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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03. 2021

성냥 100갑 팔아 용돈 모아 16살에 회사를 차려서

전 세계의 가구시장을 장악한 초대형 그룹으로 우뚝 서다.

1926년 스웨덴 아군나리드(Agunnaryd)의 엘름타리드(Elmtaryd)라는 농장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독일 이민자 출신으로 가난한 농부였다. 그는 5살 때 고모의 도움을 받아 스톡홀름의 한 가게에서 구입한 성냥 100갑을 자신의 고향에 가지고 돌아와 팔아 마진을 남길 정도로 어릴 때부터 사업가의 기질이 보였다. 12살 때는 우유 배달 트럭을 얻어 타고 다니면서 펜과 지갑 등의 값싼 물건들을 팔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이 번 돈으로 자전거와 타자기를 사기도 했다. 14살 때는 자신의 투자(?)로 산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직접 잡은 생선, 시계, 크리스마스 카드, 펜 등을 팔았다. 이런 식으로 용돈벌이로 시작하여 돈을 모은 후, 본격적으로 장사를 하겠다고 나선 것은 그의 나이 불과 17세 때였다.

스웨덴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가구 브랜드로 성장한 이케아(IKEA)의 창업주인 잉바르 페오도르 캄프라드(스웨덴어; Feodor Ingvar Kamprad)의 이야기이다.


한때는 세계 부자 순위 5위까지 오른 적이 있으며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재단 관련 재산이 워낙 많아 개인재산으로 잡히지 않아서 그렇지, 실제로는 당시 세계 최고 부자였던 빌 게이츠와 그의 동료이자 투자계의 거물인 워렌 버핏보다도 부자였을 것이라는 말까지 나왔었다. 

감이 안 온다면, 삼성전자 이건희의 재산이 정점을 찍었을 때를 기준으로 그의 개인 재산(재단 재산은 빼고)이 정점이었을 때를 보면 3배가 조금 더 될 정도였으니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유명했던 것은 그가 엄청난 억만장자라는 사실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검소한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다닐 때 이코노미석만을 타는 것을 고집하고 출퇴근할 때도 10여 년이 넘은 볼보 자동차를 몰고 다녔으며, 식당에 가면 1회용 소금과 후추를 꼭 챙겨 나올 정도였고,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는 항상 문을 닫기 전에 들어가 마감 세일 상품을 이용했다. 한 번은 호텔 객실 미니바의 콜라를 마셨는데 그것이 아까워 편의점에서 콜라를 사다가 채워 넣었다는 전설적인 일화도 있다.

 

그의 철학이 그대로 반영되어 이케아는 현재까지도 상장을 하지 않은 기업이며, 앞으로도 상장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잉바르 캄프라드가 이케아를 금융기관에 의존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의향을 워낙 확고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잉바르 캄프라드는 1943년 실업학교를 졸업하고, 16살의 나이에 카탈로그 상품 판매회사 이케아를 창업했다. 그때의 취급품목은 지갑, 스타킹, 엽서, 연필 등 주로 생활용품과 사무용품이었다. IKEA라는 이름은, 자신의 이름인 잉바르(Ingvar)의 I, 성 캄프라드(Kamprad)의 K, 그가 자란 스웨덴 남부 농장 엘름타뤼드(Elmtaryd)의 E, 농장이 있는 지역 아군나뤼드(Agunnaryd)의 A를 각각 따서 IKEA로 지었다.

 

캄프라드는 이케아를 시작하면서 예테보리의 상업학교에 진학했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을 시작한 것이다. 학업도 비즈니스도 그는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점차 회사에서 취급하는 품목도 늘어나 시계, 넥타이, 양말 등도 취급하기 시작했다. 상업학교를 졸업한 캄프라드는 삼림협회에 별도로 취직을 한다. 


