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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19. 2021

작품 말아먹고 제작비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만든 작품이

대박을 치고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새로 쓴 장인으로 우뚝서게 되다.

1941년, 일본 도쿄에서 4형제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3살 때 전란(戰亂)을 피해 도치기현 우츠노미야시로 피난을 가서, 소학교 3학년 때까지 생활했고, 전쟁이 끝나 도쿄가 안정을 찾게 된 1950년에 돌아왔다. 아버지는 가문기업으로 큰아버지가 경영하는 ‘미야자키 항공흥학(宮崎航空興学)’의 공장장이었다. 이 회사는 나카지마 비행기(中島飛行機)사의 하청으로 군용기의 부품을 생산 조립했는데, ‘제로센’을 만들기도 했다. 그의 날개와 나는 것에 대한 로망은 이 시기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패전 후에는 일본 전체에 물자가 부족했던 상황에서 생필품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업종을 전환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전후 일본의 대부분의 서민들이 궁핍한 삶에 힘겨웠음에서도 불구하고 그의 집은 언제나 삼시 세끼 흰 쌀밥을 먹을 정도로 유복했다.

어려서부터 집안의 가업 탓에 군수업에 종사하는 고급 기술자와 군인 출신만이 오가는 독특한 환경에서 성장했는데, 군인 출신 기술자들은 일본이 다른 나라에 어떤 공격을 성공했는지 자랑처럼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어릴 적부터 일본이 싫었다고 한다. 심지어 일본 노래가 부르기 싫어 러시아 민요를 부르고 다녔을 정도라고 한다.

 

아버지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전쟁에는 반대하는 반전주의자였지만, 전쟁 특수(特需)로 돈을 벌어들였던 시절을 그리워하던 세대였기 때문에 대학생이 되어 좌익 사상에 빠진 그는 아버지와 심한 반목을 빚었다.


어머니는 그가 6살 때 결핵균이 척추까지 감염되어 오랫동안 누워 지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결핵균이 전염될까 어머니 곁에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자랐다. 어머니는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여장부 스타일로 씩씩하고 활발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유독 그의 작품에는 어머니를 모티브로 하는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런 영향 때문이다.

<이웃집 토토로>

어머니가 움직일 수 없어, 어릴 적에는 식모가 집안일을 했지만, 이후에는 형제들이 스스로 밥을 짓고 가사일을 하고 동생을 돌보며 자랐다. <이웃집 토토로>는 당시 자전적인 상황이 고스란히 그려진 작품으로, 여자 주인공 사츠키는 태어난 연도까지 똑같은 자신의 체험을 투영해서 만든 인물이다.

 

유년기 시절, 체격도 작고 몸이 약해 운동에는 소질이 없어 달리기 경주를 하면 꼴찌였고 열등감에 시달렸다, 대신 방안에 틀어박혀 그림 그리기와 독서에 열중했다. 데즈카 오사무, 스기우라 시게루의 만화를 좋아했고, 특히 그림이야기 <사막의 마왕>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사람이 하늘을 날게 하는 비행석이 등장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데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인정받는 일본 애니메이션계 역사를 새로 썼다고 자타에게 공인받는 거장. 그의 작품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작품만 보고 끝낸 사람은 결코 없다고 하는 전설적인 인물. 일본 애니메이션을 ‘작품’ 수준으로 끌어올린 자타가 공인하는 애니메이션 장인,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みやざき はやお)의 이야기이다.

 

사실 1990년대까지 일부 일본 만화, 애니매이션 팬들을 제외하면 서양에까지 세계적으로 알려진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1999~2000년에 <모노노케 히메>가 서방 국가에서 개봉되며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마침내 2002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세계적인 역대급 찬사를 받으며 알려지지 않았던 과거의 걸작들도 발굴되어 영미권에도 알려졌고 스튜디오 지브리와 미야자키 하야오는 세계적인 거장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중학교 입학하고, 프랑스 유학파 미술 선생님에게서 뎃생의 기초부터 개인 교습을 받으며 미술 실력이 일취월장하게 된다. 폴 세잔과 인상파 화가에서 영향을 받으며 닥치는대로 종이만 보이면 그림을 그려댔다고 한다. 주로 채색화가 아닌 연필로, 인물보다는 주로 탱크 같은 것을 그렸다고 한다.


