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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06. 2021

짝사랑이 죽어버리고, 내 조국에서는 쫓겨나는 수모에도

전 세계 문인들에게 추앙받는 세기의 걸작을 탄생시키다.

1265년, 오늘날 이탈리아 북부의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두란테’(Durante)였지만,

이듬해에 유아세례를 받은 이래로 줄곧 애칭인 ‘단테’(Dante)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알리기에리 가문은 원래 귀족에 속했지만 그가 태어날 즈음에는 사실상 몰락한 상태였고, 그의 아버지는 임대 및 대부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1272년에는 어머니가, 1280년대에는 아버지가 사망함으로써 장남이었던 그는 10대 후반에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유산이 제법 있었던 탓에 특별히 생활전선으로 내몰려야 하는 힘겨운 지경까지는 아니었다.

 

1274년, 아버지를 따라 유력자인 폴코 포르티나리의 집을 방문한 그는 폴코의 딸인 베아트리체(비체)를 보고 한눈에 반해 버린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9세, 그의 나이는 10세에 불과했지만, 이날의 경험이야말로 그에게는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관습에 따라 그는 마음에 두었던 그녀가 아닌 부모님이 정한 상대와 맺어지고 말았다.

엘리자베타 시라니, <베아트리체 첸치의 모작>,(1662).

불과 13세 때이던 1277년, 단테는 피렌체의 또 다른 유력자인 마네토 도나티의 딸인 10세의 젬마와 약혼했고, 9년 뒤인 1286년에 결국 수순대로 그녀와 결혼했다. 베아트리체 역시 1287년에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1283년, 그의 일생에 다시 운명의 소용돌이 같은 사건이 벌어진다. 처음 만난 지 정확히 9년 만인 바로 그날, 베아트리체가 길에서 지나가던 그를 보고 인사를 건넸던 것이다. 단지 의례적인 인사에 불과했을지도 모르지만, 황홀해져 버린 그는 그날 밤에 꿈속에서 그녀와 함께 사랑의 신을 목격했다고 한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그때부터 베아트리체를 향한 사랑을 담은 시를 쓰기 시작한다.

헨리 홀리데이,<베아트리체를 만난 단테>(1883).

수도원이 경영하는 라틴어 학교를 다녔고, 이어서 피렌체의 석학 B. 라티니에게 사사하여 문법 ·논리학 ·수사학을 배웠으며 볼로냐대학에서 수사학 ·철학 ·법률학 ·천문학 등을 연구하면서 특히 이탈리아어로 시를 지었다. 동급생이던 G. 카발칸티와 돈독한 우의를 맺어 고전작가로서는 V. 베르길리우스를 탐독하는 한편, 그와 시작(詩作)을 경쟁하여 서로 격려하였다. 그는 시칠리아파(派)와 토스카나의 귀토네파의 서정시에서 받은 영향 아래 베아트리체를 향하여 싹튼 사랑을 읊기 시작하였고, 그 후에 청신체파(淸新體派) 시인으로서의 시작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한 남성의 연정을 카발칸티가 주장하는 청신체(dolce stil nuovo)로써는 표현하기가 미흡하다고 생각하여 점차 독자적인 청신체의 시를 쓰게 되었다.


그러나 1290년, 젊음과 아름다움의 절정기에 있던 베아트리체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슬픔에 빠진 그는 그때까지 베아트리체를 그리며 쓴 시를 엮어서 <새로운 인생>(1295)이라는 책을 간행한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이기겠다며 독서에 천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베아트리체를 이상화하는 급속도로 진전되어, 《신생》의 권말에서 성녀 베아트리체를 위해 대작을 준비하겠다는 결의를 피력하였다. 《신생》은 운문과 산문을 섞은 소품이지만, 그의 거작 《신곡》의 중추가 되는 종교적 ·시적 사상의 싹틈을 엿볼 수 있고, 현실의 여성을 ‘영원한 여성’으로 승화시킨 수법은 당시 유행하던 청신체였다. 이 《신생》 직후 그의 문학 및 철학에 대한 연구는 넓이와 깊이를 더해갔다.

