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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30. 2021

아내를 공부시킨다고  미국에서 가정부일을 했을지라도

국민들을 가르치고 독립투사들을 배불리 먹이던 선생님으로 기억되다.

1878년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상도(일명 도롱섬)에서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885년에 강서에서 평양 대동강변 국수당으로 이사했으며 이듬해인 8세 때에 부친이 별세하는 바람에 할아버지 슬하에서 교육받았다.


1891년에 평남 남부산면 노남리로 이사했는데, 노남리를 속칭 ‘노내미’라 했고 당시 사람들은 그의 집을 ‘노내미집’으로, 그를 ‘노내미집 셋째’라고 불렀다. 어려서부터 미소년에 고운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고 하며 옛날이야기책을 소리 내어 읽기를 좋아해서 동네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는데 동네 노인들이 저녁이면 사랑방에 모여 노내미집 셋째를 불러다가 옛날이야기책을 읽게 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서당에서 한문 수학을 받으며 유학(儒學)을 공부하였다. 1894년 16세의 청년은 청일전쟁으로 역사와 전통의 도시 평양이 파괴당한 것에 충격을 받고, 더 큰 세상을 경험하고자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서울 정동거리에서 무료로 공부를 가르쳐준다면서 학생을 모집하는 선교사 밀러를 만나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세운 구세학당(救世學堂)에 입학하게 되었다. 신학문을 교육받고 기독교인으로 입교하게 된 밀러 학당에서의 3년간의 수학 시절은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크게 넓혀주었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민족운동에 눈떴다. 평양의 쾌재정(快哉亭)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무능한 관료들을 비판한 연설로 주목받은 이후 가는 곳마다 많은 청중들을 웅변으로 감동시켰다. 그러나 1898년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을 받아 해체되자, 낙향하여 점진학교(漸進學校)와 탄포리에 교회를 설립해 교육과 전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교육에 종사하면서 교육자의 자질에 부족함을 느낀 그는 교육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자 미국 유학을 결심한다. 1902년 9월 3일 제중원에서 이혜련과 혼인하고 그 이튿날 부부가 함께 인천항을 출발해 유학길에 올랐다.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교육자였고, 정치가였던 도산(島山) 안창호 선생의 이야기이다. 그는 민족의 실력을 기르기 위한 교육 활동과 우리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며, 신민회와 대성 학교, 흥사단 등을 세웠고, 전면에서 무장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을 지원하는 일을 해왔다.

도산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우선 영어를 익히기 위해 소학교에서 공부하고자 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번번이 입학을 거절당하였다. 다행히 한 학교장의 배려로 입학 허락을 받고 영어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으나 공부를 좀 하려니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 신흥도시 샌프란시스코에는 한인 학생과 노동자, 그리고 인삼상인 등이 모여 있었으나 커뮤니티를 이루지 못하고 구심점 없이 흩어져 되는대로 살고 있는 처지였다.


앞서 이주해온 일본인 노동자들에 비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였으며 생활 또한 불안정하였다. 도산은 한인들이 남의 나라에 와서 천시받지 않고 상호 권익을 보호하면서도 신용 있는 문명인으로 대접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인들이 뭉친 모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이러한 생각이 미치자 자신의 공부를 중단하고 뜻있는 동지들과 함께 미주 한인들의 최초의 조직인 ‘샌프란시스코 한인 친목회’를 결성하였다. 친목회를 통해 한인 노동자들에게 일거리를 주선하고 그들이 정당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였다.

 

1904년 일자리를 찾아 리버사이드로 모여드는 한인들과 함께 리버사이드로 이주한 도산은 미국인 가정의 가사 고용인으로 취업해 부인을 중국인이 설립한 학교에 보내 공부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 미국인 집주인이 집을 더럽게 관리하는 한인들에게 집 임대를 꺼린다는 말을 듣게 된 도산은 일일이 한인들의 집을 방문해 집안은 물론 심지어 화장실까지도 청소해준다.


이후 한인들은 매사 모든 일을 선생과 의논하게 되었고 어느 사이엔가 선생은 한인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오렌지 한 개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 임을 깨우치려 했던 도산의 마음을 한인사회는 공유하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오렌지 농장에서 오렌지를 수확하는 도산의 모습.

