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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24. 2021

의사로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혁명가로 거듭나서

이념과 국가를 넘어 젊은이들에게, ‘전설의 혁명가’로 기억되다.

1928년 아르헨티나 로사리오(Rosario)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스페인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였고 상류층에 속했다. 귀족가 혈통을 이어받은 부르주아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가 제법 큰 병원 원장이어경제적으로는 부족함 없이 자랄 수 있었다.


하지만, 미숙아로 태어두 살이었을 때는 아버지의 팔에 안긴 채 차가운 여울을 건너다 천식에 걸려 평생 흡입기를 가지고 다녔다.

그럼에도 학창 시절 럭비를 즐겨하는 만능 스포츠맨이었고, 시가를 즐겨 피웠다. 부모가 둘 다 중립적 자유주의자라 어릴 적부터 스페인 내전 패배로 망명한 공화국 정부 인물들과 만나 진보적인 사고에 대한 지각을 넓혔다.

15살 때 동생을 안고

특히, 어머니는 문학과 사상에 대한 열정이 매우 높았던 사람으로 집안에는 많은 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영향 덕분에 자연스럽게 많은 책을 접하면서 성장하였고 그의 집에는 예술가, 지식인들의 교류가 많았다. 진보적 성향의 어머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그도 회상했다.

 

1945년 가족 모두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사하였고, 의사를 꿈꾸던 그는 1947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의대에 입학했으나, 여행을 좋아하여 1951년 친구인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모터사이클로 남미 대륙을 4500km나 여행하면서 라틴아메리카의 고대 유적과 문명에 매료된다. 1953년 알레르기 연구로 의사면허를 취득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해 그는 두 번째 라틴아메리카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이때 그는 볼리비아와 페루를 지나 과테말라로 그리고 파나마를 거쳐 코스타리카를 여행했다.

이때 그는, 피폐한 남미의 현실(심각한 빈부격차와 사탕수수, 커피, 바나나 농장의 노예들과 광산의 광부들, 빈민가의 빈민들)을 보며 충격에 빠진다. 또한 과테말라에서 CIA 사주를 받은 군부가 좌파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고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이 당시 처참한 현실에 눈을 뜨고 심각한 고민 끝에, 의사 가운을 던지고 혁명을 꿈꾸는 혁명가로 거듭나게 된다. 이 과정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 그 유명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다.

아르헨티나 태생의 의사, 공산주의자, 정치인이자, 직업란에 혁명가라고 쓸 수 있는 인물. 흔히 ‘체 게바라’라는 별명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의 이야기이다.


그의 별명이 된 체(Che)의 원래 뜻은 바로 이탈리아어 ‘케 코사 체(Che cosa c'è, 무슨 일이야?)’를 뜻하는 말이었는데, 아르헨티나로 대거 유입해 온 알프스 산맥 지방 출신의 이탈리아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 ‘c'è’를 ‘Che’로 바꿔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아르헨티나 북동부와 파라과이에서 통용되는 과라니어에서 이 ‘체’가 ‘나’ 또는 ‘나로서는’라는 의미로 전성된 것이다.


그가 쿠바 혁명의 주도자라는 이유로 쿠바 출신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사람이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인 사르트르는 체 게바라를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극찬했다. 체 게바라는 살아 있었을 때도 유명한 인물이었지만, 사후 그가 살았던 세월보다 훨씬 더 많은 기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된 인물이다. 그는 프랑스 ‘68운동’ 당시 영웅으로 추대받았고, 이후 50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양한 측면에서 재조명되고 소비되고 있다.

과테말라에서 여성 혁명가인 일다 가데아 아코스타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소속되어 정치혁명가와 폭넓은 인맥과 정치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과테말라 혁명에 실패하고, 쿠데타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되자 멕시코로 탈출해, 1955년 평생 동지인 변호사 출신 피델 카스트로와 만나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집권한 쿠바에 혁명의 불길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혁명군에 투신하게 된다. 스페인 내전을 겪은 베테랑 군인 알베르트 바요 아래에서 혹독한 훈련을 거쳐 육체적으로도 확실한 군인으로 거듭난다.

