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Dec 01. 2021

고아가 되어 연상의 남작부인 정부로 사랑을 배웠지만..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지주가 되는 계몽사상가로 우뚝 서다.

1712년, 칼뱅(Jean Calvin)의 개혁 신앙이 지배하던 스위스 제네바(Geneva)에서 태어났다. 당시 제네바는 칼뱅파 개신교를 믿는 도시 국가였는데,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토착 상류층과 투표권이 없는 다수의 이주민들 사이에 계층 간 대립이 심각했다. 그의 아버지는 투표권이 있는 제네바 시민 계급이었지만 15명의 자녀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시계 제조업자가 되었고, 목사의 딸이자 재능이 많았던 어머니는 당시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을 했기에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렇듯 어울리지 않는 부부를 엮어준 것은 지극한 사랑이었다. 하지만 루소가 태어난 뒤 열흘 만에 출산 후유증으로 그의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그의 가정은 불운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가 <고백록(Les Confessions)>(1781)에서 스스로 적은 바와 같이, 출생 자체가 그에게 닥친 첫 번째 불행이라는 슬픈 표현이 어울리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자식 교육에 무관심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도 콘스탄티노플에 일자리가 있다는 이유로 집안을 돌보지 않았고, 어머니가 세상을 등진 이후에는 자기의 처지를 비관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탓이었는지 7살 위의 형은 문제아가 되어 사고만 치다가 가출해 버렸고, 어릴 때부터 영민했던 그 역시 죽은 아내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아버지의 한탄 속에 제대로 된 훈육을 받지 못했다. 


가끔 어머니가 남긴 책(모험소설과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함께 읽기도 했지만, 그의 아버지가 베풀어준 교육은 7살 때 이미 플루타르코스(Plutarchos)에게 흠뻑 빠져 있던 루소에게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이후에도 루소는 이렇다 할 교육을 받지 못했다. 10살이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군인과의 다툼 때문에 제네바를 떠났고, 그는 외삼촌의 보살핌을 받았다. 최초에는 보세이(Bossey)에 살던 목사에게 맡겨져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리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기초적인 라틴어와 킬링타임 독서만 하다 그 집에서 오해를 받게 되어 쫓겨나게 되어 다시 제네바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공증인이나 조각가가 되려는 생각에 여러 견습생 과정을 전전했다. 그러나 리옹(Lyon)에 정착했던 아버지가 재혼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난 뒤부터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방황으로 힘겨워한다. 결국 그는 1728년, 16살에 뜻밖의 계기로 방랑을 결심한다. 나들이를 나왔다가 통금에 걸려 제네바로 들어가지 못하자, 고향을 떠나기로 작심한 것이다.

 

어린 나이에 고향에서 나오게 되자 생계가 막막해진 소년은 가톨릭 사제가 되고자 하였다. 이때 한 신부가 “개종자들을 도와주는 마음씨 좋은 귀족 부인이 있다. 가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소개장을 써주겠다”라고 하여 바랑(Françoise-Louise de Warens) 부인을 만나 그녀의 집사로 일하면서 후원을 받게 되었다. 당시 남작 부인은 29세였는데, 정략결혼 때문에 남편과 별거 중이었다. 부인은 책을 많이 가지고 있어 그가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그에게 음악 교육을 받도록 도와주기도 하였다.

바랑(Françoise-Louise de Warens)부인의 초상화

소년은 바랑 부인을 ‘엄마’라고 부르고 부인은 그를 ‘꼬마’라고 불렀다. 소년은 잘생긴 외모로 자라 21살이 되던 해 남작 부인의 정부가 되어, 그녀가 다른 애인을 만들게 되는 26세까지 애인 역할을 한다. 26살이 되어 다시 버림받은 청년은 한동안 부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며 주위를 맴돌다 결국 포기하고 프랑스로 건너갔다.

루소의 <고백록>

스위스 출신의 프랑스 사상가이자 소설가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했던 장 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의 이야기이다. 그의 사상은 프랑스혁명과 민주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저서를 통해 당시 사회와 종교를 비판했던 철학자이자, 어린이들은 자연 속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교육학자이기도 했다.

 

루소의 사상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간이 문명국가를 만들기 이전인 자연 상태에서는 선했고, 모두가 평등했지만, 사유 재산이 생기면서 악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이 재산을 포함한 모든 권리를 무조건적으로 공동체에 양도한다면 진정한 자유와 선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방랑을 지속하던 루소는 겨우 남작부인의 덕분에 배운 음악으로 파리에 정착하게 된다. 1742년 새로운 악보 표기법을 파리의 아카데미에서 발표하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년 뒤, 한 귀부인의 도움으로 베니스 주재 프랑스 대사의 비서로 채용되어 이탈리아로 가게 되는데, 루소에게 있어서 이탈리아 음악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월급이 체납되면서 11개월 만에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왔다. 이 경험을 통해 루소는 관료주의에 대해 깊은 혐오감을 가지게 된다.

