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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25. 2021

붉은 머리 때문에 놀림받고 불륜으로 사제직에서 쫓겨나도

고아들을 위한 협주곡과 연주회를 위한 새로운 작곡법을 창출하다.

하나님의 사제 신분으로 불륜으로 쫓겨나면서도

1678년,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칠삭둥이가 얼마나 살까 했던 부모는 일단 집에서 급하게 세례를 한 후 정식적인 유아세례를 주지 않고 백일만 넘기자고 했는데, 그때까지 죽지 않자 겨우 유아세례를 해주었다고 한다. 유전인 붉은 머리색 때문에 ‘붉은 사제(il Prete Rosso)’라고 불렸는데, 붉은 머리를 당시 사람들이 재수가 없는 저주받은 것이라거나 남성의 견우 성적 매력이 없다는 식의 미신 해석으로 썩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약했던 소년은 15세 때인 1693년 9월, 성직자가 되기 위해 올레오 수도원에 입회했지만 건강 문제로 집에서 출퇴근하는 배려를 받았으며 겨우 사제의 꿈을 키운다. 그때 산 마르코 대성당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 25세 때인 1703년 3월에 사제 서품을 받았지만 사제로서 직무에 충실하지 않았고, 일선 사목에도 신경도 쓰지 않고, 바이올린 연주에 심취하거나 건강 문제를 핑계 삼아 미사 집전을 거르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아예 1706년부터는 미사를 집전하지도 않았다. 사실 가톨릭 성직자인 사제가 이 정도 업무 태만이면 면직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골치 아픈 사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던 주교는 그를 1703년 9월에 베네치아의 소녀 고아원 중 하나인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Ospedale Della Pieta)의 바이올린 교사로 임명하여 보낸다. 명색이 말만 교사였지 실직적으로는 지휘나 모든 악기와 합창의 감독도 했다. 직장 상사인 프란체스코 가스파리니가 1713년 베네치아를 떠난 뒤로부터 비발디의 직함은 ‘합주 교사’로 바뀌었으며 그냥 그가 모든 것을 총괄하게 되었다고 추정된다.

 

지도했던 아이들의 뛰어난 연주 실력과 참신한 음악, 새로운 기법으로 1715년에 피에타의 높으신 분들로부터 표창장을 받고 보너스까지 받으며 그의 오케스트라를 구성하게 된다. 이후 기록에 의하면 당시 피에타의 음악 수준은 매우 뛰어났으며, 정기연주회를 열고 행사가 있을 때는 고아원들이 연합해서 음악회를 크게 개최하기도 했다.

 

자유로운 베네치아 풍경과 윗분들의 인정을 받아가며 그는 당시 고아원에 방문하시는 높으신 분들과 친교를 맺을 수 있었으며 1708년 말에는 베네치아로 놀러 온 프레데리크 4세에게 자신의 바이올린 소나타집 Op. 2를 헌정하기도 했다. 예술 애호가로 이름 높았던 프레데리크 왕은 베네치아에서 피에타의 연주를 자주 들었으며 돌아가서도 자신의 궁정에서 그가 작곡해준 바이올린 소나타를 자주 연주시켰다고 한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사제 겸 바이올리니스트로, 바로크 시대의 가장 유명한 음악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 (Antonio Lucio Vivaldi)의 이야기이다.

 

그가 작곡한 몇몇 작품, 특히 《사계》(특히 ‘봄 제1악장’)는 클래식을 전혀 모르는 문외한마저도 들어보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명곡 중 명곡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음악가로서 대중화를 시도한 인물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4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된 《사계》의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다. 붉은 머리라서 평생 붉은 머리의 신부라는 조롱과 멸시를 당하기도 했다. 또한 체력이 좋지 않았던 그는 미사보다는 작곡이나 성가대 업무를 주로 보았다.

비발디는 합주 교사직을 유지한 채 겸업 방식으로 오페라 작곡가로도 활약하기 시작한다. 비발디는 1714년부터 4년간 자신이 작곡한 10곡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게 된다. 현대의 시선에서 봤을 때 이는 어마어마한 양이지만, 당시의 음악과 비발디 특유의 작곡 속도를 고려해봤을 때 많은 양은 아니다.

 

45세 때인 1723년에 나이 차가 20살이 넘게 나던 여제자인 안나 지로와의 심상치 않은 염문으로 비난받았다. 콘트랄토 가수였던 그녀는 비발디의 많은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았는데, 그녀는 언니와 같이 비발디가 병상에 있을 때 그의 집에서 그를 간호하면서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다시 주지하지만, 그는 성직자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당시 사회적 분위기나 종교적 분위기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성직자의 품격을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사제의 지위도 빼앗기고 더 이상 고향에서 얼굴을 들고 지낼 수 없게 되어 유럽을 떠돌기 시작했다.