13세기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예언자, 신앙인으로 활동했던, 정작 본명을 놔두고서 ‘단테’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불렸던 남자, 본명 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Durante degli Alighieri)의 이야기이다. 그는 이탈리아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영원불멸의 거작으로 손꼽히는 《신곡》을 남겼다.


이 세계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작품은 이후 그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나왔을 정도로 학계는 물론 다른 문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이행하던 시기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선구자가 되어 인류문화가 지향할 목표를 제시한 업적이 크다고 하겠다.

 

특히, 모국어였던 이탈리아어로 문학의 지평을 확대했다는 업적 때문에 ‘이탈리아어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한다. 당시 소규모 도시국가가 난립해 있던 이탈리아에서는 각 지역마다 라틴어에서 파생된 방언들을 일상 언어로 삼았고, 이런 각 지역 방언들은 서로 말이 안 통하는 건 아니지만 같은 언어의 방언이라고 하기에는 또 미묘하게 차이가 큰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런 방언들 사이에서 ‘표준 이탈리아어’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중심축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단테가 사용한 언어였다. 그의 문학 이래로 현대 이탈리아어는 토스카나 방언을 표준화한 것으로 규정된다.


페트라르카·보카치오·밀턴·초서의 문학이 탄생할 수 있는 자양분을 직접적으로 제시했다고 인정받는다. 모국어가 라틴어보다 오히려 우월하다는 그의 주장은 당시 지식인들에게는 파격 그 자체와 같은 것이었다. 문학은 지식인의 전유물이 아니며 대중이 문학을 쉽게 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 또한 혁명적이었다. 미국 태생의 영국 문인인 T. S. 엘리엇은 “단테와 셰익스피어가 세계를 양분한다. 둘 사이에 3번째 인물은 없다”라고 극찬했다.

단테가 살았던 14세기 후반의 피렌체는 당파 싸움이 한창이었다. 그를 단지 시인으로만 기억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는 엄밀히 말해 정치가였다. 당시 피렌체를 양분하는 세력이었던 교황파 겔프당과 황제(신성로마제국) 파 기벨린당은 종종 음모와 무력을 동원해 가면서 권력을 뺏고 빼앗기며 각축전을 벌였다. 단테는 이 가운데서도 겔프당에 속했으며, 이 당이 또다시 상인파 비앙키(백색)당과 귀족파 네리(흑색)당으로 갈라지자 전자를 지지하고 후자와 대립했다. 그는 정치가로서 요직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는 비교적 당리당략에 좌우되지 않고 공평한 처신을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1295년에 피렌체의 약제사 조합에 가입하는 것으로 정계에 입문했던 단테는 머지않아 탁월한 지성과 언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임기 2년의 피렌체 행정부 최고위원 3인 중 1인으로 재직할 때에는 비앙키당과 네리당 간의 분규를 주도한 양측의 문제 인물들을 시외로 추방함으로써 명성과 아울러 원한도 적지 않게 사게 되었다.


1301년에 프랑스의 귀족인 샤를 백작이 교황의 요청으로 군대를 이끌고 피렌체로 진격하자, 단테는 교황을 설득해 전쟁을 막기 위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로마로 향한다. 하지만 그가 로마에 머물던 11월 1일, 샤를이 피렌체에 진입함과 동시에 그 위세를 업은 네리당의 주요 인사들이 권력을 장악한다.

도메니코 미 미첼리노,<《신곡》을 손에 들고 있는 단테>,(1465). 배경에는 지옥(좌측),연옥의 산(중앙), 그의 고향 피렌체(우측)의 모습이 보인다.

1302년, 궐석재판(피고가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재판)에서 단테는 최고위원 재직 당시의 뇌물 수수 및 각종 비리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 선고를 받는다. 로마를 떠나 피렌체로 돌아오던 단테는 이 소식을 듣고 귀향을 포기했으며, 이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줄곧 타향을 전전하는 신세가 된다. 단테의 최고 걸작인 《신곡》은 그의 삶에서도 가장 어두웠던 바로 이 시기에 나온 작품이다. 1304년부터 1321년에 걸친 긴 세월에 걸쳐 집필되었던 《신곡》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의 인생 여정의 중간에서,
나는 캄캄한 숲(una selva oscura)에 부닥쳤네.
올바른 길을 잃고서

 

모르는 이들은 그저 위대한 작품의 웅장한 시작정도로 이해하지만, 이 문구는 단순히 문학적인 메타포가 아니다. 그가 처한 현실에 대한 토로였고 당시 그의 정치적 실패를 고백하는 고해성사에 다름 아니었다.


