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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18. 2021

어머니부터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먼저 보내야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는 얼굴로 노예를 해방시킨 미국 대통령으로 우뚝 서다

1809년, 켄터키주에서 넉넉지 못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애칭은 에이브). 아버지가 확고한 기독교적 신념의 소유자라 매우 독실한 기독교 가정의 틀에서 자랐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가 8살 때 독초를 먹은 소의 우유를 먹고 걸리는 밀크병(Milk sickness)에 걸려 죽었다.


그 후 아버지는 재혼했는데, 새어머니는 책을 좋아하던 양아들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지원했다. 그녀도 재혼 당시 미망인이라서 2남 1녀를 두었는데, 이들과도 친형제처럼 잘 지냈다. 워낙 시골 개척지에 살아 친구 하나 없이 누나와 놀면서 자라서, 남매의 정이 남달랐는데, 누나가 결혼하고 아기를 낳다가 21살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 큰 충격을 받았다.


원래 아버지가 켄터키 주에서 15번째 가는 부농이었으나,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3번의 파산을 당하고 나서, 인디애나 주로 이사하게 된다. 게다가 재혼 후에 식구가 불어나자 생활고로 힘겨운 상황을 맞게 된다. 그래서 그는 공부가 아닌 농사와 노동의 길을 강요당했고,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가족 소유의 농장 일은 물론이고, 주변 이웃들의 농장에 품삯을 받고 일해야만 했다.

 

전형적인 농사꾼이던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이 '애를 너무 부려먹는다'라고 할 정도로 아들을 지나치게 혹사시켜 아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상당히 독선적인 아버지였다.

아들이 시간을 쪼개 한참 떨어진 동네까지 가서 빌려온 독서와 공부에 매진하면 일을 안 하려고 게으름 부린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에게 모진 대우를 받을 때도 새어머니는 항상 그를 지지하고 도와주며 그의 배움에 대한 열정을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정규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지만, 풍부한 독서로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특히, 어머니가 유머 감각이 풍부하여 아들과 곧잘 농담과 장난을 주고받는 사이여서 그가 바르게 자랄 수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사기꾼이 문맹이던 아버지를 속여 사기 치려던 것을 사인 직전 아들이 막은 사건이 있은 이후, 아들이 공부하는 것을 인정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22살에 독립하여 집을 떠나 일리노이주 뉴 세일럼으로 이주했다. 이 동네에는 '클래리즈 그로브 녀석들'이라는 불량 패거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항상 패거리의 리더인 잭 암스트롱이 동네에서 가장 강한 싸움꾼이라 자랑하고 다녔다. 당시 가게 서기로 일하던 그가 가장 쎈 친구라고 자랑한 사장 덕에 시비가 붙어 결투끝에 동네를 평정한다. 그 실력으로 실제 프로레슬러까지 하게 된다.

당시 싸움을 그린 삽화

그 후 우체국장, 뱃사공, 측량기사, 프로레슬러, 가게 점원 등 여러 직업들을 전전하다가 사업을 실패하고 다음 해 치른 1832년 일리노이 주 의원 선거에서도 13명 중 8위로 낙선했다. 이듬해 그는 또 사업에 실패한다. 일설에 의하면 두 번의 사업 실패의 빚을 갚는 데만도 17년이 걸렸다고 한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으로, 미국 역사상 최초로 건국 당시 중심이 되던 13주 이외의 지역에서 태어난 대통령이자 공화당 출신 첫 대통령이기도 한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의 이야기이다.

 

분열된 미국을 남북전쟁으로 통합하여 본격적인 하나의 미국을 만들었으며, 흑인 노예해방을 선언해 사실상 현대적 의미의 통합된 나라 미국을 만드는 초석을 다졌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꼽히는데, 역대 미국 대통령 평가에서 흔히 톱 3로 불리는 대통령은 국부 조지 워싱턴과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프랭클린 D. 루스벨트, 그리고 링컨을 꼽는다. 그는 이중에서도 늘 부동의 인기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는 물론 역사학자들에게까지 인기가 높은 인물이다.

