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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17. 2021

아버지를 죽이고 아내를 납치하고 자신을 죽이려 들어도.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로 살다가 세계를 정복한 군주가 되다

1162년경 오늘날의 몽골과 시베리아 지역이 맞닿은 곳 근처, 오논 강 유역 숲에서 보르지긴 씨족 예수게이와 올크누트 부족 출신 후엘룬의 아들로 태어났다.


후엘룬은 메르키트 부족 전사의 아내였으나 예수게이에게 납치당해 끌려온 입장이었다. 예수게이는 이미 첫 부인 소치겔과의 사이에 아들 벡테르를 두고 있었다. 새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테무진(鐵木眞). 예수게이가 죽인 타타르족 전사의 이름이었다.

아버지 에스게이는 쿠트라 칸의 뒤를 이어 몽골 부의 제4대 족장에 오를 것으로 촉망받고 있었으나 테무진이 9살 되던 해(1171)에 아들을 데릴사위로 보낸 뒤 홀로 돌아오는 길에 적대적인 타타르 부족장들에게 독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몽골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시라 케헤르(초원)의 변’이라 부른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예수게이의 카리스마로 뭉쳐져 있던 부족민들은 졸지에 흩어지고, 두 아내와 10살이 안 된 자식 일곱 명이 남겨진 테무진 일가에는 이때부터 엄청난 시련이 닥쳤다.

예수게이의 보르지긴 씨족은 타이치우드 씨족에 사실상 의탁해 살고 있었는데, 타이치우드 씨족은 예수게이가 죽자 그 가족들을 버리고 이동했다. 남은 부족 인원이라곤 자신과 어머니, 형제들을 포함해서 성인 남성이 하나도 없이 고작 아홉 명이 돼버렸다.


예수게이의 부하였던 콩고탄 씨족의 차카라 노인이 떠나가는 부족 사람들을 붙잡으며 가지 말라고 하자 그대로 투두엔 기르테에게 죽임을 당했다. 게다가 훗날 테무진이 자라서 자기 부족을 버린 것에 대해 보복할까 봐 두려웠던 다른 부족장들은 테무진을 죽이기 위해 추격꾼을 풀었고, 때문에 테무진과 가족들은 초원을 떠나 숲 속과 산속에서 여자와 어린이가 포함된 아홉 명이 추적자를 피해 늑대를 쫓아내고, 고기 잡으며 숨어 살아야만 했다.

 

이러한 시기에 테무진의 이복형제였던 벡테르, 벨구테이가 테무진 형제의 사냥물을 빼앗아가 자주 갈등을 빚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낚시한 생선을 벡테르 형제가 빼앗아가자 분노가 폭발한 테무진은 동생 카사르와 같이 벡테르를 활로 쏘아 죽여버린다. 다만 벡테르가 자신의 가계를 잇게 해 달라고 간청하며 죽어가 그의 동생 벨구테이는 살려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어머니 호엘룬에게 ‘친구라고는 그림자밖에 없는 처지에 자기 형제마저 죽인 놈’이라는 욕을 듣는다.

타이치우드 씨족은 테무진을 사로잡아 노예로 만들었지만 테무진은 천신만고 끝에 사지에서 도망쳤다. 이후 어릴 적에 약혼했던 보르테와 1178년 16살 경 재회 끝에 결혼을 하게 된다.

몽골 제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대칸이며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땅을 많은 땅을 정복했던 군주로, 인류 최대의 정복군주로 꼽히는 칭기즈 칸(ᠴᠢᠩᠭᠢᠰ ᠬᠠᠭᠠᠨ)의 이야기이다.

 

본명은 보르지긴 테무진, 성이 보르지긴이고 이름이 테무진이다. 현대 몽골어로는 ‘Боржигин Тэмүжин(Borjigin Temüjin)’, 한자로는 ‘孛兒只斤 鐵木眞’이라고 적는다. 몽골어로 철인(鐵人)이라는 뜻이다. 손자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를 개창한 이후 ‘태조’라는 묘호를 받았다.

 

현재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칭기즈 칸 광장과 제1의 공항인 칭기즈 칸 국제공항 등 그가 몽골을 세운 인물임에는 모두 이견이 없다. ‘잔인한 정복자’라는 평에서부터 동서 문명의 교류를 촉진시킨 영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면서도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결혼으로 한숨을 돌린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와 의형제를 맺었던 케레이트 부족의 족장인 토오릴 칸을 찾아가 아버지와 아들의 예를 맺음으로써 부족을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이로써 세력을 키울 기회가 생긴 것 같으나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

 

어느 날 메르키트 부족이 테무진의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을 습격하여 아내 보르테를 납치해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테무진은 스스로 아내를 되찾아올 만한 힘이 없었다.


