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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02. 2021

정규교육 딸랑 2년, 친형에게 고향에서 쫓겨난 수모에도

미국을 세운 건국의 아버지 4인방으로, 100달러 지폐에 얼굴을 새기다.

1706년, 아메리카 식민지의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수지를 이용해 비누와 양초 만드는 일을 했으며, 자녀를 다섯이나 둔 상황에서 상처하고 재혼해서 자녀를 여덟이나 더 낳았다. 벤저민은 이 대가족 중 13남매 가운데 10번째였고, 아들로서는 막내였다. 당시 이렇게 형제자매가 많은 집에 태어난 막내의 경우, 가업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자기가 먹고살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만 했다.


그가 받은 정규 교육이라고는 8세 때부터 2년간 학교에 잠깐 다니며 읽고 쓰는 법과 기본적인 산수를 배운 것이 고작이었다. 이후 그가 터득한 지식들은 모두 책이나 경험을 통해 스스로가 독학으로 얻어낸 것들이었다. 그렇게 일찌감치 학교를 때려치우고, 10세 때부터 아버지의 도제로 일했고, 12세 때에는 16살 많던 친형 제임스의 도제로 들어갔다.

당시 제임스는 인쇄소를 운영하며 <뉴잉글랜드 커런트>라는 신문을 발행했는데, 그는 이 신문에 필명으로 여러 차례 투고해서 인기를 끌었다. <커런트>가 반정부적인 기사로 인해 탄압을 받고 설상가상으로 형과의 다툼이 심해져 형이 주변 인쇄업자들에게 그를 비난하고 다녀 보스턴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게 되자, 1723년에 필라델피아로 거처를 옮겨 소위 개고생을 한 끝에 겨우 한 인쇄소에서 일자리를 얻는다.

 

이듬해에 프랭클린은 새로운 인쇄소를 창업하자는 어느 후원자의 제안으로 기자재를 구입하러 영국 런던으로 떠난다. 그러나 후원자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깨트려 외톨이가 되었지만 엎어진 김에 쉬어자가며 그곳의 인쇄소에서 일하며 외국의 문물을 익힌다. 2년 만에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그는 바로 인쇄소를 직접 차리고, 성실한 태도와 그간의 경험을 살려 대성공을 거둔다.

인쇄업으로 부와 명성을 얻게 된 그는, 절친한 친구들을 모아 ‘준토’라는 사교 모임을 결성했으며, 여기서 오간 진지한 논의를 확장시켜 지역사회를 위한 도서관과 소방대와 대학교 등을 설립했다. 1729년에는 <펜실베이니아 가제트>라는 신문사를 인수해서 발행인이 되었으며, 1743년에는 미국 철학회를 결성해서 당대의 지식인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나아가 그는 민병대의 창설을 제안했는데, 이는 그때까지 개별 식민지로 분열되어 있었던 아메리카를 하나의 통일국가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하기 시작한다.

미국의 정치가·외교관·과학자·저술가이자, 신문사의 경영자, 교육문화활동, 자연과학분야에서 전기 유기체설을 제창하는 등의 활동과, 정치·외교적인 분야에서도 활약하였던 일명 건국의 아버지들(The Founding Fathers) 중 한 명인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이야기이다.

 

인쇄공으로 시작해 외교관, 과학자, 발명가, 언론인, 사회 활동가, 정치 철학자, 사업가, 독립운동가, 스파이 등 온갖 직업들을 다 겸해, 미국에서 말하는 이른바 ‘보잘것없는 집안에 태어나 자수성가한 미국인(Rise From Humble Beginnings)’의 모델로 꼽히는 인물이다.

 

대통령까지는 하지 못했지만, 미국에서 지금도 대통령급 이상으로 인지도 있는 인물이며 미국 달러화 중 100달러에 도안으로 채택된 인물이기도 하다. 10달러의 알렉산더 해밀턴(미국 초대 재무장관)과 함께 달러화 도안 인물 중 단 둘 뿐인 대통령이 아닌 위인. 그래서인지 요즘 미국 젊은이들 중에서는 벤저민 프랭클린이 대통령 출신이라고 오해하는 이들도 많다.