1957년 반군 부대의 대장을 맡아 82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쿠바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들은 상륙 직후 바티스타 정부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대부분이 사살되거나 체포되어 17명(12명이 남았다는 설도 있다)으로 확 줄어들어버린다. 이 무렵 두 번째 부인 알레이다 마치를 만나게 된다. 겨우 시에라 마에스트라로 탈출한 혁명군은 그곳을 기점으로 바티스타 정권의 폭정에 오래전부터 지쳐있던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다시 힘을 키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크고 작은 정부군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해나가며, 그들은 결국 2년 뒤인 1959년 1월에 수도 아바나(Havana)에 입성하여 독재자 바티스타를 쿠바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것이 바로 포코 이론의 성공이다.

후에 독재자가 되는 카스트로와 함께

혁명에 성공하여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자 쿠바의 일반 대사로 해외에 파견되어 이집트의 나세르,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 '비동맹 국가'들의 지도자들과 만나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외교활동으로 우호를 다지게 된다.

심지어 UN 총회에서도 쿠바 대표로 참여했으며 북한에서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다. 이때부터 검은 베레모와 구겨진 군복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이후 라카바니아 요새 사령관, 국가토지개혁위원회 위원장, 중앙은행 총재, 공업 장관 등을 역임하며 ‘쿠바의 두뇌’로 불리면서 쿠바 정권의 기초를 세워나갔다.

 

하지만 산업화와 금융정책 등 경제 성적은 전반적으로 나빴다. 체는 애초에 금융이나 경제 전문가도 아니었고, 혁명가였을 뿐, 실무행정가가 아니었다. 은행 총재이었지만 돈을 혐오해 지폐에다가 대충 ‘체’라고 휘갈겨 쓰거나, 실무를 보기 위해서 책상에 앉거나, 직접 실무를 보기보다는 대외활동을 통해 항상 구멍 난 양말을 신고 직접 사탕수수 농장, 벽돌 공장에서 근로활동을 더 많이 했다.

그래도 본업에 걸맞게 의사 출신인 게바라는 무엇보다 의료 개혁만큼은 자신 있게 주도했다. 옛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를 쿠바로 초청하여 임상학 연구소를 설립하게 하고, 산티아고와 아바나 대학 등의 의대에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하지만, 너무 서투른 산업 국유화는 자본 이탈과 함께 미국의 경제 봉쇄라는 더블 펀치를 쿠바에 안겼다. 게다가 마침 불거진 중소 간의 충돌은 공산주의 진영에서 편 가르기를 촉발시켰고 그 와중에 귀중한 시간까지 낭비되었다. 결과적으로 쿠바의 경제성장률이 침체되면서 체 게바라는 자아비판까지 해야 했으며, 이 커다란 실책으로 인해 라울 카스트로의 친소파가 쿠바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쿠바가 사회주의 혁명군에게 점령되자 위기를 느낀 미국은 1961년 쿠바를 침공하였다. 쿠바는 미국의 공격을 물리쳤지만 미국에 의해 경제봉쇄를 당하게 되었다. 체 게바라는 소련을 방문하여 경제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무기원조를 요청했으며 쿠바에 소련제 미사일을 배치하여 미국의 공격에 대비하는 외교적 성과를 이루었다. 하지만 소련은 미국과 협상으로 쿠바에 배치했던 미사일을 철수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체는 소련의 점수 따기에 몰두하던 카스트로와 갈등과 반목을 겪게 된다. 특히 1965년 1월, 알제리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소련을 향해 “어떤 사회주의 국가(소련)는 제국주의 국가처럼 착취한다”라는 원색적 비난을 퍼붓는다. 이에 격노한 새 집권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이, 그가 공직에서 사퇴하지 않으면 쿠바에 대한 모든 경제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엄포를 놓자, 카스트로의 지시로 모든 공직에서도 사임하게 된다. 경제정책 실패에 이어 터진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혁명 정권 내에서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결국 그 해 5월, 가족과 카스트로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기고 소수의 지지자들과 함께 쿠바를 떠나게 된다.