고민하던 테무진은 토오릴 칸과,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자다란 씨족의 수장 자무카 등의 도움을 받아 40,000명의 케레이트-자다란-키야트 연합군으로 메르키트를 보오라 초원(부쿠라 케헤르) 전투(1182년)에서 대승을 거둬, 간신히 아내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내인 보르테는 메르키트족에게 붙잡혀있는 동안 메르키트족의 장수였던 칠게르에게 겁탈당해 이미 임신 중인 상태였다. 그래서 이때 태어난 장남 주치는 두고두고 '남의 씨앗' 이란 의혹을 받아 은근히 천대를 받아야 했다. 다만 칭기즈 칸 스스로는 주치를 자신의 장남으로 대우했고 후계자를 뽑으려 할 때도 제국을 주치에게 물려주려 했다.

 

테무진은 의형제 자무카 무리와 함께 생활하며 안정을 찾았지만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자무카와 결별하며 그와 전쟁을 벌이게 되고 크게 패해 4년이나 다시 도망쳐 겨우겨우 독자적인 세력을 쌓기 시작했다. 27살이 된 테무진은 옹 칸의 승인 아래 전통적인 씨족, 부족 회의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카마그 몽골의 칸으로 추대되었다.

 

워낙 배신과 싸움을 밥 먹듯 하던 부족들이라 부족의 통합은 쉽지 않았다 겨우겨우 부족들을 통합하던 테무진은 금나라의 황제 장종이 승상 완안량에게 명령하여 금나라를 배신한 타타르 족장 메구진 세울투를 토벌하게 하자, 그 요청에 응해, 금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오랜 숙적이던 타타르족을 정벌한다. 하지만 이 전쟁을 통해 테무진은 금나라가 타타르, 케레이트, 몽골 등 여러 부족들을 서로 싸우게 한다는 사실을 몽골의 부족들에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알린다.

타타르 정벌전 이후 케레이트의 옹 칸은 동생의 공격을 받아 패전하고 서요로 달아났다. 하지만 서요에서도 쫓겨난 옹 칸은 낙타 피를 마시며 겨우 초원으로 돌아왔다. 이런 그를 테무진 칸이 맞아들이고, 다시 한번 의부로 삼으며 케레이트의 수복을 약속해준다. 그렇게 전쟁까지 도와주며 복위시켜준 옹 칸 세력을 회복한 후, 테무진을 배신하여 불화가 싹트기 시작한다.

나이만족을 함께 정벌하기로 해놓고서는 전투 전날 테무진을 속여 위험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다시 자신이 적군의 공격으로 위험해지자 도움을 청하고 테무진은 다시 그를 위험에서 구해준다. 하지만 옹 칸은 내내 테무진 칸을 두려워하며 호시탐탐 그를 제거할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1197년 테무진은 주르킨 부족을 공격해 무너뜨리고 케룰렌 강과 쳉게르 강이 만나는 곳 근처에 새로운 근거지를 만들었다. 이곳이 몽골의 수도 아바르가가 되어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원정을 위한 기지 구실을 했다.


1200년에는 달란 네무르게스 전투에서 카마그 몽골의 원수이자 5대 부족 중의 하나인 타타르족과 격전을 벌여 마침내 전멸시킴으로써 테무진 칸은 초원 전역에 강력한 위용을 떨친 터였다. 1201년, 새롭게 떠오르는 테무진 세력에 반감을 지닌 씨족들이 자무카를 구르 칸으로 추대해 옹 칸과 테무진에 도전했다.

 

옹 칸과 함께 자무카를 꺾으며 초원의 강자로 거듭난 테무진 칸은 과거에 자신을 사로잡아 노예처럼 부리며 굴욕을 주었던 타이치우드족을 섬멸하여 복수에 성공한다.

이때 테무진은 승리를 거둔 후 자신이 직접 모든 전리품을 분배해주겠다고 공언한다. 이전에는 장군들이 직접 약탈을 통해 전리품을 얻고 그 일부를 칸에게 바치는 방식이었는데, 이 선언은 이제 자신이 모든 결정권을 가지겠다고 한 것이었다. 이에 불만을 가진 부족들은 다시 자무카쪽에 귀순하였다.

