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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29. 2021

탑 디자이너 인생을 때려치우고 순수미술을 하겠다고 나서

세계가 인정하는 팝 아트의 거장으로 우뚝 서다.

1928년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슬로바키아(당시는 체코) 이민 가정으로 위로 두 형이 있었고, 부모님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그 자신도 평생 교회를 다녔다. 본래 그의 집안 성씨는 바르홀라(Varchola)였으나, 영어식인 워홀로 바꾸었다. 

육체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그가 14세 때 사망하였고, 그 후 어머니가 혼자 아들들을 키운다. 어린 시절 몸이 너무 약해 걸핏하면 쓰러졌다. 8세 때는 류마티스성 열에 의해 생기는 병 때문에 거의 1년 동안 학교에 가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렇게 집에만 있는 그에게 그림은 유일한 친구였다. 


가난한 형편이었지만 집에서 거실벽에다가 그냥 낙서를 해도 예술적이라며 칭찬하고 맘껏 그림을 그리게 해 준 어머니는 아들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보고, 필름 사진기와 인화기도 사주었는데, 덕분에 그는 사진을 찍어서 지하실에서 인화하는 것이 취미였다고 한다. 고생스러운 생활에서도 어머니가 아낌없이 지원해 준 덕분에 그는 마음껏 그림을 그리며 창의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역 고등학교를 마치고, 카네기 공과 대학(현재 카네기멜론 대학교)에서 상업 예술을 전공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 시로 이주하여 친구 필립 펄스타인과 함께 광고나 제품 디자인 등을 하는 상업 디자이너로 활동을 시작했다. 잡지사와 광고회사를 찾아다녔지만 초창기엔 가는 곳마다 듣보잡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퇴짜를 맞았다.

 

하지만, <보그(VOGUE)>나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 등의 잡지 광고와 일러스트로 차차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52년에는 드디어 신문광고 미술 부문에서 ‘Art Director's Club Award’를 수상하고, 상업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로 성공했지만 동시에 광고주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그림을 수정하느라, 사생활이라고는 전혀 없는 피폐한 삶을 살아야 했다고 회상한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그는 나중에 단지 정확하게 비추는 TV 영상처럼 내면을 버리고 표층을 철저히 충실하게 추구하는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앤디 워홀(Andy Warhol)’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던 미국의 미술가이자, 출력물 제작자, 그리고 영화 제작자로, 이른바 시각주의 예술 운동의 선구자로 인정받는 팝 아트의 거장, 앤드루 워홀라 주니어(Andrew Warhola Jr.)의 이야기이다.

 

상업용 일러스트로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후에 화가, 아방가르드 영화, 레코드 프로듀서, 작가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는데, 1963년에 제작된 캔버스에 그려진 <여덟 명의 엘비스(Eight Elvises)>라는 그림이 무려 1억 달러에 거래되었다고 <이코노미스트>의 기사를 통해 알려졌다. 작품의 거래금액이 ‘1억 달러’라는 사실은 잭슨 폴록, 파블로 피카소, 구스타프 클림트와 윌렘 드 쿠닝만이 기록한 기준 가격이라는 점에서 그가 예술가로서 이룬 성과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워홀은 I. 밀러 같은 회사를 위해 신발 광고를 만들며 1950년대에 성공적인 삽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이 시기에 그는 책의 삽화를 그리고 무대 디자인도 했다. 1956년 뉴욕 근대 미술관에서 열린 그룹전에서 워홀은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을 선보였다. 정작 상업 미술 분야의 광고계에 종사하며 부와 명예를 얻긴 했지만, 뭔가 허전하고 계속된 갈망이 속에서 들끓었다. 그래서 상업 디자이너로 성공하여 정점에 오른 부와 명예를 버리고 10년 만에 순수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막상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다가 그가 그리기로 한 것이 바로, 일상적인 소재들이었다.

