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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16. 2021

수학 선생이 만점을 66점이라고 깎아내리는 바람에...

수학을 접고 물리학으로 전향하여 일본 최초 노벨상을 수상하다.

1907년 도쿄[東京] 현재 롯폰기 지역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지질학자였던 아버지의 직장 관계로 얼마 지나지 않아 교토로 이사하여 쭉 그곳에서 자란 독특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일본에서는 관동을 대표하는 도쿄와 관서를 대표하는 교토가 어떤 의미에서 지역적인 정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전쟁통에 전사한 막내를 제외하고, 그를 포함한 아들 4형제는 모두 일본 유수의 대학 교수를 지냈다.


그는 제3 고등학교를 거쳐, 1929년 교토[京都] 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이 대학 다마기 [玉城] 연구실에서 이론물리학, 특히 원자핵론 및 장(場)의 양자론(量子論)을 연구하였으며, 1940년 교토대학 교수가 되었다. 원폭을 맞고 나라가 풍비박산으로 패전했음에도 그 이후 1948년 도미하여 프린스턴 대학 객원교수로 있었고, 1953년 귀국하여 교토대학 기초물리학 연구소장으로 재직하였다.

1939년부터 1970년까지 교토대학의 교수로 재임하였고 재임 중인 1949년에 중간자 이론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일본인 최초의 노벨상을 수상한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 ゆかわひでき)의 이야기이다.

 

그는 1933년경부터 β붕괴 문제와 핵 내 전자의 문제 등을 연구하고 보존(보스 입자)에 의해 매개되는 상호작용(유카와 상호작용)을 고찰하였는데, 1934년 핵력을 매개하는 장으로서 중간자(中間子) 문제에 도달하여 그 질량을 산출하였다. 1949년 중간자 이론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글쓰기를 좋아하여 은퇴 후에는 에세이를 쓰고 물리학 저널 <Progress of Theoretical Physics>를 편집하는 일을 했다. 또한 1955년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막스 보른을 비롯한 이들과 함께 공동 선언자로 이름을 올리는 등 반(反) 핵 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하기도 했다.

자아, 여기까지 보면, 뭐가 그리 특별한가? 그리고 무슨 좌절을 겪은 인물이란 말인가? 명문대 들어가서 쭉 엘리트 코스 밟아서 바로 교수가 되고 심지어 일본 최초의 노벨상을, 그것도 패전 직후에 받아내다니, 뭐 그 정도로 이 시리즈에 소개될만하단 말인가? 소개한 인물이 100명이 넘어섰다더니 드디어 이 시리즈의 밑천이 바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비아냥 거릴 수 있겠다.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당신이 늘 그렇듯이 위인전이나 신문기사를 통해 그들이 얻은 성과만을 읽고 그것이 당신 같은 일반인의 삶과는 유리된 특별한 천재들만의 이야기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당신에게 소개되었던 자료만을 먼저 소개하였다. 틀린 이야기도 아니고, 대부분의 일본인들조차 그에 대해 위와 같이 기억하고 있다.


자아, 이제 이 시리즈만의 특제 스타일로 그의 삶에 돋보기를 들여다보겠다.

 

먼저, 유카와와 관련된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과학계와 유관한 2차 세계대전의 섬뜩한 뒷이야기가 하나 있어 그것부터 진실을 알려주고 시작한다.


원자폭탄이 투하된 유일한 국가였다는 이미지 때문인지 일본이 과거 원자폭탄 개발을 시도했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여기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물리학자가 관여했다는 사실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진주만 기습 공격을 감행한 1941년 12월 이전부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을 개발한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된 시기와 비슷하다.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는 군부가 중심이 됐다. 비밀리에 진행됐기 때문에 정확한 연구 개시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대체로 1940년 전후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육군은 ‘2호 연구’, 해군은 ‘F연구’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독자적으로 진행했다. 육군은 현재는 줄기세포 같은 재생의료 연구로 유명한 이화학연구소(RIKEN)와 함께 했고, 해군은 교토대와 손을 잡고 아라카쓰 분사쿠(荒勝文策)가 지휘 하에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당시 교토대 물리학과 교수였던 유카와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해군의 F연구에 관여했다. 근래에 발견된 그의 일기에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해군 간부들과 여러 차례 만났다는 내용이 나온다.

미국과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던 일본의 원자폭탄 개발은 얼마나 진행되었던 것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2호 연구’와 ‘F 연구’는 모두 기초연구 수준에서 실패로 돌아가며 끝나버렸다.