 

파리로 돌아온 루소는 친구들과 부유한 부인들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였다. 그리고 이 시절부터 루소는 호텔의 세탁부인 테레즈 르바쇠르와 사실혼 관계를 시작하였다. 이후 루소는 그녀와 남은 생애를 함께 했지만, 다른 여자들과의 애정 관계를 청산하지 않았다. 루소와 테레즈 르바쇠르 사이에 5명의 아이가 태어났는데, 아이들을 모두 고아원에 버렸다. 돈이 없어 제대로 키울 수 없다는 부모 실격에 가까운 핑계였다. 나중에 잘못을 깨닫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워져 뒤늦게나마 아이들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기록이 모두 없어져서 찾지 못했다고 한다.

1749년 계몽사상가 드니 디드로와 교우하게 되면서, 1751년 디드로가 편집을 맡은 <백과전서>에 음악 관련 부문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또 1752년에는 그가 작사, 작곡한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Le Devin du village)>가 상영되었는데 이 작품으로 그는 작곡가로 유명해지게 된다. 그가 작곡한 곡 중에 우리의 귀에 익숙한 동요 ‘주먹 쥐고 손을 펴서’로 유명한 선율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그는 음악가로 성공하여 루이 15세를 알현할 기회까지 얻었으나 밤새 고민한 끝에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알현을 포기하였다.

 

음악가로서 명성을 떨치던 루소의 사상가로서의 전환은 한참 뒤에 이루어졌다. 1750년 프랑스의 디종 시 학술원에서 ‘르네상스 이후 학문과 예술의 부흥은 도덕의 개선과 고양에 기여했는가?’라는 주제로 학술 논문 대회가 열렸는데, 거기에서 루소는 <학문 예술론(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을 발표하여 입선하였다. 상금을 받는 동시에 일약 탁월한 문필가로 주목받게 된 루소는 이후 음악이 아닌 전업작가로 전직하게 된다.

 

루소가 명성을 얻자 1754년 루소의 고향인 제네바 시에서 그를 초청하였다. 루소는 기꺼이 제네바로 돌아갔는데, 당시에는 오직 칼뱅파 개신교도만이 제네바의 시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다시 칼뱅파로 개종하였다. 하지만 딱히 루소의 종교관 자체가 이때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돌아섰다고 보이지는 않으며, 오히려 둘 다 아닌 어정쩡한 모습이었다. 이때쯤에 디종 시 학술원이 ‘인간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이는 자연법으로 정당화되는 것인가?’라는 주제로 논문 대회를 또 열었는데, 이때 제출된 루소의 저작이 바로<인간 불평등 기원론 (Discours sur l’origine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이다. 이 저작에서 자연은 악한 것을 스스로 축출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꾸밈없는 덕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서술하고, 이후 사유 재산 제도와 산업의 발전을 통해 불평등이 심해졌으며 이로부터 모든 악이 출발했다고 주장했다.

파리에 있는 그의 동상

1755년, 루소는 논문을 당시 저명한 문필가이자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에게도 보냈는데, 볼테르는 “당신의 책을 읽은 독자는 네 발로 기어 다니기를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60년 이상을 살면서 그러한 습관을 잃어버린 나로서는 불행하게도 그럴 수 없을 듯 합니다.”라는 답장을 보냈다. 인간 이성을 통한 진보를 믿고 있던 주류 계몽철학자들은 인간 본연의 감성과 자연성을 강조한 루소의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루소와 주류 계몽주의자들 사이의 본격적 대립은 1755년 포르투갈 대지진부터 표면화되었다. 포르투갈에 대지진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자 볼테르 등의 당대 사상가들이 ‘전지전능하면서도 한없이 선하다고 하지만 대지진을 막지 않은 신’에 대한 회의감을 드러냈는데, 루소는 볼테르의 이러한 반응을 두고 무신주의자라고 공격하면서, 자신의 주장처럼 인간이 도시에 모여 살지 않고 자연 속에서 살았으면 지진의 피해가 없었을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이후 계몽주의자들과 대립은 제네바의 연극 금지 제도에 이르러 극대화되었다.

볼테르의 초상화

당시 금욕적인 청교도 제도를 따르고 있던 제네바는 연극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극작가이기도 한 볼테르는 제네바의 연극 금지 제도를 해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루소는 출세의 기회와 집필의 영감을 동시에 제공했던 절친, 디드로(Denis Diderot)와 절교하면서까지 볼테르에 맞서 제네바의 편에 서서 대립한다.