 

그렇게 자무카와의 대치는 계속되었다. 제2차 쿠이텐 전투(1202년) 승리 이후 타이치우드의 족장 앙쿠 후쿠추를 추격하던 테무진이 적의 화살에 목을 맞아 피를 많이 흘려서 사경을 헤메게 되었다. 다행히 사준사구 중 하나인 우량카이 젤메가 밤새도록 테무진 칸의 피를 입으로 빨고 뱉으며 지혈해주고 적진으로 들어가 말 젖을 훔쳐와 마시게 함으로써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타이치우드족의 앙쿠 후쿠추는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테무진은 맏아들 주치와 옹 칸의 딸을 혼인시키려 했으나 옹 칸의 아들 셍굼이 거부하며 옹 칸과의 불화가 드디어 터지게 된다. 하지만 옹칸의 입장에서는 테무진의 군사력을 당해내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혼인을 수락하는 척하고 축하 잔치에 테무진을 초대해 제거하려는 계략을 세운다. 소수 병사만 이끌고 옹 칸에게 가던 테무진은 계략을 알아채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옹 칸의 추격을 피해 살아남은 자는 불과 19명.


이들은 흙탕물을 마시며 테무진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이들 19명은 아홉 부족 출신으로 전통적인 씨족이나 부족 관계에서 벗어난 새로운 결사체가 탄생한 셈이었고, 이는 몽골 제국 내 통일의 기초나 마찬가지였다. 테무진은 흩어진 추종자들을 모아 옹 칸을 향해 진군했다. 기습당한 케레이트 부족은 대부분 테무진에게 항복했다. 옹 칸은 나이만에서 죽임을 당했고 1204년 테무진은 나이만을 정복했다.

이후 한 때는 의형제이자 평생의 숙적이던 자무카를 제거하게 된다. 자무카는 도망 끝에 결국 자신을 배신한 부하들에게 테무진에게 잡혀오게 되는데, 테무진은 자무카를 끌고 온 그의 부하들을 비겁하다고 모조리 처형시켰다. 그리고 자무카에게 자신과 함께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자무카가 명예로운 죽음을 원하자 피를 보지 않고 죽도록 해주었다.

 

그렇게 케레이트의 옹 칸, 동나이만의 타양 칸, 자다란의 자무카, 메르키트의 톡토아 베키 등을 비롯한 모든 숙적들과 싸워 승리를 거둔 테무진 칸은 몽골 초원의 명실상부한 독자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통일 전쟁을 거의 마친 1206년 봄, 오논 강 하류에서 소집한 쿠릴타이(몽골 지역의 대족장 회의)에서 에케 몽골 울루스(몽골 제국)를 세우고, 칭기즈 칸의 자리에 올랐다. 같은 해, 칭기즈 칸은 제베를 보내 서나이만의 부이룩 칸을 수자우 강에서 사로잡아 처형시킴으로써 마침내 몽골 초원의 난세를 완전히 종식시켰다.

칭기즈 칸은 부족 간 납치와 몽골인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시키고, 완전하고 전면적인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으며, 칭기즈칸 자신을 포함한 모든 개인보다 법이 우위에 선다는 것을 선언했다. 칭기즈칸은 시베리아 부족과 위구르족까지 친족 관계를 확대하여, 부족이나 민족 전체 단위로 가족적 유대를 맺는 정책을 폈다.


그러고 나서 칭기즈 칸은, 해외 정복에 나선다.

하지만, 여기서 역사학자들의 의견은 상반된다. 그가 세계 정복을 하기 위한 정벌을 나선 것이 아니라 교역을 원했을 뿐이었다는 의견이다. 본래 그의 의도는 북중국과 서요 정도로 만족하려고 했고 서쪽과의 교역은 호라즘 왕국과 교류하는 정도로 그치려고 했으나, 호라즘 왕국이 거부하는 바람에 "그럼 직접 길을 트겠다"라는 식의 전쟁이 되어버렸고 교역을 위해 서쪽으로 계속 진출하다 보니 일이 더 커졌다는 견해가 바로 그것이다.