1312년에 신성로마제국의 새로운 황제 하인리히 7세가 군대를 끌고 이탈리아로 내려오자, 단테는 그 위세를 업고 피렌체로 돌아가려는 꿈에 부푼 나머지, 황제 치하의 정치에 관한 이상을 담은 《제정론》까지 저술한다. 하지만 하인리히 7세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년 만에 사망해버리면서 그의 꿈은 다시 한번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1312~18년까지 베로나에서 머물렀던 단테의 말년이, 당시 완성되어 간행된 <지옥편>과 같았다. 1314년에 <지옥편>이 간행되어 명성은 크게 올랐지만, 망명객인 그의 내면은 한시도 평온할 날이 없었다. 떠돌이 삶으로 오직 글쓰기만으로 자신의 아픔을 보듬던 그의 속이 좋을 리 없었으니 그 명성을 누리고 지낼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반니 보카치오의 전기에 따르면, 당시 단테를 처음 본 베로나의 어떤 여자들은 그 꾀죄죄한 행색에 놀란 나머지 “저 사람 행색을 보니 정말로 지옥에 다녀온 모양”이라며 수군거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에게 피렌체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315년, 전쟁을 목전에 둔 피렌체의 네리당은 다급한 마음에 내부 결속을 위해 단테를 비롯한 여러 추방자들에게 사면을 제안한다. 그러나 막대한 벌금과 굴욕적인 공개 사과가 뒤따라야 한다는 요구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단테는 그 부당성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편지를 보내 도리어 반발을 일으킨다.


우려했던 전쟁은 다행히 벌어지지 않았지만, 네리당은 대신 단테에게 칼끝을 겨눈다. 그에게 아예 사형을 선고하고 재산을 모조리 압류하고, 피렌체에 남아 있던 그의 세 아들에게도 사형을 언도해버린 것이다.(다행히도 그들은 죽음 직전 무사히 도피했다.)

들라크루아, <단테의 조각배>, (1822). 이 최초의 대작 회화로 들라크루아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1318년, 단테는 베로나를 떠나 라벤나에 머물면서 《신곡》의 대미를 장식하는 <천국편>을 마무리한다. 하지만 라벤나의 외교 사절로 베네치아에 다녀오다가 병에 걸려 1321년에 사망하게 된다. 그의 56년간 삶에서 3분의 1에 해당하는 19년을 망명한 떠돌이의 신분으로 보낸 뒤 타국에서 맞이한 쓸쓸한 죽음이었다.

라벤나에 있는 단테의 무덤

그로부터 100년이 넘어서야 실책을 깨달은 피렌체는 단테의 유골을 모셔오려 했지만 라벤나는 번번이 거절했다. 1519년에 교황이 그 분쟁에서 결국 피렌체의 손을 들어주자, 라벤나는 단테의 유골을 몰래 빼돌리는 꼼수로 결코 그의 유해를 돌려주지 않았다. 모처에 은닉되었던 유골이 발견되어 라벤나의 작은 교회에 안치된 것은 무려 1865년의 일이었다. 사후 500년이 되어서야 단테의 긴 유랑은 비로소 끝났던 셈이다.

피렌체 산타크로체 성당의 그의 무덤

잘 모르는 이들은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연인이었던 것으로 착각하는데, 그가 평생을 사랑했다고 이상화했던 여인, ‘베아트리체’는 엄밀히 그만의 연인이라고 생각했을 뿐 서로 사랑했던 사이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소심하고 10살에 처음 만나 여자아이를 평생 연인이라고 여긴 문학 오타쿠였을 뿐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하기엔 턱없이 현실적이지 못한, 신체적 접촉은커녕 말 한 번 제대로 나눠보지 못한 그저 아는 사이였던 것이다.


단테는 베아트리체 때문에 사랑의 열병을 앓으며 연애시를 줄줄이 써냈지만, 정작 그녀를 직접 만났을 때에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전전긍긍 가슴만 앓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소심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보였을 뿐이다. 한 마디로 베아트리체와의 사랑은 그저 단테의 짝사랑이었고, 어디까지나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사랑이었다.