1905년 3월 28일, 장남 필립(必立)이 태어났다. ‘필립’이라는 이름은 조국을 반드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선생의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한인사회가 자리 잡아가면서 자신감을 얻은 선생과 동지들은 4월 5일, 조국 광복을 사업목표로 한 정치단체인 공립협회를 창립하였다.


이때 28세로 초대 회장에 취임한 선생은 공립협회 회관을 마련하고 <공립 신보>을 발간하였으며, 각지에 지방회를 만들어 공립협회를 지도하였다. 그러나 이때 국내로부터 청천벽력과 같은 을사조약 체결 소식이 들려온다. 일본이 한국통감부를 설치해 노골적인 식민통치를 시작했다는 소식이었다. 함께하던 동지들은 선생의 귀국을 종용하며 국내에서 국민단체를 만들어 조국의 국권을 회복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처음에는 동지들의 신세를 질 수 없다며 거절했지만 동지들은 그렇다면 자신들이 노동하는 것도 의미가 없으니 공립협회를 해산해 버리겠다며 강권하며, 조국을 구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도산뿐임을 설득한다. 이에 선생은 리버사이드에서 ‘대한인신민회’를 결성하고 그 설립 취지서를 안고 1907년, 귀국하게 된다.

귀국하자마자, 도산은 ‘대한사람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라고 역설하는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신민회, 대성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서울과 평양부 등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설을 했다. 그의 뛰어난 웅변은 많은 청년들에게 감동을 주어 청년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1907년 일제는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날 해산 군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일본군과 일대 시가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해산 군인들의 탄환이 떨어지자 일본군들은 반격에 나서 도망하는 해산 군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하였다. 이때 선생은 남대문 세브란스병원 의사로 복무 중이었던 김필순의 집인 세브란스 건너편 김형제 상회 2층에 머물고 있다가 시가전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선생은 현장에 뛰어들어 거리에 쓰러진 군인들의 시체를 거두고 중상 입은 군인들을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연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며 구호한다. 이 경험은 도산에게, 상해에서 대한적십자사를 재건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사건이 된다.

 

그해 11월, 조선 통감이던 이토 히로부미의 제의로 그와 회동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청년 내각’ 구성을 제시하며 도산을 회유하지만, 이에 도산은 “한국의 개혁과 발전은 한국인들 스스로의 힘과 노력에 맡겨야 한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서양의 간섭과 압력을 받았다면 지금처럼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반박했다.

 

이후 일제 탄압이 심해져서 105인 사건이 일어나 서북 지역 항일 인사들이 대거 투옥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안창호는 준비론에 입각하여 실력 양성을 주장했고, 이시영, 이동휘, 김좌진과 같은 급진파는 만주로 이동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국내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국민운동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여전히 선생은 미주 공립협회 회장의 자리를 유지하면서 공립협회의 민족운동을 원격 지도하고 있었다. 한편 1908년 8월, 신민회의 청년조직인 청년학우회를 창립한 선생은 이 땅의 건전한 청년들을 교육계와 경제계, 그리고 정치계 등 각 계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인재로 키우고자 하였다. 청년학우회는 얼마 활동하지 못하고 신민회의 해체와 동시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1913년 미주에서 결성된 ‘흥사단’이 그 역사를 계승하였다.

대성학교 당시 학생들과 단체 사진.

1909년, 선생은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대한제국 황제를 환영하는데 일장기를 들고나갈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해 일제의 따가운 주목을 받았다. 이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공립협회의 지도자인 선생을 안중근 의거 배후 혐의로 체포하였다. 선생은 그 해 말 석방되었다가 이듬해 초에 재소환되는 등 일제의 요주의 경계 인물로 부각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과 신민회 회원들은 국내에서 더 이상의 국권회복운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게 된다.

 

신민회는 1910년 3월, 긴급 간부회의를 개최해 독립 전쟁론을 최고의 구국 전략으로 채택하였다. 그것은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여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사관을 양성해 일제에 장기적 항쟁한다는 전략이었다. 도산은 조직 단체만이 아니라 각종 회사와 학교를 설립해 조직 운영에 치력하였다. 독립운동의 물적 토대와 인적 토대를 구축해 나가지 않으면 우리 민족의 장래 희망도 없다고 봤던 선생은 인적, 물적 실력양성의 기반을 다져가는데 소홀하지 않았다.


