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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22. 2021

돈이 없어 대학도 못 가고 알바하다 그저 동물이 좋아서

학사, 석사 패스하고 케임브릿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따내다.

1934년, 영국 런던에서 첫째 딸로 태어나 영국 남부 도싯 주(州)의 본머스 바닷가에서 자랐다. 당시 그녀의 아버지는 영국에서 유일한 카레이서였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동물을 무척 좋아해 지렁이를 침대 위에 올려놓는가 하면, 닭이 알 낳는 장면을 보겠다고 다섯 시간이나 닭장 안에서 기다리다 가족들이 경찰에 실종 신고하는 소동을 치렀다.

소설책에서 읽은 아프리카로 여행가는 것이 평생소원이라고 말했다. 12살의 나이에는 친구들과 동물사랑 단체를 결성해 박물관을 만들고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으며, 또한 기금을 마련해 늙었다는 이유로 안락사당할 위기에 처한 말을 구해 주는 등 행동력이 높았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가세가 기우는 탓에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에 가는 대신 비서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비서가 되면 세계 각지를 여행할 기회가 더 많아질 것’이라는 어머니의 충고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후 병원과 영화사 등에서 일하다가, 1956년 5월 케냐에 있던 학교 친구가 초대를 했고, 케냐로 갈 뱃삯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웨이트리스로 일했다. 이 아프리카의 케냐 여행은 그녀의 일생을 송두리째 바꾼 계기가 되었다.

 

1956년 한 달 정도 친구네 농장에서 지내던 중, 지역 주민이 그녀의 유별난 동물에 대한 관심을 알아보고 루이스 리키 박사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루이스 리키 박사는 케냐 나이로비의 국립 자연사 박물관장이었다. 구달은 그를 만나 바로 자신의 경력을 살려 그의 개인비서가 되었다.

루이스와 비서시절

저명한 고고학자였던 루이스는 영국인 선교사의 아들로 케냐에서 태어나, 키쿠유 족과 함께 생활하고 성인식을 거쳤을 정도로 그곳의 말과 문화에 정통했다. 뛰어난 직관력과 쇼맨십을 지니고 학계의 인습과 체면에 굴복하지 않았던 학계의 이단아였던 루이스는 아내, 아들과 함께 케냐의 올두바이 협곡에서 고인류의 화석을 발굴해 명성을 얻기도 한 인물이었다.

 

당시 루이스는 현존하는 생물 가운데 인류와 가장 가까운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등의 대형 유인원에 관한 현장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동물들을 연구함으로써 선사시대 인류의 행동 양식에 대해 약간이나마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연유였다. 비서를 자청하고 나선 그녀가 이 연구를 해보겠다고 자원하자, 루이스는 자신의 연줄을 총동원해서 자금 지원에 나섰다. 주위에서는 학력도 경험도 없는 영국인 처녀가 혼자서 밀림에 들어간다는 사실에 어이없어했지만, 루이스는 주위의 우려를 일축하고 물심양면으로 그의 비서를 후원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동물학자, 침팬지 전문 연구가이자 환경 운동가로 유명한 제인 모리스 구달(Jane Morris Goodall)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탄자니아에서 40년이 넘는 기간을 침팬지와 함께 한 세계적인 침팬지 연구가이다. 침팬지가 채식뿐 아니라 육식도 좋아하고, 도구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혀낸 인물로 유명하다.

 

몇 년 동안 자신의 비서일을 훌륭히 수행하던 제인을 눈여겨본 리키 박사는 그녀에게 침팬지에 대한 관찰과 연구를 추천했고, 그 제안에 기뻐한 제인은 바로 침팬지 서식지로 떠나겠다고 한다. 젊은 백인 여성 혼자서 오지에 들어가는 것을 탐탁잖게 생각한 정부는 허가를 낼 수 없다고 하고, 정부의 허가를 받아내기 위해 영국에 있던 그녀의 어머니까지 불러들여 그녀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야행성 침팬지 침팬지 서식지(현재의 탕가니카 호수 인근의 자연보호구역)로 들어가게 된다.


