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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26. 2021

모두가 미친 과학자라고 비아냥거리며 재판에 회부시켜도

천체 망원경조차 없던 시대에 지동설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다.

기원전 310년경 고대 그리스 사모스 섬에서 태어났다. 일생을 천문학 발견을 하는 것에 바쳤으며, 제자로는 히파르코스가 유명하다.

그는 본래 천문학자가 직업이 아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사서로 일했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천문학적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최초의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의 기준으로 그의 지동설을 보면, 설명해내지 못한 많은 문제점들이 노출되기는 한다.


당시로선 설명하지 못했던, 지구가 우주의 먼 거리를 도는데 시차 현상이 생기지 않는 이유라던지, 물체가 낙하할 때 지구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데도 불구하고 물체는 왜 지면에 수직으로 낙하하는지, 왜 지구 위의 우리는 지구가 도는 현상을 알아볼 수 없는지, 왜 중심인 태양이 아닌 지구로 물체가 낙하하는지 등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냥 지구가 돈다고 생각하고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월식을 보면서 달과 지구의 크기의 비를 알아냈고, 그것을 활용해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의 비와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의 비를 구해낸 수학자였다. 그리고 그의 연구결과에 바탕하여 에라토스테네스가 지구의 크기를 알아냄으로써 태양, 달, 지구의 크기와 그 사이의 거리를 알 수 있었고, 그 계산 결과값을 가지고 볼 때 태양이 지구보다 300배나 큰 압도적인 규모라는 사실도 수학적으로 증명해냈다. 따라서 규모면에서 상대가 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보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당시의 압도적인 정설이라고 여겨졌던 지구중심설(천동설)을 뒤집는 태양중심설(지동설)을 최초로 주장한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였던 아리스타르코스 (Aristarchos; Ἀρίσταρχος ὁ Σάμιος)의 이야기이다.

흔히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동설을 주장했다고 한 것으로 알고 있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보다 무려 1700년가량 앞서 지동설을 주장한 선구적인 과학자였다.

 

비록 결과값은 정확하지 못하고 틀린 부분도 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지구, 달, 태양 간의 거리도 계산한 인물이다. 기하학적 저술인 논문 <태양과 달의 크기와 거리에 관하여>에서 3각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후 천동설에 완전히 묻혀 지동설은 코페르니쿠스 때에 이르러서야 재발견된다. 실제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그가 이탈리아 유학 중에 아리스타르코스의 논문을 접한 것이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최초 주장과 근거는 그만큼 과학사에서 무게를 갖는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아리스타르코스는 달 구덩이 가운데 하나에 그 이름이 붙여져 영원히 남게 되었는데, 그 중심 봉우리가 달에서 가장 밝은 부분에 헌정된 이름이기도 하다.

충돌 크레이터(Aristarchos)

B.C. 281년 경에 하지(夏至)의 관측에 성공한 그는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였다. 당시의 수학은 수리보다는 기하학을 주류로 하던 시기였다. 그러한 점에서 아리스타르코스가 지구나 달 혹은 태양 간의 거리나 규모를 계산했다는 것은 수리적으로 계산해낸 실제 값이 아니라, 단지 비율을 알아낸 정도였다. 태양이 지구의 몇 배 크기이고, 달까지의 거리는 지구 크기의 몇 배 정도라는 식이었는데, 그보다 10년 정도 늦게 태어난 에라토스테네스는 두 도시(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 사이의 거리를 잰 값을 기초로, 지구 둘레를 재는 일을 시도하게 된다.

 

그는 항성의 겉보기의 부동성과 태양을 도는 지구의 회전궤도를 조정하기 위하여, 항성구(恒星球)는 지구의 궤도를 포함한 천구에 비하여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고 가정하였다. 즉, 그가 생각한 우주는, 그 이전의 사람들이 생각한 우주보다 훨씬 컸다. 지금 남아 있는 그의 유일한 논문 <태양과 달의 크기와 거리에 관하여>는 본질적으로 기하학적 저술이지만, 이 속에서 삼각법을 사용하여 월식 때 달 표면에 비치는 그림자를 관찰하고는 지구 그림자의 곡선과 달의 가장자리 곡선을 비교함으로써 지구-달의 상대적 크기를 알아냈다.