평생에 걸친 미야자키의 밀리터리 매니아 취향은, 어린 시절 본 비행기 부품 제조 공장의 기억과, 미군 통치가 끝난 후, 반동(反動)처럼 몰아닥친 태평양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우익 성향의 아동 잡지의 기사들(제로센, 전함 야마토 찬양)의 영향을 받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토에이 동화의 <백사전>(1958)을 보고 여주인공에게 반해서 3일 연속 극장을 찾으며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주로 디즈니 작품이나 미국 애니메이션만 보던 그에게는, 별거 아닐 거 무시했던 일본 애니메이션이 던진 충격이었다. 애니메이션 업계에 들어가게 된 계기가 된 것도 바로 이 작품이다.


만화가가 되려는 마음은 있었지만 무엇을 그려야 할 지는 모르고 있었는데, 이 낯간지러운 멜로 드라마 영화를 보고 자신이 이런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부끄럽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한 다음에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진실역시 이 때 깨달았다고 한다.

 

대학은 미대를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가쿠슈인 대학 정경학부(정치경제학)로 진학했다. 대학 재학 기간 당시 일본은 한창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시절이었으나, 가쿠슈인은 대표적 부르주아 교육기관(귀족학교)이라 학생운동의 무풍지대였다. 미야자키도 처음에는 그들과 어울려 시대에 무관한 듯 굴던 철없는 학생이었지만, 1960년 안보투쟁에서 경찰이 대학생을 유혈진압하는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고서 데모에 전선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만화를 천대하던 시기였던 지라, 대학 재학 시 학교에 만화 서클이 없어서 그나마 가까워 보이는 아동문화 연구회(児童文化研究会)에 들어간다. 그나마도 아동문화는 뒷전으로 그냥 친목 모임으로 인형극 몇 편을 연출하려다 관둔 경험이 다라고 한다. 당시 인형극의 주인공 이름으로 예정하고 만든 ‘파즈(해적 선원의 이름)’와 ‘시타(그리스어 알파벳)’는 훗날 <천공의 성 라퓨타>의 주인공의 이름으로 낙점된다.

 

이 시기, 몇 편의 사회주의 혁명을 그린 만화 습작 원고를 들고 만화 출판사에 찾아갔지만, “우리 회사는 시대극은 안 받습니다.” 라며 편집자한테 한방에 차였다고 한다. 성격이 소심하여 그런 바보같은 편집자들에게 자신의 만화를 보여준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해서 그 이후로 다시는 출판사에 찾아가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야자키의 젊은 시절

만화가와 애니메이터라는 진로 선택의 갈림길에서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애니메이션이 표현방법면에서 더 뛰어나다고 결론을 내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토에이 동화에 정식 입사했다. 동화를 그리는 애니메이터 생활을 시작했지만, 토에이 동화가 만들고 있던 작품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조직의 톱니바퀴가 되는 것도 싫어서 저녁 5시가 되면 칼퇴근하는 불성실한 직원이었다고 한다.


애니메이션 원화의 수준에 실망하여 매번 싸움을 벌이곤 하다가, 입사 1년 뒤 회사 내에서 열린 상영회에서 보게 된 소련의 애니메이션 <눈의 여왕>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고, 애니메이션을 자신의 평생의 직업으로 삼아야겠다는 결심을 다지게 된다.

<눈의 여왕>, 1957년작

당시 그는, ‘정말로 어떤 생각이나 마음을 전하려고, 심플하고 정성들여 만들면 애니메이션도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당시엔 비디오테입도 없어 아는 사람에게 구한 <눈의 여왕>의 소리만 녹음한 음향 테잎 릴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테잎이 늘어지도록 들었다고 한다. 러시아어도 전혀 몰랐지만 그저 봤던 영상을 떠올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고 한다.

입사 1년차 신입 동화맨였던 미야자키는 <걸리버의 우주여행>(1965)의 라스트 씬을 바꾸는 아이디어를 제안해서 선배들을 놀라게 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회사 내에서 ‘물건’ 혹은 ‘천재’로 유명해진다.