가장 큰 원인은, 지속적인 연합군의 공습으로 인해, 주요 연구시설이 파괴되고 우라늄, 원심분리기 등 연구에 필요한 물자를 손에 넣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열 확산법, 원심분리법 등 일본이 연구하던 우라늄 분리 방법 자체가 미국이 연구하던 기체 확산법에 비해 비효율적이었던 것도 이유로 꼽힌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들어간 돈이 2호 연구와 F 연구에 투자된 비용의 500배가 넘었다는 기록을 참고해보면 정부의 경제적인 지원의 규모에서 이미 연구의 성패가 갈렸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지배적인 견해이다.

당시 30대의 젊은 물리학자였던 유카와는 ‘F 연구’에서 원자핵과 관련된 이론을 만드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뒤 미 군정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유카와는 정작 ‘F 연구’에서 큰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적극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미군정의 자체 조사 결과는 그가 전쟁이 직후인 1949년 노벨상을 받을 수 있게 된 데에는 적지 않은 사유로 작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카와는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에 조금이라도 자신이 관여했다는 사실에 대해 평생을 반성하며 살았다. 그는 패전 직후였던 1945년 11월 주간지 <주간 아사히> 기고문을 통해 “전쟁은 항상 인류 행복의 파괴자”라며 “과학은 오히려 인류를 파멸에 이끄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라고 썼다. 이것은 그저 패전했기 때문에 꼬리를 말고 거짓으로 투항하는 모습이 아닌 그의 진솔한 과학자로서의 반성이었고, 그것은 그의 남은 생의 자취로 증명되었다. 물론 이런 그의 태도가 일본인에게 최초로 노벨상을 수여해도 무리가 없겠다는 위원회의 결정을 확정시켰다.

예컨대, 1954년 미국이 태평양 비키니섬에서 진행한 수소폭탄 실험에 의해 일본의 참치 원양어선이 피폭을 당한 ‘다이고후쿠류마루’ 사건이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때까지 반핵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데 소극적이었던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게 된다. 이후 1955년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과 미국의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중심이 돼 핵무기 폐기와 과학 기술의 평화적 이용을 호소한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서명한 것이다. 노벨상을 수상한 일본인이라는 그의 정체성이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음은 설명할 나위도 없다. 모든 핵무기 및 모든 전쟁의 근절을 호소하는 과학자에 의해 만들어진 국제회의인 ‘퍼그워시 회의’에도 참가했다. 그는 숨을 거둘 때까지 반핵 평화를 외쳤다.

교토대학 기초물리학연구소(일명 유카와 관(館)) 앞에 세워진 흉상

다시 그의 유년기로 돌아가 보자. 그가 왜 물리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게 되었는가부터 그의 인생 실패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고등학생 시절 그는 자신의 특기이던 수학시험에서 66점을 받아 선생님에게 불려 가 주의를 받게 된다. 그런데 친구들과 답안과 문제를 다시 찬찬히 살펴보아도 한 문제도 틀린 구석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래서 1등을 다투던, 겨우 90점을 맞은 친구에게 물었더니 친구가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방법과 다르게 풀었기 때문이야.”


자신이 스스로 열심히 생각해서 정답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오점 처리하다니, 그는 어이가 없었다. 그 이후 그는 수학선생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수학에 대한 정까지 모두 떼어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수학을 싫어하는 과목으로 정하고 과학 쪽으로 돌아서면서 그는 수학자가 될 뻔한 길을 접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공계에서 선진 과학과 기술을 배우기 위해 세계 유수의 대학으로 유학을 가는 것은 당시에도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외국 유학이라고는 나가본 적도 없는 100% 국내파였다. 물론 그가 일본 최초의 노벨상을 받은 인물이라 상대적 비교가 의미가 없긴 하지만, 이공계에서 유학을 하지 않은 국내파가 노벨상까지 가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훌륭한 과학자들을 일본 본토에 불러 학생들을 장려하던 정책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은 세대였다.


그가 중학교 때 당시 일본을 찾은 아인슈타인의 강연을 마치 “음악이나 영화를 감상하듯” 들었다고 한다. 독일의 하이젠베르크와 영국의 디랙, 덴마크의 보어 등 당시 물리학의 변혁을 주도하던 젊은 과학자들(이들은 모두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된다)을 일본에서 직접 만나 강연을 들으며 자극을 받았다. 중간자 발표 이후 물리학계의 스타가 된 유카와 히데키는 프린스턴 대학 고등연구소, 컬럼비아대학 등의 초청으로 미국에 체류한다. 그때 교수 신분으로 스탠퍼드 연구소에 방문학자로 가서 우상이던 아인슈타인을 만나고 그에게 염주를 선물한다. 아인슈타인은 그 인연으로 유카와에게 받은 염주를 꼭 몸에 지니며 불교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1949년 일본이 아닌 미국에서 노벨 물리학상 선정 소식을 듣는다.