논문 <태양과 달의 크기와 거리에 관하여>

그는 달의 지름이 지구의 약 3분의 1이라고 추정했다. 참값은 4분의 1이지만, 천체 망원경이나 인공위성이 없던 시대에 그 정도 예측이 수학적으로 가능했다는 점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달이 햇빛을 반사하여 빛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그는 달이 정확하게 반달이 될 때 태양-달-지구는 직각삼각형의 세 꼭짓점을 이룬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이 직각삼각형의 한 예각을 알 수 있으면 삼각법을 사용하여 세 변의 상대적 길이를 계산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먼저 달-지구-태양이 이루는 각도를 쟀다. 87도가 나왔다(참값은 89.5도). 세 각을 알면 세 변의 상대적 길이는 삼각법으로 금방 구해진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달과 태양은 겉보기 크기가 거의 같다. 이는 곧, 달과 태양의 거리 비례가 바로 크기(지름)의 비례가 된다는 뜻이다. 아리스타르코스는 이 점에 착안하여 태양과 달, 지구의 상대적 크기를 구한다.

 

그는 이러한 증명과정을 통해 몇 가지 가설을 마련한 뒤,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① 지구로부터 태양까지의 거리는 지구로부터 달까지의 거리의 18배나 되고, 20배보다는 짧다.

 

② 태양의 지름과 달의 지름의 비는 위와 같은 비율이다.

 

③ 태양의 지름과 지구의 지름의 비는 19:3 보다는 크지만, 43:6 보다는 작다.

 

이때 그는 이 계산을 위해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전술한 바와 같이, 지구와 태양 거리 계산은 큰 오차를 냈지만, 달과 지구와의 거리는 실재와 비슷할 정도로 거의 정확하게 예측해냈다. 그는 시각(視覺) ·빛 ·빛깔에 관한 분야에도 상당한 연구의 성과를 거두었고, 개량 해시계도 발명했는데, 이 해시계의 바늘은 오목(凹) 면구의 중앙에 세워져, 태양의 방향과 높이는 반구면(半球面)에 표시된 눈금으로 읽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코페르니쿠스

그가 지동설을 주장한 지 1700년이 지나서야 인정을 받은 코페르니쿠스도 지동설을 인정받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는데, 대학자 아리스토텔레스마저 천동설을 주장하고 당시 당연한 정설이던 천동설에 틀리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나 정확한 그의 이론도 그 시대 사람들로부터는 비웃음을 살뿐이었다. 물론 스토아학파의 학자들로부터는 신성을 모독한다는 준엄한 비판까지 받아야 했다.

 

“당신 주장대로라면 공중 높이 돌을 던지면 던진 장소로부터 서쪽으로 이동한 자리에 떨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하늘을 나는 새도 동쪽으로 날기 위해서는 매우 힘겹게 날아가야 하겠지만 서쪽으로 날기 위해서는 방향만 잡은 채 가만히 있어도 서쪽으로 이동할 것 아닌가?”

 

21세기가 되어서야 독일의 역사소설가 토마스 뷔르케가 <별을 계산하는 남자(원제; Die Sonne im Zentrum)>이라는 소설 작품을 통해 그의 인생을 재구성하여 사람들에게 알렸다.

소설에서 되살아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왕의 지식과 권력을 알지 못하듯이, 자연 역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처럼 보이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착각을 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어쩌면 우리 다음 세대는 자연의 수수께끼를 풀고, 마지막 신을 왕좌에서 끌어낼지도 모르지요.”

 

남아있는 공식적인 기록이라고는 그의 논문 <태양과 달의 크기와 거리에 관하여> 단 한 편이 전부이다. 심지어 지동설에 관한 논문조차 불사라 져버려 남아 있지 않다. 단지 후세에 전해진 아르키메데스의 저서 《모래알을 세는 사람》와 코페르니쿠스의 획기적인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의 초본에서 그의 주장이 명확하게 언급되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최초로 해시계를 발명했고, 지구와 태양의 둘레를 계산했던 아리스타르코스의 저서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 히파티아부터 아르키메데스까지 당시 최고의 지성으로 일컬어졌던 인물들에 의해 연구되었던 명저였다고 전해진다.

굳이 내가 생몰연대마저 정확하지 않은 기원전의 인물을 이 시리즈에 소환한 것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그의 업적과 그보다 더 훌륭한 그의 인생을 당신에게 일러주기 위해서이다.