다른 일단의 역사학자들은 본래 몽골족들이 워낙 배신과 전쟁에 익숙했기 때문에 겨우 통일 국가를 이룩한 상태여서 내부 불만을 억제하기 위해 밖으로의 원정을 감행했다는 설도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론, 테무진이 "칭기즈 칸"의 호칭을 얻으면서부터 세계를 지배한다는 사상에 심취하게 되었고, 그것이 타국과의 외교 정책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칭기즈 칸의 정복 활동을 살펴보면 연경을 포위한 후에도 정치적 복속과 조공품의 상납만 약속받고 초원으로 돌아가는 등, 실제적인 ‘지배행위’에 큰 욕심을 가졌다고 보기엔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그의 원정은 지배가 아니라 대부분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목적이 짙었으며, 이 과정에서 응징과 복수를 명분으로 내걸었을 뿐이다. 몽골이 그나마 정복전에 가까운 전쟁 양상을 띄게 된 것은 오고타이 칸 시절부터이며, 아무리 빨리 잡아도 칭기스 칸 말년부터다.

 

칭기즈 칸이 정복한 대외 영토가 워낙 넓은지라 평생을 대외 정복에 힘써온 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데, 칭기즈 칸의 생애 대부분은 몽골 통일 전쟁을 하면서 보냈다. 가문이 망하고 부족들이 흩어진 후 적대 부족에 노예로까지 붙잡히는 등, 완전히 밑바닥에서부터 일어났기 때문이다. 몽골의 통일이 1206년이고, 칭기즈 칸의 사망연도가 1227년이니, 대외 정복에 힘을 기울인 시기는 고작 21년밖에 채 되지 않는다. 고작 그 정도 기간에 그는 본의 아니게(?) 세계 제국의 건설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원정에서 몽골군의 병력은 기병 6만 5천이었다. 지구력 강한 몽골 말과 보급부대를 두지 않는 간편함(육포와 마른 젖 덩어리를 휴대했다), 고도로 조직화된 부대 편재는 몽골군의 기동력을 세계 최강으로 만들어주었다. 여기에 포로들을 통해 익힌 공성전(攻城) 전술과 무기, 굳은 충성심과 규율, 적에게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선전전, 적이 제대로 대응하기 전에 전격적으로 기습하는 전술, 적의 영토 전역에 걸쳐 작전을 펼쳐 혼란을 일으키는 전술 등으로 몽골군은 위세를 떨쳤다.

 

탕구트 원정을 위해 고비 사막을 건너던 1226~27년 겨울 칭기즈칸은 진군을 멈추고 야생마를 사냥했다. 갑자기 야생마들이 돌진해오자 칭기즈칸이 탄 말이 놀라 뛰어올랐다.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지만 칭기즈칸은 탕구트와 전쟁을 계속했다. 수도를 포위하고 마지막 승리를 얼마 앞둔 1227년 8월 칭기즈칸은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중국 깐수성(甘肅省) 칭수이현(淸水縣) 시장(西江) 강변이었다.

사실 세계 최대의 정복 군주가 살아낸 스펙터클한 삶을 고작 A4 5장에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굴곡진 삶을 오늘 당신에게 소개하는 것은, 당신이 세계 정복의 꿈이라도 꾸라는 황당한 제안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적당히 위인전이나 영화를 통해 기억하고 있는 칭기즈 칸은 그저 외부에 알려진 것일 뿐, 실제 그의 삶을 조망한 몽골의 역사자료들을 통해 살펴본 그의 삶은, 정복군주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그는 철천지 원수의 부족 장수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아준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해야만 했고, 그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처절한 다짐 같은 것을 할 틈도 없이 살아남아야만 했다. 그가 몽골의 그 탈 많은 몽골 부족을 통합하여 통일된 제국을 만들어 칭기즈 칸으로 불리기 전까지 그는 자신이 뭔가 더 얻겠다거나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고 먼저 칼을 들지 않았다.

몽골 언덕에 그려진 칭기즈 칸의 초상화(2006)

족장으로 추대될 아버지가 죽고 정작, 친지라고 하는 혈육들이 가장 잔인한 배신을 하는 것을 어려서부터 몸에 배도록 봐왔고, 어린 나이에 이복형제이긴 하지만, 형제를 죽이게 된 이유도 자신의 것을 지나치게 탐하는 것에 분노를 참지 못해서였다.


결코 그는 충분히 갖기 위해 남을 공격하고나 탐하는 성품이 아니었다. 심지어 자신을 배신하려는 옹 칸을 몇 번이나 구해주고 또 구해주다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을 때 마지못해 죽였다.