도산은 혁명가로서만이 아니라, 장차 독립될 국가의 전문분야에서 전문인으로서 조국 건설에 기여할 인재를 키우는 일도 독립운동이라 보고, 재능 있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광복된 조국에서 봉사할 수 있는 전문인 될 것을 권유하였다.

1917년 멕시코 한인사회를 돌아보기 위해 떠나기 직전 찍은 가족사진

하지만 전 세계 한인사회를 대한인국민회 중심의 네트워크로 구축하고자 했던 선생의 희망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실패하고 말았다. 일본이 승전국의 하나가 됨으로써 만주 및 러시아 지역의 대한인국민회의 항일운동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선생은 1916년 하와이의 이승만과 박용만 사이에 분규가 일어났을 때, 분쟁해결을 위해 하와이까지 날아간다.

1919년 3.1 운동 발발 소식이 선생에게 전달된다. 선생은 신속히 3.1 운동의 소식을 북미, 하와이, 멕시코 등지에 전파하였다.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기회가 도래했음을 알리고, 전 세계에 한국의 사정을 알리는 외교활동을 전개할 것과 전 동포사회가 독립전쟁 준비에 단결해 줄 것, 특히 북미, 하와이, 멕시코 재류동포들이 재정 공급과 선전활동에 주력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윌슨 대통령과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중국 등 5국 대사에게 한국민의 절대 독립의 의지를 알리고 김규식의 파리 강화 회의 대표 출석권을 안정해 줄 것을 간절히 청원하였다.


이후, 정통성을 가진 민족 정권을 수립해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고자 3개의 임시정부 통합운동을 진행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정부 통합에 성공해 통일 임시정부가 출범할 수 있었음은 선생의 정력적인 통합운동의 결실이다. 초기의 임시정부의 조직과 운영은 이처럼 선생의 방침과 방략에 따라 진행되었으며 이때 지도자로서의 역량과 리더십이 크게 발휘되었다.


그러나, 통일정부에서 선생은 한성정부의 법통성을 계승함에 따라 노동국 총판이 되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 기호파 내각의 견제를 받게 되면서 임시정부 내에서 선생의 입지가 크게 축소되었다.

그러나 선생의 통일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에 의해 결집된 반정부 세력은 이승만의 외교노선에 반대하며 반정부활동을 전개해 임시정부의 지도력에 큰 타격을 입혔다. 현재의 정부조직이 미주, 러시아, 만주 등 각각의 운동 조건이 다른 곳으로부터 모여든 독립운동의 세력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현실에 직면하자 선생은 그 대안으로 독립운동 세력을 횡적으로 연대시킨 ‘대독립당’을 결성해 정부와는 별개로 정당에 의한 독립운동을 지도하고자 하였다.

 

1921년, 위기에 처한 임시정부 독립운동 방략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선생은 여운형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국민대표회의 기성회를 조직해 나갔다. 1923년 1월에 시작된 국민대표회의는 국내는 물론 미주, 만주, 중국 관내, 러시아 등지에서 대표권을 인정받은 140명 이상의 대표들이 참석한 대대적인 민족회의였다.


선생은 현정부유지파와 창조파를 중재하며 중도안으로 정부개조안을 주창했지만 국민대표회의는 끝내 결렬되고 말았고, 실망한 독립운동 세력들은 상해를 떠나 버렸다.

 

당시 선생이 주장했던 독립운동의 방향은 좌, 우 운동세력의 통합과 전민족의 연대, 그리고 일제에 대한 파괴책을 주창한 바, 미국 내의 일부 분자들은 선생이 사회주의자이며 위험 분자라고 지목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이런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고 1926년 7월 8일에 선생의 상해 귀환을 환영하는 연설회 석상에서 ‘주의(主義)’를 초월해 전민족운동계가 역할분담을 한 혁명을 진행시켜 나갈 것을 간절히 호소하였다.

선생이 자녀에게 보낸 엽서(1930). 말미에 '언제든지 스마일'이라고 쓰며 용기를 잃지 말라 격려했다.

선생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미국에서는 막내아들 필영(必英)이 태어났다. 막내아들 필영은 태어나서 한 번도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였다.