 

1965년, 같은 직장 동료인 연상의 여인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했다. 같은 해, 토에이 동화 노동조합 주도로 제작을 시작한 타카하타 이사오의 첫 극장용 영화 연출작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1968)에서, 미야자키는 신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면설계과 원화로 참가, 바위 거인같은 캐릭터부터, 그릇·잡기·집게·활·무기·건물의 투시도 등등 방대한 설정 그림을 그려서 타카하타가 연출하려는 작품 세계 전부를 실체화해 낸다.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 북미출시 DVD판

하지만 이 작품은, 막대한 예산(1억 3천만 엔)과 시간(3년)을 투입하고도 상업적으로 참패, 토에이 동화가 망할 뻔할 정도로 휘청거리게 만들었고, 자연스럽게 제작팀의 회사 내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 작품인 <장화신은 고양이>(1969)는 지금까지도 명액션 장면으로 회자될 정도로 오오츠카 야스오 작화 장면과 타고난 공간 감각을 이용한 종횡무진으로 펼쳐지는 미야자키의 작화 장면이 돋보이는 클라이맥스의 추격전으로 좋은 반응을 얻고 흥행에도 대성공해서 후속편이 2편이나 만들어졌다. 이후 주인공 고양이 페로는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만화가로서의 재능이 워낙 강했던 지라, 이 시기 미야자키는 1969년 9월부터 1970년 3월까지 일본 공산당의 청소년지 <소년소녀신문>에 필명을 사용하여 <사막의 백성(砂漠の民)>(총 26회)이라는 만화를 연재한다. 11세기 말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실크로드를 둘러싼 민족분쟁과 노예 반란을 주동하는 소년 주인공을 그린 작품으로, 이후 <슈나의 여행>과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모델이 된 작품이다.

<사막의 백성(砂漠の民)>

이후 차기작 <하늘을 나는 유령선>(1969)이나 <동물 보물섬>(1971년)에서 눈에 띌만한 액션이 가미된 작화는 거의 미야자키의 손에서 탄생한다. <알리바바와 40마리의 도적>에서 원화로 참가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는 토에이 동화를 떠나게 된다.

 

토에이 동화는 노조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회사는 이들을 희망퇴직이라는 명분으로 내쫓았다.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가 제작비와 제작기간을 초과하고 막대한 적자를 낸 데에 대한 타카하타 이사오의 징벌 처분이었다. 이후 그는 연출을 못 하게 되었고, 그의 팀이었던 미야자키도 원화나 그리는 일만 시켜서, 토에이에서 그가 연출을 맡을 수 있는 기회는 요원해보였다.

 

1971년, 그렇게 희망퇴직이라는 명목으로 쫓겨나듯이 타카하타 이사오, 코타베 요이치와 함께 3인방은 토에이 동화를 떠나, 토에이의 선배 오오츠카 야스오가 1968년에 먼저 이적해 있던 A 프로덕션(현재의 신에이 동화)로 이적했다. 그곳이라면 자신들이 만들고 싶어하는 작품을 마음껏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리라는 착각을 품었다.

<루팡 3세>

말괄량이 삐삐를 TVA 애니화하려고 사전에 많은 준비 작업을 하고, 스웨덴까지 가서 원작자를 만나서 부탁했지만, 애니메이션화의 허가를 받지 못하고 기획은 좌초됐다. 이때 낮은 시청률 때문에 방송국의 높은 분한테 꾸중을 들은 감독이 홧김에 제작 현장을 내팽개치고 떠나버려서 난리가 난 상태인 <루팡 3세>(1기 TV시리즈)에 긴급 투입되어 엉겹결에 연출을 맡게 된다.

 

1972년 10월 중국에서 일본에 선물로 보낸 판다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애니메이션 업계에도 판다를 소재로 한 영상화 이야기가 나돌았다. 미야자키는 기획이 엎어진 말괄량이 삐삐의 설정과 캐릭터를 살려서 각본을 쓰고 <판다 아기 판다>(1972)라는 극장용 단편영화를 만든다.

