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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11. 2021

20년간 구직활동만 하고서도 결국 백수가 되었지만...

음악사의 유일무이한 신동으로 불세출의 작곡가로 인정받다.

1756년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잘츠부르크에서 3남 4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형제자매가 7명이나 된다고 생각되어 많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형제는 누나인 마리아 아나 발부르가 이그나티아 모차르트(Maria Anna Walburga Ignatia Mozart(통칭 Nannerl, 1751~1829)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이, 나머지 형제 5명은 모두 유아기 넘기지 못하고 일찍 사망했다.


음악가이자 바이올린 선생이던 엄한 아버지에게 누나 난네를이 혼나가며 음악을 배우는 것을 보면서 걸음마를 뗐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수학적인 재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3세 때 클라비어 연주를 터득했고 5살 때 이미 작곡을 시작했다. 5살 차이 나던 누나의 수준은 이미 그즈음에 추월했다.

음악으로 밥벌이를 하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흥분해서 주변 친구들에게 자랑했었는데, 그저 허풍이 잔뜩 섞인 자식 자랑 정도로 생각하고 믿지 않았던 이들은, 나중에 집에 놀러 갔다가 그 천부적인 음악 능력을 직접 보고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작곡된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모차르트가 즉흥적으로 연주하거나 흥얼거린 것을 그의 아버지가 일일이 악보로 옮겨 놓은 것이 남아있게 된 것들이다.

7살 당시 그려진 초상화

아버지는 아들의 작곡 능력을 확인하고는 스스로 작곡하기를 그만두고 아들의 피아노와 바이올린 교육에만 전념하는 것으로 삶의 목표를 집중한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의 나이 불과 6살이 되던 1762년, 온 가족을 이끌고 유럽 연주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이 음악 유랑 여행은 무려 10년이나 계속된다. 음악 신동인 아들을 유럽 각지에 알리기 위한 것에서 시작된 이 여행의 패턴은, 가는 곳마다 유명하다는 음악가를 찾아 아들에게 한 수 음악을 지도해달라며 선보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음악가로, 바흐, 베토벤과 더불어 클래식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음악의 신동(神童)’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의 이야기이다.

 

클래식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정규 교육을 받은 이들이라면 음악 시간을 통해 너무도 익숙한 음율을 작곡한 사람이라서 그 이름을 모르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워낙 뛰어난 음악세계를 구축했더 터라, 음악사에 있어 가장 재능이 뛰어났던 불세출의 천재로 인정받고 있다.


35년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작품 수만 무려 쾨헬 번호(K.) 626편에 이르는 작곡을 완성시킨 어마어마한 노력하는 천재로, 그저 많은 곡을 작곡한 수준이 아닌 대다수의 작품들이 음악성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최고의 수준이기에 클래식 음악은 그의 활동기 전과 후로 나뉜다는 농담까지 있을 정도의 독보적인 존재되시겠다.

 

가장 그의 천재성이 높이 평가되는 부분은, 장르와 형식을 가리지 않고 거의 음악적인 부분의 전부분에 걸쳐 최고 수준의 자취를 남겼다는 점이다. 기악곡의 경우 독주곡, 실내악, 협주곡, 교향곡과 같은 다양한 음악 장르에서 (첼로나 트럼펫 정도를 제외하고) 특정 악기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악기를 위한 작품 및 다양한 악기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작품을 남겼으며, 성악곡의 경우에도 독창, 합창, 오페라, 종교음악 등에 이르는 거의 모든 장르에서 역사적인 명작들을 단 35년간의 짧은 삶 동안, 남겨 그가 왜 불세출의 천재인지를 의심에 여지없이 입증했다.

첫 번째 여행에서 어린 모차르트는 뮌헨으로 가서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 앞에서 연주를 선보였으며, 이어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쇤부른 궁정을 방문해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앞에서 신기에 가까운 연주 솜씨를 선보였고 다시 프라하를 방문하였다. 빈의 궁정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딸이자 비운의 여인이 된 마리 앙투아네트까지 알현하였다.

 

이듬해에는 3년 반에 걸친 긴 2차 연주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첫 번째 여행이 신동 모차르트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 여행의 목적은, 모차르트가 좀 더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음악가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는, 현실적인 목표가 있었다. 다만, 여행경비가 늘 부족하여 가는 곳마다 지역 귀족들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고, 원인 모를 풍토병에 걸려 가족 모두가 비명횡사할 위기까지 겪어야만 했다.