 

그러나 짝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 매도할 수는 없었다. 베아트리체가 사망한 직후, 충격을 받은 단테는 마음의 위안을 찾아 광범위한 독서에 천착한다. 이때 그는 철학자 보에티우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술을 숙독했으며, 그런 독서 체험으로부터 중세의 종교 및 사상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철학 서사시 《신곡》의 기본 구조가 마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단테가 이 작품의 집필에 착수한 것은 1307년으로 추정된다.

윌리앙 부게로,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이 시에서 단테는 평소 존경했던 로마 시대의 서사시인 베르길리우스(Vergilius)의 안내로 부활절 전후 일주일 동안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여행한다.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단테는 많은 점을 공유한다. 기원전 70년에 태어난 베르길리우스는 극심한 분열을 통해 수없이 반복되는 전쟁을 경험했고, 이러한 내전을 종식시키고 제정 시대를 연 아우구스투스에게 큰 기대를 건다.


혼란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제국을 통해 보편적 평화가 도래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단테가 평화를 위해서는 신(神)이 세운 신성 로마제국에 모든 나라가 종속되어야 한다고 본 것과 일맥상통한다.

즉,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에게 단순히 시적 영감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제국’을 통한 평화에 대한 전망도 공유한 것이다.


그래서 R. W. B. 루이스가 “《신곡》은 시로 표현된 단테의 자서전”이라는 말을 한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신곡》은 당시의 역사와 현실이 곳곳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신곡》의 행간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당시 역사와 문학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겪었을 인생의 흐름과 비추어 읽어내야만 한다. 그래서 다른 문학작품과는 달리 방대한 주석과 해설이 이 작품에 달리게 된 것이다. 물론 가장 유명한 <지옥>의 경우에는 사전 지식 없이 읽을 수 있는 단테의 탁월한 상상력이 빚어낸 걸작이다.

단테의 서사시는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이 각각 33개의 ‘곡’(曲, canto)으로 이루어졌고, 여기에 서곡을 합쳐 모두 100곡이다. 하나의 ‘곡’은 150행 내외로서 전체 1만 4233행에 달한다. 지금은 전 세계에서 이 작품을 《신곡》이라고 부르지만, 원래 그가 직접 이 세 편을 묶어지었던 제목은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comedia, 희극)>였다. “절망으로 시작되어 희망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런 제목을 붙였다고 그는 설명한다.


그러던 중, 단테의 열렬한 예찬자인 보카치오가 이 작품의 위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디비나’(divina, 신적인)라는 수식어를 붙임으로써 졸지에 ‘라 디비나 코메디아(la divina comedia)’, 즉, ‘신적인 희극’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한자어 《신곡(神曲)》은 일본의 작가 모리 오가이(森鷗外)가 처음 이 작품을 번역하며 사용한 일본어 표기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런던에 전시된 영어 초판본

왜 《신곡(神曲)》이 세계문학사에서 그렇게 대단한 작품이라고 하는지는 당신이 직접 읽어보면 된다. 정작 누가 썼고 작품 이름이 뭔지만 알고 단 한 번도 읽으려고 시도해보지도 않은 책중에 하나로 손꼽히니 읽어보라. 읽되, 그저 술술 읽어 내려가는 소설책이나 브런치 발 싸구려 에세이가 아니니 제대로 공부하고, 그의 삶을 투영하여 꼼꼼하게 읽어보기를 권장한다.

 

그는 10살에 본 한 살 어린 여자아이에 한눈에 빠져 자신의 망상(?) 속에서 그녀를 짝사랑했고, 그녀와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제대로 이야기조차 나눠보지 못했으면서도 평생을 그녀만이 자신의 사랑이라 여겼다.


그가 그저 심약한 오타쿠 망상병 환자로 기록되지 않은 것은, 그가 그것을 문학이라는 형태로 승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문학이 희대의 명작으로 인정받는 것은 단순히 그의 짝사랑 놀음이 점철된 작품이 아닌, 그가 정치가로서 조국으로부터 쫓겨나 다른 나라를 방랑하면서 겪게 된 굴곡진 삶과 그의 탁월한 정치와 시대를 읽는 시각이 모두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었기 때문이다.