이 무렵 미야자키나 타카하타 모두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자기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든 작품이었다. 대박까지 가진 못했지만, 좋은 반응 덕분에 속편 <비오는 서커스 편>도 만들어졌다. 미야자키는, 아이들이 마지막에 함께 주제가를 부르며 호응하는 모습을 보며, 정말로 아이들 편에 서서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기만 하면 이렇게 집중해서 본다는 사실을 직접 실감하고, 보람과 행복감을 느끼고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화면 속에 자극적인 장면이 없어도 어린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만들면 된다는 체험은 다음 작품인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의 기초가 되었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1973년, 즈이요 엔터프라이즈의 사장이 오오츠카 야스오의 추천으로 타카하타 이사오를 감독으로 발탁하여, 함께 즈이요 영상으로 이적, 세계명작극장 시리즈가 되는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에서 장면설정과 레이아웃을 맡았다. 장면설정과 레이아웃이란 화면에 보이는 모든 그림의 설정과 구도의 설계를 하는 작업인데, 보통의 애니메이터는 하루 10컷 정도 그리는 것이 기껏인데, 하야오는 하루에 50컷 이상, 한 에피스드 당 300컷 이상을 그려서, 하이디 전 52화 전 컷을 혼자서 해치우는 전설을 만들어낸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이 작품이, 평균 20%가 넘는 엄청난 대박을 치면서, “세상 한 구석에서 찌그러져 일하고 있던 기분이었는데, 돌연 세상과 만난 기분이었다.”라며 성취감을 맛보았다고 한다. 방송사들이 다 그렇지만, 한번 히트하니까 같은 스타일로 비슷한 작품을 만들어달라는 오더가 쏟아진다.

그렇게 한국에서도 방영된 <엄마찾아 삼만리>에서도 전 에피소드 전 컷의 장면 설정, 레이아웃을 담당해낸다.

<엄마찾아 삼만리>

1977년, 일본에서는 우주전함 야마토의 극장판 편집 영화의 히트와 <스타워즈>의 영향으로 아니메와 SF 붐이 일기 시작한다. NHK도 이런 사회적인 요구에 부응하고자 유소년과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연속극을 방영하기로 기획하고 투자에 나선다. 그렇게 세계명작극장 시리즈로 인기를 얻고 있던 닛폰 애니메이션에 의뢰가 들어온다.


프로듀서의 추천으로 미야자키는 감독으로 발탁됐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생애 처음으로 연출(감독)을 맡은 TVA 연속 시리즈(총 26화) <미래소년 코난>(1978)에서 거의 모든 전 작업을 혼자서 해내는 대활약을 펼쳤다. 앞선 두 편의 TVA 시리즈의 전 컷의 레이아웃과 화면설정을 한 경험이 그에게 그것이 가능하게 한 능력과 자신감을 준 결과였다.

<미래소년 코난>

<미래소년 코난>은 첫 방송에서는 시청률이 높지 않았지만(평균 9%) 재방송이 방영되면서 작품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지금까지 회자하는 고전 명작이 되었다.

1979년에는 타카하타 팀으로 복귀, 세계명작극장 시리즈 <빨강머리 앤>에서 참가했지만, 동일한 작업 스타일과 따분한 일상극에 욕구불만이 최고조로 달했다. 그즈음 선배인 오오츠카 야스오가 도쿄무비신사,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에서 제작하는 극장용 영화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의 감독직 의뢰를 받고 고민한다는 전화를 받고 자신이 하겠다고 나선다.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하지만 결과적으로 <칼리오스트로의 성>은 3억 엔의 제작비를 들여 고작 절반도 채 회수하지 못하고 흥행에서 참패했다. (물론 이후 이 작품도 명작이라는 재평가를 받게 된다.)

혼신의 힘을 쏟아 붓은 <칼리오스트로의 성> 흥행 참패는 극장 영화로 데뷔한 39살의 소심했던 미야자키에게는 정신적 데미지가 엄청 컸다. 다시는 감독직을 맡지 않겠다, 애니메이터도 그만두고 만화가가 되든지 그림책 작가가 되겠다든지,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할 정도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당시 기획했던 스케치

이후 도쿄무비신사의 산하 실제작사인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에서 이탈리아와의 합작 TVA <명탐정 홈즈>에서 5편을 연출하고, 도쿄무비신사가 세계 시장 진출을 노린 야심 찬 대작 <리틀 네모> 제작을 위해 타카하타 이사오, 오오츠카 야스오와 함께 미국 LA까지 건너가 장기간 체류하면서 준비했지만, 기획에 대한 의문을 품고 도중하차, 더 이상 회사와도 의견이 맞지 않는다며 퇴사하고 프리랜서를 선언하게 된다.

당시 기획했던 스케치

이 암울했던 시절의 기획이 훗날 토토로, 나우시카, 라퓨타, 모노노케 히메로 실현됐다.