그곳에서도 잉바르의 ‘개인적인 상업 활동’은 계속되었다. 잉바르는 고급 시계를 사다가 협회의 간부들에게 팔았고 일일이 생산 공장을 다니면서 가장 싼 가격의 사무용품을 구입해 협회에 공급했다. 그의 ‘투잡’은 단순한 투잡이 아닌, 소속된 회사의 사람들을 판매 대상으로 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둔 대성공이었다. 월급보다 장사로 벌어들이는 돈이 당연히(?) 훨씬 많았다.

 

1947년, 캄프라드는 21세에 군에 입대했다. 그는 심지어 군에서도 상관의 허락을 받아 통신판매업을 계속했다. 부대 인근에 지하실을 얻어 밤에는 그곳에서 카탈로그를 제작했고, 우편발송 작업 또한 계속했다. 2년 후 군에서 제대한 그는 온 가족을 동원해 사업의 발전세를 지속했다. 취급 상품은 늘어 잉바르 캄프리드는 거의 매일 밤을 새우며 장사에 매달렸다. 난독증이 있는 캄프라드는 회계나 주문 작업에 어려움이 있어 그 업무들은 모두 그의 부모님이 도맡아 했다.

 

가족만으로는 소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업이 커지기 시작하자 캄프라드는 직원을 채용하기로 결정한다. 1952년, 이케아의 첫 직원 스벤예테 한손이 입사했다. 캄프라드는 스벤예테와 ‘이렇게 많은 품목을 취급하는 것이 사업성이 있는가? 새로운 사업 아이템은 없을까?’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한 후 잡화점식 사업의 형태를 정리하고, 한 가지 품목을 취급하는 전문점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바로 가구였다. 캄프라드는 정부 정책에 주목했다. 당시 스웨덴 정부는 서민들에게 집을 마련해주기 위해 주택 100만 가구를 짓기로 했다. 캄프라드는 주택의 확산은 필연적으로 가구 수요를 촉발시킬 것이라고 판단했다. 가구는 카탈로그 주문이 대부분이었고, 실제로 소비자가 가구를 볼 수 있는 것은 전시장에 있는 소량의 고급 가구뿐이었다. 캄프라드는 소비자가 주택 다음으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구를 직접 보고 선택하고 싶은 욕망이 소비로 이어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1953년 캄프라드는 고객의 방문이 용이한 엘름홀트의 기차역 인근에 전시장을 열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문을 연 캄프라드는 약 1000명의 고객이 방문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판단이 맞았음을 직감했다. 캄프라드의 고객 위주, 고객을 생각하는 판매 전략이 주효했음을 보여주는 증표인 것이다.

 

캄프라드는 전시장을 소비자의 욕구를 채우고,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는 고객들이 가구를 만져보고, 살펴보게 했다. 직원들은 고객과 많은 대화를 통해 고객들이 원하는 가구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낼 수 있었다. 당시 스웨덴에서 가구는 고가의 제품이었다. 비싼 가격표는 고객을 주저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캄프라드는 가격을 낮출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캄프라드는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우수한 품질의 제품을 저렴하게 팔 수 있을까?”


캄프라드는 가구의 생산과 배달까지의 전 과정을 다시 복기하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제품을 디자인하고, 좋은 나무로 완제품을 만들어 매장에 전시하고, 이를 고객이 선택하면 파손되지 않게 포장해, 고객의 집까지 배달하는 전 공정에서 줄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쉽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캄프라드는 우연히 이 해결책을 찾게 되는 운명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이케아에 ‘길리스 룬드그렌’이라는 디자이너가 있었는데, 하루는 한 직원이 공장에서 가져온 큰 가구의 사진을 찍고 다시 통째로 큰 박스에 담았다. 하지만 넓은 상판에 붙어 있는 가구의 다리 4개는 의외로 포장하기도 어렵고 차에 실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룬드그렌은 “다리를 일단 떼어내고 상판에 붙여 포장한 다음 다시 조립하면 되잖아”라고 말하며 제품을 분리했다. 그러자 포장도 줄어들어 차에 쉽게 옮길 수 있는 부피가 되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캄프라드는 순간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제품을 분리해 포장하는 것이다.” 한 디자이너의 순간 응용력이 세계 최대의 가구회사 이케아 탄생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캄프라드는 ‘플랫 팩(flat pack)’ 즉 ‘부품을 상자에 담아 운반하고 이를 소비자가 직접 조립하게 하는 가구’의 콘셉트를 세웠다. 그렇게 연구와 분석을 거듭한 끝에 조립형 포장 가구의 장점을 어떻게 살릴지에 대한 전략이 섰다. 