피렌체 단테의 생가

앞서 그가 ‘이탈리아어의 아버지’라는 별칭으로 소개된다는 설명을 한 바 있다. 그 배경에는 그가 정치가로서 가졌던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과 그 생각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문학가로서의 재능을 어떻게 사용했는지가 깔려 있다.


그는 《속어론》(1304)에서 지식인의 공용어인 라틴어보다 각 지역의 일상어인 속어로 시를 쓰자는 주장을 펼친 바 있었다. 단테가 《신곡》을 라틴어가 아니라 당시 방언으로 사용되던 일상어로 쓴 까닭은, 그래야만 지식인 말고도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또한 보다 현대적인 감각에 맞는 문체를 구사하기 위해서였다.


비슷한 시기 조선에서는 같은 의도를 가지고 세종대왕이라는 분이 한글을 창제하셨다.


브런치의 첫 페이지에 인용된 문구로 계속 등장하는,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영문학자 C. S. 루이스 역시 《신곡》의 마니아 중 한 명이었는데, 아내 조이와의 짧고 슬픈 결혼생활을 회고한 작품 《헤아려 본 슬픔》의 마무리를, 단테가 베아트리체의 모습을 묘사한 문장으로 대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루이스와 그의 아내

당신이라면, 그저 좋아했던 첫사랑을 잊지 못해서 그녀의 요절을 위해 독서와 공부에 천착하고, 사회를 바꾸겠다고 정치에 뛰어들었다가 자신의 조국에서 쫓겨나고 배신당하고 모든 재산을 빼앗기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다른 나라를 떠돌면서 그와 같은 대작을 집필할 수 있었겠는가?


그저 작가로서 조용히 자신의 서재에 앉아 우아하게 깃털 달린 펜촉에 잉크를 묻혀가면서 썼을 거라고 당신이 막연하게 상상하던 그 세기의 걸작, 《신곡》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그의 피와 영혼을 찍어 한 땀 한 땀 작성된 것이다.


고난이 반드시 영웅을 만들거나 극적인 성공을 만들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에서 고난과 실패와 좌절에서 그대로 좌초되고 현실과 타협하고 그저 그런 삶으로 사그라들어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이 뭐 특별할 게 있어’라며 그렇게 고개를 떨구고 마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그 더 많은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 속해야만 할 이유는 내가 부러 지금 하나하나 열거하지 않더라도 분명히 당신의 가슴속에서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고 있는 그것이 있기에 나는 지금 당신이 아직 꺼트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는 그것의 존재만을 확인시켜주려 한다.

맞다. 사람 사는 게 뭐 그리 특별할 게 있겠는가? 부자든 가난한 자든 삼시 세 끼 먹고 눈감고 자는 거 다 똑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 자신에게 물어봐라. 다 같지 않다. 당신이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당신의 꿈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고생하고 피땀 흘려 무언가를 이뤘을 때 느끼는 것은 그저 꾸역꾸역 하루하루 연명하듯 사는 삶과 완전히 다르다.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잠을 자도 삶의 농도가 다르단 말이다.


고난을, 좌절을, 심지어 말도 제대로 못 걸어본 짝사랑을 문학작품을 통해서라도 완성시킨 이탈리아 찌질이 단테도 해냈다. 당신이 못할 리가 없지 않나?


지금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깨닫고 반성하고 더 나아가고 싶고 올라가고 싶다는 마음가짐만으로도 충분하다. 바로 오늘, 지금부터 하나씩 해나가면 된다.


힘들 거다. 왜 이런 결심을 해서 그냥 대충 편하게 살아도 되는데 이렇게까지 하면서 무슨 대단한 삶을 살려고 내가 이 짓거리를 하고 있나, 욕도 나오고 지쳐 주저앉아 드러누워 그냥 다 포기하고 싶어질 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다른 누군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가슴속 뜨거운 불덩이가 외치는 소리에 응해서 한 것이기에, 당신은 그렇게 당신의 인생을 완성시켜나갈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의 가슴속 깊은 그 한 켠에 있던 불덩이를 찾아내 준 나는 안다. 

그리고 믿는다, 당신이 끝내 이겨낼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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