1737년 필라델피아 우체국장으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전기에 관심을 가지고 미국 사회에 전기를 알리는 장본인이 되었다. 42세 때인 1748년에는 이미 성숙기에 들어선 출판사업을 아예 전문경영인을 고용해 맡기고 은퇴하여 자신은 다른 사업이나 과학 연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초점 렌즈, 소방차 등을 발명했으며, 당시 대부분의 가정에서 목재를 연료로 벽난로를 사용했던 것 때문에 운송비용과 목재 비용이 늘어나는 것을 염려해서 기존의 벽난로보다 열효율이 좋고 안전한 펜실베이니아 화로를 발명했다. 그 이후 펜실베이니아 화로의 문제점을 개선한 개방형 난로를 발명했는데, 개방형 난로는 지금도 ‘프랭클린 난로’라는 이름으로 땔감이 아닌 가스 등을 사용해 쓰이고 있다.

프랭클린 난로

전기에 대한 프랭클린의 관심은, 174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되었다. ‘양전하’와 ‘음전하’를 비롯해서 ‘전지(배터리),’ ‘충전,’ ‘(전기적) 중성,’ ‘도체’ 등의 전기 관련 용어도 대부분 프랭클린이 처음 이름 붙인 것들이다. 그는 번개가 전기의 일종이라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커다란 연에 금속 막대를 달고 하늘에 띄워서 구름에서 전하를 이끌어내는 실험을 고안했다.


이 실험이 실제 벌어졌는지 여부를 놓고 논란도 있었지만, 기록상 1752년 6월에 프랭클린이 실제로 연을 날린 것이 명백히 증명되었다. 그 위험한 실험한 끝에 이름도 유명한 피뢰침을 발명해냈다. 연줄 끝에 금속제 열쇠를 묶고 그 열쇠를 관찰하여 번개가 전기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심지어, 방귀 냄새가 지독하다고 방귀 냄새를 맡기 좋게 만드는 실험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화재 사고에 대해 관심도 많아서 필라델피아 소방회사라는 미국 최초의 소방서를 만들었으며, 피뢰침도 낙뢰로 인한 화재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도 사용되는 요도용 카테터 발명자이기도 하며, 물리학, 기상학, 해양학, 경제학 등에도 상당 부분 발자취를 남겼으며 음악에도 능해 하프, 바이올린, 기타를 다룰 줄 알았으며 글라스 하모니카를 발명했는데, 직접 작곡한 현악 4중주 곡도 남아 있다. 체스도 무척 좋아했다. 1775년에는 미국 우체국의 초대 우정공사 총재를 지냈으며, 그가 만든 우체국 시스템은 아직도 미국에서 사용 중이다.

여담이긴 하지만, 대개 발명가들은 특허를 통해 돈을 번다. 하지만, 그는 펜실베이니아 화로나 피뢰침 같은 일반인들의 일상생활에서 유용하게 쓰일 만한 물건에 대한 특허권을 포기했다. 이후에 영국인들은 그를 ‘왕의 반역자’라 칭하면서 그가 발명한, 끝이 뾰족한 표준 피뢰침 대신 끝이 둥근 피뢰침을 사용했지만 그의 과학적 업적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인정하여 영국에서도 결국 왕립학회 회원으로 받아주고 메달까지 수여하게 된다.

 

마치 프랭클린이 아메리카 식민지의 대변자이며 혁명의 주도자로 나선 것처럼 알고 있는 이들이 많은데, 사실 처음부터 그가 그런 입장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질서와 실용을 선호했던 그의 성향은 오히려 온정적 보수주의자에 해당했다. 원래 프랭클린은 아메리카가 계속해서 영국의 식민지로 남기를 바랐다.