첫째, 가구의 파손을 줄일 수 있었다. 그동안 완제품을 배송하는 과정에서 조그만 흠이 생기는 등 파손이 많아 파손율도 높았고, 배달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둘째, 전시공간의 효율적 이용이었다. 완제품 가구 하나만 전시하고 나머지는 포장한 채 보관해 물류비용을 줄이면서 더 많은 제품을 전시할 수 있었다. 셋째, 무엇보다 포장, 물류, 배달 비용을 줄이면서 가격 경쟁력에서 타사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고객들이 직접 조립하는 번거로움을 감당할 수 있을까?’였다. 하지만 캄프라드는 이 부분에 대한 분석을 이미 마친 터라 자신이 있었다. 그는 “고객들이 직접 조립하는 불편함은 높은 품질, 저렴한 가격으로 보상할 수 있다.”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의 판단은 이번에도 적중했다. 렌치와 드라이버, 볼트와 너트만으로 조립이 가능한 이케아의 가구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고객들은 저렴한 가격, 우수한 품질에다가 직접 가구를 완성하는 노력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캄프라드는 다시 한번 “고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게으르지 않다.”라고 주장하며 다양한 디자인의 조립가구 생산을 지시했다. 캄프라드는 시장의 변화를 선도하는 결단력, 시장의 흐름을 읽어내는 예리한 눈을 가진 리더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리더였다.

캄프라드는 1958년 대형 가구매장을 세웠다. 매장은 고객들로 넘쳐났다. 그들은 조립식 가구를 집으로 가져가 조립해 쓰는 것을 오히려 즐겁게 받아들였다. 그의 사업은 하루가 다르게 번창했다. 하지만 이케아의 성장은 스웨덴의 기존 가구 업계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스웨덴 가구 조합은 이케아의 판매 방식으로 위기를 느끼자 이케아를 가구 협회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가구 박람회 참가조차 금지시키며 따를 시켰다. 그들로서는 이케아의 대량 판매, 저렴한 가격 등을 ‘동업자 의식’이 없는 기업이라고 평가한 것이었다. 이는 이케아 불매 운동으로까지 펴져나갔고, 이케아 제품에 대한 표절 시비, 하청 생산 중지, 원목 공급 중지 등 조직적 반발로 이어져 나갔다.

캄프라드가 처음으로 겪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는 결국 이케아의 생산 공장을 스웨덴에서 철수, 노동 비용이 상대적으로 싼 동유럽으로 옮기는 강수를 감행한다. 이때의 좌절감으로 캄프라드는 한때 알코올 중독에 빠져 심한 고통을 겪기도 했다. 캄프라드는 좌절은 겪었지만 결코 거기서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는 그 과정들을 전화위복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폴란드 등으로 옮긴 공장에서는 저렴한 인건비로 원가를 더 낮출 수 있었고 생산성은 오히려 크게 향상되었다. 이케아는 더욱 빠르게 성장했고 명성은 이전보다 훨씬 더 높아갔다.

 

캄프라드는 1976년 이른바 ‘가구 판매업자 헌장’을 만들었다. 이 헌장에는 캄프라드의 경영철학, 이케아의 기업 사명과 캄프라드의 리더십이 모두 담겼다. 캄프라드는 “우리 물건을 사지 못하거나 사지 않는 사람들에까지 우리 상품을 공급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불가능’이란 말은 이제 지워버려야 한다. 미래를 위해 달려가자. 더욱 싸게, 더욱 좋은 제품을 공급하는 것이 ‘이케아의 임무’이다”라고 천명한다.