이 여행에서는 파리에서 당시 전도유망한 쳄발로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던 요한 쇼베르트(Johann Schobert)를 비롯한 유명 작곡가들에게 본격적인 작곡 지도를 받아 모차르트의 천재성이 비약적인 발전을 맞이하게 된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런던에 갔을 때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아들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에게 작곡법을 배웠는데, 이 가르침은 이후 모차르트의 기악곡, 특히 교향곡과 협주곡의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유명했던 카스트라토 가수, 지오반니 만추올리(Giovanni Manzuoli)에게 성악도 배웠는데, 모차르트는 성악에서도 매우 특출한 능력을 보여줬으며 변성기 전까지는 종종 교회 행사나 공연에서 보이소프라노로 활약하기도 했다.

 

너무 고생을 한 탓일까? 1769년 12월부터 3년간 계속된 연주여행은 아버지와 아들, 둘만으로 이루어져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떠나게 된다. 계획했던 대로 이 여행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 덕분에 모차르트는 훗날 당대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가 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1770년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에서, 그레고리오 알레그리(Gregorio Allegri)의 종교음악인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Miserere)>를 2번만 듣고 그대로 악보에 옮겨 적는 신기에 가까운 묘기로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왜냐하면, 당시 바티칸에서는 종교음악의 악보를 유출시킬 경우, 파문에 처할 정도로 엄격히 악보를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당시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모차르트를 신성모독으로 처벌하긴 커녕, 그의 재능을 크게 칭찬하고 황금 박차 기사단(Chivalric Order of the Golden Spur)이라는 근사한 칭호도 수여하였다.

황금 박차 훈장을 달고 있는 모차르트. (1777년)

같은 해 밀라노에서는 드디어 모차르트 최초의 본격 오페라라고 할 수 있는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Mitridate, re di Ponto, K. 87)>가 공국 왕립 극장(Teatro Regio Ducal)에서 초연되었는데, 14살밖에 안된 소년 작곡가의 작품임에도 무려 21회나 상연될 정도로 당시로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성공 덕분에 모차르트는 공국 왕립 극장에서 주기적으로 작곡을 의뢰받아 <알바의 아스카니오(Ascanio in Alba 1771, K.111)>, <루치오 실라(Lucio Silla 1772, K.135)> 같은 오페라들을 잇따라 작곡하게 된다.

 

그 덕에 당시 밀라노의 통치자였던 페르디난트 대공(Archduke Ferdinand Karl of Austria-Este, Governor of the Duchy of Milan)이 모차르트를 궁정음악가로 고용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페르디난트 대공의 모친 마리아 테레지아가 이 채용을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결국 모차르트의 취업은 성사되지 못했다.

 

그렇게 10년이나 유럽 전역을 돌며 고생했지만, 그 명성에 어울리지 못하게 구직활동에도 실패하고 돈을 벌지도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온 모차르트는 어느덧 17살이 된다.

이미 명성으로는 유럽 클래스였던 그가 안착하기에 그의 고향 잘츠부르크는 너무도 무대가 작았다. 곡을 완성하더라도 그것을 상연할 만한 마땅한 극장도 그것을 보러 찾아올 관객들조차 없는 소규모 도시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현재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설상가상으로 새로 잘츠부르크 영주로 부임한 히에로니무스 콜레레도 대주교(Archbishop Hieronymus von Colloredo)는 전임 영주와는 달리, 음악적 애정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때문에 음악가들에 대한 처우도 상당히 박했다. 젊은 모차르트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대주교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았고 그와 자주 충돌했다.

 

결국 모차르트는 박봉의 본업을 사실상 비워두고 제대로 다른 직장을 구하기 위한 구직활동에 열을 올린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1774년 9월에 다시 빈을 방문했고 1달 후에는 뮌헨을 방문했다. 모차르트의 명성을 잘 알고 있던 뮌헨의 막시밀리안 선제후는 모차르트에게 대위법이 돋보이는 모테트 하나를 써보라고 권했는데 그는 3일 만에 작곡해서 바쳤다. 뮌헨의 선제후는 모차르트의 음악에 상당히 관심을 보이기는 했지만 끝내 자리를 제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1777년에는 아예 잘츠부르크 궁정음악가 자리를 사임해 버리고 어머니와 함께 다시 뮌헨으로 갔다. 하지만 뮌헨에서는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에서 고용주와 마찰을 빚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막시밀리안 선제후의 태도는 3년 전보다 더 냉랭했다. 그는 모차르트에게 일단 이탈리아로 가서 오페라 작곡가로 성공하라는 등의 뜬금없는 조언만 하고 돌려보냈다.

