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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23. 2021

전차에 치였는데, 행색이 초라하다고 외면당해 죽다.

스페인 건축의 아버지이자, 바르셀로나의 건축물로 길이 남다.

 1852년, 카탈루냐 캄 데 타라고나(Camp de Tarragona) 바시 캄(Baix Camp)의 레우스(Reus) 혹은 리우돔스(Riudoms)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출생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가 태어난 해에 레우스(Reus)의 산트 페레 아포스톨 성당(Church of Sant Pere Apostol)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추정할 뿐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주물 장인 집안이었다. 당시 주물이 주로 구리를 사용했던 터라, 구리공(銅工)이라고도 불렀다.


그는 자신이 천재적인 재능을 얻은 것도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를 이어받은 탓이라고 여기며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집안에 대해 이렇게 자부심을 표현했다.

 

“내가 공간을 느끼고 보는 재능을 갖게 된 것은 아버지와 조부와 증조부가 모두 주물 제조업자였기 때문이다. 몇 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건축가인 내가 만들어진 것이다. 주물 제조업자는 표면으로 부피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가우디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전에 이미 공간을 본다.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이 설계도면에서 시작하여 부피를 창조해내는 조각가들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류머티즘(rheumatism)을 비롯한 고질병으로 서있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이 심해서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한다. 고향 근처의 옛 유적을 복원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하는데 그 꿈은 그의 사후 함께 복원을 꿈꾸었던 친구인 토다가 정말로 이뤄낸다.

어려서 지냈던 여름 별장

1살 위였던 둘째 형 프란세스크와의 관계가 각별했는데 건장했던 그가 몸이 약했던 동생을 늘 업고 다녔다고 한다. 훗날 이 프란세스크의 존재와 그의 이른 죽음은 형을 무척이나 따랐던 그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라서 성적도 좋지 못하고 몸도 허약했던 소년은 어느 날 친한 친구에게 자신의 그림 실력을 인정받게 되는데, 이게 그가 건축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 계기였다.

 

스페인 카탈루냐 출신의 건축가.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 건축가이자, 스페인 건축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우리가 스페인어식 이름인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í)’로 기억하는 카탈루냐 본명, 안토니 플라시트 길렘 가우디 이 코르네트(Antoni Plàcid Guillem Gaudí i Cornet)의 이야기이다.

 

미술이나 건축 분야에서 보이는 천재들과는 달리, 생전에 이미 대성공한 건축가로서 스페인의 아르누보 건축의 중심인물이었으며, 스페인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가 건축한 바르셀로나 시내와 인근에 지은 7개의 건축 유산은 그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건축과 시공 기술의 발전에 매우 창조적으로 기여했다는 것을 현장에서 오롯이 느낄 수 있다. 7개 건축 유산은 카사 비센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Basilica I Temple Expiatori de la Sagrada Familia, 1883년 착공)의 가우디 작품인 예수 탄생 파사드와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예배실, 카사 바트요, 콜로니아 구엘 성당의 지하 예배실 등이 있다.

가우디는 레우스의 피아리스트 학교(Piarists school)에 등록하여 기초 교육을 이수하였고 일찍부터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자랑하였다. 가우디가 ‘가우디 건축의 성지’라고 불리는 바르셀로나로 간 것은 건축 공부를 하기 위해서인 1868년, 17세가 되던 해였다. 


그는 그곳에서 바르셀로나 미술 학교(Escola Provincial de Belles Arts de Barcelona)와 바르셀로나 고등 건축 학교에 등록하여 건축학을 배웠다. 학비가 넉넉지 않았던 탓에 건축 학교 재학 당시 호안 마르토렐(Joan Martorell)을 비롯한 카탈루냐 건축가들의 소묘 화가로 고용되어 학비를 조달하였다.


그는 바르셀로나 시립 건축전문학교 학창 시절, 교수들 사이에서 논쟁과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리는 독창적인 학생이었다. 그래서 그가 졸업할 때, 학장 에리아스 토헨트는 “우리가 지금 건축사 칭호를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미친 놈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가우디의 학교생활을 짐작해하는 말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그가 바로 건축설계로 유명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생계를 위해 철 세공업과 같은 일을 시작했다. 물론 이 경험이 이후 가우디 건축에 모두 녹아들어 가게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심지어 작업 중에 대장장이의 작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망치를 들고 쇠를 두들겼다는 이야기는 그의 제자들 사이에도 유명한 일화이다.


어려서 허약했던 몸도 차츰 많이 나아졌는데, 혈기왕성한 청춘의 시기였다 보니 밤이면 밤마다 거리를 누비며 놀러 다녔다고 한다. 예술가들이 모이는 카페의 단골이었는데, 본인이 좋아서 가는 것도 있었겠지만 이제 막 활동하던 시점이라 인맥을 넓혀 좀 더 큰 일을 맡아보려는 소심한 그만의 시도였다고 한다. 술이 약해 주로 미식을 즐겼다고 한다.