 

어느 정도 부와 지위가 갖춰졌음에도 불구하고 캄프라드는 다시 더 업그레이드를 위한 장고(長考)에 들어간다. ‘기업의 성공’이 단지 싼 제품, 좋은 품질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한 끝에 약속과 신뢰가 기업 성장의 핵심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케아는 고객과 약속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는 또 하나의 원칙을 정했다. 그는 카탈로그를 보고 찾아온 고객이 느끼는 가장 큰 당혹감이, 카탈로그와 다른 가격표라고 생각했다. 캄프라드는 ‘고객을 당혹스럽게, 혹은 배반감을 주는 모든 행동은 기업의 적’이라고 모든 직원들에게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그는 카탈로그에 표시된 가격은 중간에 원가 상승 요인이 발생해 설사 손해를 보더라도 무조건 1년간은 유지한다는 원칙을 정했다. 이 원칙은 전 세계 모든 매장에 동일하게 적용했고, 1970년대 중동전 이후 세계적인 유가파동, 원목 가격 상승 등의 위기 때도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지켜나갔다. 그의 이러한 기업철학은 이케아를 성장시키는 가장 큰 동력이 되었다. 이케아는 고객들의 신뢰를 얻으며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1970년대, 스위스, 캐나다, 1980년대 세계 최대의 시장인 미국, 1990년대는 동유럽으로, 2000년대 들어오면서 이케아는 러시아, 중국, 아시아에 잇달아 매장을 설립하면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케아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캄프라드는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그에게 만족은 정체이자 도태라는 그의 인생관 때문이었다. 그는 고객이 이케아에서 얻을 수 있는 만족, 이케아가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를 고민했다. 그러면서 캄프라드는 두 가지를 이케아에 적용시켰다. 그것은 ‘절대 상품’과 ‘쇼핑 보상’이었다.

 

‘절대 상품’은 이케아만이 제공할 수 있는 저렴한 가격대 상품이다. 캄프라드는 “이케아에서만 만날 수 있는 상품들이 최소한 10여 개 이상은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고객이 보는 순간, 헉 소리가 날 정도의 가격이고, 대신 품질은 우수해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 이케아는 머그컵을 내놓았다. 시중 가격의 약 1/3 수준이었다. 소비자들은 가격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 머그컵은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이케아 대놀라

또 다른 하나였던 ‘쇼핑 보상’은 음식이었다. 무거운 제품을 쇼핑하고 계산대를 나서는 순간 고객들은 식욕을 자극하는 핫도그 냄새의 유혹에 자연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는 핫도그, 음료, 아이스크림 등을 시중보다 절반 가격에 팔고 있었다. 고객들은 힘든 쇼핑을 마친 자신에 대한 보상으로 맛있고 싼 핫도그를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을 먹으면서 고객들은 다시 한번 이케아는 ‘무엇이든 싸고 좋다’라는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캄프라드는 저렴하고 맛있는 핫도그를 만들기 위해 이번에는 음식 전문가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난상토론 끝에 캄프라드가 내린 결론은 ‘핫도그 DIY’였다. 이는 매장에서 핫도그가 든 빵을 받은 고객은 본인이 직접 양파와 피클을 넣고 각종 소스를 뿌려 자신만의 핫도그를 만들어 먹는 방식이다. 최소의 직원이, 아주 빠르게 핫도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이 방식으로 인해 핫도그는 이케아의 또 다른 시그니쳐 메뉴가 되었다. 이케아가 이 핫도그를 공식적으로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 1995년, 캄프라드의 나이 70세 때이다.

캄프라드에게 원가 절감과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는 1300여 개에 달하는 생산 공장에서 새로운 재료로 제품을 연구하고 만들어내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적지 않은 나이에 세계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제품 개발에 아이디어를 얻는 것에도 그 예민한 감각을 늦추지 않았다. 한 번은 캄프라드가 중국의 재래시장을 구경했다. 그곳에서 캄프라드는 털을 뽑힌 채 매대에 쌓여있는 닭을 보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당시 중국에서는 닭 깃털을 쓰레기로 버리고 있었다. 캄프라드는 이를 전량 수입해 새로운 상품으로 만들었다. 각종 이불, 베개 등 침구류들이 그것들이다. 닭털을 가공한 이케아의 침구류는 기존 오리나 거위털 침구류에 비해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수백만 개가 팔려나가는 빅히트를 기록했다.

