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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15. 2021

수차례 자해 자살시도에 이혼만 3번이나 하고서도...

아이를 위해 강인한 엄마로 거듭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배우가 되다.

1975년 LA에서 유명 배우 존 보이트의 딸로 태어났다. 지금은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녀의 어머니 역시 배우였다. 그녀가 두 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서 그녀와 그녀의 엄마를 버리고 가정을 떠나버렸다. 1978년 공식적으로 이혼하고 아버지가 가정을 버리자, 어머니는 홀로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그녀의 오빠와 그녀를 키웠다.

그래서 늘 가난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녀의 어머니는 남편에게 버림받았다는 심리적 불안감에 남편과 똑같은 금발을 한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머리와 똑같은 갈색으로 염색시킨다. 어린 나이에 엄마와 똑같은 머리 색이 된 것을 좋아한 그녀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후 매번 염색을 통해 아버지와 닮은 금발을 드러내지 않게 된다.


가난에 힘겹게 생활하던 세 식구는 매주 영화관을 찾으며 현실을 도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녀는 자신도 영화의 세계에 주역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된다.


그러던 중, 거짓말처럼 7살에 첫 영화에 출연하게 되는데, 하필이면 그 영화의 주인공은 친 아버지 존 보이트였고, 심지어 아버지의 불륜녀였던 배우까지 나오는 영화였다. 설상가상으로 그 영화에 엄마는 단역으로 함께 출연하게 된다. 7살의 나이에 친엄마와 세트장에 간 그녀는 아버지와 그 불륜녀를 같은 장소에서 만나는 황당한 현실을 직접 겪게 된다.

아버지와 함께

그 충격으로 그때부터 그녀는 불안장애와 불면증에 시달리게 된다. 당시 그녀를 사로잡은 생각은 오직 하나, ‘나는 이 세상에 나오면 안 되는 존재였다.’라는 이었다. 거기에 더해 10대 사춘기가 되면서 가난한 가정형편 때문에 늘 싸구려 중고옷을 입었어야 했고, 두툼한 입술에 치아 교정기까지 끼고 있어, 그야말로 왕따를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야만 했다.


이때부터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된 옷과 장신구만 하고 다니며 아이들과 격리된 생활을 스스로 만들기 시작한다. 14살의 나이에 극심한 왕따로 인한 스트레스로 자해를 하는 그녀를 보게 된 어머니는 그녀를 지옥 같은 학교에서 자퇴시키는 것으로 그녀를 구하고, 당시 남자 친구가 있던 그녀에게 극단적이긴 하지만, 사랑으로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다면, 괜찮다고 동거를 하도록 허락해주었다.

그렇게 학교도 가지 않은 채, 할아버지의 죽음을 보게 되면서 ‘장의사’가 되겠다며 ‘시체 방부 처리법’을 공부해 자격증까지 취득한다. 그 사이 2년간 동거하던, 그녀를 이해해준다고 의지했던 남자 친구와 결별을 맞게 된다. 그렇게 다시 그녀는 전문 킬러에게 자신을 죽여달라는 시도로 그 아픔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녀의 나이를 물었던 킬러는 그녀가 너무 어리다는 것을 확인하고 한 달 정도 다시 생각해보고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그때 연락하라고 하고 극적으로 그녀는 다시 영화로부터 구원을 받게 된다. 당시 영화학과에 재학 중이던 대학생 오빠가 단편영화를 찍으며 아역이 필요할 때마다 동생에게 출연을 부탁한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오빠의 부탁을 들어주려고 시작한 연기는 다시 그녀에게 묘한 안정감을 갖게 해 주고, 연기의 열정을 갖게 한다. 그렇게 그녀는 킬러에게 연락하는 대신, 다시 연기학교에 돌아가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21세기 할리우드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유일무이한 여성 액션배우의 대명사이자 사회운동가로 유엔의 난민 대사로도

유명한 안젤리나 졸리(Angelina Jolie)의 이야기이다.