 

1878년 건축사 자격증을 딴 가우디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바르셀로나 시 정부의 공공사업에서 입상하여 진행하게 된 시내 가로등 설치 작업이었다. 가우디는 이때 6개의 조명으로 장식된 독특한 미감의 가로등 디자인을 제안하였다. 가우디의 가로등은 예산과 시간문제로 레이알 광장(Placa Reial)에 2대가 설치되는 데에 그쳤으나 근대적 미감을 내재한 설계 기획안이, 훗날 그를 전폭적으로 후원하게 되는, 에우세비 구엘(Eusebi Guell)과 같은 예술 후원자들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게 된다.

카사 비센스(Casa Vicens)

1883년에 착공된 카사 비센스(Casa Vicens)는 안토니 가우디 최초의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이자 그의 이름을 스페인 건축계에 널리 알리게 된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증권 중개인 마누엘 비센스 이 몬타네르(Manuel Vicens I Montaner)의 의뢰로 제작된 여름 별장인 카사 비센스는 스페인의 그리스도교 건축 요소를 독창적으로 변용하였기에 신 무데하르(Neo-Mudejar) 건축물로 평가된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가우디는 카탈루냐의 명문가 코미야스 후작가의 별장을 건축하면서 가우디 평생의 후원자 에우세비오 구엘 백작을 정식으로 만나게 된다.

 

1883년에 구엘 가의 가문 건축가가 되었으며, 이 시점부터 ‘구엘’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축물을 대대적으로 건축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아메리카와 직물산업을 기반으로 한 구엘 가문의 무제한에 가까운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

‘구엘 별장’ 정면의 철제문은 철 세공품

‘구엘 별장’ 정면의 철제문은 철 세공품이다. 철문을 장식하고 있는 용의 몸체는 휘어진 철봉으로 표현하고 굵은 용수철을 휘감았다. 용의 다리들은 돋을무늬로 세공한 비늘이 덮고 있고, 왼쪽 발에 움직이는 연접 장치를 하여 문을 여닫도록 만들었다. 주물제조 가문의 집안 유전자가 자신의 천재적인 건축기술을 가능하게 했다는 말은 그저 겸손의 표현이 아님을 이 ‘작품’을 보면 실감하게 된다.

구엘 별장

구엘 공원에서는 자연미와 조형미의 절묘한 조화를 색감을 통해 보여준다. 소나무, 떡갈나무, 종려나무, 백리향 등의 나무와 재스민, 등나무 같은 덩굴식물, 건축자재로 사용된 타라고나 지방의 마른 돌멩이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각각의 고유한 색과 불규칙한 배열이 자연의 풍경에 녹아들어 있다. 구엘 공원은 198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구엘 공원

구엘 가문의 작업을 진행하면서도 이미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였기에 다양한 수주는 밀려들어 동시에 다양한 건설작업을 하게 되는데, 카사 바트요나 카사 밀라 등이 당시 동시에 이루어진 건축물들이다.

구엘 공원

경제적인 후원을 구엘에게서 받았다면, 건축학적으로는 이슬람의 건축 양식과 아르누보 그리고 비올레 르 뒤크의 이론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뒤크의 <프랑스 건축 사전>은 그에게 많은 영감을 준 책이라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가우디는 뒤크의 가르침을 모든 독창적인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자신만의 개성으로 수정 보완한다. 뒤크의 책을 통해 습득한 고딕 양식은 ‘테레사 학원’의 모든 층에서 잘 나타난다. 테레사 학원은 청빈한 수도사들의 건물답게 가우디의 작품 중에서 비교적 저렴하게 만든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독창적인 건축기법이 잘 살아있다.

테레사 학원

평생 동안 설계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의 감독직을 수락한 것은 1883년 가을이었다. 이후 사망할 때까지 40여 년 간 이 작업 만에만 몰두했다. 이 건축물은 서적상이자 발행인인 호세 마리아 보카 베리야가 주도한 일이었다. 그는 성가족이 봉헌된 사원을 바르셀로나에 짓기로 결심하고 기금을 모아 당시 교구 건축가인 프란시스코 데 파올라덴 빌랴르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빌랴르가 건축의 기술 고문인 마르토렐과의 불화로 사임을 하자 가우디가 일을 맡았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가우디는 ‘신앙이 없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쇠약한 인간이며, 손상된 인간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자신의 재능을 신을 위해 사용한다는 소명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년에 가우디는 건축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것을 멀리하고 수도자처럼 살았다. 