그가 향한 곳은 독립국 탄생이 한창이던 아프리카였고, 콩고 내전이 한창이던 콩고 민주공화국에서 자기 자리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스페인어와 가톨릭으로 공통점이 많은 남미와는 달리 생소한 환경의 아프리카는 그가 생각했던 세상이 아니었다. 자칭, ‘공산주의자’들은 약탈밖에는 관심이 없는 오합지졸들뿐이었다. 콩고 반란군은 술집, 매춘굴에 드나들면서 성병에 걸리기 일쑤였고, '다와(Dawa)'라는 미신을 믿어서 마법의 약을 마시면 총알을 맞아도 괜찮다고 여길 정도로 미개했다.


무기에 대해 부주의해서 권총으로 장난치다가 총기사고로 죽는 이들도 빈번했다. 게다가 중국과 소련 간의 갈등은 이곳에서도 그의 발목을 잡아 친소 국가인 쿠바 출신의 그를 중국의 지원을 받는 콩고 공산세력은 다짜고짜 적대시했다. 변장을 하고 콩고에 들어갔던 체가 콩고의 국회의원에게 정체를 밝히자 국회의원은 국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킬 거라며 그를 만나지 않은 것으로 하겠다며 당황해했다.

그나마 체가 믿고 존경하던 콩고의 지도자, 로랑 마투디디가 체의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정작 마투디디의 부하들은 외국인이라면서 체의 명령을 듣지 않으려 했고 자신들이 트럭이 아니라면서 무거운 군장을 메려 하지 않았고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만 마셨다. 그 과정에서 쿠바 군 하나가 전투 중 일기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쿠바가 콩고 반군을 지원한다는 것을 CIA가 알게 되었다.


체는 ‘이런 병력으로 승리란 불가능하다.’며 좌절했지만 계속 쿠바 게릴라 부대를 모았고 콩고 반군에게 ‘너희들 같은 남자와 싸우느니 여자들을 데리고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다그치며 수습하려 했다. 결국 오합지졸들을 패배했고, 그나마 최측근이었던 이들은 체만을 남겨두고 소련 항공기 편으로 모스크바로 거쳐 쿠바로 돌아가 버렸고 체만 혼자 주 탄자니아 쿠바 대사관에 숨어 지냈다.

결국 콩고 군 참모총장이었던 모부투 세세 세코가 쿠데타로 조제프 카사부부 대통령을 몰아내고 철권통치 시대를 열며 콩고 혁명은 끝이 났다.

연이은 좌절에 피폐해진 그는 일단 남미 혁명이라도 완수하겠다고 생각하고, 1966년 11월 변장한 채 볼리비아로 입국하게 된다.

쿠바에 돌아온 이후 볼리비아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게릴라 요원을 훈련시켰으며 1966년 가을에는 볼리비아에 직접 잠입하였다. 하지만 소련에게 낙인찍힌 그를 볼리비아 공산당은 대놓고 내놓은 식구 취급했고 지휘권 문제까지 불거지자 거의 빈손이나 다름없이 정글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볼리비아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그 혼혈 혈통인 메스티소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들 현지 원주민들은 백인인 체 게바라의 명령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 볼리비아에서 공산당 지지 세력은 농민들이 아니라 광부나 도시 노동자였으나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심지어 오랜 동지인 카스트로조차 침묵했다.


결국 지원을 받지 못해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고 산악지대에서 소규모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여 라틴아메리카 전체의 혁명을 위해 군사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미 혁명가로서 너무 유명해진 그는 미국에게도 카스트로 다음 가는 눈엣가시로 여겨졌고, 그의 입국이 확인되자 CIA가 나서서 그린베레(미 육군 특전부대)에 의해 양성된 볼리비아군 정예 레인저 부대를 인간사냥에 투입했다. 그의 목에는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비롯한 거액의 현상금이 걸렸다.

 

영양실조와 이질에 시달리며 11개월 동안 추격을 피해 게릴라를 벌이며 도망 다녔으나 끝내 확실한 거점을 만들지 못해 점점 한계에 몰렸다.

결국 1967년 10월, 몇 안 되는 부하들과 함께 볼리비아 정부군 레인저 부대의 매복에 걸려 그 자신도 총상을 입고 생포된다.