그가 수학을 포기하고 교토대를 졸업하고 근 10년 후 교수직에 오른다. 상당히 빠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대학을 다니던 시기 대학원을 갔거나 이미 교수가 된 형들을 보며 자신도 대학원 진학을 당연하게 꿈꾸고 학자가 되려고 했지만, 그는 정작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조차 모르고 방황했다. 그가 물리학에서도 실험이 아닌 이론 물리학을 선택한 계기에 대한 그의 고백을 들어보면 너무도 어이가 없어 맥이 빠진다.

 

대학 3학년이 되어 이론을 할지 실험을 할지 정해야 하는 시기가 되자 또다시 방황했다. 나는 원래 실험을 싫어하지 않았다. 2학년 때는 키무라 키이치와 함께 여름방학 중에도 매일 나와 실험을 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나카무라 기사부로 선생님이 매우 친절하게 실험을 지도해주셨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나의 서툶이 나타났다.
그것은 유리 세공이었다. 발로 풀무를 움직여 가스버너의 불을 조절했다. 양손으로 유리관을 불에 대고 있으면 곧 붉게 변하며 말랑말랑해졌다. 적당한 때에 이것을 마음먹은 형태대로 굽히려고 하면, 갑자기 구불구불해져 버렸다. 급히 불에서 떼어내면, 이번에는 금방 딱딱해져서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무리해서 굽히려고 하면 뚝 부러져버렸다. 결과가 아주 나빴다. 주위를 둘러보면 친구들이 재미있는 듯 여러 가지 형태를 만들고 있었다. 이것이 실험 물리학자가 되기를 단념한 직접적인 동기였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당시 인기를 누리고 있던 원자 물리학의 실험에는 진공기술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유카와 히데키, <보이지 않는 것의 발견> 중에서

 

유리세공을 못한다는 것에 자신감을 잃어 실험은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수학선생 때문에 수학을 쳐다보지 않은 이의 결정이라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긴 하지만, 역시나 일반적인 판단은 아닌 셈이다.

 

그는 대학원에 가서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그저 그런 학생이었다. 심지어 대학원 졸업 후 수년 동안 한 편의 논문도 쓰지 못했다. 답답했던 학과장이 그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원래 너의 친구를 강사로 초빙하려고 했는데, 형의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채용한 것이니 분발하라.”


굳이 일본에서 유학을 해본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의 직접적인 비난은 치욕스러운 꾸지람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그는 결혼을 했었다. 그런데 그 결혼마저도 의사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간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데릴사위였고, 그의 둘째형도 데릴사위였다. 자기 집안에 빵빵한 인물이 데릴사위로 들어가 성을 바꾸는 일은 흔치 않다. 본래의 성인 ‘오자와’를 버리고 처가의 성인 ‘유카와’로 바꾼 것이다.

(여담이긴 하지만 오사카 순환선 모모다니역 근처에 가면 아직도 유카와 위장병원(湯川胃腸病院)이 있다. 전철 안에서도 간판이 보인다.)

아내와 함께 어색한 설정샷

그런 그의 답답하기 그지없는 젊은 날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그의 아내는 추운 겨울밤에도 아이가 울면 얼른 업고 집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연구에 몰두하는 남편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런 독려와 내조 덕분이었을까? 결국, 그는 1934년 ‘중간자’ 이론을 통해 원자핵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규명하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여덟 때의 일이었다.

그 시작은 1934년 10월의 어느 날 밤 갑자기 떠오른 생각 하나였다.

 

‘전자들 사이에 힘을 전해 주는 광자는 질량이 없지만 두 전자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도 둘 사이에 힘을 전달할 수 있다. 힘이 미치는 범위는 두 전자가 주고받는 광자의 질량에 반비례하고, 광자의 질량이 영이라는 말은 두 전자가 거의 무한대로 떨어져 있어도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이 양자 전기역학 이론에, 이미 알려진 핵력의 범위를 적용하여 ‘핵자들이 주고받는 입자의 질량은 전자보다 200배 정도 커야’ 한다는 이론을 세운다. 아직까지 발견된 적이 없는 입자를 이론적으로 예측한 것은 1935년이었다.

유카와와 세실

이어 영국 실험물리학자 세실 파월과 동료들이 실험을 통해 유카와 이론을 증명하는데 이때가 1947년이었다. 1949년 유카와에 이어 1950년 파월은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된다.