할리우드 현역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으로 연기력, 외모, 인성, 파급력 모두 톱클래스로 평가받는다. 외모 트레이드 마크는 각진 턱, 광대뼈와 입술. 특히 졸리의 입술은, 두꺼운 입술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유명하다. 예쁘다고 보기는 어려운 미모였지만, 누구도 닮기 힘든 매우 독보적인 비주얼을 소유한지라 오랜 기간 동안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덤에 자리하고 있다.


단순히 액션 여배우로서가 아닌 연기력도 일찌감치 인정받아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을 비롯하여, 미국 배우 조합상 2회, 골든 글러브 3회 수상에 빛나는 수상경력을 자랑하며, 2009년, 2011년, 2013년에는 <포브스>지에서 ‘할리우드에서 가장 출연료가 높은 여배우’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6세에 심기일전하고 연기학교로 돌아간 졸리는 선생님의 칭찬을 받으며 한층 업된 상태로 영화사의 오디션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분위기가 너무 어둡다는 이유로 오디션에 실패하고 오히려 그런 어두운 이미지를 원하던 모델계에 제안을 받고 모델로 연예계에 입문하게 된다. 그렇게 광고나 뮤직비디오로 얼굴을 알리며 뉴욕대학교 예술학과에 진학, 연기를 공부하고 성실하게 졸업하게 된다

 

대학 재학 시절, 1993년 저예산 영화 <사이보그 2>에 사이보그로 주연을 맡게 되지만, 열연을 한 것과는 별개로 영화가 망해서 극장에 개봉되지도 못하고 비디오용으로만 출시되는 실패를 겪게 된다. 스스로도 이 당시 시사회를 통해 자신의 주연작을 처음 보고 너무 쪽팔린 나머지 끝까지 보지도 못하고 집으로 달려와 엄마와 오빠를 부둥켜안고 구토를 할 때까지 내내 울기만 했다고 한다.

영화 <사이보그 2>

그렇게 실패만 경험하던 그녀가 겨우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던 것이 연기라고 생각해서 도전했던 영화가 참패하고 스스로도 부끄럽다고 느끼게 되자, 그녀는 다시 좌절하고 1년간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로 돌아가 단 한 건의 오디션조차 응하지 않게 된다. 유서를 쓰고, 머리를 짧게 깎고 다시 검은 옷만 입고 다니는 과거로 숨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전화위복이 일어난다. 당시 지극히 어둡기 그지없는 이미지를 찾던 감독에게 1995년 사이버 스릴러 영화 <해커스>에 주연으로 참여해달라는 제안을 받게 된다. 이 영화 역시 극장가에서 히트를 기록하진 못했지만, 비디어로 출시되며 오히려 역주행하기 시작해, 그녀의 비주얼과 연기력을 인정받는 첫 작품으로 할리우드의 호평을 받아내게 된다.

 

연기에 대한 자신감을 찾은 것도 다행이었지만, 함께 이 영화에 출연했던 조니 리 밀러와 1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을 하게 된다. 이 결혼식에서 웨딩드레스 대신 검정 가죽바지에 피 같은 붉은 잉크로 남편이 될 사람의 이름을 적은 흰색 셔츠를 입고 나타나 파격적인 결혼식으로 두고두고 회자된다.

영화 <해커스>에서 첫 남편 조니 리 밀러와 함께

그렇게 결혼을 하고 1997년 <조지 웰러스>로 골든 글로브상을 받으면서 차츰 미래가 밝아지는 듯했다. 졸리는 게리 시니스가 연기한 앨라배마 주지사 조지 월러스의 두 번째 아내 코르넬리아 윌러스 역을 맡았는데, 에미상 후보에까지 오르며 그녀의 연기력에 인정을 받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그런데, 1998년 HBO의 <지아>에서 슈퍼모델 지아 카란지 역으로 출연하게 되면서 다시 묘한 극 중 인물에 대한 몰입 때문에 생활에 힘겨움을 맞게 된다. 이 영화는 1980년대 중반 헤로인에 중독되면서 삶과 경력이 파괴되고, 26살에 에이즈로 삶을 마감한 모델 카란지의 일생을 다룬 전기 영화였는데,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싱크로율을 높이며 이 영화로 골든 글로브상과 에미상에 2년 연속으로 후보로 지명되었고, 골든 글로브와 미국 배우 조합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한다.