부검 당시 사진

CIA의 지령을 받은 볼리비아 정부는 그를 살려두면 훗날 큰 화가 생길 거라 판단하고 체를 비밀리에 죽이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체는 비밀리에 볼리비아 병사들에게 처형된다. 하지만 당시 볼리비아에는 사형제도가 없었으므로 대외적으로는 게바라가 전투 중 부상으로 숨졌다고 발표하였다. 그를 사형시킬 때 몇몇 병사들이 거부해 병사들을 억지로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총으로 쏘았다는 설도 있다. 그의 나이 마흔도 채우지 못한 불과 39살이었다.

 

그의 죽음을 입증하기 위해 볼리비아 정부는 그의 손을 잘라 고향 아르헨티나 또는 카스트로에게 보냈다. 얼굴이 이미 심하게 훼손되었기 때문에 식별 가능한 것이 지문밖에 없다며 손을 직접 잘라서 보내는 끔찍한 짓까지 벌였다.

 

그의 시신은 비밀리에 매장되었다가 30년이 지난 1997년, 유족을 포함한 볼리비아-쿠바 합동 조사단에 의해 바예그란데의 어느 폐쇄된 활주로에서 발굴되었다. 이후 쿠바 정부는 추모 주간을 선포하고 대규모 국장 행사를 진행했다. 심지어 산타클라라에 체 게바라를 추모하는 사원까지 생겼다. 2013년에 볼리비아 정부의 협조 아래 체 게바라의 일대기가 담긴 일기와 편지, 신문기사, 사진, 문서 등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쿠바 사람도 아니면서 의사로서의 보장된 안락한 삶을 버리고 열악한 라틴 아메리카의 실정에 혁명가로 변신하여 자신의 삶 전체를 혁명에 바쳤던 인물. 너무도 허망하게 인생을 마감하긴 했지만, 그가 그가 보여준 현실의 안락과 권력에 안주하지 않고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죽어간 삶의 궤적은 이후 진보적인 젊은이들이 그를 멘토로 삼기에 주저치 않게 하였고 그의 참혹한 죽음은 ‘전사 그리스도’란 별명까지 붙게 했다.

실제 쿠바 혁명에 성공하고 난 뒤, 정치가로서의 처참한 실패와 그 이후 처참하게 쫓겨다니다가 죽음을 맞이한 그의 인생은 허망하게까지 보일 수도 있지만, 그는 결코 정치를 망쳐버린 실패자가 아니었다.

 

체는 쿠바의 정치를 책임지게 되었을 때, 녹색 의료, 니켈 생산, 원유 탐사, 설탕 부산물, 화학산업 등 9개의 연구·개발 기구를 설립했다. 또 회계 처리를 전산화하는 실험을 시도했고, 새로운 임금체계를 고안했고, 노동자의 발명 및 혁신을 장려했고, 농업 기계화를 진두지휘했으며, 사회적 노동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을 시도했고, 사회적 임무로서의 노동 개념을 발전시켰으며, 노동자 경영 참여를 위한 기구를 설립했다.

아바나의 혁명광장

오늘날 쿠바의 사회·경제 구조 전반에 이러한 시도들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를 고안하고 시도했던 체의 기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체 게바라란 인물 자체의 이미지가 혁명 투쟁가로서의 색깔이 너무 강해, 어딜 가던 한 곳에 쭉 눌러 붙어 지루하고 관료제적인 입씨름이 태반인 실제 국정 운영과 정치를 하고 있을 만한 성격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혁명가로서는 성공했지만, 정치가로서 실패하여 쫓겨나듯 쿠바를 떠나야만 했고, 그렇게 한 곳에 오래 붙어있지 못하고 새로운 혁명을 찾아 이리저리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니다 죽음을 맞게 되었다.

본래, 어지러운 세상은 영웅을 부르지만, 그 영웅이 난세가 끝난 후에 정치가로 성공하는 역사는 거의 없다. 토사구팽이라는 이유로 영웅은 난세에만 1회용으로 쓰여지고 만다.