안나와의 불륜으로 베네치아에서 쫓겨나고 나서도 “나는 사랑과 베네치아를 맞바꾸었을 뿐이다.”라고 할 정도로 자존심도 상당했던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바흐나 텔레만 등의 다른 작곡가들 같은 묵직하고 엄숙한 느낌이 별로 없었던 건 분명해 보인다. 건강이 워낙 안 좋은 탓을 하긴 했지만, 사제 치고는 미사에는 별 관심도 없었다고 하며, 흥청망청 즐기는 일도 즐겼기 때문에 주교를 비롯한 다른 성직자들에게 요주의 인물인 것을 분명했다.

 

말년에 자신을 알아주고 안면이 있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6세를 만나러 빈으로 갔지만, 비엔나에 도착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사이에 황제가 죽어버려 자신의 몸을 의탁하지도 못하게 된다. 전성기 때는 전 유럽에 비발디의 이름이 알려져 있었지만, 말년에는 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차게 식었기 때문에 빈이라는 타지에서 쓸쓸하게 객사하였다. 앞서 말했던 특유한 낭비벽 때문에 오페라 상영이나 바이올린 연주로 벌었던 재산도 바닥난 상태였기 때문에 극빈자로서 제대로 된 장례식이랄 수도 없는 수준으로 장례를 치렀다. 비발디의 유해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처럼 묘지가 이장되는 과정에서 분실되어 행방이 묘연하다.

안토니오 비발디 박물관, 베니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그저 잊혀지는가 싶었던 비발디는, 그를 존경했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그가 작곡한 곡을 건반 악기 등으로 편곡한 <비발디 편곡집>이 20세기 초에 재평가받으면서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비발디는 500여 곡이 되는 기악곡과 40여 곡의 오페라 등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코렐리와 알비노니 등이 개발해 온 협주곡 형식을 더욱 발전시켜 빠름-느림-빠름의 3악장 형식의 협주곡 형식을 처음으로 완성시킨 음악가였다. 


바흐는 이러한 비발디의 작품을 여러 번 편곡하면서 그 기법을 완벽하게 익혔고, 그렇게 바흐를 통해 재편집된 비발디의 곡들이 발굴되면서 합주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의 양식을 정립하는 데에 기여했다고 평가받기 시작한 것이다.

바흐

사실, 클래식에 조예가 깊지 않은 일반인들은 《사계》 외에 그의 음악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클래식 마니아들 사이에도 비발디에 대해서는 그냥저냥한 작곡가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있긴 하지만 비발디는 지나치게 과소평가된 억울한 측면이 많은 아쉬운 인물이다. 왜냐하면 작곡 능력에 있어, 창의성이나 구성력 측면에 있어서 선배들을 뛰어넘는 베네치아 바로크 음악의 최고봉이라 할 만한 인물이라는 것이 그의 음악을 연구한 전문가들의 일관된 의견이기 때문이다. 


워낙 그 기초를 다진 1세대였기 때문인데, 그의 선배 세대에 그보다 뛰어나다고 할만한 작곡가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도, 그의 음악을 100~200년 뒤의 후배들의 레퍼토리와 작품성과 직접 비교하며 폄하하는 것은 음악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의 실수라고 할 것이다.

그의 음악세계를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의 면모에 대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는데, 비발디 자신이 워낙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기 때문에, 바이올린 협주곡들을 가장 많이 작곡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당시 통주저음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던 악기를 이용해서 바순 협주곡과 첼로 협주곡을 상당수 작곡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베일에 가려져 있던 두 악기를 협주곡을 이용해 독주 악기로써의 잠재력을 당대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지금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비올라 다 모레 협주곡, 플루트 협주곡, 오보에, 소프라노 리코더 등 솔로 협주곡들뿐 아니라 화려한 대편성의 합주 협주곡도 여러 곡 썼다. 오르간과 바이올린이 들어간 협주곡을 제외하고 건반 음악은 쓰지 않았다.

 

첫 협주곡집인 <화성의 영감>(L'estro armonico, Op. 3)을 시작으로 <라 스트라바간차>(La Stravaganza, Op. 4), <화성과 창의의 결합>(Il cimetno dell' armonia e dell' inventione, Op. 8), <라 체트라>(La cetra, Op. 9)등 다양한 협주곡집을 출판했는데, 바로크 후기에는 이미 바이올린 또는 협주곡 하면 ‘비발디’라는 이름이 떠오를 정도로 많은 유학 음악가들이 그를 만났고, 사사했다. 바흐도 그의 협주곡집들을 쳄발로와 오르간 곡으로 편곡하며 그 기법을 모두 익혀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비발디의 음악은 굉장히 열정적이고 생기가 약동하는 느낌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발디는 자신의 작품들의 거의 대부분을 협주곡으로 썼다. 협주곡 중에서도 주로 3악장 형식의, 빠름 - 느림 - 빠름 구성이 대비되는 곡들을 많이 썼는데, 느린 악장은 빠른 악장과 장단조를 반대로 해서 작곡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이 이른바 비발디 음악에서 강조되는 ‘대비 효과’인데, 위의 악장 간의 대비와, 리토르넬로(ritornello)라 불리는 형식을 통해서 전체 협주(tutti) 부분과 독주 악기의 솔로(solo) 부분이 극단적으로 대비되어 보인다. 협주 내에서도 셈여림(다이내믹스)을 바꾸면서 일종의 ‘메아리 효과’를 주어서 동일한 동기나 악절이라도 상황에 맞게 대비시키는 패턴을 완성시킨 것이다.