낙담한 모차르트 모자는 만하임으로 떠났다. 만하임에는 유서 깊은 교향악단이 있었고, 모차르트는 이 악단에 취직하고 싶어, 카를 테어도어 선제후에게 청원을 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이 시기, 소프라노 가수로 데뷔를 준비하고 있던 17세의 소녀 알로이지아 베버(Aloysia Weber)를 만나 그녀의 음악 선생이 되었는데, 둘은 곧 사랑에 빠졌으며 모차르트는 청혼까지 하며 가정을 이룰 뻔했다.

 

모차르트가 만하임에서 일만 잘 풀렸더라면 두 사람은 큰 문제없이 결혼했을 뻔했다. 하지만 박봉이던 직장도 때려치우고 제대로 돈벌이도 못해 상당히 많은 빚을 진 상태에서 결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아들의 출세에만 목을 매고 있던 아버지의 간곡한 만류로 일단 연애감정을 접고 구직을 위해 다시 프랑스 파리로 떠나게 된다. 파리에는 든든한 후원자였던 멜히오르 폰 그림 남작이 돈을 빌려주고 구직을 위해 높은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첫사랑, 알로이지아 베버(Aloysia Weber)

하지만 파리에서의 구직도 결국엔 실패한다. 음악 선생이나 연주 및 작곡 알바로 돈을 충당하면서 6개월간 나름 열심히 구직활동을 했지만 베르사유 궁전의 오르가니스트같은 내키지 않는 제안만 들어왔으며 설상가상으로 모차르트와 동행했던 그의 어머니가 전염병에 걸려 급사하는 비극까지 벌어지고 만다. 결국 모차르트는 파리에서도 안정된 직장을 얻지 못하고 파리 교향곡 같은 몇몇 작품만 남긴 채 쓸쓸하게 파리를 떠나야만 했다.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딱히 외국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아내마저 허무하게 잃게 되자, 모차르트에게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제안했다. 레오폴트는 지역 귀족들에게 매달리듯 설득하여 연봉 450 플로린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아냈고 콜로레도 대주교로부터는 다른 지역으로부터 초청이 있을 경우 출장을 허락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며 모차르트의 귀향을 종용했다. 그렇게 모차르트는 다시 잘츠부르크로 돌아오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잘츠부르크로 복귀했으나 고향의 사정은 여전히 암울했다. 월급은 쥐꼬리만큼 올랐지만 콜로레도 대주교는 여전히 빡빡했고, 음악 환경은 변함없이 열악했다.

 

오페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차르트는 일종의 외주를 받아서 오페라 작곡을 계속 시도했다. 1781년 3월, 모차르트는 신성 로마 제위를 계승한 요제프 2세(Joseph II)의 대관식에 자신의 고용주인 콜로레도 대주교를 따라 참석하게 된다. 여기서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받는 연봉의 절반이 넘는 액수를 제안받고 황제 앞에서 연주하려고 했는데, 콜로레도 대주교가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진다. 자신을 하인으로 취급하면서 사사건건 간섭하는 콜로레도 대주교에게 오만 정이 떨어진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로 돌아온 즉시 사표를 제출하고 다시 백수가 된다.

뮤지컬 <모차르트>의 공연 모습

그렇게 아버지가 어렵게 얻은 일자리를 걷어찬 모차르트는 아버지와도 사이가 벌어지는데, 혈기 넘치던 25세의 청년 모차르트는 빈으로 떠나버린다. 이후 귀족이나 왕족들에게 굽신거리는 인생이 지긋지긋하던 모차르트는 과감하게 프리랜서 작곡가의 길을 선택한다.

 

그러던 중 모차르트는, 빈에서 옛 연인 알로이지아의 집안에서 하숙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잠시만 머물 생각으로 숙소를 옮겼다. 옛사랑 알로이지아는 이미 요셉 랑게라는 연극배우와 결혼하여 따로 살고 있었고, 그녀의 두 여동생 콘스탄체와 조피가 하숙집에 살고 있었는데, 모차르트는 이 쾌활한 소녀들과 너무 재미있게 지낸 나머지 잠시 머물려던 계획을 바꾸어 계속 하숙집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다가 콘스탄체와는 재미있게 지내는 사이를 넘어 연인으로 발전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져 결국 결혼 약속을 하는데, 문제는 양가의 부모였다. 일단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이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하지만, 아버지와는 이미 갈등 중이었고, 장모는 모차르트가 빈에서 나름 잘 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 생각을 바꿔 결혼을 부추겼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1782년 모차르트는 가족의 참석도 없이 결혼을 하게 된다.