 

프리랜서가 된 후, 여러 편의 영화 기획을 내밀어보지만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원작이 없다는 이유로 기획이 연거푸 문전박대를 당하자, <아니메쥬>잡지의 편집장이었던 스즈키 토시오는 원작이 될만한 만화를 그리라고 권했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영화를 만들려는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만화를 그린다는 것은 싫었기에, 영상화는 염두에 두지 않고 평소 자신의 철학과 취향을 살린, 만화라는 표현 매체에 맞는 작품으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아니메쥬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그럭저럭 인기를 얻었고, 단행본 1권이 발행되자, 1시간 분량의 OVA로 제작하자는 제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장편 극장용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영상사업에 의욕이 있었던 당시 도쿠마 쇼텐의 사장을 아니메쥬 초대 편집장 오가타 히데오와 2대 편집장 스즈키 토시오가 설득하고, 미야자키의 남동생이 근무하는 광고대리점이 공동투자를 하기로 해서 영화화가 결정, 프로젝트팀(제작위원회)이 결성됐다.


톱크래프트를 제작 거점으로 제작팀을 꾸려, 1984년 3월 11일,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극장에 공개했다. 관객동원 수는 약 91만 5천 명으로, 대박까지는 아니었지만 다음 작품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인정을 받는 것으로 안도해야만 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정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그 해 아니메 그랑프리, 일본 아니메 대상에서 상을 타고, 영화잡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신문 칼럼에서도 주제의식과 작품성에 대해 절찬했고, 다음 해 TV에까지 방영되면서 호평을 얻고, 비디오 판매와 렌탈 수입으로 역주행에 해당하는 높은 수입고를 기록했다.

 

하지만, 정작 미야자키는 필름 원본을 불태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했다. 제작 스텝을 제대로 구하지 못한 인력난에 긴박한 상황에 제작 기간이 겹쳐, 원하는 퀄러티가 나와주지 않았던 것을 내내 아쉬워한 것이었다.

애당초 영상화를 고려하지 않고 그린 작품이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하나 하나가 손이 많이 가는 작화였다. 스토리도 영화는 만화 원작의 프롤로그 소개 수준에 억지로 만든 결말을 덧붙인 미완성작이었던 것이다. 라스트 씬도 애초의 콘티에는 나우시카가 오무와 서로 마주 서는 장면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오무를 죽이는 엔딩을 해야한다고 우겨 지금의 엔딩이 된 것인지라 미야자키에게는 아픈 손가락인 작품이었다.

 

하지만, 역주행을 한 덕분에 미야자키에게도 원작자 지분의 저작권 로얄티로 상당한 수입이 들어왔다. 애니메이터는 가난한 직업이라 이 돈을 혼자서 갖는다는 것이 양심에 걸렸다. 그래서 미야자키는 이 돈을 타카하타 선배를 위해 쓰기로 한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만들 때 프로듀서를 맡아 준 은혜를 갚기 위해 이번에는 자신이 타카하타의 작품의 프로듀서가 되어, 그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지원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후 지브리 스튜디오를 공동설립하게 된 3인방

그런데, 타카하타 이사오 특유의 느긋한 스타일로 인해, 그의 문화 다큐멘터리 영화는 절반도 완성되기 전에 제작비가 바닥이 나버렸다. 보통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라면 1~2천만엔이면 충분한 예산이었음에도 5천만 엔이 증발하고 미야자키는 본인의 집 저당까지 잡혀야 할 처지에 놓였다. 어떡할까 고민하는 미야자키에게 스즈키 토시오는 다른 영화를 만들어 돈을 벌 수밖에 없다고 제안한다.

<천공의 성 라퓨타>

그렇게 미야자키는 리틀 네모와 NHK TVA 기획을 위해 제안하려고 만들어둔 기획서를 가져온다. 그 기획서가 저 유명한 <천공의 성 라퓨타>였다. 그렇게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기 위해 1985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제작거점이었던 톱크래프트를 해산, 재창립하는 형식으로 ‘스튜디오 지브리’라는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탄생하게 된다.

 

이후 <마녀 배달부 키키>가 히트치기 전까지 미야자키는 항상 투자자들의 압박 속에서 작업에 임해야 했다.

 

<천공의 성 라퓨타>(1986)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첫 작품으로, 관객동원 수는 약 77만 명으로 전작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못 미치는 성적을 남긴다. 하지만, TV에 방영되면서 엄청난 시청률의 대박을 기록하며 대중적인 인기작이 되었다.