HBO의 <지아>

하지만, 이 영화의 극 중 캐릭터에 몰입한 나머지 정신적으로 불안해하며 극도의 우울에 다시 빠지게 되고, 영화 촬영 도중 몇 주간이나 잠수를 타는 등 심각한 사태가 지속되면서 견디지 못한 남편에게 이혼을 통보받게 된다.


그리고 다음 영화를 찍으며 알게 된 배우 빌리 밥 손튼과 급작스런 결혼을 결정하게 된다. 그는 당시 이혼을 4번이나 한 이력이 있었고 심지어 그녀보다 20살이나 많았다. 결혼식도 첫 번째 결혼식만큼 만만치 않은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서로의 피가 담긴 목걸이를 하고, 팔뚝에 서로의 이름을 크게 새긴 문신을 드러낸 채 식장에 들어섰다. 이미 이 결혼이 정상이 아니라는 점은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그녀가 스스로 정신이 이상하다며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기행에서부터 예견되었던 것이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늘 침대 머리맡에 긴 칼을 넣고 자는 등 기행을 보여, 남편인 빌리가 당시에 그녀가 너무도 불안정하고 무서웠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1999년 <본 콜렉터>의 연기가 호평을 받으며 점점 더 주목을 받게 된 그녀는 2000년에 정신병원에서 지내는 환자들의 삶을 조명한 <처음 만나는 자유>라는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사실 이 영화는, 주연을 맡았던 당대 최대의 하이틴 스타였던 위노라 라이더의 오랜만의 출연작으로 할리우드의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었는데, 오히려 할리우드에서는 안젤리나 졸리라는 배우를 재발견했다는 입소문을 타면서 또 한 번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 조연상까지 수상하며 그녀를 다시 스타덤에 올려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과거와 연결된 당시 심리와 생활을 그대로 연기에 투영한 것이 히트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영화 <처음 만나는 자유>

하지만 이때까지 주로 TV 드라마나 인디 영화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았다. 이때부터 그녀의 할리우드 전성기가 시작된다. 그녀가 대중적 인지를 얻고 스타로 떠오르게 된 작품인 2001년작 <툼 레이더>를 만나게 된 것이다.

게임 속 라라 크로포드의 20년간 외모 변천사

영화 자체는 평은 안 좋았지만 그건 시나리오와 연출의 문제였을 뿐, 지금까지 수많은 라라 크로프트 모델들이 나왔지만, <툼 레이더> 영화에서 원작 게임의 주인공인 라라 크로프트의 글래머러스한 몸매와 ‘썰면 한 접시’ 입술을 완벽하게 재현해낸 인물이라는 데는 다들 이견이 없을 정도였다. 이후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여 여성 액션 스타로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특히, 이 영화가 그녀의 개인사적으로 더 큰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친아버지 존 보이트가 극 중 아버지 역을 맡으면서 조우하게 된 상황이었다. 처음 아버지를 증오하며 자신의 이름에서 법적으로 ‘보이트’라는 이름까지 지웠던 그녀가 영화를 통해 아버지와 극적인 화해를 하게 되면서 수년간 그녀를 장악하던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사라지게 된 것이었다. 사실 그렇게 된 계기이자,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게 된 사건은 영화 촬영차 방문하게 된 캄보디아에서 벌어졌다.