1960년, 32살이 되던 해 그는 일러스트레이션의 세계를 완전히 버리고 미술의 세계로 옮겨간다. '배트맨’, '딕 트래이시’, '슈퍼맨’ 등 만화를 모티브로 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지만, 계약했던 〈레오 캐스테리 갤러리〉에서 뿐만 아니라 미국 만화를 모티브로 한 시대를 풍미한 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팝 일러스트레이션 작품을 접한 이후 이 주제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당시 미국은 눈부신 경제 발전을 추구하고 있었다.

 

〈캠벨 수프 캔〉

그리고 나서 자신만의 그림세계를 구상한 끝에, 〈캠벨 수프 캔〉이나 〈코카콜라 병〉 등 유명한 상품들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후에 그는 실크 스크린(silk screen)으로 바꾸어, 대량 생산된 상품의 그림을 그리는 것만 아니라 작품 자체를 대량 생산하였다. 워홀이 신발 산업에서 일할 때 잉크를 종이에 묻혀서 인쇄하는 블라티드 라인(blotted line)이라는 초보적인 수준의 인쇄 기술을 개발했다. 


그는 이른바 ‘예술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뉴욕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인 ‘The Factory’에서 판화, 신발, 영화, 책 등을 만들어내었다. 워홀의 작품에는 의뢰를 받아 제작한 초상화나 광고도 포함되어 있다. 친근한 소재의 그림을 대량으로 찍어내 예술 작품을 누구나 쉽고 편하게 즐기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마릴린 먼로>,1967년, 실크스크린.

메릴린 먼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는 곧바로 영화 <나이아가라>의 먼로의 최고의 스틸 사진 초상화를 잘라서 다른 색깔을 입혀서 대량 생산을 계속했다. 제트기 사고, 자동차 사고, 재해 등의 화재의 신문 보도 사진을 사용했다.

 

뉴욕에 마련한 그의 작업 스튜디오 ‘The Factory’는 믹 재거(롤링 스톤스), 루 리드(벨벳 언더그라운드), 트루먼 커포티(작가), 에디 세즈윅(모델) 등 아티스트가 모이는 유명 모임 장소가 된다. 1965년, 36 세가 되던 해, 벨벳 언더그라운드(The Velvet Underground; 이하 V.U.)의 데뷔 앨범을 프로듀싱한다. 워홀은 V.U. 의 연주를 듣고 공동 작업을 요청해, 배우 겸 모델인 니코를 데려와 합류시킨다.


1967년 3월 발매한 그들의 데뷔 앨범 <The Velvet Underground & Nico>에서는 프로듀스와 재킷 디자인을 직접 만들어낸다. 실크 스크린 프로세스에 의한 〈바나나〉를 그린 레코드 표지는 유명해졌다. 전위적 음악이기 때문에 앨범은 망해버렸지만, 이후 높이 재평가되었다. 워홀은 V.U. 의 악곡을 영화의 사운드 트랙에도 이용했다. 그 당시 이야기에 대해서는 영화 <루 리드: 로큰롤 하트(Lou Reed: Rock and Roll Heart)>에 상세히 그려져 있다.

발레리 솔라니스

1968년 워홀은 급진적 페미니스트 작가인 발레리 솔라니스에게 스튜디오에서 저격당해 중상을 입었다. 거리의 매춘부였던 솔라니스는 SCUM(남자를 괴멸하기 위한 단체)의 성명서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뉴욕에서 워홀을 소개받은 후, 그녀는 워홀에게 자신이 쓴 연극 '빌어먹을'(1966)의 제작을 부탁했다. 그러나 워홀은 이 요청을 거절했고, 극본도 돌려주지 않았다. 솔라니스는 워홀을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극본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워홀은 그녀를 달래기 위해 자신의 영화 <나는 남자다>(1968)에서 배역 하나를 맡겼다.

 

그러나 이런 회유에 만족하지 못한 솔라니스는 팩토리에서 나오는 워홀을 기다려, 그와 그의 매니저인 프레드 휴, 그리고 미술비평가인 마리오 아나야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두 발의 총탄이 워홀의 폐와 위, 간 그리고 목을 관통했고, 응급 수술 뒤 그는 두 달간을 병원에서 보내야만 했다. 