 

1761년 루소는 서간체 소설 <신 엘로이즈(Nouvelle Héloïse)>를 발표하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소설은 18세기 유럽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로 기존의 18세기 내내 이어져오던 고전주의 사조의 소설에서 벗어나 새로운 낭만주의 사조로 옮겨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1762년 그는 문제의 저작 둘을 내놓게 되는데 바로 <사회계약론 (Du Contrat social)>과 <에밀 Émile>이다.

<사회계약론 (Du Contrat social)>

<사회계약론>에서 그는 인민주권설을 제창하게 되는데, “국가의 성립은 인민 전체의 사회 계약으로 성립하며 사회 구성원들의 의지 중 공공선을 지향하는 부분의 합, 즉 개별 의지들 중에서 공공선을 지향하는 부분의 교집합인 일반의지가 법질서 성립의 기반이 되는 것이며, (일반의지가 사회에 드러난 모습이 곧 법이라는 것이 루소의 주장이다.) 주권은 바로 이러한 인민 전체의 일반의지의 행사이며, 따라서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정부는 이를 집행할 따름이며, 그리하여 정부는 일반의지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급진적인 혁명사상으로 연결이 되어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에밀>에서 그는 사회적으로부터 고립된 인간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자연성을 잃지 않은 인간, 곧 자유로운 자연인을 길러내고자 하는 교육론을 펼쳤다. 그래서 그는 기존의 교사 중심의 전통적 교육관에 도전하고 어린이의 흥미와 개성, 경험을 중시하는 아동 중심적 자연주의 교육사상을 주장했다. 여기에서 일반인들에게 너무도 유명한 “인간이여,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자연주의가 등장한다고 하는데, 실제 루소는 <에밀>을 비롯한 그의 어떤 저서에서도 그런 말을 남긴 적이 없다.

실제로, 사회적 부조리의 극복을 위한 내적 기반으로서 자기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루소는 자연 상태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교육을 요구한다. 다시 말하자면, 루소는 자기 보존이라는 목적과 타인과의 호혜적 관계를 동시에 만족시키기 위해, 새롭게 조성된 ‘도덕성’을 통해 자기 편애가 아니라 자기 사랑이 기능하는 사회적 조건을 수립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두 저서는 루소의 명성을 더욱 드높여 주었지만, 이후 루소의 삶이 나락으로 빠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에밀>에는 루소 고유의 자연 종교 원리가 담겨있어서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 모두의 비위를 상하게 했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의 금서목록에 포함되었다.

 

<사회계약론>은 더 심각하여, 왕권신수설을 아예 부정하는 내용을 담았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는 체포 영장을 발부하였다. 제네바 종교회의 역시 두 저서에 대해 판매금지를 내리는 동시에 체포 명령을 내렸다.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루소는 프로이센 왕국으로 도피하였는데, 프리드리히 대왕은 루소를 보호하여 모티에에 살도록 허락하였다.

프로이센에서 3년간 망명생활을 하던 와중, 루소는 현지 목사의 불화 때문에 지역 주민들이 그를 해하려고 하자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영국에서는 예전부터 안면이 있던 데이비드 흄이 돌봐주었으며 생활도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순조로웠던 영국 생활은 루소가 피해망상 증상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불행은 모두 음모자들에 의해 발생한 것이고 흄이 그 음모의 대행자이다.’라고 의심하면서 깨지고 말았다. 대인배인 흄은 루소의 망상이 도질 때마다 감싸주었지만 더 이상 망상을 견딜 수 없던 루소는 결국 1767년 영국을 떠나고 말았다.

 

영국을 떠난 루소는 프랑스로 돌아가서 남은 생애를 곤궁하게 살았다. 예전에 그에게 내려졌던 체포 명령은 여전히 유효했지만 그리 심각하지 않아 그럭저럭 피해 가며 주변의 도움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이 시절에 그가 쓴 자서전인 <고백록(Les Confessions)>(1770년작, 출판은 1782년)은 위대한 역작이기도 하지만 평생을 불행하게 지내야만 했던 자신에 대한 변호를 늘어놓았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1778년 에름농빌에서 아침 식사 중 쓰러진 뒤 점심 무렵 숨을 거뒀다. 이때 그의 나이 66세였다. 그는 사망한 이후 11년 뒤 일어난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고 1794년 그의 유해는 팡테옹으로 옮겨져서 볼테르와 나란히 묻혔다.

파리 시내 판테온에 있는 루소의 무덤

당신이 중고등학교 다닐 때, 배웠던 그 훌륭한 사상가 루소가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은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는지 속속들이 들여다본 소감이 어떠한가?


