. ‘스카우어(Scour)’는 그의 나이 22세 때 세운 회사로, 음악 파일 공유 사이트 냅스터와 경쟁하는 P2P(Peer-to-Peer) 서비스였다. 하지만 2000년 29개 방송국과 영화사들, 그리고 미국영화협회(MPAA), 미국음반산업협회(RIAA), 전미음악출판협회(NMPA)에서 저작권 침해를 주장하며 2,500억 달러 규모의 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그는 파산신청을 하게 된다. 그렇게 첫 번째 싸움에서 졌다.

운송 네트워크 서비스 회사 우버(Uber)의 창립자이자, 경영자로 알려진 하지만 정작 2017년 자신이 창립한 우버(Uber)에서 쫓겨나 새로운 공유 경제개념으공유 주방 사업을 준비한다고 알려진, 트레비스 코델 캘러닉(Travis Cordell Kalanick)의 이야기이다.

 


 

이후 칼라닉은 곧바로 스쿠아 동업자인 마이클 토드와 ‘레드 스우시'(Red Swoosh)라는 파일공유 서비스 사업을 설립해 또다시 파일 공유 사이트와 콘텐츠 딜리버리 서비스를 시작했다. 


자신을 망하게 한 주체인 방송국·영화사들이 합법적으로 자료를 공유하도록 도와주는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다. 이전의 실패를 경험하고서도 실패에 주저앉지 않고 또한 자신을 실패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결국 자기편으로 만드는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불어닥친 닷컴 버블 붕괴 직후 회사가 출범하면서 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 결과, Red Swoosh는 월별 현금 흐름을 최소화하면서 운영되었으며, 2001년 8월까지 일부 직원들은 몇 달 동안 급여를 지불하지 못하는 사태까지 악화된다. 결국, Red Swoosh는 일상적인 운영에 자금을 대는 데 회사의 급여세 중 약 11만 달러를 사용하게 된다. 이 결정은 결국 공동 창업자인 마이클 토드와의 신뢰관계를 깨뜨리는 원인을 제공하여 캘러닉은 동업자를 떠나보내는 실패를 맞게 된다. 


그 후 캘러닉은 돈을 아끼기 위해 부모님 집으로 들어갔고, 정작 Red Swoosh에서 일하는 3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수입이 전혀 없는 지경에 이르른다. 2002년까지 Red Swoosh는 캘러닉과 전직 Scrow 엔지니어인 Evan Tsang 두 명의 직원만 남게 되었다. 그는 그 상황에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컨설팅을 비롯한 다른 일들을 전전하기도 했지만 결코 사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극적으로 2006년에는 처음으로 벤처캐피털로부터 펀딩에 성공, 오거스트 캐피털과 래디컬 인베스트먼트 2개의 회사로부터 약 170만 달러를 펀딩 받게 된다. 그 투자로 프로그래머들을 충원하고 형태를 갖춘 후 비용 절감을 위해 2006년 회사를 태국으로까지 옮기는 파격적인 시도까지 하면서 회사의 형태를 갖추고 유지하여, 겨우 칼라닉은 2007년 이 회사를 네트워크 컴퓨팅 경쟁사였던 아카마이 테크놀로지(Akamai Technologies)에 1900만 달러에 매각시키면서 백만장자가 됐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작은 규모에 속하지만 처음으로 자신이 만든 회사를 성공적으로 매각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캘러닉은 Red Swoosh를 매각하여 번 돈을 창업에 투자를 하는 일에 사용한다. 즉, 최초의 수학 1타 강사였던 센스와 그간 자신이 창업을 통해 얻은 경험을, 자신의 창업이 아닌, 창업을 하고자 하는 스타트업들을 리드하는 일종의 신생 기업 문제에 대한  ‘해결사’로서의 포지션을 새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직접 Expensify, Livefyre, Crowdflower, Formspring과 같은 기술 신생기업에 투자하기 시작한다. 