현재 백악관에 전시된 공식 초상화

결국 빚잔치만 한 화려한(?) 과거를 뒤로 하고, 말 그대로 ‘간신히’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1834년 일리노이 주 의원 선거에 다시 출마해 당선하며, 정치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일리노이 주 의원 의장에는 다시 낙선. 1840년 대통령 선거인단으로도 낙선, 1844년에는 연방하원 의원 공천 탈락, 1846년에야 간신히 하원의원에 당선된 것이 그의 나이 37세였다. 당시 정치가들의 평균 연령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한 늦깎이였던 셈이다.

1846년. 첫 하원 당선 당시

그러고 나서, 다시 1855년 연방상원의원 낙선, 1856년 부통령 후보 경선에서도 1/3 정도의 지지(110/350)만 받으며 월리엄 데이튼에게 낙선, 1858년엔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시 유명 정치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스티븐 A. 더글러스와 경쟁을 벌이게 된다.


이 선거에서도 링컨은 낙선했지만, 그와의 토론 과정에서 노예 문제에 대해 단호히 반대 입장을 밝히며 노예제 반대 입장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이때 링컨과 더글라스가 벌인 세 차례의 토론은 아직까지도 미국 역사에 남을 명토론으로 교과서에 게재될 정도로 유명하다.

 

당시 이슈는 새로 미연방에 편입되는 주들에게 노예제를 금지할 것이냐 말 것이냐였다. 더글라스는 해당 주의 거주민들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는 주장이었고, 링컨은 투표를 통하더라도 노예제를 결코 허용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당시 링컨은 노예제를 이미 실시하고 있는 주들에서도 노예제를 바로 폐지해야 한다는 급진적 공화당 분파와 노예제에 찬성하지 않지만 주민들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고 했던 민주당 좌파의 중간 정도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1860년. 특유의 수염이 없는 이 모습으로 50까지 지냈다.

결국 흑인 노예제 문제가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던 1860년 말 치러진 대선에서, 링컨은 마침내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당시 여당인 민주당이 북부 민주당(스티븐 더글러스)과 남부 민주당(존 C. 브레킨리지)으로 쪼개지면서 링컨으로선 어부지리의 효과를 얻은 점도 있었다.


당시 스티븐 더글러스가 노예제를 각 주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는, 민주당 출신치고 나름대로는 중립적인 발언을 해서 브레킨리지를 대표로 한 남부 출신 인사들의 미움을 산 것이 표가 분산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더글러스는 유권자 선거에서는 100만 표 넘게 받으며 2위를 차지하지만, 텃밭이던 남부를 존 C. 브레킨리지가 가져가면서 선거인단은 12명밖에 못 얻는 충격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그가 대통령이 된 것도 압도적인 승리가 아닌, 신승에 해당했다. 미국 역대 대통령 선거 중에서도 이 선거는 당선자의 득표율이 40%를 넘지 않은(39%) 유일한 선거였다.

 

취임식 때부터 순탄치 않았는데,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의 자택에서 워싱턴 DC로 향하는 링컨 대통령을 암살하겠다는 음모가 발각되는 사태와 워싱턴 DC까지 직행열차가 없었던 시절 암살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 번 여행 일정을 바꿔야 했다.

 

결국 남부의 7개 주가 따로 떨어져 남부 연합 조직을 만들었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하지만 링컨이 "어느 주도 미연방에서 탈퇴하지 못한다"라고 선언함으로써 그의 취임 1달 만에 제퍼슨은 링컨에게 선전 포고를 하였고 1861년, 섬터 요새에서 남북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1862.10.03. 왼쪽부터 앨런 핑커톤, 에이브러햄 링컨, 존 알렉산더 매클러넌드.

전쟁은 4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하지만 1863년,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선언하면서 남부는 힘을 잃어 갔다. 그리고 펜실베이니아 주의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북부가 승리하면서 서서히 북군 쪽으로 승리가 기울었다. 게티즈버그에서 링컨 대통령은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

“미국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영원할 것입니다.”