이후 수많은 작품이 스튜디오 지브리를 애니메이션의 명가로 만든 것은 당신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여든을 맞이한 이 거장은 아직 죽지 않고 현역에서 계속 꼼지락거리며 작업을 하고 있다. 내가 지브리 스튜디오를 세운 것을 마지막으로 그의 이야기를 접은 것은, 분량도 분량이지만, 이 시리즈는 그가 거둔 성공에는 그닥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는지, 그 어마어마한 실패의 연속들을 모두 본 소감이 어떠한가? 당신이 지금 40대 중반 이상이라면, 스튜디오 지브리가 아닌 그와 함께했던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고스란히 추억할 것이다. 그의 발자취에 있는 그 명작들은 모두 한국의 80년대 TV를 통해 당시의 어린 당신들에게 이름만으로도 주제가를 흥얼거리게 할만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생긴 그대로, 소심하고 소극적이며, 작품을 끝낼 때마다 은퇴를 하겠다고 징징거리는 성격으로 유명하다. 가난이 일반이었던 전후 일본에서 유복한 가정에서 만화를 꿈꾼 소심한 그가, 실패를 거듭하며 밀리고 밀려 돈을 마련할 방편으로 어쩔 수 없이 만든 영화가 그를 지금의 대가로 만들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회사가 일본 애니메이션을 대표하는 스튜디오 지브리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당신의 생각을 듣고 싶다.

그림체만 보더라도 그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만큼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작업은 거의 혼자서 다 한다고 할 정도로 독특한 작업 스타일을 갖게 되었다. 보통사람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것은 그의 성격이 빚어낸 자업자득의 결과였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시스템이 아니었고, 물론 지금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스타일은 그 어느 누구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가 만화쟁이가 아닌, 예술가로서 높이 평가받는 것은 그의 작품이 상업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창의적이고 섬세하고 뛰어난 영감으로 다양한 모티브들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실패로 점철된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는 내내 그 실패에서 지금은 성공이라고 하는 것들을 거둬냈다. 자신이 모두 작화를 할 수밖에 없던 현실에서 자신을 업그레이드 시켰고, 그 모든 작업을 혼자서 해내면서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전체 호흡을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다. 생각이 다른 이들과 내내 부대끼면서도 움츠려들면서도 그 때 준비했던 것들, 엎어졌던 것들 그 어느 하나도 그의 자산이 아닌 것이 없었다.


당시에 처참한 실패라고 손가락질 받고, 희망퇴직이라는 미명하에 쫓겨나고, 제작비가 없어 제대로 된 작품을 완성하지도 못했던 그 모든 경험과 그 때 그렇게 궁지에 몰려 그가 생각해내고 그려냈던 것들은, 여든의 거장이 되어가는 동안 하나하나 자산으로 풀어냈고, 인기를 얻는 작품으로 거듭났다.

그의 실패 중 그 어느 하나 헛투루 쓰인 것이 없을 정도로 그의 좌절했던 시기의 그림과 아이디어들은 알뜰살뜰하게 그의 성공한 인생의 밑바탕이 되어 주었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그것이, 꾸준히 해나가고 계속해서 자신의 꿈을 향해 가면서 실패라고 낙인 찍혔던 것들마저도 결국 당신의 최종적인 성공에는 꼭 필요한 자양분이고 실질적인 재산이 된다는 사실을, 지금 당신이 모르고 있을 뿐이다.


안다. 힘들고 지치고, 이제까지 당신이 해온 것들이 다 의미없는 것 같고, 도대체 이제까지의 인생에 뭘 하고 살았는지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


하지만, 그렇지 않다.


당신의 인생은 지금 그렇게 초라하고 시시하게 끝날 것이 아니며, 당신의 인생에 시작될 성공의 빵바레는 이제부터 울릴 것이다. 그것도 당신이 이제까지 삽질이라고 생각하고 다 헛된 일이라고 생각했던 그것들이 당신의 영혼에 근육으로 붙어 당신의 꿈을 이루는데 어느 하나 허투루 버려지지 않고 사용될 것이다.


당신의 실패 그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잊지마라.


당신의 인생은 이제 막 전성기에 들어서기 위한 워밍업을 끝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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