당시 안내를 맡았던 가이드는 영국에서 온 이 백인 여자 둘이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내기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기껏해야 몇 주나 버티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 엉성한 영국인 모녀는, 1960년 7월 16일에 탄자니아 곰베(Gombe)의 침팬지 보호구역에 도착한다. 탕가니카(오늘날의 탄자니아)에 입국한 것은 꽤 오래전이었지만, 때마침 인접국인 벨기에령 콩고에서 식민 통치를 타도하려는 민중 봉기가 일어나 피난민들이 국경 너머로 몰려오자, 탕가니카 정부 측에서 그 지역의 접근을 정말 차단한 상태였다.

20대 당시 제인 구달

보호구역에 도착한 뒤에도 모녀는 계속해서 의혹의 눈길에 시달려야 했다. 현지인은 백인 여자들이 원숭이를 보러 왔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고, 아마도 정부나 외국의 첩자일 거라고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몇 달 뒤에 어머니가 먼저 귀국하자, 현지인과 안내인의 예상은 마치 들어맞는 듯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이 젊은 여성이 이후 10여 년이 넘도록 그곳에 머무르며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사실들을 발견하리라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곰베(Gombe)에 도착한 지 5개월 만에 어머니가 영국으로 돌아가자, 제인은 혼자 밀림에 남아 매일같이 산을 오르며 침팬지들을 찾아다녔다. 관찰이 시작되고 처음 얼마 동안은 침팬지를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제인은 일부러 언덕 위에 앉아서 침팬지들이 자기 모습에 익숙해지게 했고,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침팬지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털을 골라주는 등의 신체 접촉까지도 성공했다.

제인은 침팬지에게 데이비드, 골리앗, 맥그리거, 플로 등의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이는 당시 학계에서 금기로 여겨지던 행위여서 거센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동물에 대한 관찰 연구에 약간의 감정이입이 불가피함을 인정한 이런 조치는 동물행동학의 원조 격인 콘라트 로렌츠(1903~1989)의 방법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제인의 연구는 자연환경을 벗어나 실험실의 인공환경에 갇혀 있던 그 분야의 연구를 다시 자연으로 불러낸 셈이었다.


그러나 주위의 평가는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금발에 백인에 미인인 그녀의 외모, 다리가 훤히 드러난 반바지 차림의 사진, 하다못해 ‘타잔’과 ‘치타’를 연상시키는 ‘제인’이란 이름까지도 종종 험담의 대상이 됐다.

 

물론, 제인 구달 이전에도 침팬지를 연구한 학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남성이었으며, 또한 자연 상태에서는 수개월 정도의 단기 연구가 대부분이었다.

제인 구달의 초기 연구에서 가장 획기적이었던 발견 두 가지는 침팬지가 사냥과 육식을 즐긴다는 사실, 그리고 침팬지가 연한 나뭇가지를 구멍에 쑤셔 넣는 방법으로 흰개미를 잡아먹는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두 번째 발견은 도구의 제작 및 사용은 오로지 인간만이 지닌 능력이라는 통념이 지배적이던 시절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소식을 들은 루이스 리키는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을 다시 정의하던가, 도구를 다시 정의하던가, 아니면 침팬지를 인간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구달은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1962년까지 대학 근처에도 가보지 못해서 아무런 학위도 없었던 고졸에 불과했던 그런 그녀에게 앞으로의 연구를 위해서 그 분야의 학위를 받아두는 것이 필수라는 루이스의 주선으로 그간 모은 자료들을 기초로 학계에 발표하면서 이슈를 일으키면서 1962년~1965년에 학사 학위 없이 곧바로 케임브리지 대학교 박사 과정에 입학하는 기적을 만들어낸다. 대학에 다닌 적이 없었던 제인에게 베풀어진 이런 특혜는, 그때까지 영국 역사상 단 8명밖에 없었다. 이후 박사학위를 받고 활동을 위해서도 고졸이던 제인은 1971~75년까지 스탠퍼드 대학의 외래 교수로 재직한다.


영국으로 돌아와 학위를 따내는 와중에 침팬지들이 위기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를 맞아, 침팬지들의 진실에 대한 강의를 여럿 열고 현지 주민들에게 숲과 그것을 둘러싼 생태계의 중요성에 대해 교육을 받도록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숲과 침팬지들의 존속을 인정받게 만드는 역할도 하게 된다.

