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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07. 2021

유배당하고, 아들은 투신자살을 하려다가 장애자가 되어도

공산주의를 버리고 중국을 강대국으로 올려놓는 기반을 닦다.

1904년 쓰촨 성에서 유복한 집안의 장남으로 출생해 15살이던 1918년 근공검학(勤工儉學)운동에 참가한 유학생의 신분으로 프랑스에 건너가 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학업을 하였다.


이 운동은 1918년에 시작되어 1920년에 이루어진 일종의 중국과 프랑스의 합작 프로젝트였는데, 근로자가 부족했던 프랑스에서 주경야독을 그럴싸하게 만들어 중국의 어린 학생들을 인력으로 활용하려던 목적이 컸는데, 중국은 반대로 유학을 통한 학생들의 견문을 넓히는 기회로 삼으려고 했고, 실제로 이때 유학을 했던 중국 유학생들들은 고국으로 돌아와 상당한 요직을 차지한다. 15살의 어린 나이였던 그는 돈이 없어 많은 끼니를 크루아상 하나로 때웠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1차 대전의 여파로 일자리 자체가 없어져 버리면서 프랑스 측의 대우가 나빠졌다. 처음에는 공부하러 프랑스로 갔던 그는, 당시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로 공산주의에 눈을 뜨게 되고, 공부에서 운동으로 관심을 돌려 1923년 말, ‘중국 공산 청년 동맹’에 가입하고 조직 기관지 《적광(赤光)》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와 함께 일하며 공산주의 운동을 시작한다. 1924년에 저우언라이(周恩來)를 포함하여 청년 동맹의 지도자급들이 모스크바로 떠난 뒤 그는 자연스레 지도자급 위치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모종의 사건으로 프랑스 경찰이 귀찮게 하기도 했고 귀국을 결정해야 하던 시기, 동지들과 같이 1926년 초 모스크바로 향한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그는 1926년 초에 스탈린 동방노동자공산주의대학(약칭 КУТВ)에 입학했고, 이때 공산당에 입당한다. 그리고 1925년에 설립된 중국 유학생 교육을 표방한 중산대학(中山大學)으로 바로 학적을 옮기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자기 이론의 배경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배웠는데, 프랑스 유학시절처럼 그다지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열심히 공부하며 매진하지 않은 덕분에(?) 극좌파 노선이 아니라 실용적인 성향을 가지게 된 것이라는 분석이 정설처럼 인정되고 있다.

1926년 말, 당대 중국의 군벌 펑위샹 밑으로 들어가는데, 펑위샹이 소련과 연계하면서도 반공을 표방한 장제스와 합작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던지라, 난징 국민정부에 합류하자마자 펑위샹은 그를 군에서 내쫓는다.


그래서 1927년, 그는 당시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였던 우한(武漢)으로 가서 당의 중앙에서 일하게 된다.

그리고 1927년 8.7 긴급회의에 서기로 참석하여 마오쩌둥을 처음 만나게 된다. 그 후 몇 개월 뒤 당 중앙이 상하이로 옮기자 그도 따라가게 된다. 1928년 초에 중산 대학에서 같이 수학했던 동지 장시위안과 결혼했는데 안타깝게도 2년 뒤 그녀가 사망하게 되면서 그의 첫 번째 결혼 생활은 짧게 끝나버린다.

지금의 중국을 ‘중공’이라는 이름에서 벗어나게 해 준 인물로, 공산주의를 버리고, 경제정책의 실용주의 노선을 걷게 해 준 중국의 정치가, 우리에게는 ‘등소평’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덩샤오핑(邓小平; Deng Xiaoping)의 이야기이다.

 

권력의 획득과 실각을 반복하였다. 1950년대에는 경제정책의 책임자로서 활약하였지만 모택동(毛澤東 ; 마오쩌둥)과 대립하여 1967년경 문화 대혁명의 시대에 추방되었다. 1973년 주은래(周恩來 ; 저우언라이)의 힘으로 복권하였지만 1976년에는 이른바 ‘4인조’에 의해 다시 추방되었다. 모택동의 사후에 복권하여 1980년경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1981년부터 실용주의 노선으로 과감한 개혁조치들을 단행하여, 기업가와 농민의 이윤 보장, 엘리트 양성, 외국인 투자 허용 등 자유시장의 원칙을 도입하여 경제가 크게 성장하였다. 서방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1978년에 미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1989년에 텐안먼(천안문) 사태를 군사력으로 억제하는 정책을 지지하여 대외적 이미지에 타격을 받았다.

