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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12. 2021

고등학교 중퇴하고 바람피워 이혼을 3번이나 하고서도..

세계 최초로 ‘아이돌’이라는 단어로 추앙받는 주인공으로 기억되다.

1915년 미국 뉴저지주 호보켄에서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인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출산 당시 엄마는 키가 5피트도 안되었었는데 아기가 너무 커서 아기의 고막에 구멍을 내고 꺼냈지만 숨을 쉬지 않아 아기가 숨을 쉴 때까지 산파였던 할머니가 차가운 물속에 담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막의 상처는 평생이 갈 정도의 큰 상처를 남겼다.

 

호보켄은 작은 이탈리아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많이 살았다. 그의 부모는 술집을 운영했는데, 술이 필요하고 보호가 필요했던 그들은 금주법이 시행되던 당시 이탈리아계 조직 폭력배들과 결탁해 주류 밀매 활동을 했다. 아이는 불가피하게 부모의 술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자란 탓에 상당히 선정적이고 위험하며 폭력적인 환경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또래들보다 비교적 풍족하게 자랐지만, 부모의 사랑이나 관심을 받을 수 없었다. 늘 바쁘다는 이유로 아이를 할머니에게 맡겨둔 탓에 그는 학교에서 내내 문제아였다. 

어렸을 때부터 노래 부르는 재질이 뛰어나 고교 때는 교내 합창단을 조직하기도 했으나 거친 아이들과 어울리며 도둑질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고등학교 생활 1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불미스럽게 학교를 중퇴하게 되었다. 

집안의 경제적인 형편은 상당히 부유한 편에 속했지만, 고등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한 소년에게 직업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삼촌의 소개로 조선소를 나가기 시작해서 창고의 짐을 나르는 짐군, 신문을 나르는 트럭 운전사, 스포츠 기고가로 활약했다. 그러다가 대공황에 거의 모든 미국인들이 실직하게 된다

 

빙 크로즈비를 우상으로 삼았던 소년은 대공황기를 맞던 1920년대 후반부터 가수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부모에게 65달러를 빌려 석회암이 덮인 케이스에 있는 휴대용 사운드 시스템을 구입해서 고향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아들이 망상에 빠졌다고 크게 화를 내며 아들을 집에서 내쫓았다. 


이에 고향을 떠나 뉴욕으로 간 그는 음악인들이 많이 모이는 52번가의 클럽들을 드나들면서 빌리 홀리데이, 베니 굿맨, 토미 도시, 에델 워터스 같은 이들로부터 음악적 영향을 받으며 실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지방 신문의 스포츠 기자로 일하던 그는, 1935년 스리 플래시즈(Three Flashes)라는 지역 음악팀에 합류하면서 기회를 잡게 된다. 얼마 뒤 그룹 이름도 호보켄 포(Hoboken Four)로 바뀌었다. 그는 이 그룹에서 가장 두드러진 존재였고, 순회공연을 하면서 제법 유명인으로 대우받았다. 그러나 그의 특별한 인기와 여자들과의 교제 때문에 동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3개월 뒤 순회공연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결국 이 경험은 그에게 강하게 ‘진짜’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확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중음악 역사상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음악가 중 한 명이자 20세기 대중문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타가 공인하는 가수 프랜시스 앨버트 프랭크 시나트라(Francis Albert Frank Sinatra)의 이야기이다.

 

그는 빙 크로스비와 함께 20세기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최고의 엔터테이너였으며 가수로서는 1940년대와 1950년대의 스탠더드 팝의 중흥기를 이끈 상징이자 영미권 대중음악사상 최초의 국민가수로 1970년대 일본에서 ‘아이돌’이라는 호칭으로 처음 불렸던, 시대의 아이콘이라 할 만한 인물이다.

 

20세기 중반, 음악과 영화계 양쪽에서 모두 최고 수준에 오른 인물로 음악가로서의 인기를 치면 동시대에서 가장 뛰어난 수준이었고, 영화배우로서 단기간 그보다 높은 인기를 자랑한 영화배우는 많지만, 음악과 영화계 모두에서 시나트라는 최고봉에 오른 인물이므로 대중문화계 전반에 미친 영향을 치자면 미국 대중문화계에서 가히 절대적인 자리에 위치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기회는 1939년 ‘러스틱 캐빈’이라는 업소에서 가수 겸 웨이터로 일할 때 찾아왔다. 트럼펫 연주자인 해리 제임스가 시나트라가 노래하는 것을 우연히 듣고 자신의 밴드에 합류하기를 제안했던 것이다. 제임스 밴드와 함께함으로써 시나트라는 대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어도 도약할 수 있는 계기는 마련했다.