워홀은 목숨은 겨우 건졌지만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진 못했다. 솔라나스는 경찰에 자수하며, “그는 내 삶의 너무 많은 부분을 통제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는데 후에 정신감정을 통해 편집 조현병 진단을 받았으며, 워홀이 그녀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1995년에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는 그의 파격적인 예술을 소장하고 싶은 사교계 인사들로부터 의뢰를 받아 초상화 실크 스크린 제작 프린트를 다수 제작한다. 1970년 〈라이프〉지에 의해서 비틀즈와 함께 ‘1960년대에 가장 영향력이 있던 인물’로 선정된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방중에 맞추어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같은 해 그의 어머니가 피츠버그에서 사망하면서, 전 세계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게 된다. 1982년부터 1986년 사이에는 재해와 신화를 모티브로 한 일련의 작품을 창조한다. 마지막 작품은 1986년 〈레닌의 초상화〉가 있다.

1987년 뉴욕 코넬 의료 센터에서 담낭 수술을 받은 다음 날, 페니실린 알레르기 반응으로 상태가 악화되어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향년 58세였고, 평생 독신이었다. 피츠버그 성 세례 요한 가톨릭 공동묘지에 묻혔다. 피츠버그 시내에서 아르게이니 강 건너 맞은편 언덕의 노스 쇼어 지역에 앤디 워홀 미술관이 있다. 개인 예술가 전문 미술관으로서는 미국 최대 규모이다.

 

그가 지나치게 소비지향적이고 튀는 행동으로 일관한 기벽의 예술가로 알려졌지만, 실제로 그가 죽은 후 그의 침실이 언론에 공개되었는데, 그의 기행과 명성에 걸맞지 않게 독실한 신자 할머니 방같이 검소했다.

 

본래 그는 예술은 대중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작품을 대량 생산해서 저렴하게 팔았다. 그의 이러한 예술철학은 그 유명한 코카콜라 병을 작품의 소재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계기를 인터뷰한 것에서 확실하게 알 수 있다.

<Coca-Cola 5 bottles> ,1962.
“이 나라가 정말 멋진 것은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모두가 똑같은 것을 사는 전통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TV를 보면 코카-콜라가 나오고, 대통령도, 리즈 테일러(미국의 영화배우)도, 우리도 모두 코카-콜라를 마신다. 콜라는 그저 똑같은 콜라일 뿐, 아무리 큰돈을 준다 해도 더 좋은 코카-콜라를 살 수는 없다. 모든 코카-콜라는 동일하며, 똑같이 좋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리즈 테일러도 알고, 대통령도 알고, 가난한 자도 알고, 당신도 안다.”

- <앤디 워홀의 철학(The Philosophy of Andy Warhol)>(1975) 중에서-

 

‘희귀한 것만 예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흔한 것도 예술이 될 수 있다.’ ‘당신이 훔쳐 달아날 수 있는 모든 것이 예술이다.’라는 앤디 워홀의 말속에 그의 예술 철학이 모두 집약되어 있다. 예술은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철학이 그대로 묻어난다.

 

그가 초창기 그려 주목을 받았던 캠벨 수프 깡통 그림은 상품화에 대한 점점 더 늘어나는 무관심함에 대한 언급이었으며, 반면 매릴린 먼로의 이미지는 번지르르하게 포장된 천박함에 대한 지적에 다름 아니었다. 


워홀은 그렇게 냉정한 사회의 관찰자로서 사진과 영화가 사람들의 현실 인식에서 행하는 눈에 띄는 역할에 일찍부터 주목해왔다. 그래서 비행기 추락과 피로 물든 인종 폭동, 시민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사납게 공격하는 경찰 등의 정치적인 작품들은 워홀의 대표작인 유명인과 상품의 이미지만큼이나 중요한 작품들이다.