홍군의 정치장교로 근무했다. 1933년 당시 비주류였던 마오쩌둥을 지지하고, 대장정에 참여하였다. 항일전 내내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에서 정치장교를 맡았다.

덩샤오핑과 류보청

‘군신’ 또는 ‘독안룡’이라고 불리던 8로군 명장, 류보청과 함께 129사단을 이끌고 8로군 주류와 떨어져 옌안을 떠나 중원으로 이동하여 일본군 배후에서 항일 전쟁을 치렀다. ‘류덩군’이라고 불린 이 129사단은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덩샤오핑의 군사적 재능도 높이 평가되었다.

 

국공 내전이 시작되자 8로군은 ‘인민해방군’이라고 이름을 바꾸었고, 129사단은 확대 개편되어 제2야전군이 되었다. 국공 내전 초기에 전체적으로 인민해방군은 밀리고 있었으나, 류덩군은 결국 산둥 반도를 장악했고, 1948년 말부터 전쟁은 전체적으로 역전되어 인민해방군이 국민당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1949년 장강(長江) 도하 작전과 난징 점령을 지도하여 중화 인민 공화국(중국) 수립에 결정적인 공적을 세웠다. 공부보다는 군사작전에 장기를 보였던 것으로 스스로 자평한다.

1949년 인민해방군 창건일 기념행사에서, 하룡과 주덕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지만, 서부에는 1950년대 초반까지 국민당군 40여만 명이 아직 남아 있었다. 류덩군은 서부로 진격했고, 1949년 12월 청두를 함락시켜 대륙에 남아 있던 최후의 국민당 근거지를 점령했다. 국민당군은 쓰촨에서 밀려났지만 쓰촨 성 서부에서 끈질기게 저항했다. 류덩군은 1950년 말부터 벌어진 6.25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이곳에 주둔하면서 서남군구로 개편되었다. 여기서 덩샤오핑은 서남군구 정치장교, 서남군정위원회 부주석을 맡아보았고 이후에는 군에서 제대해 충칭시장을 역임하면서 토지 개혁, 아편 거래 근절, 국민당 잔당 토벌들의 여러 조치들을 실시했다.

 

그의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이었기 때문에 토지를 가진 지주들이 폭동까지 일으킬 정도로 저항했으나, 덩샤오핑은 무자비하게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덩샤오핑은 이때 저항하는 지주계급 및 아편 유통업자, 기타 국민당 잔당들을 합해 10만 명 이상을 과감히 처형하는 강수를 둔다. 이렇게 과감하면서도 큰 잡음 없이 일처리를 깔끔하게 했다는 소문이 나면서 중앙에서 그를 주목하게 되었다.

 

3년 후 중앙으로 전임되어 1952년 정무원(政務院) 부총리, 1954년 당 중앙위원회 비서장, 1955년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국공 내전 말에 그와 지위가 비슷하거나 그보다 훨씬 높았던 인물들이 많았음에도 꾸준히 승진하여 지도부까지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서남지구에서 보인 탁월한 행정 능력과 리더십의 소문 덕이 컸다.

1957년에는 중국 공산당의 총서기가 되어 국정 일반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마오쩌둥에게 비판의 화살이 쏟아지자, 덩샤오핑은 상대적으로 더 실질적인 권력에 다가서게 된다. 류사오치와 그는 최종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마오쩌둥을 ‘명목상의 지도자’로 앉히려는 계획을 세우는 한편, 경제 개혁을 실시했는데, 이로 인해 당 조직과 전체 인민들 사이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1960년 중국과 소련이 결별하자 공산국가들이 모인 여러 회의에서 마오주의를 설파, 소련을 ‘수정주의’라 비판하면서 마오쩌둥의 신임을 확실하게 받기 시작한다. 이때 시작된 마오의 신임은 덩샤오핑이 실각하고 나서도 다시 복귀할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문화대혁명 당시

하지만 국가주석에서 물러난 마오쩌둥은 류사오치, 덩샤오핑이 자신이 죽으면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격하했듯이 자신을 격하할 것이라고 우려했고, 이들을 당내에서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반혁명 분자요 ‘주자파’라 여기게 되어 제거의 대상으로 삼게 된다. 여기에는 마오를 부추긴 그의 부인, 장칭의 이간질도 크게 한몫을 했다. 결국 1965년 해서파관 사건을 시작으로, 1966년 베이징 8월 폭풍 사건이 벌어지면서 본격적인 ‘문화 대혁명’이 시작, 중국 전역은 홍위병들의 살육과 파괴, 약탈로 생지옥으로 변모하였다. 이때 류사오치도 숙청당하게 된다.