 

전쟁 중이던 1864년 어렵사리 재선에 성공한다. 결국 1865년에 남북전쟁은 남부의 항복으로 끝났지만, 종전 11일 후인 1865년 4월 15일 그는 극장에서 극렬한 남부 지지자이자, 인기 배우였던 배우 존 윌크스 부스에게 암살된다. 당시 그의 나이 56세였다.

까마득히 전인 앤드루 잭슨의 재선 이후 링컨이 당선된 32년 동안 미국에서 연임에 성공한 대통령은 한 명도 없었고, 링컨 이후에도 연임 대통령은 그랜트를 제외하곤 한동안 없었다.

 

링컨은 남북 화합을 강조했기 때문에 링컨이 살아있을 때 남부는 수용소장 한 명만 빼고 관대한 처분을 받았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북부에서는 "남부를 박살내야 한다!"라는 급진파가 힘을 얻게 되었다. 그 결과 남부는 1877년까지 무려 12년 동안 군정 치하에 놓였다. 또한 남부 출신 사람들은 연방 공직 임명에서 무조건 배제되는 불이익을 받았으며, 북부인과 달리 충성 서약을 해야만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등의 유례없는 대탄압을 받았다. 이 때문에 남부에서도 결과적으로는 링컨 암살 사건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암살 가담자들의 공개 처형식

그는 그야말로 실패와 좌절의 아이콘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으니 진작에 이 시리즈를 장식했어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환갑도 맞지 못한 그의 짧았던 인생에서 두 번의 큰 사업 실패와 10번의 선거 중에 7번의 낙선을 기록하였다. 거기에 8살 때 어머니를 잃고, 20살 때 누이를 잃고, 27살 때 첫사랑인 약혼녀를 잃었고, 42살 때 둘째 아들 에드워드, 53살 때 셋째 아들 윌리엄을 먼저 보내는 슬픔을 겪었다. 그리고 그 자신 역시 암살당하는 그야말로 힘겨운 인생을 살다가 갔다.

 

친어머니의 죽음을 시작으로,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은 모두 일찍 죽어버린다는 트라우마 속에서 평생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인생의 실패야 그렇다 치더라도 자신의 그렇게 사랑하고 의지하던 사람들이 연이어 죽는 모습을 보면서, 심지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아끼던 아들이 죽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 어쩌면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 것이 더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둘째 아들을 땅에 묻은 그해 겨울 태어난 셋째를 보면서 그 아픔을 이겨냈는데,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 아들마저 대통령에 당선된 지 1년도 되지 않아 백악관에서 떠나보내야 했다.

12살에 죽은 셋째 아들과 함께한 초상화

그래서 그가 우울증에 매일을 술에 쩔어 그 슬픔을 이겨내지 못했다면 그는 결코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대통령으로 존경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우울증을 겪으면서도 특유의 위트와 유머를 잃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부여잡았다.

 

실제로 그는 여러 가지 콤플렉스를 안고 있었다. 외모는 193cm이나 되는 키에 비쩍 마르고 볼품이 없었고, 도시가 아닌 시골 출신이었던지라, 말투조차 미국 남부 특유의 사투리가 약간 섞인 억양에다가 체구와 어울리지 않은 가는 목소리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심지어 그의 얼굴은 인신공격을 퍼붓는 일부 정적들에겐 ‘고릴라’라며 노골적인 비아냥의 소재로 이용되었다.

 

 번은, 그 유명한 링컨 - 더글러스 논쟁 중에 더글러스가 링컨에게 ‘두 얼굴의 사나이’라고 비난하자 “저한테 얼굴이 하나 더 있다면 잘생긴 얼굴로 하고 나왔지, 이 얼굴을 하고 다니겠습니까!”라고 재치 있게 받아쳐 사람들의 호감을 이끌어냈다.