이러한 획기적인 발견과 연구발표 직후에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는 자금 지원과 아울러 네덜란드 출신의 사진작가 휴고 반 라윅을 파견해 사진 및 영화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제인과 휴고는 사랑에 빠져 1964년에 결혼했고, 짧은 신혼여행을 마치고 곰베(Gombe)로 돌아가 연구를 재개한다. 제인은 1967년에 아들을 낳고 양육에 신경 쓰며 현장 연구로부터 다소간 멀어진다. 오지에서의 침팬지 연구로 강인함의 상징이 되다시피 한 그녀였지만, 의외로 어머니라는 여성의 전통적인 역할을 강조한 까닭에 페미니즘 진영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동물의 세계에서 페미니즘을 찾으려 한다면 침팬지는 그 개념에 부합하는 동물이 아니라는 것이 그녀의 복귀의 변이었다.

그러나 아들 에릭이 짐승 흉내를 내는 등 모글리 현상을 보이며 정글 속에서의 생활이 악영향을 미친다고 이를 싫어한 남편과 자주 다투다가 결국 10년 만에 이혼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인 1975년에 탄자니아인(귀화한 영국인)인 탄자니아 국립공원 관리자 데릭 브라이슨과 재혼했다. 데릭 브라이슨은 백인으로서 드물게 탄자니아에서 투표로 국회의원도 한 바 있을 정도로 탄자니아에서 인맥을 구축했던 인물이라 그녀의 연구를 잘 도왔으나 아쉽게도 5년간의 짧은 결혼생활 끝에 1980년 암으로 사망한다.

 

제인의 연구는 1975년에 큰 위기를 맞이한다. 연구원 네 명이 탕가니카 호수를 건너온 자이레(콩고)의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 직후 탄자니아 정부는 곰베(Gombe)에서 외국인을 모두 철수시키는 조치를 내렸고, 제인 구달조차도 향후 지금까지 그곳에 거주하지 못하고 매년 몇 주 동안만 체류가 허락되었으며, 부재중에는 탄자니아인 연구원들이 업무를 대신 수행했다. 납치범들과의 협상 과정에서 탄자니아 정부나 연구소 측이 일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듯 외부에 비치는 바람에, 제인은 한동안 연구를 위해 사건을 은폐 또는 축소하려 했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녀의 다큐멘터리 영화

같은 해 또 다른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침팬지 사이에서 ‘동족 살해’의 사례가 처음으로 관찰됐던 것이다. 이때 나타난 증거를 본 제인은 침팬지의 미덕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을 인정하고 바로잡게 된다. 침팬지도 충분히 잔인해질 수 있으며, 인간 못지않게 어두운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공식 연구로 발표되었던 것이다. 침팬지의 잔인성에 대한 그녀의 보고는 많은 사람들의 반감과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일각에서는 이런 증거가 자칫 폭력과 살인을 옹호하는 근거로 오용될 수 있으리라고 지적했다. 제인도 그런 위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정치적인 고려 때문에 어떤 사실을 무시하거나 축소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당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침팬지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우리 인간을 닮았다.”

 

20세기 초만 해도 아프리카의 침팬지는 200만 마리에 달했지만, 반세기 후에는 15만 마리로 수가 급감했다. 원인은 바로 인간이었다. 인구 증가로 밀림이 사라지고 개간지로 변했다. 곰베(Gombe) 인근만 해도 제인이 처음 연구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울창한 밀림이었지만, 오늘날 국립공원 경계선 밖으로는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무지로 변해버렸다. 침팬지는 실험용 및 애완용으로 비싼 값에 수출되기도 했다. 밀렵꾼은 보통 어미를 쏴 죽이고 새끼를 챙기는 방법을 선호한다. 이 경우 혼자 남은 새끼의 생존 확률은 극히 낮으므로, 불법 거래되는 침팬지 새끼 한 마리는 다른 침팬지 여러 마리의 희생을 전제한 셈이라고 것이 그녀의 지적이다.

디카프리오와 함께

제인 구달은 1986년 말까지만 해도 동물보호운동의 일선에 나서지 않은 것 때문에 지인 및 운동가들로부터 오히려 오해와 비난을 받았다. 물론 동물을 무의미하게 학대하고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의 연구 대상인 곰베(Gombe)의 침팬지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 이후로는 전 세계를 돌며 자연보호에 관련된 강연을 하고 있으며, 각지의 실험실이며 동물원을 방문해 그곳에 수용된 침팬지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뿌리와 새싹’이라는 아동 대상 환경보호 운동을 제창하여 큰 호응을 얻고 있다.