물론 그의 인생이 바르고 정직하지만은 않았다. 그중에서 기업 운영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사실로 젊은 시절의 극우 파시스트 가담 전력과 탈세 의혹이 있었다. 캄프라드는 20대 시절 1940년대 유럽을 휩쓴 파시스트 정당을 지지한 극우단체 ‘새 스웨덴 운동’에 가입해 활동했다. 훗날 이 같은 전력이 밝혀지며 논란과 여론의 비판이 있자 그는 공개적으로 이를 사과했다. 캄프라드는 1994년 당시 2만 5000여 명의 이케아 전 직원에게 편지를 통해 “당시 나의 행동과 생각에 대해 지금도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것은 내 인생 최대의 실수이며 가장 어리석은 짓이었다. 나는 1950년대 파시스트와 단절했다.”라고 고백했다.

 

또 하나는 탈세와 ‘거짓 구두쇠’ 의혹이다. 캄프라드는 1973년 스웨덴의 이른바 ‘부자세’를 피해 덴마크로 주거지를 옮겼다. 그리고 3년 뒤 그가 평생을 살다시피 한 스위스 로잔으로 이주했다. 캄프라드가 스웨덴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2014년이니 거의 40년이나 세금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조국을 떠나 있었던 것이다.

 

캄프라드는 1982년 회사를 분할했다. 이케아는 네덜란드에 설립한 지주회사 인터 이케아와 전 세계 매장을 운영하는 이케아 그룹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케아 그룹이 인터 이케아에게 발생하는 판매금액 3%를 브랜드 로열티를 주는 구조다. 그리고 네덜란드와 리히텐슈타인에 있는 재단 2곳, 스타칭 잉카 재단과 잉카 홀딩스가 인터 이케아를 지배하고 이 재단은 캄프라드의 세 아들이 지배하는 구조이다. 일부에서는 이 재단의 궁극적인 목적이 자선이나 기부보다는 캄프라드와 이케아의 탈세와 절세를 위한 수단이라고 보기도 한다.

 

또한 캄프라드가 수도승을 연상시킬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강조한 것도 사실은 탈세 의혹을 피하고 이케아 직원들에게 근면·절약을 강요하려는 ‘계산된 행동’이란 비판도 있었다. 그의 지독할 정도의 구두쇠 정신이 단지 이케아 직원들의 절약을 강조하기 위해 ‘위장 행동’이라는 지적인 것이다. 그는 스웨덴과 스위스에 엄청난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으며, 프랑스의 프로방스에는 와이너리도 있고 낡은 볼보는 대외용이며 평소에는 포르셰를 타고 다닌다는 보도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루머에도 불구하고 캄프라드를 옆에서 지켜본 수많은 사람들은 “캄프라드가 평생 지켜온 가치는 이케아나 그 자신에게 엄격하게 적용됐다. 그는 겸손하고 검소하며 매우 근면한 사람이다.”라고 캄프라드의 인생을 인정했다.

 

캄프라드는 1988년 이후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고 고문 직책을 맡아 오다 2013년 이케아 이사회에서 사임했다. 두 번 결혼해 3명의 아들을 낳고 딸 1명을 입양했다. 2018년 그는 스웨덴의 스몰란드 자택에서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다.

 

이것이 써본 적이 없는 이들도 이름은 알고 있다는 IKEA의 창업주이자 죽어서도 아직까지 기업을 지배하고 있다는 전설의 20세기 위대한 가구 상인이자 유통 거인 잉바르 캄프라드의 삶이다.