당시 선생이 주장했던 대공주의(大公主義)는, 사회 전반의 공익을 제일의로 하고, 독립운동계에 분열을 초래했던 자본주의(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상대화하여 민족 평등, 정치 평등, 경제평등, 교육평등의 사회민주주의적 국가 수립의 전도를 제시하였다.


이는 비타협적 항일투쟁의 노선을 견지하고 민족 내부에서는 민족 간의 신뢰와 사랑에 바탕을 둔 민족우선의 통일주의를 주창하여 좌, 우 양쪽의 공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중도에서 민주주의적 민족국가 수립의 비전을 제시한 것이었다.

 

1932년 1월 16일 자로 부인 이혜련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어려움에서도 최후 순간까지 독립항쟁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비장한 도산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다.

 

“이미 혁명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기로 작정하고 오랫동안 희생을 달게 여기여 온 바에 이제 어떤 고통을 받든지 어찌 원망할 것이 있으리오. 나는 더욱이 여러 동지와 동포에게 빚을 진 것이 많고 지금은 늙었으니 다시는 집이나 무엇이나 사사로운 일을 돌아볼 여지가 없고 오직 혁명을 위하여 최후로 목숨까지 희생할 것을 재촉할 것뿐입니다.”

                           - 도산 선생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

 

1932년 4월 29일에 윤봉길 의사가 성공한 날, 선생은 프랑스와 일본 영사관 합동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대전 감옥으로 이송되어 2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1935년 2월 10일 가출옥하였다. 그러나 일체의 민족운동을 허용하지 않은 일제는 1937년 6월, ‘동우회 사건’을 일으켜 동우회원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였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당시의 도산 안창호

그렇게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당했을 때 경성 지방법원 검사의 심문의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 있어 잠시 살펴본다.

 

검: 너는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안: 대한의 독립은 반드시 된다고 믿는다.

검: 무엇으로 그것을 믿느냐?

안: 대한 민족 전체가 대한의 독립을 믿으니 대한이 독립할 것이요, 세계의 공의가 대한의 독립을 원하니 대한이 독립할 것이요, 하늘이 대한의 독립을 명하니 대한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

 

이렇게 취조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선생은 생명 위독 상태에 빠졌다. 일제는 서둘러 선생을 병보석으로 출옥시켜 경성제대 부속병원으로 옮겨 치료하였다. 장결핵, 늑막염과 복막염 등으로 인한 합병증이 발생한 상태로, 폐결핵 겸 결핵성 복막염에 간경화증 겸 만성기관지염 및 위하수증의 증세까지 보였고,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한 선생은 1938년 3월 10일, 만 59년 4개월의 일기로 환갑을 넘기지 못하고 서거하였다.


선생의 서거로 인해 민중시위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일제는 장례식에 참석 인원을 제한해 소수의 인척들만 참석하게 하고 망우리 공동묘지로 가는 길목마다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후 1973년 강남에 도산공원을 조성하고 도산의 유해와 미국에서 온 부인 이혜련의 유해를 이곳으로 옮겨 합장하였다.

대한민국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굳이 내가 도산 선생의 일대기를 오늘 당신에게 소개하는 이유는, 물론 본 시리즈의 성향에 맞게 대한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실패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던 점을 보여준다는 1차적인 의도도 있지만, 선생이 그렇게 치력한 것이 단순한 독립운동에 그치지 않고, 저마다의 이익을 품고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의 통합을 끝까지 노력했음을, 그리고 그 당시의 분열된 조국의 모습이 80여 년이 흐른 지금 뭐가 그렇게 다른지 한심하고 한탄스워서 당시의 적나라한 우리의 창피한 모습을 당신이 제대로 읽기를 바라서이다.

 

도산 선생은 당대의 객관적 정세를 파악하고 우리 민족이 당면한 고난의 상활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합리적 방략을 세우고 공론을 이끌어내려 노력했다. 또한 민족 개개인의 자기 혁신, 자기 개조를 강조하며 이것이 곧 민족 개조와 혁신의 기본이라고 보았다. ‘무실역행(務實力行)’은 그가 가장 강조한 방법이다. 이러한 개인의 혁신과 더불어 ‘대공주의(大公主義)’를 통해 개인이 전체를 위해 통합하고, 대립과 분열을 극복하자는 민족 대통합을 주장했다.