 

이제 막 참신한 정치 개혁 세력으로 떠오르던 덩샤오핑은 반마오주자파(反毛走資派, 마오쩌둥에게 반기를 든 자본주의 추종자)의 수괴라는 비판을 받고 하루아침에 모든 권력을 잃고, 유배지에서 연금 상태로 지내야 했다. 대학생이었던 덩샤오핑의 아들은 홍위병 학우들에게 아버지의 잘못을 인정하라는 고문에 시달리다 창문에서 투신자살을 하려고 뛰어내려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게 된다.

1973년 3월, 총리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복권되어 국무원 부총리가 되었다. 방광암으로 투병 중이던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을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을 겸직하기도 했는데, 이전 그의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캐릭터 자체가 유능한 군사 참모였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덩샤오핑이 훗날 정권을 잡을 때도 보이듯이 그는 군부에 엄청난 입김을 행사했다.

덩샤오핑의 부활에 문화 대혁명 이후 중국의 권세를 누리고 있던 4인방(四人幇)은 긴장했다. 덩샤오핑만 없다면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 사후 권력은 그들이 독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정치국 회의 등에서 4인방은 덩샤오핑을 격하게 비판하며 총공격을 감행했다.

저우언라이와 함께

결국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떠났다. 인기 있던 총리의 죽음에 군중은 그와 대척점에 섰던 4인방의 처벌을 요구했고 4인방은 빈소 설치 금지, 검은 옷 착용 금지 등으로 대응했다. 이때 저우언라이의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한 것이 바로 덩샤오핑이었다.


저우언라이의 명실상부한 후계자로 대중에게 인식되는 순간이었다. 당연히 4인방은 더욱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마오쩌둥의 조카, 마오위안신을 움직여 마오쩌둥에게 덩샤오핑이 문화 대혁명에 대한 평가에 인색하다고 모함하도록 사주했다. 문혁은 마오쩌둥의 역린(逆鱗)이었다. 마오쩌둥의 불신이 깊어지는 상황에서 천안문 사태가 격화되자 덩샤오핑은 그 책임을 지고 다시 모든 직위에서 밀려났다. 마오가 그를 아꼈던 탓에 4인방의 끊임없는 숙청 제의에도 그의 당적만은 유지해주라는 명령이 있어 겨우 당적을 유지하며 후일을 도모할 여지가 있었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사실 문화 대혁명은 결정적인 마오의 실책으로 이미 낙인찍혀 있던 터였는데, 덩샤오핑은 끝까지 문화 대혁명에 대해 공식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보이지 않았다. 물론 마오쩌둥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멀리 보고 자신이 집권했을 때, 이전 정권의 결정적 실책에 한 배를 타지 않겠다는 포석이 깔린 결정이었다. 공격받고 내쳐지는 상황에서도 덩샤오핑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그 해 9월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났다. 당 중앙위 주석이던 화궈펑이 문화 대혁명에서 살아남은 10원수 출신의 예젠잉(葉劍英), 특무 부대장인 왕둥싱(汪東興)과 결탁하여 4인방을 숙청해버렸으나 문화 대혁명을 기반으로 급성장했던 화궈펑의 힘만으로는 정국 수습이 어려웠으므로, 예젠잉의 종용으로 1977년 7월 덩샤오핑은 다시 한번 복권된다.

그는 중국 공산당 내에 있는 그의 지지자들을 조심스럽게 선동하여 애초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화궈펑을 교묘하게 따돌렸고, 결국 1978년 12월 자신을 사면해 준 화궈펑을 권력으로부터 축출해버리는 데 성공한다.

 