 

그가 16살에 세운 회사 IKEA는 가구회사가 아닌, 1인 기업이자 그저 물건을 파는 장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가 더 배우고 더 능숙해지고 더 업그레이드하기 시작하면서 직원을 뽑았고, 그 직원과 상의했고, 그렇게 가구회사로 변모했고, 일반 가구회사들과 다르게 조립식 가구 회사라는 독특한 콘셉트로 계속해서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그 유명한 잉바르 캄프라드가 이케아의 직원들에게 누누이 강조했다는 아껴야 할 세 가지. 그것은 ‘돈, 시간,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 즉 직원들에게도 ‘존경과 신뢰’를 갖고 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조직에 구체적으로 적용했다. 이케아에는 다른 회사에는 없는 독특한 면허증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실수 면허증’이다. 캄프라드는 “우리 회사에서도 직원들이 실수를 할까 두려워한다. 

그런데 실수를 두려워하는 것은 관리 편의이고 모든 발전의 적이다. 조직에서 누구의 결정도 100% 옳은 결정은 없다. 우리는 실수를 얼마든지 허락한다. 그래서 나는 실수를 두려워하는 직원들을 위해 일종의 ‘실수 면허증’을 만들어주었다”라고 말한다. 그는 도전과 창의성, 열정의 기업 문화를 만든 것이다.


당신이 사업을 시작해봤는지 아니면 이미 시작해서 몇 번이나 말아먹었는지 아니면 평생 가도 월급쟁이만 하지 사업을 하지 않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당신이 사업을 하든 월급을 받는 직원이든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

당신에게 실수를, 실패를, 좌절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며 일어설 수 있는 진정한 용기와 배짱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실수를 두려워하면 그 어떤 것도 시도할 수 없다. 언제나 모든 시도가 성공한다면 굳이 사람들이 시도하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새로운 것에 대한 시도가 두려운 것은, 실수할까 봐 실패할까 봐서이다. 

작게는 창피해질까 봐서이고 좀 더 크게는 자신에게 걸려 있는 책임감에 대한 부분이 금전적인 것과 관련되어서 있을 것이다. 이런 비유가 우습긴 하지만, 하다못해 도박을 하더라도 아무것도 걸지 않으면 내가 이겨도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많이 걸면 많이 가져올 수 있지만, 당연히 그 모든 것을 잃을 각오도 해야만 한다.


당신의 인생은 도박이 아니다.

당신이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 올린 피와 땀으로 구성된 탑이다. 그렇게 쌓아 올린 탑은 여간해서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너질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다. 


온갖 빚내서 식당을 차렸는데 갑작스러운 역병이 몰아쳐서 가게 영업을 할 수 없는 것은 당신이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서 주저앉아 울고 손가락만 빨고 있을 것인가? 손해를 최소화하고 그 상황에서 다시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만 한다.


손해를 입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러한데, 사업이 잘 나가고 안정화되면 대부분의 사람은 간사해지기 마련이고, 도전에 몸을 움츠리고 소극적인 투자와 경영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 기업들은 중소기업 이하로 쪼그라들거나 결국에는 망하게 된다.


공격적인 경영이 정답이라는 말이 아니다. 100년 기업을 바라보는 IKEA의 기업 전략을 보면, 창업주의 생각대로 그들은 계속해서 시도했고 계속해서 변화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계속해서 노력하고 업그레이드하며 끊임없이 더 나아지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고 피땀을 흘리고 있는가?

같은 비행기의 비즈니스석에 탔던 옆자리 젊은이에게 아주 소중한 것을 건네주듯 그가 종이 쪼가리를 내밀며 ‘이것이 아주 요긴하게 쓰일 걸세.’라며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비행기 안에서 읽는 잡지 안에 있던 아이스크림 쿠폰을 찢은 종이였다. 당시 그 젊은이는 여든이 넘은 그 노인이 IKEA의 창업주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흔이 넘도록 결코 ‘정체’ 하지 않았던 그가 당신을 위해 남긴 그의 생각을 전하며 오늘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경영 전략, 제품, 리더십 모두 단순해야 한다. 단순함이 미덕이다. 그 대신 기존의 것과 다른 것을 항상 생각하라. 기업이든 사람이든 목표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정체는 시작되고 생명력을 잃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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