자신과 의형제를 맺고 평생의 숙적이던 자무카도 세력의 흐름 때문에 적대하기는 하였지만 마지막까지 그를 존중하여 그를 배신하여 잡아온 부하들을 모두 죽이고 자신과 함께 하자고 손을 내민 자였다.

몽골의 마동상(무려 높이 40미터, 무게 250톤에 달한다)

당신이라면 10살이 되기 전에 자신의 아버지가 독살당하고, 어머니와 이제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늑대들이 득시글거리는 숲과 초원을 적들의 공격을 피해 가며 살아갈 수 있었겠는가?


한때 유행했던 홍콩영화의 단골 메뉴처럼 아버지를 죽인 부족들과 원수들을 죽이기 위해 살 틈조차 없었던 그의 유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먼저 복수의 칼을 들고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몽골의 풍습의 의거하여, 손님으로 모셨던 사람을 결코 해하지 않는다는 풍습을 어겼다는 점 때문에 아버지를 죽인 부족을 더 증오하였다는 기록은 그러한 그의 성품을 반영한다.

특히 그러한 그의 굴곡진 삶 때문에 그는 평생에 걸쳐 가문이나 부족보다는 스스로 얻은 ‘인재’를 믿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옹 칸에게 초대되었다고 죽을 뻔하면서 흙탕물을 먹으며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19명의 전사들은 그가 몽골의 초대 통일 군주로서 그리고 세계를 정복한 군주로서의 다짐을 지지해준 혈족보다 더 끈끈한 의미로 맺어진 이들이었다.


그는 그들에 대해 그들의 후손까지 챙기는 의리를 보여줬고, 죽음의 기로에 몰렸을 때 그를 지지해준 그 아홉 부족의 젊은이들은 초대 공신들이 되었다.

때문에 칭기즈 칸은 귀족이나 가문이나 혈통 따위를 오히려 철저히 무시했다. 그의 평생에 걸쳐 그러한 가식적인 이들의 가면 쓴 모습에 넌더리를 냈기 때문이다.


그는 원칙이 있었고 기준이 있었으며 정복을 위한 정복이나 더 갖기 위한 사치를 부리지 않았다. 그가 통일 군주가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조치는 당시로서는 샤먼을 내세워 정치에 영향력을 발휘하던 무당을 제거한 것이었다.


그는 결코 무식하지 않았고, 사세(事勢)를 정확하게 읽어냈고 사람의 심리를 누구보다 잘 읽어냈다. 누구보다 여리고 여린 이가, 그저 자신을 지키고 자기 가족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발버둥 치다가 세계를 정복하는 군주까지 가게 된 독특한 케이스라 하겠다.

몽골 박물관

전술한 바와 같이, 자신이 아내로 한번 삼은 여자가 적장에게 겁탈을 당해 임신을 하여 낳은 아이를 자신의 장자로 인정하고 왕위까지 양위하려 하였다. 기마민족인 몽골족은 말에 굉장하기 민감하기 때문에 현재의 DNA 검사보다 훨씬 더 정확한 데이터로 자신의 씨이냐 아니냐를 구분하고 아니라면 버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차 없이 죽이기까지 하였다.


그가 세계를 정복한 군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그릇을 갖추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당신이 오늘 이 글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당신이 이제까지 가졌던 그 작고 찌질하고 조잡하기 그지없는 마음을, 이제 큰 바다와 같은 사이즈로 증량하기를 바란다.


당신의 아이가 당신의 자손이 당신의 그릇보다 더 작아지면 작아졌지, 당신이 그런 생각과 행동을 보이면서 당신의 아이에게 큰 사람이 되라고 말하는 것처럼 모순된 것은 없다.

결코 칭기즈 칸이 큰 마음을 먹고 세계를 정복하겠다고 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지키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달려온 것만으로도 그의 결과는 세계 정복으로 이어졌다. 내가 단언컨대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고, 무엇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면서도 해내기 어려운 일이라 할 것이다.

그가 당신을 위해 남긴 이야기를 전하며 오늘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똑같이 희생하고 똑같이 부를 나누어 갖소. 나는 사치를 싫어하고 절제를 존중하오. 나의 소명이 중요했기에 나에게 주어진 의무도 무거웠소. 나와 나의 부하들은 늘 원칙에서 일치를 보며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굳게 결합되어 있소. 내가 사라진 뒤에도 세상에는 위대한 이름이 남게 될 것이오. 세상에는 왕들이 많이 있소. 그들은 내 이야기를 할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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