정치에 복귀한 그는 1978년 5월경 중국의 주요 인재들을 서유럽 5개국으로 시찰 보냈다. 시장경제를 도입하기 전에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연구를 철저히 하고, 이것을 중국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준비한 것이다. 그가 이토록 치밀하게 사전 준비를 한 이유는 100년, 200년에 걸쳐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발전시킨 서구에 비해 단기간에 중국이 시장경제 모델을 들여와 성공하기 위해서는 시간도 인력도 낭비할 겨를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덩샤오핑은 중국이 ‘다시 그릇된 길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노구를 이끌고 직접 경제 강대국이자 자본주의의 꽃이 활짝 핀 미국, 일본 등을 방문했다. 정치적으로는 적국이지만, 시장경제를 알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경제 발전상을 눈으로 직접 보고 몸으로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이 시기부터 그는 ‘문화 대혁명에 대한 재평가’와 ‘출신 성분 제도 혁파’를 단행했다. 그는 그 시기에 벌여졌던 극단적인 행위와 이로 인한 고통에 대해서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한편, 기존 공산 혁명 시기에 있었던 조상의 행위를 근거로 전 중국을 두 개의 계급으로 나누어 지주 계급 출신이 제도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게 한 것을 철폐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마오 주석은 공이 과보다 많다.”라는 말로 마오쩌둥의 권위를 보호해주는 척하면서 실질적으로 마오쩌둥을 계승한 문화 대혁명 당시 마오쩌둥의 직계들을 차례차례 제거한다. 문화 대혁명에 대한 대중의 비판이 일어나게 함으로써 그 사건에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있던 사람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그 시기에 고통받았던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또 이때부터 실용주의 노선에 입각하여 과감한 개혁 조치들을 단행하였다. 중국 정계의 최고 실권자로서 1978년 ‘4대 근대화’(농업의 근대화, 공업의 근대화, 과학 기술의 근대화, 국방의 근대화)로 대표되는 개혁과 개방 정책을 발표, 추진하여 기업가와 농민의 이윤 보장, 지방 분권적 경제 운영, 엘리트 양성, 외국인 투자 허용 등으로 중국 경제가 크게 성장하는 단초를 마련하였다.

미중 수교 과정은 1970년대 초반부터 진행되어왔던 것이었지만 1979년 1월 미국과 공식 수교하였고, 9월에는 중국 지도자로서는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여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때 카우보이 모자를 눌러쓰고 로데오 경기를 관람하는가 하면, 공식 석상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를 열창하는 등 미국인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려는 모습을 보였다. 백악관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과 만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84년 12월 19일 영국과 중국 간에 체결한 중영 공동선언을 이끌어내어, 이 조약에 따라서 홍콩이 1997년에 중국에 반환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치명적인 실책은 발생한다. 1989년 천안문 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학생 운동에서 시작한 이때의 시위는 개혁파 후야오방의 명예 회복 요구로 시작하여 민주화 운동으로 발전하지만, 이 사건에 대해 덩샤오핑은 시위대를 난동꾼이라고 비난하며 유혈 진압을 단행한다.


무자비한 군 투입으로, 탱크로 밀어붙이며 살상한 탓에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게 된다. 사실, 당시 덩샤오핑을 포함한 중국 원로들이 이런 학생 운동이나 대중 운동에 대해 특히 콤플렉스를 보인 것은, 민주화에 따른 중국 공산당 실각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겠지만, 그 외 이들이 문화 대혁명의 시련을 겪은 당사자들이었기 때문이라는 합리적인 분석이 이루어졌다. 문화 대혁명 역시 당시 홍위병이 주체가 된 학생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민중들에게 무력진압을 해서는 안된다고 반대하던 총리 자오쯔양은 영구히 축출해버리고, 그를 대신해 시위대에게 강경하게 대응했다고 높이 평가된 장쩌민을 당 총서기에 임명하는 등 권력 승계 작업은 계속 진행되었다. 또한 티베트인들의 반중 시위를 유혈 진압한 후진타오를 중앙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하였다. 이들이 덩샤오핑을 이은 다음 후계자들로 이어져 현재까지 오게 된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모든 당직의 재임 기간을 최대 10년으로 제한하고, 65세 이후에는 새로운 당직에 취임하지 못하도록 명문화하였다. 이는 1인 독재와 원로들의 간섭을 배제하고 원활한 세대교체를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70대 ~ 80대 원로들이 당을 좌지우지하거나 수십 년씩 제왕적 권력을 휘두르는 행태는 사라졌으며 시대 변화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덩샤오핑 사후 장쩌민과 후진타오 모두 10년씩 집권하면서 후계 세대를 조직적으로 양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일당 독재이면서도 주기적인 세대교체가 잡음 없이 이루어지는 특이한 모습은 이때 자리 잡았는데, 지금 권력을 잡은 시진핑이 이것을 제멋대로 장기집권으로 가려는 꼼수로 덩샤오핑의 미래를 위한 안배를 모두 무너뜨리고 있다.

레이건 대통령과의 회담

물론 정식 직함은 없었지만, 덩샤오핑을 포함한 8인의 원로방은 공식 직함 없이 사실상 중국을 통치했다. 상하이에서 시위대에 강경 대처한 공로로 단숨에 중앙 정계에 진입한 장쩌민 국가주석은 덩샤오핑의 개혁파와 천윈의 보수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은 과거 마오쩌둥 시대로 퇴보하지는 않았지만, 외국에 약속했던 추가적인 개혁개방, 시장경제화는 모두 미뤄졌고, 사회 전반적으로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잔인한 천안문 유혈진압에 격분한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은 중국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로 돌변해서 모든 방면에서 교류협력을 중단했으며, 덕분에 외국인 투자는 급감하고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위상은 실추되었다.