그의 적은, 영국 정부가 아니라, 오히려 영국 정부의 비호 하에 식민지를 좌지우지하는 일부 독점 세력뿐이었다. 그러나 독점 세력의 횡포를 다스려 달라는 호소에 영국 정부가 미온적으로 반응하자, 이에 환멸을 느끼고 결국 독립 쪽으로 노선을 바꾸어 불가피하게 나서게 된 것이다.

한동안 펜실베이니아 의회의 서기로 일했던 프랭클린은 1751년에 처음 의원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 무대에 나섰다. 1753년에는 프렌치 인디언 전쟁을 앞두고 인디언 지도자들과의 동맹 회담에 참석했고, 영국 정부에 의해 식민지 전체를 관장하는 체신장관 대리로 임명된다. 이듬해 5월에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식민지군이 프랑스군에 패배하자, 프랭클린은 식민지의 분열이 패배의 원인이라며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유명한 구호를 신문에 게재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식민지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인 올버니 회의에서 프랭클린은 연방 대의원회의 구성과 연방 대통령의 지명을 핵심 내용으로 삼는 선구적인 안건을 제시했지만, 각 식민지 의회와 영국 의회 모두의 거절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757년에 프랭클린은 식민지 대표 자격으로 독점 세력의 횡포를 고발하러 영국으로 떠난다. 평소 식민지인으로 자부심을 가졌던 프랭클린은 정작 영국 정부가 식민지인을 일종의 2등 국민으로 간주한다는 현실에 충격을 받았고, 영국 정치가들을 연이어 만나며 환멸을 느껴 마음을 바꾸게 된다.

스스로를 양으로 만들게 되면 늑대들이 당신을 먹어치우게 될 것이다.

영국에 머무는 동안 프랭클린은 과학자로 얻은 명성 덕분에 곳곳에서 환대를 받았다.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흄을 비롯한 당대의 지식인을 만나고,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762년에 귀국한 프랭클린은 2년 뒤 다시 한번 독점 세력 문제로 영국 출장을 떠난다. 이때 그는 영국이 식민지에 과세를 하면 영국 의회에 식민지 대표도 있어야 한다는 선구적인 의견을 피력했으며, 왕당파이며 뉴저지 총독으로 재직 중인 아들 윌리엄을 위해서라며 <자서전>을 집필을 시작한다.

1770년, 보스턴 학살 사건, 1773년, 보스턴 차 사건, 1775년, 영국군과 식민지군 사이의 최초 무력 충돌이 발생하며, 독립을 향한 식민지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1775년에 귀국한 프랭클린은 최고령 대의원(당시 70세)으로 제2차 대륙회의에 참석했으며, 이듬해에는 토머스 제퍼슨과 함께 독립선언서 작성 5인 위원 가운데 한 명으로 선임되었다. 독립선언서는 거의 제퍼슨의 초안대로 채택되었지만, 그 가운데 ‘자명한 진리’라는 유명한 문구는 프랭클린의 첨언이었다.

 

1776년에 프랭클린은 비밀 외교 임무를 띠고 프랑스로 떠나며 친손자와 외손자를 나란히 대동했다. 하지만 그는 70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1778년에 프랑스와 아메리카 식민지의 동맹 조약을 성사시키고 이듬해에 전권대사가 되었으며, 미국 독립전쟁이 식민지의 승리로 끝나자 1782년에 영국 대표단과 평화 협상까지 담당했다. 당시 그는 일거수일투족이 파리 사교계에서 큰 화제가 될 정도로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독서에 열중한 프랭클린을 묘사한 데이비드 마틴의 1767년 작 초상화.

1785년 여름에 프랭클린은 신임 공사 토머스 제퍼슨에게 임무를 인계하고 10년간 살던 프랑스를 떠나 이제 독립국이 된 미국으로 향했다. 축포와 환호성 속에 귀국한 프랭클린은 이제 워싱턴 다음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로 존경받았다. 1787년의 제헌 회의에서는 최고령자(당시 81세)에 대한 예우로 특수 제작한 가마를 타고 회의장에 들어섰다.


이로써 프랭클린은 독립선언서(1776), 프랑스와의 동맹 조약(1778), 영국과의 평화 조약(1782), 미국 헌법(1787)에 모두 서명한 유일무이한 인물이 되었다.