 

이것은 원시 유학에서 공자의 가르침에서 출발한 지금의 코스모폴리탄에게도 너무도 필수적으로 갖춰야할 소양이 아닐 수 없다. 지금 군부의 총칼로 청와대에 입성한 군바리들이 허구한 날 빨갱이 타령을 해가며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던 시대가 있었다. 있지도 않은 물공격을 말하며 평화의 댐이라는 가공할만한 개념을 만들어 가난한 서민들의 코 묻은 돈까지 챙겨가 자기 주머니를 불려놓고서는 그 돈을 처자식을 위해 뿌려놓고 돈이 없다고 하고 자기가 죽으면 그만이라며 사라져 버렸다. 그뿐인가? 그들의 후예는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이 든 서민들을 용돈으로 선동하며 다시 빨갱이 어쩌구 하면서 대한민국을, 국론을 분열시키는데 앞장서고 있다.

당신에게 지금 조국이 없는 것이 아니요, 당신의 조국을 도산 선생 때처럼 일제가 장악하여 우리가 우리말을 쓰지 못하고 굴욕적인 노예처럼 짓밟히는 것도 아니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도산 선생이 쭈욱 현재의 이 꼴을 보고 계셨다면, 이 꼬락서니가 결코 일제의 식민지 치하 때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하고 뿌듯해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도산 선생이 늘 강조했던 것이 있다. 배우는 것과 자신이 자기 자리에서 자기 책무를 제대로 온전히 한다면 일제가 아니라 그 어떤 천재지변에도 나라가 흔들릴 일은 없다고 한 부분이다.


100%, 아니 300% 공감하는 말씀이다. 당신이 지금 당신의 자리에서 당신이 해야 할 일, 당신의 양심에 맞춰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을 하지 않고, 당신의 눈앞에서 바르지 못한 일이 벌어질 때 그것에 대해 아니라고 따끔하게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일, 그것이 정치이지, 국회의원이랍시고 세금 축내고 내부 정보 이용해서 땅 사고 건물사고, 지들끼리 정보 공유하고 찌질한 자식 로스쿨, 의전원 넣겠다고 스펙 쌓기 하고 그따위 행동이 일련의 정치가 아닌 것이다.

거창하게 지금 우리나라는 제대로 살리고 우리 사회를 살리자는 말까지 당신에게 하지 않으마. 당신이 당신의 부모님이, 당신의 자식이 당당하게 우리 사회가 독립을 하고 나서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까지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실패하고, 좌우 양측의 이익과 정치적인 이유로 도산 선생은 내내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를 맛봐야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않았다. 해외에 나가 타지에서 눈칫밥을 먹으면서도 서로 단합하지 않고 싸우고 헐뜯는 한국인들에게 꾸지람 대신 솔선수범하는 모습으로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들이 단합을, 통합을 싫어하거나 못하는 것이 아님을 선생을 구심점으로 그들은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들이 미국에서 유학했다고, 자신들이 모든 독립운동의 선두에 있었다고 저마다 공을 내세우며 자신들만이 나라를 제대로 이끌 수 있다고 혈안이 되어 있을 때도 선생은 그들의 앞에 서지 않고 뒤에 서서 양측의 손을 계속해서 잡아끌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선생이 그리하였는지 당신이 그것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을 것이다. 잘 모르면 현혹되고 싸울 수 없으니 가르쳤고, 배고프고 총탄을 살 돈이 없으면 독립운동도 할 수 없다며 달러를 긁어 긁어 독립운동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해왔던 이가 바로 도산 선생이었다.


부끄럽지 않은가? 선생만큼의 삶까지는 아니더라도 선생이 우리에게 남겨준 이 자유와 이 발전된 나라의 모습을 저마다의 사욕과 정치적인 이유로 나라를 두동강내어야 속이 시원하겠는가 말이다.


그러지 말자.

더 하고픈 말은 많으나 잔소리로 들릴 테니 선생이 마지막으로, 당신을 포함한 어리석은 우리 동포들을 위해 1938년 3월 10일, 외침으로 남긴 유언을 전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동포들이 겪은 고통에 마음이 아플 뿐이오. 일본은 자기가 일으킨 전쟁으로 망할 것이오. 그러니 아무리 힘들더라도 참고, 힘을 모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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