 

자신을 내내 '고릴라'라며 부르고 다녔던 정적 에드윈 스탠턴이 노예제에 대한 입장이 같다는 것을 계기로 처음 만남을 가졌는데 불같은 성격의 스탠턴이 그 당시 촌뜨기 신출내기 변호사이던 링컨을 자기와 함께 묶었다는 것에 노발대발했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을 알아본 링컨은 참모진들이 결사반대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남북전쟁 중 전쟁부(Department of War, 육군부) 장관에 임명하는 포용력을 보여주었다.

 

지금은 한국인에게도 널리 알려질 정도로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에 대해 당시 미국의 언론지 <시카고 타임스>지에서는 ‘멍청하고 쓰레기 같은 연설’이라며 그를 폄하했다. 그는 임기 내내 당시 미국 엘리트의 조롱과 멸시를 오롯이 받아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지도력을 발휘해서 미국을 거듭나게 했다.

그가 자신의 외모를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친근감 있고, 인자하고 따뜻한 인상으로 만든 턱수염을 기르게 된 사연 역시 자신의 외모로 고민하던 그가 그저 편지를 썼던 소녀 그레이스 베델의 의견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다. 이 편지는 미국에 보존되어 있는 링컨이 살았던 집에 가보면 그의 집무실 벽에 그대로 꽂혀 있는 걸 볼 수 있다.

 

당신이라면 장티푸스로도 죽던 시설에 전염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주치의를 보며 “드디어 제가 뭘 좀 나눠줄 만한 게 생겼네요.” 하고 선선히 웃어 보일 수 있었겠는가?


당신이 어떤 힘겨운 좌절과 실패를 겪어 다른 사람을 만나기 싫을 정도로 힘겨워하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머니를 시작으로,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을 모두 떠나보내야만 했던, 그리고 이긴 선거보다 떨어진 선거가 더 많은 정치인으로 미국의 대통령 자리까지 올랐던 그의 힘겨움보다 더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잘 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아픔보다 내 아픔은 작더라도 훨씬 더 아프게 느껴지는 법이고, 내 아픔은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다고 느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 힘겹고 지난했던 삶 속에서 우울증을 위트와 유머로 견디던 링컨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평온한 성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고, 오히려 초조·불안해하는 각료들에게 농담을 던져 긴장을 풀어주곤 했다. 자신이 가장 힘들고 자신이 가장 아프다는 사실 앞에서도 그는 늘 그런 모습으로 그 아픔을 삭이고 앞으로 걸어 나갔고, 그렇게 역사를 새로 썼다.

 

고졸 출신의 대통령이던 비슷한 유년기를 보냈던 노무현 前 대통령도 그런 마음을 나누고 싶었던 것인지, 직접 링컨 전기를 쓴 적이 있다.

링컨 박물관장의 말에 의하면 세계에서 링컨 전기를 쓴 유일한 대통령이었다고 전한다. (책 제목은 2001년 집필한 <노무현이 만난 링컨>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워싱턴 D.C. 포드 극장 박물관에 특별 전시되어 있다.)

 

이미 이 시리즈를 통해서 충분히 느꼈겠지만, 위인전은 위인이 되려고 읽는 게 아니다.


이 시리즈 본연의 취지처럼, 당신이 어려서 위인전을 통해 읽었던 그렇게 훌륭하다던 노예해방의 주인공 링컨도 이렇게 힘겹고 지난한 삶을 견디고 살아야만 했다. 그렇게 살아냈다.

당신의 삶이 아무리 당신을 힘겹고 당신의 어깨를 짓누르더라도 당신은 그 삶을 살아내야만 한다.


살아만 낸다면,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옮겨가는 과정에서 당신은 당신의 역사를 반드시 새로 쓸 수 있게 될 것이고, 그 외의 것들은 부수적으로 따라올 것이다.

오늘도 꿋꿋이 살아낸 당신에게 수백 년 전 태평양 건너 미국 대통령을 지냈던 그가 남긴 말을 전해주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나는 울지 않기 위해서 웃는다, 그게 전부야, 그것밖에 다른 이유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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