 

실패와 좌절로 점철된 젊은 날을 하루하루 견디고 견디던 그가 거둔 성과에 다름 아니었다. 그가 최초의 노벨상을 수상하고 도모나가 신이치로(朝永振一郎)가 다시 1965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도모나가는 사실 유카와와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동창이었다. 원래 도모나가가 1년 선배인데 유카와가 중학교 때 월반을 해서 동창이 되었다고 한다. 도모나가는 라이벌 유카와가 먼저 노벨상을 수상하자 충격을 받아 10년이 넘게 칼을 갈고 갈아 두 번째 노벨상을 일본에 안겨준다.

도모나가 신이치로(朝永振一郎)

자신감을 갖고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밀지도 못해서 그 실패로 인해 수학을 포기하고, 논문도 제대로 쓰지 못하던 그가 주변에 자극이 되는 존재가 되기까지 어느 날 갑자기 전화박스 안에 들어가 셔츠를 찢으며 ‘S’ 자를 드러내며 날아오른 것이 아니란 말이다.

 

한국은 아직까지 그렇게 이공계를 지원하네마네 하면서도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하였다. 객관적으로 보면 일본은 이미 노벨상을 21명이나 배출한 국가이다. 21명이나 수상자를 내는 동안 우리나라의 대학에서는 연구비 횡령하는 기술만 늘어갔다. 실험을 하는 대학원생들에게 월급을 주는 것처럼 통장을 만들어 다시 교수의 통장에 넣는 방식까지, 학자라고 부르기에도 창피한 모습을 가진 이들 천지였다. 그뿐인가? 실험 결과를 조작해서 획기적인 연구라고 광고하는 짓까지 서슴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추악하게 만들었을까?

연구재단을 통해 이공계에 지원한다고 한들, 그 돈이 재단을 장악한 정치적인 교수들과 그런 교수의 이름을 단 양아치들의 호주머니에 빨려 들어가는 거래의 일환일 뿐이라면, 정부차원에서 방법을 달리해야 하는 것이 옳다. 연구비 횡령을 하고 운이 안 좋아(?) 그것이 걸리면 다시 연구비를 원상 복귀하는 것으로 눈을 감아주던 것이 관행이라면 그 관행을 만든 것들까지 함께 쇠고랑을 채워 콩밥으로 장기 섭생을 시켜야만 한다.

위의 핑크 옷 입었던 주인공 되시겠다.

당신은 많이 다른가? 강남 한복판에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못볼꼴을 많이 보게 된다. 그 오래된 아파트 숲 속에 본래 그곳에 살던 이들이 아닌 이들이 아이들의 학군을 위해, 학원 1번가로 진출하겠다고 전국에서 몰려와 남의 집 살이를 한다. 아직도 어린아이들을 영재로 키워야 한다며 엄마가 애 목덜미를 붙잡고 끌고 다니며 학원이 끝나는 시간쯤 되면 그 근처를 차로 지나는 것은 러시아워를 방불케 한다.


정작 당신의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가르쳤는가? 결국 천재성과 영재성이라는 것은 부모에 의해서 발견되거나 갈취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흥미를 느끼는 놀이와 관심사에서 부모가 함께 관심을 가져주고 기다려주는 것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수많은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충고한다.

그런데, 전문가라는 애엄마도 그 충고를 하는 방송이 끝나면 아이가 학원을 빠지지 않고 갔는지 챙기는 전화를 하는 코미디를 찍는다.

 

한국에서 노벨상이 나오기 어려운 상황으로 가는 썩어빠진 세태를 이야기하다 보니 교육현장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또 쓴소리가 나와버렸다.

유카와가 평범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천재성이 드러난 인물도 아니었고, 자신감 없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늘 몰라 방황하던 소심하고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던 학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꾸준히 자신의 길을 하나하나 밟아갔고, 주변의 압박과 심리적 압박감에도 결코 쪼그라들지 않고 자신을 지켜냈다.


자신이 선택하고 자신이 가려는 길을 꾸준히 가는 이는 반드시 그 결과를 얻어내고 만다는 아주 단순하지만 힘겨운 인생을 보여주었다.

그 소심하고 이리저리 치이던 일본인도 해냈던 것을 당신이 못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내가 지나친 국뽕에 취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말길 바란다.


당신에게는 누구보다 진취적이며 누구보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강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공이나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닌 당신의 인생을 당신 스스로가 만족스럽다고 느낄만한 무언가를 찾고 그것을 꾸준히 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삶은 빛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보다 내일 더 빛날 당신의 삶을,

내가,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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