 

세 번째 기회는 1940년 토미 도시 밴드와 함께함으로써 찾아왔다. 시나트라보다 열 살이 많았던 토미 도시는 뛰어난 트럼본 연주자이자 천부적 사업 능력을 겸비한 스타 제조기였다. 


시나트라는 “토미는 노래에 대해 내가 아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다”고 기억했다. 이때부터 시나트라는 미국 음악계에서 슬슬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며 팬덤을 만들어낸다. 당시 그가 불렀던 노래 중 〈I'll Never Smile Again〉은 12주 동안 인기 순위를 석권하며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 주었다.

1940년대에 들어서며 프랭크 시나트라는 단순한 인기 가수를 넘어 미국 최고의 가수이자, 1940년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1940년대 초, 미국의 대중문화를 상징하던 ‘빅밴드 음악’의 중심에 그가 있었다. 그가 꿈꾸던 우상 빙을 넘어서게 된 것이다. 빅밴드 음악으로 대표되는, 그를 상징하는 ‘스윙’은 이 시대의 대중문화 자체를 선도했다. 음악 산업은 라디오와 축음기라는 두 강력한 기술적 힘에 대한 대중문화라는 것을 확고하게 사업화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은 매체를 통한 노출을 통해, 수백만 명의 미국인, 특히 10대들에게 전례 없는 열광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했다.

최고의 밴드와 거의 3년을 보내며 정점에 선 시나트라는 드디어 솔로로 독립하게 된다. 매체를 통해 음악을 듣던 대중들은 라이브의 묘미를 느끼게 된다. 그의 행운은 바로 찾아왔다.


1942년 12월 30일,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손꼽히는 콘서트 홀이자 영화관인 파라마운트에서 공연을 하게 된 것이었다. 유례없는 여성 인파가 극장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결국 일주일 예정된 공연은 한 달, 두 달 연장되었다. 그가 무대에 입장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객석의 십 대 소녀들은 목청이 터져나가도록 소리를 내질렀고 급기야 복도에서 졸도하기까지 했다.

1947년의 시나트라

이미 미국인의 우상으로, 존경받는 솔로 아티스트였던 그의 첫 음반이 1944년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나왔다. 이후 작사가인 새미 칸과 작곡가인 줄 스타인은 연이은 히트곡을 만들면서 시나트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44년 10월에 있었던 파라마운트 공연에서는 무려 2만 5천 명의 청소년들이 거리를 막고 아우성치는 대소동이 일어나 십 대 우상으로서의 그의 면모가 재확인되었다. 그래서 한때 시나트라는 ‘졸도 유발의 황제’ ‘수백만을 전율시키는 목소리’라는 닉네임까지 붙기도 했다.

하지만, 행운과 인기는 계속되지 않았다. 그는 겸손하지 않았고, 그 인기에 취해 방탕한 생활에 빠지기 시작했다. 다운비트 최고의 남자가수 여론조사에서 5위로 하락하며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더니 에바 가드너와의 스캔들로 나락으로 떨어져 간다. 이후 출시한 음반은 연이은 혹평과 실패로 이어진다.

 

그렇게 그의 경력과 인기는 사실상 50년대 초에 끝났고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시나트라의 경력을 다시 부활시킬 수 없다는 기사까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전후 슬럼프에 빠졌던 그의 커리어는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의 성공을 기점으로 완벽하게 부활한다. 배우로서도 인정을 받게 되는 시기지만 음악가로서도 완벽하게 부활한다. 컬럼비아 레코드사에서 밀려난 그는 53년 신생 캐피톨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으며 음악적으로도 큰 성과를 얻는다.

그렇게 그는 재기했을 뿐만 아니라 1950년대에 이전보다 훨씬 더 큰 스타가 되었다. 그는 심도 있고, 극적으로 진화했고, 훨씬 더 완벽하고, 성숙하고, 자신감에 차 있는 더 나은 예술가가 되었고, 사실상 또 다른 가수가 되었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과감하게 재창조했다.

 

시나트라는 캐피톨 레코드사 전에는 스윙 노래를 거의 부르지 않았고, 심지어 노래들에서 어울리지 않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었지만, 캐피톨 레코드에서, 그는 어떻게든지 이 노래들을 아주 편안하고 숙달된 채 부르는 법을 배웠다. 그의 캐피톨에서의 앨범은 한 예술가가 대중음악에서 발표한 것 중 가장 완벽한 퀄리티를 자랑하는 시기 중 하나다. 1954년부터 1960년까지 12개의 앨범을 발매했는데, 크리스마스 앨범은 물론이고, 모든 앨범들이 걸작이다.

1940년대가 ‘아이돌 시나트라’ 시대였다면 1950년대는 ‘아티스트 시나트라’의 시대로 재탄생한 것이다.