단순한 투자자의 포지션에 만족하지 못했던 그는 ‘잼 패드’라고 부르던 카스트로 디스트릭트 아파트를 젊은 기술 애호가들을 위한 비공식 살롱으로 내놓으며 경험과 정보를 취합하기 시작한다.

스칼렛 요한슨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나왔던 영화

연이은 사업 실패로 섣불리 자신의 사업을 시작할 수 없다는 트라우마에 힘든 시간을 보내던 그는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우디 앨런의 영화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Vicky Christina Barcelona)를 보게 된다. 이 작품으로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고 96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린 우디 앨런의 당시 나이가 이미 70대였다는 것을 통해 깨달음이 현타로 찾아온 칼라닉은 “나도 할 수 있다”는 강한 자극을 얻었다고 한다.

 

2009년, ‘스텀블어폰(StumbleUpon)’의 공동 설립자인 캐나다 기업가 개럿 캠프(Garrett Camp)와 함께 승차 공유 회사 Uber를 공동 설립하게 된다. 늘 캘러닉의 집에 놀러 왔던 캠프는 샌프란시스코의 택시 서비스에 좌절했고, 고급 검은색 자동차 서비스를 제공하는 운전사들을 고용하는 것이 불편하고 비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그는 사용자의 스마트폰에서 고급 차량을 직접 보낼 수 있는 스마트폰 앱의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개발하게 된다. 

그는 원래 ‘UberCab’이라고 불리는 회사의 ‘메가 어드바이저’ 역할을 하기로 동의한 캘러닉과 이 아이디어를 함께 키워나가기 시작한다. 실패와 파산의 트라우마 때문에 캠프도 캘러닉도 회사를 직접 운영하려 하지 않아 라이언 그레이브스라는 젊은 개발자를 CEO로 내세워 2010년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시작으로 이 서비스를 출시한다. 그렇게 시작된 실시간 모바일 운수 서비스 ‘우버’를 창업하면서 그는 성공의 첫 돌을 쌓는다.

 

사업이 성공궤도에 들자 캘러닉은 돌연 그레이브스에게 CEO 자리를 양보하라고 협박에 가까운 요구를 하게 된다. 얼굴마담이었던 그레이브스는 총괄 매니저에 만족해야 했고, 성공의 맛을 보게 된 캘러닉은 ‘공격적인 성향의 마초 CEO’로 우버를 들고 전 세계에 진출하게 된다.

우버를 경영하면서도 많은 실패가 있었다. 한국 시장에서도 성공했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가장 아픈 실패는 중국 시장에서 엄청난 손실을 입고 철수한 사건이다. 2016년 8월 1일 그는 임직원들에게 이런 이메일을 보냈다.


"기업가로서 성공하려면 가슴이 아닌 이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우버와 디디 추싱은 중국에 수십억 달러를 투입했기 때문에 반드시 수익을 내야 한다. 이것이 장기적으로 고객들에게 제대로 된 서비스를 하는 길이다." 


중국법인인 우버 차이나를 중국 토종 차량 호출 서비스 업체인 디디 추싱에 넘긴다는 뉴스가 나온 바로 그날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이메일에는 미사여구로 표현됐지만 중국에서 최대 경쟁업체였던 디디 추싱에 백기투항을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중국 사업 철수를 밝힌 셈이다.

그의 실리콘밸리에서 강력한 카리스마와 전투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마도 P2P 서비스를 할 때부터 많은 규제와 싸워야 했던 지난한 삶의 경험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추정된다.