아내 콘스탄체

빈에 온 모차르트의 음악인생은 상당히 순조로웠다. 빈에 오자마자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각광을 받았으며 제자도 생겼다. 1781년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자신보다 4살 위이며 모차르트보다 앞서 빈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무치오 클레멘티와 피아노 배틀을 벌였는데, 여기서 사실상 승리하면서 '빈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는 명성도 얻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빈에서 음악적으로 자신을 도와줄 사람들도 여럿 만났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고트프리트 판 즈비텐(Gottfried van Swieten)과 요제프 하이든이었다. 장서가이자 외교관이었던 즈비텐은 바흐, 헨델, 텔레만을 비롯한 바로크 음악가들의 악보 사본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기에, 모차르트는 즈비텐의 배려로 이 사본들을 열람할 수 있었는데, 이 때 모차르트는 바로크 특유의 정교한 대위법과 유려한 합창, 성악 처리법을 통해 또 한 번의 발전 기회를 잡게 된다. 모차르트는 즈비텐이 보유한 바로크 거장들의 악보들을 베끼고 피아노로 연주해 보면서 열심히 공부했으며, 이후 모차르트의 중요한 작품 상당수에서 이때 익힌 대위법 수법이 반영된다.

1784년에는 빈에 들른 하이든을 만났는데 두 거장은 서로의 음악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24살의 나이 차이를 딛고 금세 친구가 되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아버지에게 ‘당신의 아들은 명성으로 보나 저의 경험으로 보나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가입니다.’라는 찬사를 담은 편지를 보냈으며 모차르트는 모차르트대로 하이든의 영향과 앞서 언급한 대위법적인 전개 수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6곡의 하이든 4중주를 3년에 걸쳐 작곡하여 차례로 하이든에게 헌정하였다.

 

이렇게 빈에서 명성을 얻었으면서 유독 자신이 그토록 애착을 가졌던 오페라에서 지지부진했던 이유는, 피아노 연주자로 바쁘게 활동했던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좋은 오페라 대본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높이를 맞춰줄 만한 대본작가로 베니스 출신의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가 있었는데, 워낙 의뢰가 밀려 있어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 2년 만에 어렵게 다 폰테로부터 받아 든 대본이 바로 보마르셰의 희곡을 오페라용으로 각색한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이었다. 모처럼 마음에 쏙 드는 대본을 받아 쥔 모차르트는 즉시 작곡에 착수하였고 1786년 드디어 야심작이 완성되어 무대에 올려졌다.

 

오페라 역사에 큰 획을 하나 그은 이 작품은 빈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모차르트가 방문한 프라하에서는 더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모차르트의 음악은 빈을 넘어 독일 지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말 그대로 제대로 된 직장도 구하지 못하다가 처음으로 빅히트를 친 것이었다.

 

이후 모차르트는 보헤미아의 왕이자 요절한 요제프 2세의 후임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레오폴트 2세(Leopold II)의 대관식 축제에 맞추어 프라하에서 오페라 <티토왕의 자비(La Clemenza di Tito)>를 상연하였는데 이때부터 병을 얻어 상당한 고열에 시달렸다.

오페라 <마술피리> 공연 장면

모차르트는 아픈 몸을 돌볼 새도 없이 9월 30일에는 빈에서 자신의 마지막 오페라가 된 <마술피리>를 초연했다. <마술피리>의 초연은 성공적이었으나 이와 별도로 그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쉬지 못하고 진혼곡의 작곡에 매달려야 했다. 이 진혼곡은 당시 28살의 젊은 귀족이었던 프란츠 폰 발제그(Franz von Walstegg) 백작이 거액을 주고 20살에 죽은 자기 아내를 애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곡을 의뢰한 것이다. 모차르트는 작곡료의 절반을 미리 당겨 받고 빠른 시일 내에 완성해 달라는 독촉을 받았는데 건강이 악화되는 바람에 작곡에 속도를 내기 힘들었다.

모차르트는 11월 20일에 고열과 부종에 시달리다가 급기야 구토를 하면서 쓰러졌고, 아내와 처제(조피)가 그를 간호하고 가족 주치의에게 치료를 맡겼으나 차도는 없었다. 결국 그는 1791년 진혼곡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 진혼곡은 결국 자신을 위한 곡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굳이 다른 인물의 삶에 비해 이렇게 많은 분량을 할애하면서까지 그의 결국 성공하지 못했던 구직활동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6살에 시작된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은 20년 가까이 이어졌다. 그는 20대 중반이 넘어서야 겨우 빈에 정착했다. 이후 오페라에 전념, ‘후궁으로부터의 도주’(1782) ‘피가로의 결혼’(1784) ‘돈 조반니’(1787) 등 명작을 남겼다. 명성과 함께 수입도 늘었지만 보석과 고급 옷, 파이프 담배 등을 탐닉하면서 자신보다 더 낭비벽이 심했던 아내와 함께 수입은 많지만 늘 쪼들려 사는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페라 27곡, 교향곡 67곡 등 600여 편의 작품을 세상에 선물하고 35살의 젊은 나이게 세상을 떠난 음악신동의 지난한 삶을 보면서, 당신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가?