앞서 소설에서 인용했던 그가 말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가 자신도 잘 모르던 태양 중심의 우주 체계를 발견해가는 과정을 통해 과학으로 사실을 증명해내고 사람들이 증명하지 못한 것에 대한 수많은 것들 중에서 불확실한 것을 공부하고 연구하여 밝혀내는 그 지난한 과정을 경주하였다는 것이 그러하고, 근거가 아닌 비아냥과 비난으로 그의 연구와 발견과 증명을 거부하고 무시했던 무세이온 학자들과 세상의 편견에 당당히 맞서 싸웠다는 것이 그러하다.


그는 당시 나름 천문학자와 수학자로서 부와 명예를 갖추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위험을 그 실패를 무릅쓰고서도 자신의 신념을 위해 세상과 싸웠던 모습은 그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공부하는 이들의 가슴을 울려주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생전에는 고사하고 그가 죽은 뒤 한참이 지나서야, 당대에 처참한 실패로 기억되던 그가 마지막까지 지키려고 했던 신념이 어떻게 갈릴레오와 코페르니쿠스를 탄생시킬 수 있었는지를 역사를 통해 보여준다.

철학자 클레안테스

역사적 기록에 보면, 플루타르코스의 서술을 통해, 철학자 클레안테스는 이 가설을 이유로 아리스타르코스를 신성모독으로 고발하자고 아테네에서 호소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재판이 실제로 열렸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만큼 그의 입지는 수많은 당대의 학자들과 사람들에게 공격받아야만 했다. 심지어 자신이 키운 수제자에게 자신의 이론을 부정당하는 비극적인 상황까지 맞게 된다.

 

당신이 지금 과학적으로 혹은 자연의 섭리를 밝히기 위해 세상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을 당신만이 발견하고 그것을 주장하는 일이 벌어지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코웃음 치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화성에 이주해가서 살겠다고 계획하는 이 첨단의 시대에도 과학분야가 아닌 사람살이에서는 그러한 일들이 아주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너무도 당연하고 옳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사람들의 ‘도덕책하고 현실이 같냐? 철딱서니 없이’라고 말하는 그 현실에서 너무도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믿고 있는 옳다는 것에 대한 신념을 당신이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신념이 없이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기 마련이다. 신념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다. 그냥 내가 우기겠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신념이란, 당신이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공부하고 실증하고 경험을 통해 수양하면서 쌓아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덕책에 나오는 것들이 단순한 신념일 수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당신의 주변에 직장 동료, 친구,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당신의 신념이라는 것에 비아냥거리고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고 조언을 가장하여 같이 물들자고 할 것이다. 신념이라는 것은 이때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그저 당신이 고집하는 것이라면 시간의 문제일 뿐 당신은 흔들리게 된다. 정작 그렇게 사는 것이 당신에게 힘겨워질수록 당신은 노선을 쉽게 갈아탄다. 하지만 명확한 신념이 있을 때의 사람은 눈빛부터가 다르다. 옳지 않은 것을 보고 옳다라고 말하는 것이 불편하기 이를 데 없어진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러 사람이 그렇다고 여기는 것은 신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 당신에게 아리스타르코스를 소개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그의 인생 자체가 매도당하고 결국 그의 생전에 그는 자신의 신념에 근거한 주장을, 그것도 수학과 과학으로 입증했던 주장을 종교와 권위에 짓눌려 인정받지 못하고 죽어갔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뜻을 굽혔던가? 그렇다고 그가 갈릴레이처럼 일단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자신만 옳다고 속으로 삭혔던가?

그렇지 않다.

그의 인생이 그의 신념이 그토록 확고했기에 그의 연구는, 당대의 후배들은 물론이고 시대를 막론하고 후세의 학자들에게 필독서였고 반드시 참고해야 할 연구로 인정받았다. 때문에 그의 인생을, 그의 연구를, 그의 신념을 실패라고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부터 당신이 혹시라도 지동설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 아리스타르코스를 떠올린다면, 오늘날 너무도 당연한 지동설이 당시에 미친 소리라고 매도당하고 멸시당하며 비아냥을 받았고, 그 비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연구와 주장과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한 학자를 기억하길 바란다. 마치 그의 인생을 두고 한 찬사와 같은 칼릴 지브란의 말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모든 사물은 스스로 아름다운 것, 그러나 그 아름다움의 비밀이 인간에게 알려질 때 그것은 몇 배나 더 아름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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