 

우버의 또 다른 경쟁자인 리프트와의 승부에서 이기기 위해 손님으로 가장해 리프트에 탄 후 리프트의 운전자들을 우버로 스카우트한다든지, 리프트의 펀드레이징을 방해한 사례는 그의 공격적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면모를 아주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그래서였을까? 트럼프 행정부의 경제 자문위원을 맡겠다고 나서자 이에 반발한 사용자 20여만 명이 서비스를 탈퇴하는 해프닝이 벌어져 결국 5일 만에 자문직을 사퇴한 일이나 우버 기사와 가격 인하 정책에 대한 논쟁 중 막말을 한 동영상이 공개되며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스캔들과 문제를 끌고 다니는 실수를 범했다. ‘2014년 가장 섹시한 CEO’에 꼽히기도 했지만 남성잡지인 GQ와의 인터뷰를 통해 “여자를 꼬시는 건 정말 쉬운 일이다” 등의 발언이 여성 승객들의 안전에 대한 논란으로 번져가기도 했다. 심지어 우버를 비판하는 기자를 사찰하겠다고 한 우버 간부의 발언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미국의 한 매체가 그를 두고 “매사를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이기주의자’면서 지칠 줄 모르는 수완가”라고 표현한 것만 봐도 이제 그는 국제적인 밉상이 됐다.

 

그럼에도 그는 눈치를 보거나 몸을 사리지 않았다. 트래비스 칼라닉은 인터뷰에서 “수도꼭지를 틀면 바로 물이 나오듯, 전 세계 어디서든 버튼만 누르면 5분 안에 고급 차부터 릭샤(인력거)까지 탈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라면서 “우리는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을 수송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칼라닉의 최종 목표는 “사람들이 직접 운전대를 잡을 일이 없게 하는 것”이라고 하며 공격적인 경영을 계속했다.

그렇게 공격적으로 중국을 공략했지만, 중국 정부의 자국 기업 양성과 베끼기 신공에 밀려 디디에 백기를 들고 쫓겨나야만 했고, 제대로 직원 관리와 성차별 성희롱에 대한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했던 스캔들이 트리거가 되면서 2017년 주주들에 의해 자신이 창립한 회사에서 거창하게 쫓겨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그는 훌륭한 사업가면서 혁신 아이콘으로 불렸지만 기업 경영에서는 낙인이 찍힌 실패자로 기억된다. 스티브 잡스가 자신이 세운 애플에서 쫓겨났듯이 그도 어쩔 수 없이 우버를 떠나야 했다. 주주들이 그를 몰아냈던 것이다. 물론 이유는 완전히 다르다. 잡스는 실적 악화를 책임지고 물러났지만 캘러닉은 사내에서 발생한 성차별과 성희롱 때문에 쫓겨났다. 우버를 나왔지만 그의 사업 본능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버 주식을 팔아 확보한 자금으로 벤처 펀드를 설립하는가 하면 부동산을 구입하기도 했다. 클라우드 키친 사업을 위해 관련 벤처기업을 인수했다.

창업자의 생애를 통해 드러난 우버의 실체는 절대로 단순한 콜택시 업체가 아니었다. 그는 시장을 지배하던 규제와 싸우며 기존 질서를 부수는데 두려움이 없었다. 그는 망(net)으로 연결된 세상을 활용해 억만장자가 됐다. 파일 공유, 교통 공유 등 공유 서비스를 개발해 파산과 실패를 거듭했지만 늘 첨단 정보기술(IT)을 활용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버는 새로운 운송 시스템이며 공유경제의 신모델인데 그치지 않는다. 우버는 새로운 제3의 산업을 탄생케 하는 기술 플랫폼이다. 우버가 새로 나온 택시 애플리케이션에 불과했다면 구글과 아마존이 투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오늘 이 오만하고 성질 고약한, 파괴적이면서 혁신적인, 섹시하지만 무신경하기 이를 데 없는 ‘문제적 CEO’를 당신에게 소개하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그는 아직 50도 되지 않았다. 그의 인생 자체가 파란만장 칠전팔기이고, 아직 그의 인생이 완성된 것이 아니기에 그가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마초 경영으로 문제를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그의 이후 인생이 어떻게 또 반전을 일으킬 것인가 많은 전문가들의 이목을 주목시키지 때문이다.