태어났을 때부터 어머니를 잡아먹은 원흉으로 아버지에게 원망받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고 여겨 16살에 집을 나와 불과 남작 부인의 정부로 젊은 청춘을 연명했던 것을 보면, 그가 유럽의 제대로 된 교육자 집안 출신쯤이었을 거라는 당신의 막연한 상상은 박살이 났을 것이다.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루소의 동상

사실, 루소는 정신분석학적 연구대상으로도 상당한 가치를 갖는 인물이다. 어머니가 없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부터 시작해서, 스스로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고 여기고, 가출하여 어머니를 연상하는 남작부인에게 엄마라고 부르며 육체적 연인관계가 되고, 그녀에게 다시 버림받고, 정작 사실혼 관계이던 부인과 20년 만에 결혼하지만 그 사이에도 여러 여자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자신도 버림받았다고 여기면서 정작 자기 자식을 다섯 명이나 고아원으로 보내버리는 등 위인전에 실리기에는 상당히 심각한 도덕적 결함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 시리즈를 통해 당신에게 소개하는 것은, 그런 그가 어떻게 동양의 이름 모를 나라에 사는, 공부라고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당신까지도 이름과 사상을 알만한 유명인사로 업적을 인정받게 되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보라고 부러 끄집어낸 것이다.

 

혹자는, 그의 사상이 프랑스 급진 혁명사상의 기반이 되기에 좋았기 때문에 그 덕을 본 것뿐이라며 폄하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는 이미 나라에서 나서 초청할 정도로 생전에 유명 작가였고 사상가였다.

 

당신이 거의 고아에 16살에 제대로 된 정규 교육이라고는 받지도 못하고 책 몇 권 읽은 것이 고작이었다면 당신은 당신만의 노력으로 계몽사상가니, 철학가니, 심지어 유명 작곡가로까지 이름을 날릴 수 있겠는가?


그 모든 것은 그 고난과 불행이라고 여겨졌던 현실 속에서 그가 오롯이 그의 힘만으로 일궈낸 것이다. 물론 주변 친구의 도움이 크기는 했지만, 그가 사상사이자 문필가로 인정받게 되는 현상 논문 공모전에서 이름을 날리게 되는 것은 대필도 합작도 아닌 그가 그 불우한 상황에서 직접 일궈낸 것이다.

 

당신이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가방끈이 짧다고 핑계 대지 마라. 부모가 금수저가 아니어서 제대로 지원을 못 받았다고 하지 마라. 당신이 운이 안 좋아서 지금 실패하고 그 모양 그 꼴이라고 핑계 대지 말란 말이다. 당신이 생각했을 때,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겠다고 여길 정도의 불우한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낸 그도, 수많은 단련의 시간을 거쳐 그 고난과 불행을 극복하고 전 세계인이 기억하는 계몽사상가로 우뚝 섰단 말이다.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 제대로 생각해보지 못하고 있는 자에게 꿈이란, 미래란, 성공이란, 그저 글자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 물방울 같은 허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소개받은 대사관 비서직을 하고서도 관공서에서 11개월이나 제대로 월급을 못 받아 생활이 되지 않았던 그는 다시 원점에서 시작했다.

 

악덕 사장에게 제대로 된 월급을 못 받았다고 당신의 인생을 끝낼 것인가?

벤처 한번 해보겠다고 부모님한테 없는 돈 끌어다가 다 말아먹었다고 당신의 인생을 끝낼 것인가?

그동안 안 먹고 안 입고 모았던 돈을 모두 뻥튀기하겠다고 주식과 코인에 넣었는데 뻥하고 날아갔다고 그 자리에서 접시에 물을 받아 코 박고 당신의 인생을 끝낼 것인가 말이다.

그렇게 쉽게 끝낼 인생이라면 얼른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추천한다.


하지만, 그렇게 끝내지 않을 것이라는 답이 나왔다면 얼른 일어서라.


돌아본다고, 운다고, 이를 간다고, 돈 떼어먹고 날라버린 그놈을 잡아 죽인다고, 당신의 돈은 돌아오지 않는다.


당신은 잃어버린 돈과 시간과 그 노력보다 훨씬 더 많은 본전과 이자를 현실에게서 받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렇게 파란색 츄리닝입고 청승 떨며 편의점 앞에서 소주나 까고 있는다고 어디서 네모 세모 동그라미 명함 주며 딱지치기하자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 주지 않는단 말이다.

당신의 인생을 일으켜 세워줄 일을 찾아 움직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시절이 좋아져, 최소한 평균 100살은 산단다.

당신에게는 이제까지 산 날보다 앞으로 살날이 더 많이 남았지 않은가?

기왕 한 번 사는 거 찌질하게 사는 것보다는 폼나게 사는 게 좋지 않겠는가?


당신이라면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일어서자, 보란 듯이!
매거진의 이전글 아내를 공부시킨다고  미국에서 가정부일을 했을지라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