82명의 특공대를 데리고 자신이 간부도 아니었던 체가 유일한 의사라는 이유로 신임을 받기 시작하고 불과 12명만 남아버린 인원을 가지고 쿠바 혁명에 성공한 것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이라면, 그 상황에서 끝까지 정부군을 뒤집고 혁명에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세를 키워나가겠다는 결정을 할 수 있었겠는가?

아내와 함께

그는 무모하리만큼 우직하고 강직했으며, 단순했다.

하지만, 그랬기에 그는 혁명가로서 쿠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다.


의대를 다니던, 미래를 보장받은 젊은이가 오토바이 여행으로 서민들의 불쌍한 삶을 목도하였다고 해서 의사로서의 보장받은 안락한 미래를 던져버리고 혁명가로 돌변하는 경우는 그때도 지금도 여간해서는 찾아내기 어려운 드문 케이스이다.


당신이라면, 아니 당신의 자녀라면, 의대에 다니다 말고, 사회가 썩었으니 그것을 바꾸기 위해 내가 혁명가가 되어야겠다고 하면 뭐라 하겠는가?

실제로 우리의 역사에도 그런 이들이 있었더랬다.

87년 6월 항쟁

공부 열심히 해서 서울대에 들어갔는데, 정작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국민의 눈을 가리고 국민을 속이고 국민을 기만하고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며 억압과 통제만으로 국민들의 목을 움켜쥐려는 이들이 있었다. 서울대를 나와 사시를 보고 행시나 외시를 보고, 그것도 아니면 그냥 대학원에 가서 번호표를 받으면 교수가 될 수 있는 시대였다.


그러나 거리로 나와 화염병을 던지고 혁명을 꿈꾸며 새로운 대한민국을 피와 땀으로 얻어낸 이들이 있었다. 물론 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정치가로 변하고 결국 기름진 자신의 배를 채우겠다고 이상하게 변질되어 다시 기득권층이라는 본색(?)을 드러내 추잡한 노년을 보내기도 했지만, 최소한 당시 제대로 된 우리 조국을 만들겠다고 했던 그 젊은 혁명가로서의 외침은 당당했고, 나중에 국회의원 배지나 달고 보상을 받겠다고 했던 일이 아니었다.

물론 당시에도 그들을 외면하고 도서관에 처박혀 책과 씨름해서 법조인이 되고 의사가 된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친구들은 그들을 욕했지만, 그들이 그들의 위치해서 할 수 있는 당당한 무언가를 했다면 그것도 나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혁명이 필요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오늘날 왜 이런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가 싶은가?

아니다. 당신이 젊든 나이를 조금 더 먹었든, 사회를 보는 눈. 잘못된 것을 고쳐야 한다고 인식하는 마음은 결코 바꿔서는 안 된다는 체 게바라의 외침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굳이 오늘 길게, 쿠바 혁명 이후 그의 실패한 노정을 자세히 설명한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그 시대에 속해있는 당사자인 국민들이 변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바꾸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삶을 바꿔줄 혁명가가 맞춤 배달로 띵하고 나타나서 제대로 된 당신의 조국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늘 깨어있어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하는 것이다.

당신이 직접 가투를 뛰지 않은 사람이라도, 가투에서 쫓기던 친구를 잠시 숨겨주거나 배고파하던 친구들에게 선뜻 도시락을 건네주었다면 당신도 무엇이 그릇된 것인지 알았기에 동참했던 것이다. 당신에게 아직도 우리 사회의 그릇되고 잘못된 부분들을 보면 이것은 아니다라고 외치고 바꿔야 한다고 나설 수 있는 용기가 남아있기를 바란다.

젊어지려고 피부과를 다니고 운동으로 하고 관리를 받는 것이 당신의 껍데기를 조금이나마 덜 늙어 보이게 만들 수는 있겠으나, 썩어가는 사회의 비뚤어진 구석을 바로 잡겠다는 올곧은 마음가짐과 실천만으로도 젊은 혁명가로서의 피 끓는 열정을 유지하게 만들어주는 비결이 될 것이다.


겉과 속, 당신은 진정 어디가 젊어지는 것을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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