 

 몇 년 새 ‘헬조선’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이대남(20대 남자)들이 제대로 취업을 할 수도 없고 돈을 모아 집을 장만하고 결혼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현실에 낙담하며, 정부를 욕하고, 기성세대를 ‘꼰대’라고 욕하는 것을 넘어서 마치 아버지 세대가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았던 세대인 양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며 욕을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미 6살에 첫 번째 유럽 투어를 통해 불세출의 음악 천재임을 전 유럽에 알렸던 그가 왜 제대로 된 직장 하나 구하지 못하고 20여 년을 떠돌이 풍악 쟁이로 떠돌아야만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 시대는 이대만이 말하는 기성세대보다 훨씬 더 윗세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가장 그의 모습에 가까운 것으로 남은 초상화

다양한 이유를 댈 수 있다. 내가 지금 말하려고 하는 것은 당시 유럽의 시대상이나 천재를 대했던 특별한 사회학적 의미가 아니다. 음악에 문외한인 당신조차도 이름과 음악을 기억하는 그 불세출의 천재가 당대에 천재성을 인정받지 못한 것도 아닌데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길거리를 전전했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가 취했던 삶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고자 함이다.

 

그는 그 지난한 과정을 거치고, 귀족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굴욕적인 아버지를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라왔으면서도 결코 현실에 영합하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시도했고 끊임없이 노력했고, 끊임없이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워가며 발전을 거듭했다. 그가 계속 연봉이 높은 회사에서 스카우트되지 못했지만, 그는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누구도 넘보지 못할 위치를 차지하기까지 자신의 천재성에 의존하며 나태하지 않았고, 우연한 기회에 어쩌다 눈먼 후원자를 만나 세월을 탕진한 적이 없었다.

 

태어나서 천재는 고사하고 상위 10%에도 들어보지 못했던 당신이 지금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했거나 당신의 마음에 썩 드는 직장을 구하지 못해, 이것은 내 삶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사는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극복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이번 생은 글렀으니까 그냥 이렇게 살다가 다음 생에 다이아몬드 수저를 입에 물고 나올 것을 기대하고 있는가?


그럼 굳이 그렇게 고생스러운 이번 생을 끝까지 보지 말고 얼른 접시에 물을 담아와서 코를 담아와 ‘GAME OVER’를 외치고 얼른 가라.

 

당신의 그 안일하고 루즈한 정신상태로 어떻게 당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먹여 살릴 수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 당신을 세상에 멀쩡하게 건강한 사람으로 내어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할 것이란 말인가?

천재였던, 그것도 그 동네 천재도 아닌, 음악사에 자신의 발자국을 또렷이 남긴 저 모차르트마저 20여 년을 구직활동만 하다가 결국 자신이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나서 히트작을 내면서 전문직의 길을 걸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구직활동을 20여 년 동안을 천재라는 이름 뒤에 숨어 인생을 탕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범인(凡人)인 당신이 고작 대학입시에 실패하거나 취업을 하지 못해 휴학하고 고작 한다는 것이 몇 푼 버는 알바인가? 그 알바가 무엇을 위함인가? 당신이 과연 당신의 인생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당신 스스로에게 물어봐라.


당신이 오늘 돋보기를 들이대고 꼼꼼히 살펴본 저 천재 모차르트의 삶을 보고 나서도 당신이 그간 얼마나 애들처럼 그저 칭얼거리기만 했던가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 깨달음을 통해 당신의 삶에 대한 자세를 바로잡지 못한다면, 이제 당신의 미래는 그야말로 답이 없게 된다.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면 깨달으면 되고 깨달았다면 고치면 된다.

당신의 인생이 모두 끝난 것이 아니고, 아직 남은 당신의 인생이 이제까지 살아왔던 인생보다 훨씬 더 길기 때문이다.


35년만 살다 간 천재의 삶을 보면서 다시 한번 당신의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길 바란다.


그리고 당신다운,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당신만의 미래를 만들어나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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