 

90이 가까운 현재까지도 그녀는 침팬지의 존망과 지구 환경의 중요성을 설파하기 위해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중이다.


당신이라면, 고등학교 졸업해서 비서 전문학교 나와서 정장에 하이힐 신고 아프리카에 가서 동물 연구를 하겠다고 당당히 나설 수 있었겠는가?

박사 학위는 고사하고 대학 근처에도 못 가봤다는 비아냥과 학계 학자들의 노골적인 무시와 비난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자신의 연구성과를 발표하며 그 일을 지속할 수 있었겠는가?


그녀가 목숨을 내놓고 그 위험한 야생 동물 서식 구역에서, 심지어 테러리스트들이 수시로 출몰하는 그 지역에서 평생을 바쳐 동물을 연구한 것은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고, 그녀가 그렇게도 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녀의 목적이 명문대 학위도 교수직도 아니었다는 말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녀는 어렵게 얻은 성과를 가지고 런던으로 돌아와 돈과 명예를 누리며 지냈을 것이다. 자신의 아이가 말을 배우기도 전에 모글리처럼 돼간다며 아내의 명성이 부담스러웠던 남편의 질시와 몰이해를 온몸으로 경험하면서도 그녀는 결코 그녀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가장 어이없는 점은 그녀에게 장애가 있다는 점이다. 이미 그녀를 아는 그 분야의 사람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도 한데, 그녀는 ‘안면인식 장애’가 있다. 안면인식 장애는 여러 증상이 있긴 하지만, 대표적인 설명으로는 사람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안면인식 장애가 있는 남자는 집안에서는 아내를 아내라고 인식하지만, 아내와 마트로 가게 되면, 아내의 얼굴을 아내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한다.

 

그런 그녀가 침팬지마다 각기 다른 이름을 지어주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 울고 웃고 자기가 낳은 아들과 함께 생활했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당신의 이해 기준으로 보면 신체 건강한 장애가 하나도 없는 남성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멋지게 해냈고, 침팬지의 생활에 대해 면밀하게 모든 것을 알아낸 동물학자로 인정받았다.

내한 당시 강연 모습

당신이 여자라서, 학력이 짧아서, 혹은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어쩔 수 없이 경력이 단절될 수밖에 없어서 자신이 원하던 인생을 살지 못한다고 스스로 한탄하고 시대를 탓하고 좌절에 빠지고 우울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고 독신으로 하고 싶은 일 해서 업적을 높이 세운 사람보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심지어 대학교 졸업장이 없어도 저렇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 하고, 훌륭한 업적은 쌓은 사람이 적지 않다.

문제는 주위 환경도 아니고, 사회적 문제도 아니다. 핑계를 대려면 한도 끝도 없이 누구에게나 성공하지 못할 핑계는 산처럼 쌓을 수 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핑계로 대는 것인가? 같잖은 핑계를 대고 우기면 당신의 마음이 편해지나? 그러면 사람들이 아, 그런 이유가 있었네,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가슴으로 이해해주던가? 그렇지 않다. 당신이 가정을 포기하고 아이를 포기해야 당신의 꿈을 이룰 수 있다면 그건 당신의 능력과 의지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아이를 키우고 올바른 가정을 만들고, 제대로 된 남편을 만들어내는 것도 세상 그 어느 일보다 가치 있는 일이다. 그 가장 중요하고 엄청난 일을 폄하하며 너는 왜 나가서 돈을 벌지 않느냐라는 식으로 말하는 허접한 것들의 입방정에 당신의 자존감을 던져주지 마라.


당신의 삶은 당신이 결정하고 당신이 이끌어나가는 당신이 주인인 삶이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 책임도 오롯이 당신의 진다는 결론에 어긋남이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삶이 결코 누군가에 의해 판단된다는 나약한 생각을 지금 이 글을 읽는 순간, 버릴 것을 권고한다. 당신이 당당하게 당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당신의 판단을 존중하며 앞으로 나아가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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