촬영지에서 그녀는 평생을 자신은 불행하다며 자신을 책망하고 걱정하며 불안감에 휩싸였던 지난날들이 캄보디아의 거리에서 만난 이들에 비해 얼마나 고마운 인생이었는지를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곳에는 부모에 대한 얼굴조차 모르고 미래에 대한 희망 따위는 없이 하루하루 먹을 것을 찾아 길거리를 헤매는 아이들로 가득했던 것이다. 세상에 자신보다 불행하고 불쌍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 깨닫는 계기가 된 것이다.

처음 입양한 매덕스와 함께

이때 졸리는 그간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후회를 넘어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깨달음에 그치지 않고 바로 실행하기 시작한다. 10억이 넘는 출연료를 유엔 난민기구에 기부하였고, 영화 촬영이 끝났는데도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가 봉사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봉사활동을 하면서 그녀는 공허하게만 살아왔던 자신의 삶에 드디어 살아갈 목표가 생겼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자존감을 회복하게 되면서 그간의 우울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한다.


그렇게 다시 밝음을 되찾으며 그녀는 한 아이를 만나게 되고 다시 한번 자신의 인생을 바꿀 큰 결정을 내리게 된다. 바로 그 아이의 엄마가 되겠다는 결심이었다. 당연히 스무 살이나 많던 남편 빌리는 결사반대를 했고, 어렵사리 극적 화해를 했던 아버지마저 결사반대 의사를 밝힌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결심대로 밀어붙여 자신의 첫 아이인 매덕스를 입양하게 되었고, 남편 빌리와는 곧 이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전과 달라져 있었다. 아이에게 책임감 있는 엄마가 되겠다고 스스로 약속하고는 술, 마약을 비롯하여 자신을 파괴했던 모든 행위를 끊어버리고 밝음을 잃지 않고 더 밝은 곳을 향해 걷게 된 것이다.

 

그렇게 <툼레이더 2>에서 다시 한번 라라 크로포드를 연기하며 그녀는 명실공히 할리우드에서 여전사 액션스타로서의 이미지를 다지게 된다. 그렇게 액션배우로서 자리매김하며 그녀는 2005년 인생작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에 출연하게 된다.

많은 액션씬들을 잘 소화해냈고 흥행에도 성공했다. 심지어 유부남이던 브래드 피트를 이혼시키고, 영화가 개봉되던 해에 결혼까지 골인하여 행복한 나날을 맞게 된다. 둘은 바로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임신 중에도 다양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직접 몸으로 연기하기보다는 애니메이션 목소리 연기라는 분야에서 맹활약을 하게 된다. 영화 <베오울프>의 마녀는 아예 그녀의 실제 모습을 렌더링 했고, <쿵푸 팬더>에서는 무술 고수 암호랑이 역할을 소화해낸다.


아이를 낳고 몸을 회복하기가 무섭게 2008년, 액션 영화 <원티드>에서 주연인 폭스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크게 흥행하여 전 세계적으로 3억 달러를 벌여들였으며 이 작품으로 그녀는 그야말로 대체 불가능한 여자 액션 스타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했다.

2010년 영화 <솔트>는 본래 남자 스파이가 주인공이었던 시나리오를, 탐 크루즈가 자신의 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캐릭터와 겹친다며 고사하여 엎어졌던 것을 영화제작사에 직접 찾아가 자신이 연기해 보이겠다고 매달려 배역을 자신에게 최대한 맞춰 변경하고 촬영하게 된 영화이다. 그녀는 실제로 거의 모든 연기, 특히, 맨발로 빌딩 창에 매달려 걷는 연기 등을 소화해내며 다시 흥행과 호평을 이끌어낸다.

이후 2011년에는 <피와 꿀의 땅에서>로 영화감독 데뷔까지 하게 된다. 2014년, 차기작으로 감독한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여 실존 인물 루이스 잠페리니가 전쟁에서 겪은 상황을 그린 영화 <언브로큰>을 개봉한다. 이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1억 6천만 불의 수익을 올리며 흥행에 성공한다. 이 영화에서 특히 일본군의 학대가 묘사된 부분이 많아 일본 우익의 공적이 된 듯하다.