 

편안하게 연예계를 주름잡고 있던 그는 50년대 중반 대중음악계에 록 음악이 침투하여 일대 위기를 맞았다. 그는 로큰롤이 팝계를 강타하고 젊은 층을 장악하게 되면서 스탠더드 팝의 인기가 폭락하게 된 것이다. 그는 1958년 의회의 연단에 등장, 록 음악의 폐해를 증언했다. 여기서 그는 로큰롤을 “가장 야수적이고 절망적이고 추하며 사악한 표현양식”이라고 성토했다.

비틀즈의 멤버 폴 매카트니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재미난 머리 모양을 한 꼭두각시였고 대중은 그런 모습을 좋아했다. 수많은 아버지들은 우리가 나오면 텔레비전을 껐다. 시나트라는 그런 아버지 중 하나였다."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이기로 한 그는 1960년대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엘비스 프레슬리를 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태세를 전환한다.


그렇게 그는 다시 1960년대를 통해 아이돌과 아티스트를 지나 이제 전설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60년대에도 많은 명반들을 발표하면서, 그래미 올해의 앨범상을 2번이나 수상하며 50대의 나이에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다. 


또 라스베이거스에서의 성공, 계속되는 투어의 성공, 렛 펙으로서의 성공, 방송에서의 성공, 정치적인 영향력, 사업가로서의 성공, 배우로서도 다수의 히트작이 나오는 등 할리우드에서의 영향력이 정점에 올라서게 된다.

세 번째 아내, 미아 패로와 함께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하던가. 방탕한 사생활로 인해 이미 갈라져버린 세 번째 아내, 미아와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별거를 하게 되고 지리한 법정 싸움 끝에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으며 그는 상당한 심적 타격을 입고 우울하고 슬픈 나날을 보내며 칩거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노년을 바라보는 54세였다. 이혼과 영화 사업 실패로 연예계를 은퇴하려는 생각까지 하며 슬럼프를 겪던 그에게, 어느 날 새벽, 그에게 자신을 위한 특별한 곡을 만들었다면서 폴 앵카(Paul Anka)에게서 전화가 온다.

본래 그 노래는 자크 루브(Jacques Revaux)와 질 띠보(Gilles Thibault)가 만들고 끌로드 프랑소와(Claude François)가 1967년에 발표한 ‘Comme d'habitude’란 제목의 프랑스 노래였던 것을 폴 앵카가 영어로 가사만 고쳐 쓴 것이다. 원래 가사는 일상적 생활로 인해 사랑이 죽은 결혼생활의 끝을 맞이한 남자의 심경을 노래한 곡으로 영어 가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폴은 1967년 프랑스 남부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가 이 곡을 듣자마자 너무도 맘에 들어 곧장 파리로 날아가 저작권을 협의했다.

폴 앵카(Paul Anka)

뉴욕으로 돌아온 폴은 새벽 한 시에 가사를 쓰기 시작했다. 뉴욕에는 비가 오고 있었는데 그 느낌으로 인해 영감을 받았다. 가사를 쓰면서 자신이 존경하는 ‘프랭크라면 어떻게 말할까?’를 염두에 두고 그가 자주 사용하는 말들을 떠올리며 썼다. 그리고 멜로디도 살짝 바꾸었다. 다 쓰고 나자 새벽 5시가 되었고 폴은 프랭크에게 전화를 걸어 프랭크만을 위한 특별한 곡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가사는 죽음을 앞둔 한 남자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는 고백을 담고 있다.

https://youtu.be/w019MzRosmk

1974년 라이브 영상

맞다. 바로 그 노래가, 그의 인생을 대표하는 시그니쳐 송 ‘My Way’였다. 그해 마지막 날 녹음을 마친 이 곡은 다음 해, 영국에서 탑 10을 기록했고, 영국 차트 역사상 가장 길게 차트에 진입한 노래가 된다.

 

하지만, 미아와의 이혼으로 생긴 우울증, 아버지의 사망, 커리어의 침체 그리고 계속되는 투어에 지쳐버린 시나트라는 은퇴를 선언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고 다시 복귀를 선언하고 복귀와 동시의 컴백 TV 스페셜 방송의 시청률이 대박을 치면서 성공적으로 복귀를 하게 된다. 이 시기의 시나트라는 레코딩을 많이 하지 않고 예전 같은 앨범 판매고를 보이지는 않고 라스베이거스에서의 공연 활동이나 자선 공연, 투어 활동을 한다. 이 시기의 시나트라는 하는 투어마다 매진과 성공을 거두고 ‘라스베이거스의 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1980년대는 그가 왕성하게 활동한 마지막 시기였다. 이 시기의 시나트라는 레코딩은 거의 하지 않고 배우 활동은 사실상 은퇴를 했다. 그러나 여전히 왕성한 투어, 자선 활동과 공연들을 한다. 그의 히트곡 중 하나인 ‘New York, New York’이 1980년에 나오게 되는데, 녹음 당시 그의 나이 무려 65세였다.