건축가로서의 명성과 열정이 종교적인 신성과 결합하여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 건축물은 결국 가우디의 죽음으로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오리엔탈 건축, 네오고딕 건축 등을 한 곳에 모아 유기적으로 구성한 이 종교 시설은 현재 미완성이며 2026년 완공을 목표로 시공되는 중이다. 


가우디는 성가족 교회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세 개의 파사드를 만들었다. 동쪽은 탄생의 파사드, 남쪽은 영광의 파사드, 서쪽은 수난의 파사드이다. 가우디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첨탑이 빠진 탄생의 파사드만 완성된 상태였다. 이 파사드의 중앙 문은 사랑, 오른쪽은 믿음, 왼쪽은 소망의 문이다.

가우디는 1914년에 조수이자 동료 건축가였던 프란체스크 베렌게르, 1916년에 평생의 친구인 호세프 토라스 이 바게스가 사망하는 일을 겪고, 1915년에 재정난으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설이 중단되는 등 안팎으로 힘겨운 일들을 맞게 된다.


그러나 그는 “나의 친애하는 벗들이 모두 떠나갔다. 내게는 이제 가족도, 고객도, 부도, 그 어느 것도 남아 있지 않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하며 말년을 사그리다 파밀리아 건설에 전념하였다.

1926년 6월 7일 성당에 아침 미사를 마치고 성당 건축현장으로 가던 길에 노면전차에 치여 치명상을 당했다. 운전사는 그저 지저분한 노숙자쯤으로 보고서 그를 길 옆에서 팽개치고 전차를 몰고 자리를 떠버렸다. 사람들이 병원으로 데려가고자 택시를 잡으려고 했으나, 볼품없는 차림새의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3번이나 승차거부를 당한 끝에 경찰의 도움을 받아 4번째 택시 운전사를 겨우 설득하여 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병원도 그저 부랑자나 노숙자쯤이라 여겨 2곳이나 거부당해 할 수 없이 빈민들이나 치료받는 열악한 시설을 가진 무상 병원에 그를 버려둔 채 가버렸다. 신분을 증명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지라, 이 병원에서도 방치되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그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그제야 병원 관계자들이 매우 놀라며 가우디의 친구들과 친척에게 연락했다.

 

서둘러 달려온 그들이 어서 다른 병원으로 옮기자고 말했지만, 가우디는 “옷차림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이들에게, 이 거지 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걸 보여주게 해라. 그리고 나는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는 게 낫다.”며 그대로 남았고, 결국 3일 후, 73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당시 장례식 행렬

그를 죽게 만든 노면 전차 운전사는 파직과 동시에 구속되었으며, 승차 거부했던 택시 운전사 3명도 불구속 입건되었다. 결국 택시 운전사 3명과 그의 입원을 거부했던 병원은 막대한 배상금을 가우디 유족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장례식은 1926년 6월 12일 사실상 반(半) 국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가우디가 마지막까지 열정을 쏟았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의 지하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묘석에 새겨졌다.

안토니우스 가우디 코르네트
레우스 출신
향년 74세
모범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 위대한 예술가이며 경이로운 이 교회의 건축가
1926년 6월 10일
바르셀로나에서 세상을 떠나다.
이 위대한 인간의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기대 하노라.

세상을 떠나고 불과 10년이 지난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을 때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의 지하묘지가 과격주의자들에 의해 방화되었고 가우디의 무덤도 훼손될 위기에 처했으나 가우디의 제자 리카르도 오피소가 간신히 막았다. 그렇지만 몇 달 뒤 경찰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지고 말았다. 


무덤 안에 무기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나마 관 뚜껑까지 뜯겨나가는 참극은 면했지만 무덤은 파헤쳐진 그대로 방치되었으며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군대가 1939년 바르셀로나를 점령한 후에야 비로소 무덤을 다시 봉인할 수 있었다.


무식하고 몰지각한 그 나라 사람들이 그를 죽게 하고 죽어서도 험악한 꼴을 당하게 한 것은 제삼자의 입장에서도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어려서는 제대로 걸을 수 없던 고통과 가난 속에서도 친구가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 한마디에 자신의 건축가로서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도 36살이 되기 전까지는 나름 방탕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36살 이후 교회 관련 건축 일을 하면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지을 때엔 성당 내 사무실에서 살며 수도자처럼 지냈다고 한다. 그랬으니 그 나라를 대표하던 그가 노숙자로 오해를 받아 그렇게 죽어간 것도 그의 행색이 어떠했는지 알만한 대목이다.

건축 현장 속의 가우디

건축 현장의 작품들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연기를 몰아 대던 골초였지만, 그런 줄담배를 피우던 그가 토라스 신부와 약속을 하고 50이 되면서 하루아침에 담배를 끊는다. 그리고 그는 극단적인 채식주의를 평생 이행했다.