백악관에 걸린 그의 초상화, 바로 위의 그림.

미국이 독립을 이룬 1785년에서 1788년에는 펜실베이니아 주지사를 재임했는데, 집필 18년 만인 1788년에 비로소 <자서전>을 완성한다. 중년부터 비만과 통풍으로 고생하던 프랭클린은 2년 뒤인 1790년에 흉막염으로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살던 필라델피아의 집

공인으로서, 특히 거의 평생을 살아온 도시, 필라델피아에 워낙 기여가 컸기 때문에 그의 장례식에는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몰렸다고 한다. 당시 필라델피아 시 전체 인구가 3만이 안 되었던 걸 생각해 보면 불가피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빼고는 모두 왔을 정도의 장례식이었다.

 

자녀로는 딸 하나와 혼외관계로 얻은 외아들 윌리엄이 있었는데, 열혈 왕당파로 뉴저지 총독을 지낸 윌리엄은 줄곧 부친과 대립하다가 식민지가 독립하자 영국으로 망명했다. 마침 윌리엄에게도 혼외관계로 얻은 ‘템플’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할아버지의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받았던 이 손자가 <자서전>의 정리와 출간 작업을 담당한 덕분에 이 유명한 책이 오늘날 전해지게 된 것이다.

 

프랑스의 정치가 튀르고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가장 큰 업적을 위 문구로 정리했다.

 

사실 프랭클린은 젊은 시절에만 하더라도 자주 남을 비판하고 빈정거린다는 이유로 지적을 당하던 성격이었다. 20세 때에 첫 번째 영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앞으로의 자신의 삶을 위한 4가지 실천 계획을 세워 철저하게 준수했으며, 이후 인쇄업자로 성공한 다음에는 다시 한번 자신이 평생 지켜야 할 13가지 덕목을 선정해서 역시 철저하게 준수했다.

절제, 침묵, 질서, 결단, 검약, 근면, 성실, 정의, 온건, 청결, 침착, 순결, 겸손이라는 각각의 덕목에는 “배부르도록 먹지 말라” “쓸데없는 말은 피하라,” “결심한 것은 꼭 이행하라,” “말과 행동이 일치하게 하라” 등의 구체적인 실천사항이 있었고, 이행 여부를 확인하는 체크 리스트까지 꼼꼼히 만들어 체크하며 이행했다고 한다.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혼자서 공부해나갔던 그의 환경과 그 길을 따른 인생을 보건대, 그는 자신의 인격과 인생의 상당 부분을 오롯이 자신만의 노력으로 바꾸고 업그레이드시킨 인물인 것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누구나 교육받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손치더라도 그가 2년밖에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혼자서 모든 것을 독학으로 익혔고, 심지어 그렇게 익힌 인쇄기술로 친형에게 내쳐지고, 스무 살에 영국까지 가서 투자자의 배신으로 홀로 남겨졌음에도 그는 2년간 그곳에서 선진기술을 또 배우고 자신을 단련했다.

프랭클린의 시대에 아메리카 식민지는 사실상 문명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원자재를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을 영국에 의존하고 수입하던 때에 프랭클린은 진취적인 정신과 실용적인 태도로 여러 방면에서 개척자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 의미에서 프랭클린은 역대의 미국인 중에서도 가장 미국적인 인물이라고 할 것이다. 그만큼 개척자로서의 인생을 산 인물이 누가 있었겠는가?


미국이 그런 그의 개척정신으로 개척되어 설립된 나라였고, 제대로 배운 이가 아니었기에 대통령의 위치나 중앙 정부의 요직까지 오르지는 못했지만, 실력만으로 그는 미국을 넘어 영국과 프랑스에도 그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것이 그가 오늘날 역대 대통령들과 나란히 가장 영향력이 있는 미국을 대표한다는 ‘100달러 지폐’에 그의 얼굴을 새길 수 있었던 것이다.