1980년대에 워홀은 장 미셸 바스키아 같은 젊은 미술가들과 공동으로 작업했으며, 달러 기호($)의 이미지를 그려 과열된 미술시장을 조롱하기도 했다.

세상에 보이는 것만 보면 상당히 난잡한 바람둥이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여러모로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누구보다 사회참여적인 의식을 작품에 남아냈던 진정한 예술가였다.


당신이라면, 그닥 명문대도 아닌 듣보잡 대학을 나와 대도시에 무작정 상경하여 어렵게 10년간 고생하며 상업 디자이너로 쌓은 부와 명예를 때려치우고, 뜬금없이 자신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 순수미술로 전향할 수 있었겠는가?

 

물론 결과적으로 그는 어마어마한 성공을 이뤄냈다.

이제 100명이 훨씬 넘었으니 잘 알겠지만, 내가 오늘 당신에게 그의 삶을 소개하는 것은 단순히 그가 유명한 예술 거장이라는 이유가 아니다. 


조금 면밀하게 돋보기로 들여다보자. 그가 그저 흔한 서양화가로 전향했다면 지금의 앤디 워홀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순수미술을 하겠다고 그렇게 고민하고 나서 고른 소재들이나 표현 기법이 모두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하는가?

<여섯 개의 마릴린(The Six Marilyns / Marilyn Six-Pack)>,1962년, 실크스크린.

10년간 그가 정점에 서 있던 광고 삽화 디자이너로서 배우고 익히고 활용했던 그 기술고 기법과 사회를 읽어내는 눈이었다. 즉, 그가 10년간 상업 디자이너로 일을 해서 단순히 돈만 벌었던 것이 아니라, 그는 자연스럽게 수행을 했던 것이고 결국 순수 미술 쪽으로 가면서도 자신이 10년간 수행했던 그 경험과 수양의 결과들로 이후의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처음 그가 소재로 삼았던 것은 미국 만화였다. 하지만 같은 모티브로 한 시대를 풍미한 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팝 일러스트레이션 작품을 접하고 나자 그는 바로 그 소재를 버린다. 그리고 다시 자신만의 소재를 찾아 나선다. 그가 거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과정들을 거쳤기 때문이다.

당신이 지금 당신의 꿈을 향해 걷고 있지 않다며 자신의 일에 일말의 애정은 고사하고 그저 먹고살기 위해 마지못해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고쳐먹어야 한다는 말이다. 당신이 배우고 익히고 매일같이 하는 그 업무를 통해 당신만의 노하우가 생기고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당신이 원하는 그 무엇을 하던, 심지어 그 분야가 똑같지 않아도 하더라도 당신이 겪은 그 수양 과정들은 당신을 또 다른 한 층 위의 세계로 업그레이드하는 데 있어 충분한 자양분을 제공하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지금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당신의 심장을 때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당신이 매일같이 하는 일,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이리저리 고민하고 며칠 야근까지 하며 당신이 이루어낸 그 지난한 과정들과 경험은 결코 팔려나간 곳에 함께 패킹되어 나가지 않고 당신의 영혼과 당신의 경륜에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여 당신이라는 온전한 전문가를 만들어나간다는 뜻이다. 

그 이후에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이루고 싶은 꿈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어떤 식으로든 당신이 쌓아온 그 삶의 족적들은 당신의 삶에 큰 도움이 되고 기반이 되며 응용의 기초가 될 것이다.

 

당신의 지금 힘겨운 실패가, 그 지겨운 과정의 반복이, 결코 헛된 노력이 아님을 내가 보장 하마. 그리고 마침내는 당신의 화려한 미래가, 곧 다가올 성공이 내 말과 당신의 땀을 증명해줄 것이다. 그것들이 없이 성공하고, 대가가 되고, 거장이 되는 인간은 없다. 당신은 그들의 뒤를 잘 따르고 있다. 


스스로를 의심하지 마라. 
당신은 잘해나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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