 

이후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사망을 목도하게 되고, 암으로 사망한 어머니의 죽음에 암은 가족력이 강하다는 설명을 듣고 검사를 진행한 끝에 자신이 유방암과 난소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진단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의 아이들을 지키는 건강한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과감하게 자신의 가슴을 드러내고, 난소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게 된다. 이후 그녀는 이렇게 인터뷰에서 말한다.


“나는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고, 심각한 호르몬의 변화도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여성이라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고 나는 강한 사람이고 내 마음은 평온하다. 이것 역시 삶의 일부일 뿐이다.”

 

그렇게 수술로 인한 공백기가 길어지면서 2014년 새 영화 <클레오파트라>만 찍고 은퇴하겠다는 의향을 표시하는 인터뷰까지 하지만, 디즈니의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실사화한 영화 <말레피센트>에 주인공 말레피센트로 출연하며 3년 반 만에 스크린에 복귀했다. 전 세계적으로 7억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올리며 졸리의 출연작 중 가장 흥행한 작품이 되었으며 후속 편까지 제작된다.

이후 그녀가 남편의 알코올 중독과 심각한 가정폭력 등으로 이혼을 한 사실은 역시 그녀의 삶을 다시 어둠으로 떨어뜨리지 못했다. 남편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서든 회복해보고자 자신이 직접 감독을 하며 자신들의 상태를 투영한 캐릭터로 2015년 <바이 더 씨>라는 영화를 찍지만 결국 영화처럼 극적 화해에 실패하고 2016년 브란젤리나 커플은 이혼을 하게 된다.

 



최근 <이터널스>에서 다시 여신의 모습처럼 부활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이제까지 돋보기로 들여다본 그녀의 인생이 결코 누군가에게 모범이 될만한 바른 삶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다.


누구나 흔들리고 누구나 실패하며 누구나 휘청거릴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리즈를 통해 소개하는 모든 이들은 그 휘청거림에서 쓰러지지 않고 자신을 바로 잡아 자신의 인생이 더 나은 삶을 구현할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했다.


아들 대학 입학 때문에 한국에 왔던 그녀와 잠시 만나 이야기를 나눌 일이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천진난만한, 아들을 처음으로 자신의 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보내는 엄마의 모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의 지금 삶이 빛날 수 있는 이유는 어둡고 힘겹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던 그 힘든 터널을 스스로 이겨내고 뚫고 나왔기 때문이라고 나는 느꼈다.

 

당신이 이혼을 했던, 가정폭력으로 우울한 유년기를 보냈던, 연이은 사업 실패로 알코올 중독에 빠졌던 사람이든, 당신의 힘겨웠던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당신이 그 어둡고 힘겨운 과거를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 당신의 미래를 위한 크고 힘 있는 한 발을 내딛을 용기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이가 첫 발을 내리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그다음 발을 내딛을 것이며 연이어 걷게 되고, 어느 사이엔가 기지 않고 걷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인생이 이미 끝난 것이 아니고 앞으로 걸어 나가야 할 길이 훨씬 더 많이 남았다는 점에서 당신은 아이들의 엄마로서, 혹은 아빠로서 당당하게 자신을 사랑하고 당신 스스로를 존중할 강력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당신 자신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며, 당신의 삶이 결코 이렇게 가벼이 다뤄져서는 안 된다는 자각을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어떤 실패와 좌절과 고난 속에서도 당신이 일어서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당신의 앞으로의 삶이 마냥 반짝거리는 봄날의 연속이지 않을런지는 몰라도, 최소한 당신이, 그것이 흐린 날이든 천둥벼락이 치는 날이든 모두 지나서 다시 화창한 무지개를 볼 자격이 충분히 있는 사람임에 분명하다는 사실은 내가 보장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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