종종 뭣도 모르는 과학사학자들이 프랭클린이 체계적인 공부를 하지 못한 까닭에 그의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깊이가 없다는 지적을 받는 것을 보곤 했다. 하지만, 그가 기성 학문의 울타리에 갇혀 버렸다면 언제나 자유롭고 참신한 시각을 유지하며 그 수많은 발명과 시스템의 창출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호언장담할 수 있다.


그를 상징하는 개척과 실용적 가치는 그의 인생에서 만들어진 것이기에 더욱 공고했다.


나는 배우며 가르치며 경성제대에 많은 학생들을 봐왔다.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과 우리가 공부했던 시기와 비교하며 이른바, ‘관악의 하향 평준화’를 입맛 씁쓸하게 논하며 혀를 찼던 기억이 난다. 이 나라 구석구석에서 그나마 머리가 좋고 공부도 꽤 한다고 하던 아이들은 책을 거의 읽지 않고 그나마 잃은 책도 제대로 소화시켜 자신의 것을 만들지 못하는 현실을 보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여 년 전쯤인가, 과학고니 외고니 민사고니 하는 애들 중에서 더 똑똑한 애들은 하버드를 필두로 한 아이비리그에 진출한다고 하여 해외 대학을 나가 가르치게 되면서 한국 학생들과 현지 학생들을 비교해보곤 한다.

부족하다. 현저히 부족하다.

물론 젊은이들이 부족한 것이 한국 학생들에 한한 것은 아니다.

당신의 삶은 다른가?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배고픈 것을 해결해야만 하던 시대가 아니었음에도 당신은 공부에 취미가 없었고, 공부를 그닥 필요하다고 느끼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지금도 공부는 경성제대 들어가서 출세 번호표를 받는데 더 유리한다고만 인식하지 않는가?


아니다. 물론 프랭클린 당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이들이 없는 시대라고는 했지만, 식민지 시대의 당시 미국 대통령을 한 이들의 면면을 보면, 여전히 그들은 정규 교육의 정점에서 교육받은 이들이었다. 지금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랭클린은 자신의 천재적인 두뇌가 아닌, ‘노력’으로 승부했다. 특히 학문적인 부분은 물론이고, 인격적으로 모난 부분들을 메모와 철저한 계획과 끊임없는 수양으로 고쳐나갔고 업그레이드시켜나갔다.


어떻게 아냐구? 관상학과 심리학을 전문가 이상으로 공부하게 되면, 중세 시기의 인물들 나이별 초상화만 분석해도 그의 성격이나 그의 관심사 등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프랭클린의 초상화가 나이가 들수록 느긋하고 여유 있으며 모든 문제를 받아낼 수 있는 모습이 갖춰지는 것이 당신의 눈에도 보일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 포스가 실제 구현되는 것을 확인한 미국적인 인물들이, 긴 가방끈을 갖춘 그들이 외교 선방에 그를 보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매달렸던 것이다.


다른 사람의 성격을 인생을 바꾸라고 당신에게 시키면 할 수 있겠는가? 그럼 당장 당신은 볼멘소리로 투정할 것이다. ‘저 사람이 내 마음과 같아서 내 말을 듣겠느냐고.’


말 잘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 바꿀 생각하지 말고, 당신만 바꿀 수 있으면 된다. 당신은 누구보다 당신을 가장 잘 알고 있으며, 당신의 장점과 단점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세상 유일무이한 사람이다. 당신의 얼굴을 5만 원짜리 신권에서 신사임당 언니를 밀어내고 올릴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 거라고 누가 함부로 장담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당신을 바꿀 수 없다면, 당신은 이 세상 그 어느 하나도 바꿀 수 없다.

프랭클린의 번개 실험을 따라 한다고 많은 어리석은 따라쟁이들이 요단강을 건넜다.


그의 삶을 그저 따라 하라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만의 방법이 있고,

당신만의 길이 있을 것이다.


당신의 길을, 당신만의 방법으로 꿋꿋이 걸어 나가란 말이다.


그리하면 당신이 원하지 않아도 도달하는 곳은 결국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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