일하던 현장에서 처음 만난 ‘페피타’라는 여성을 사모한 적이 있었다. 5년 동안 매주 일요일이면 늘 그녀의 집에서 식사를 했다고 한다. 한참 만나던 시기 그녀는 이혼조정 중이었는데, 이혼이 성립된 때에 가우디가 청혼을 했으나 페피타의 손엔 이미 다른 남자가 끼워준 약혼반지가 있었다 한다. 실연의 충격이 상당했던 것인지 이후 가우디가 어떤 사람과도 연애도 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말년의 가우디

이렇게 심약하고 소심했던 그의 건축물을 보면, 그 어마어마한 예술세계에 21세기의 사람들도 경탄을 금치 못한다. 그의 건축세계는 카탈로냐 전통 복고주의 + 아르누보 정도로 대개 분류되지만, 그 자신의 다방면에 걸친 광범위한 취향과 건축주들의 다양한 요구를 소화시키려는 노력에 의해,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신고전주의 등등 서양 전통뿐만 아니라 인도 문명, 이집트 문명, 중국 문명, 마야 문명과 잉카 문명, 역사 이전의 석기시대 건축들, 오컬트 신비주의, 심지어 곤충이나 식물 및 동물들의 형태에서까지 모티브를 따와 건축물에 반영하면서, 그 이전이나 이후나 볼 수 없는 독특한 건축물이 완성되었다. 


거기에는 기존 서양 건축에서 고전 건축을 리바이벌할 때 나타나는 엄격한 절차나 규칙이 무시되어 가우디만의 독특한 원칙에 의해 배치되었는데, 이건 사실 탈권위성이 강한 아르누보 예술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우디의 건축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재발견되어 시대를 앞서간 포스트모던 건축으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당대에는 주류였던 모더니즘을 벗어난 완전 독자적인 외딴 섬 같은 건축이었고, 후대에 계승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즉, 가우디의 양식은 그저 가우디만의 양식이라고 불릴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그가 천재로 불리는 이유는, 채광이나 환기와 같은 건축물의 기능 역시 충실하게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예술적인 감성과 치밀한 공학을 조화시킨 점에서 진정 천재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인데, 자연 속에서 건축물이 녹아들어 가는 것은 예술가의 수준이었다.

1895년 바르셀로나 신도시계획 당시 세워진 연립주택으로 1910년 완성된 카사밀라(Casa Milà)의 1920년 모습과 현재 모습

건축에 문외한일 당신에게 이름만 익숙할 가우디의 생애와 그의 건축물을 이렇게 보여주고 소개하는 것은, 그가 가난한 구리 세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맨손으로 바르셀로나를, 스페인을 대표하는 건축물들을 세우고 만든 것을 보며 당신이 세울 당신만의 건축물을 꿈꾸길 바라기 때문이다.

 

어려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병에 집안이 가난하면서 한 나라를 대표하는 건축가가 되는 것이 결코 쉬웠을 리가 없다. 5년이나 매주 데이트 한 여자에게 제대로 청혼을 못해서 그 트라우마로 사랑을 접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지만, 그의 건축물에는 분명히 따스한 사랑이 곳곳에 흘러넘친다. 자신의 부족했던 점들을 보완하고 방탕했던 삶을 반성했으며 수도자 같은 생활로 노숙자로까지 오해를 받아가며 길에서 죽어갔다.

술을 못 마시던 그렇게 즐겨 피우던 담배를 아무렇지도 않게 50이 되면서 담배를 끊은 것처럼 그의 건축에서는 그만의 엄중한 원칙과 원리가 적용된다. 그 어떤 곳에서 배운 것도 아니고, 전통적으로 내려오지도 않은 그만의 원칙이고 그만의 예술세계가 명확했다.

당신이 당신의 의지로 담배 하나 제대로 끊지 못하고, 게임 하나 끊지 못하고, 게으름 하나 끊지 못하는 마음가짐으로 무엇하나 제대로 이룰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당신도 알고 나도 안다.

 

당신의 삶이니 당신이 어떻게 살든 어느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 알 것이다. 당신의 삶을 나중에 돌아봤을 때 당신 스스로가 후회 없는 떳떳한 내 삶을 살아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저 하루하루 먹고 산다고 사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쯤은 당신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지금 당신의 삶을 완성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경주하고 있는지 당신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을 가져보라. 그리고 다른 누구와의 삶과 비교할 필요도 없고, 그런 비교로 우울해질 필요도 없다. 당신 자신에게 묻고,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채우면 되고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고쳐나가면 된다.

그렇게 당신의 삶이, 하루 또 하루 고양된 삶으로 업그레이드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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