그가 획기적인 제기 아이팀을 가지고 요 근래 한국을 직접 찾았었다. 이른바 ‘공유 주방’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사업을 한국에서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서울의 한 호텔에서 사업 설명회도 열었다. 비공식으로 진행됐지만 100명 가까이 참석했고 언론의 관심도 높았다. 신사업 이름은 클라우드 키친(cloud kitchen)이었다.

 

구글과 아마존 등 글로벌 정보기술(IT) 업체들이 서버를 기업들에 빌려주는 사업을 클라우드 서비스라고 한다. 이 개념을 음식점에 원용해 대규모 주방과 요리사를 확보한 뒤 레스토랑에 제공하겠다는 게 클라우드 키친의 사업 내용이다. 이를 위해 건물 수십 개를 사들여 전체를 공유 주방으로 만들겠다는 것인데 성공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캘러닉은 클라우드 키친이 정착되면 요리사뿐 아니라 식당 인테리어나 서빙 인력을 줄일 수 있고, 이는 고스란히 음식 수준을 높이고 가격을 낮추는 데 쓸 수 있어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그는 수많은 실패를 겪었다. 그리고 그 실패가 두려워 제대로 창업을 하지 못하는 시기를 겪었고, 그렇게 어렵게 성공을 했지만, 제대로 경영관리를 하지 못해, 큰 전쟁에서 또 졌다. 하지만 그가 져서 죽었다면 어쩔 수 없을지 몰라도 그는 결코 죽지 않았고, 죽지 않은 이상 그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수많은 전문가들은 그의 행보를 주목하는 것이다.

 

당신이 창업을 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이미 한번 혹은 몇 번 해서 말아먹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다시 월급쟁이로 돌아와 숨을 고르고 다시는 창업은 할 게 못된다며 주변에서 누가 창업이라도 할라치면 도시락을 들고 다니며 말릴 거라며 혀를 내두를 수도 있다.

 

하지만, 실패는 누구나 한다. 그 실패로 수천수억에 해당하는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캘러닉의 50도 되지 않은 파란만장한 창업 인생만 보더라도 결코 쉽게 회복할만한 작은 실패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다음 판은 이전판보다 언제나 더 커져있었고 그는 그 와중에 40도 되기 전에 포브스 세계 억만장자 리스크에 이름을 올렸다.

자세히 살펴보면 알겠지만, 그가 자신의 아이디어로 오로지 독자적으로 혼자서 뭔가를 일으켜 세운 적은 없었다. 심지어 우버마저도 파산이 겁난다며 최고경영자를 맡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 흐름을 통해, 그 실패들을 통해 그는 이제 ‘공유’라는 개념이 어떻게 사회의 필요에 응하는지를 확실하게 감을 잡은 듯해 보인다.

성공을 했던 실패를 했던 많이 해본 사람만큼, 그것을 직접 경험해본 사람만한 전문가가 없는 것이다. 당신이 실패를 많이 했다면 당신은 그만한 자산을 이미 축적하고 있는 셈이다.

당신이 실패만 잔뜩 모았고, 돈은 모으지 못했다고 자신을 탓하기 전에 당신의 실패가 정말로 당신에게 빚과 멍만 남겨두었는지를 다시 한번 차분히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당신이 직접 낸 아이디어가 아니어도 된다. 당신이 모든 투자자들을 끌고 오지 않아도 된다.

당신에게는 그것을 이루고자 했던 꿈과 정열이 있었고, 실패를 했지만, 무엇 때문에 실패를 했는지 최소한 지금은 확실하게 복기(復碁)가 되어 있어야 한다.


실패는 누구나 하지만, 그 실패를 통해 성장하는 사람은 극히 적다.

그래서 당신의 눈에도 성공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로 보이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하다.

실패를 통해서 공부하고 복기하며 그다음을 꿈꾸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아무나인가?


당신이 오직 이 세상에 하나뿐인 독보적인 사람이길 바란다면,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당신 자신밖에 없고, 당신의 의지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 인지하고 일어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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