바로크 당대에 비발디는 셈여림의 활용에 있어서는 뛰어난 테크닉을 갖추고 있었다고 알려지는데, 그가 사용했던 셈여림 지시들은 현대에 활용되는 ppp - pp - p - mp - mf - f - ff - fff 구분보다 세분화됐다고 한다. 비발디의 셈여림 지시를 크기 순으로 일렬로 늘어놓으면 현대의 크레셴도(crescendo)나 디크레센도(decrescendo)와 정확히 일치한다. 


바로크 시대 자체가 포르테랑 피아노 정도 외에는 찾아보기도 어렵던 시대였고, 특히 건반 악기의 경우에는 음량을 일정하게 유지하며 연주하는 것이 정격연주까지는 아니어도 시대적 트렌드를 잘 반영한 연주라는 평을 받을 정도였음을 생각한다면, 그의 안목과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대목이다.

이 부분을 굳이 자세히 설명한 이유는, 비발디가 당시 잦은 연주회를 갖게 되면서 가졌던 고민을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위에 설명했던 그의 음악이 갖는 특징은 그의 천성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가난한 고아원의 아이들을 데리고, 처음엔 바이올린만 가르치다가 차차 악기 편성을 늘려가서 오케스트라를 만들게 되면서 그는 협주곡에 주목하게 되었고, 단순한 하모니를 위한 협주곡이 아닌 현실적으로 더 뛰어난 악기 연주자를 돋보이는 방식을 그때그때 변용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런 작곡 형태가 구축된 것이었다.


이후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신분이 높은 이들을 초빙하여 연주회를 자주 열게 되면서 늘 비슷하고 같은 음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고민하다가 짧은 준비기간에 비해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 비발디의 대비 효과였던 것이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당신이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닐 수 있다. 그 역시 죽을지도 모를 정도로 약한 몸에, 사제가 되려고 스스로 결정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방탕하네 뭐네 하지만, 당시 항구도시로 유명했던 베네치아는 도시의 특성상 여러 문화와 다양한 이들이 오가는 분위기로 흥청거리던 도시였다. 

베네치아

그는 음악이 그저 좋았던 사람이었고, 자신이 원하지는 않았지만, 작곡할 때를 제외하고는 묵주를 손에서 놓는 일이 없었던 독실한 사제였음은 분명했다. 다만, 그가 더 좋아했던 것이 주교의 보조로 미사를 집행하는 것이 아닌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가르치는 것이었을 뿐이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환경에 의해, 혹은 어쩔 수 없는 사정들에 의해 당신의 의사나 당신이 원하는 완성도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대로 모두 흘러간다면 그건 인생이 아니다. 인생은 인간인 당신이 계획할 수 있지만, 신이 아닌 다음에서야 당신이 계획한 대로 실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당신은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저 당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때려치우고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으로 그 상황에서의 최선에 해당하는 결과를 이뤄낼 수 있다. 


그러한 노력의 과정에서 당신이 본래 당신이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훨씬 더 큰 성과와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설사 당장 그런 보상과 성과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당신이 했던 그 노력과 결과물들은 어디에 가지 않고 당신의 머리에 당신의 손에, 당신의 인생에 자양분으로 녹아들어가 있다.

당신이 겪었다고 생각하는 그 실패와 어려움 속에서 얻어낸 경험과 지식과 그 모든 과정들, 어느 하나 헛되이 남의 인생을 위해 흘려보내지 않았다는 말이다.


당신이 흘린 땀은 당신의 피와 눈물은, 결코 당신을 배신하지 않는다.


지금 당신이 계획했던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실패라고 단정 짓기엔 너무 이르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실패라고 생각했다가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둔 이들을 적지 않게 본다. 당신의 지금 하고 있는 그 노력이, 결과가 어떨지라도 오롯이 당신만의 것이고 설사 한 번에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당신의 인생 어떤 타이밍에서건 반드시 아주 요긴하게 시의적절하게 빛을 발해 줄 것이다.

당신만 포기하고 의지를 접지 않는다면 말이다.


당신의 완성된 더 큰 성공을 위해 지금 쌓아져 자양분이 되려 하는 수많은 이제까지의 실패들을 위해 그것을 만들어낸 당신의 노력과 포기하지 않았던 의지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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