https://youtu.be/TK0Vdb1RUCk

1985년 라이브 영상

이후 많은 사람들은, 시나트라가 다시 은퇴를 번복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무려 9년 만에 78세의 나이에 그는 정규 앨범 ‘Duet’을 발표했고, 이 앨범은 그야말로 초대박을 터트린다.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 2위를 기록하며 롱런 끝에 수백만 장이 팔린다. 빌보드는 이 성과의 대해 “시나트라가 세기의 아이콘임을 증명하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평한다. 이후 급격히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더 이상의 활동은 없었지만 ‘Duet’의 상업적 성과만으로 그가 얼마나 롱런한 레전드인지를 보여주고 그의 커리어의 마지막마저도 성공으로 장식하는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여주며 그는 무대에서 내려간다.

그의 공식적인 마지막 무대

1998년, 프랭크 시나트라는 급성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향년 82세.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뉴욕시에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불빛이 파랗게 변했고, 라스베이거스 스트립은 그를 위해 불빛을 희미하게 흐리게 했고, 카지노는 1분 동안 중지되었다.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를 비롯하여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당시 대통령이던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까지 공식 성명을 통해 그의 사망을 애도했고, 위의 사진처럼 전성기의 그의 사진을 그 달의 <타임즈>의 커버를 장식한다.

1998년 5월 25일 커버

제대로 학업을 마치지도 못하고, 웨이터와 밤무대를 전전하던 소년이 전 세계를 열광시키는 스타가 되어 ‘아이돌’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내고 미국을 넘어 세계적인 레전드가 되어 각국 정상들이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연예인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그의 묘지

이탈리아계답게 마피아와 연계하여 연예계와 사업을 승승장구했다는 소문도 일정 부분 이후 사실로 드러날 정도로 어두운 구석도 있었고, 정치적인 뒷거래라던가 무려 4번이나 결혼을 했던 지저분하고 방탕한 사생활로 인한 스캔들도 있었지만, 그는 제2의 전성기, 제3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바닥을 치고 다시 부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네번째 부인 바바라와 함께

연예계는 전 세계 어느 곳을 막론하고, TV 속에서 보이는 것처럼 내내 발랄하고 생기가 넘치는 곳이 아니다. 늘 경쟁해야 하고, 음모와 배신이 드글거리는 정치계와 아주 많이 닮아 있는,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는 곳이라고도 불린다. 10대 때부터 그 분야에서 평생을 보내고 레전드라고 꼽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몇 명 되지 않는다.

 

당신은, 한번 당신이 좋아서 시작한 분야의 일을 죽을 때까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는가? 50세만 되어도 명퇴니 강퇴니 해서 정상적으로 자신이 다니던 회사를 끝내는 사람도 많이 없는 시대이다. 게다가 정상적인 퇴직 연령까지 일한다고 하더라도 신체 멀쩡하고 100세 시대인데 퇴직 이후 뭘 할지 몰라 망연자실해하는 노령층 아닌 노령층이 늘어나고 있다.

 

그렇기에 시나트라의 인생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시대의 부침, 자기 인생의 부침,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연예계 인생과 함께 했다. 은퇴와 복귀를 반복하면서도 여든이 다된 나이까지 정규 음반을 발매하여 빌보트 차트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그는 늦깎이 스타도 아니었고, 10대 때부터 노력하여 화려하게 20대부터 80대까지 꾸준히 활동을 해왔다.

가족들과 단란한 한 때

당신이라면, 지금 하는 알바나 지금 하는 공부도 꾸준히 하지 못하고 그저 중간에 덮고 다른 일에 눈 돌리고 찾아다니는데 그의 인생이 이해될 리가 없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꾸준히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하는 것은 상당한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다면, 그 일을 평생 할 수 있는가를 충분히 고민해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단, 한 번도 당신은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봤을 뿐, 그것을 평생 하겠다는 생각이나 의지를 불태워본 적이 없지 않은가?


당신이 100세를 산다면 아직 남아 있는 세월이 당신이 살았던 세월만큼이거나 아직 훨씬 더 남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인생과 일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정작 ‘MY WAY’로 대표되는 인생을 살았던 시나트라는 그 노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노래를 들으며 그의 인생만을 떠올리지 않는다. 

한 남자의, 이제 노년을 바라보는 한 남자가 자신의 인생을 회상하는, 그렇게 다시 반추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당신이 그 나이가 되어 당신의 인생을 쭉 돌아봤을 때, 그 어느 누구가 아닌 당신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말할 수 있으려면 지금 그 바탕을 마련해야만 한다.


당신의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이, 큰 깨달음을 얻은 바로 지금이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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