 

그런 상황을 읽은 덩샤오핑 다시 승부수를 던진다. 1992년, 소위 ‘남순강화’라고 하는 행보를 시작한 것이었다. 80대 후반의 노구를 이끌고서 선전과 상하이 같은 경제특구를 돌면서 중국은 더욱 개방하고 경제 발전을 해야 한다는 연설 행군을 감행하였고, 이런 개방 정책을 환영하던 중국인들의 여론을 타고서 베이징의 개혁 반대 세력을 엄청나게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개방된 연안 지방의 여론을 무시하지 못한 장쩌민과 중앙 지도부가 덩샤오핑 쪽으로 돌아서면서 CCTV와 신화통신 등 중앙 언론과 중앙당 선전 부서가 덩샤오핑의 메시지를 전국적으로 발표하였다. 그리고 3월 전용 열차가 마지막 시찰지인 상하이역에 도착했을 때, 장쩌민을 위시한 중앙당 정치국원 전원과 군사령관들이 도열해서 덩샤오핑을 영접한다.

중국 공산당 내의 마지막 개방 반대 vs 개방 찬성의 대결에서 이긴 덩샤오핑과 개방 세력은 결국 중국의 경제정책 방향에 마침표를 찍었고, 중국은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후배들과 시대를 모두 정리한 그는, 여유로운 노년을 보내다가 1997년, 모든 후손들이 바라보는 집에서 92세의 나이로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유언으로는 그 유명한 ‘도광양회(韜光養晦)’, 즉 향후 50여 년 동안은 국제 사회에 섣불리 나서지 말고 인내하며 조용히 힘을 키우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인생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유언이었다. 힘을 키우기 전까진 패권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지극한 실리주의가 담긴 말이었다.

그게 했던 말 중에 가장 유명한 것으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라는 흑묘백묘론은 사실 저우언라이가 한 말을 그가 인용한 것인데, 어찌 되었든 그의 실용적인 사상이 그대로 담겨 있는 말이다.

중공에서 ‘공’을 떼어버리고 소련처럼 붕괴하여 쇠퇴의 길을 걷지 않고, 미국과 양강을 이루게 된 지금의 중국을 만든 기반은 덩샤오핑이라는 이 작은 거인이 이뤄낸 업적이라는 에 대해 아무도 이견을 달지 않는다.

 

일부 마오주의자들에게는 중국을 ‘공산주의의 탈을 쓴 제국주의’로 만들었다고 비난까지 받을 정도로, 그는 공산주의의 옷을 입고 낙후되어 있던 중국을 미국에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는 강국으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중국 공산당의 역사를 조금이라고 공부한 사람이라면, 중국인들과 사업이든 학업이든 조금이라고 엮여 그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이익앞에 가차없는 민족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덩샤오핑이 얼마나 살얼음판 같은 인생을 곡예하듯이 살아왔고, 그곳에서 맨손으로 그 정점까지 올랐는지 상상이 갈 것이다.

당신이라면, 나라의 정점까비 올라갔다가 갑자기 숙청당하고 유배당해 새파란 젊은 학생들에게 추궁당하며, 자아비판을 하고 자기 반성문을 제출할 수 있었겠는가? 가족까지 길바닥에 내몰려 자신의 대학생 아들이 도망치다 건물에서 뛰어내려 죽으려다 평생 장애인이 된 모습을 보면서 다시 재기를 기약하며 마냥 때를 기다릴 수 있었겠는가?


당장 권력을 쥐고 있는 자의 실정(失政)에 대해 괜찮았다고 말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 자신이 다시 돌아와 정권을 차지했을 때까지 고려하여 절대 고집을 굽히지 않으며 5년 후 10년 후를 기약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아니 언제 숙청되어 죽을지도 모르는 그 서슬 시퍼런 암투 속에서도 그는 기다렸고, 자신이 완전한 힘을 쥐게 될 때까지 숨죽이고 또 기다렸다. 그리고 그가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을 때 과감하게 그가 생각했던 나라의 나아갈 바를 제시하고 나아갔다.


물론 문화 대혁명으로 그 끔찍한 경험을 한 탓에, 천안문 사태라는 학생운동에 대해 강경하게 대한 실책도 있지만, 결국 그가 중앙에 발탁되었던 최초의 계기로 돌아가 보면 그는 그 과감함으로 인해 발탁되어 정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덩샤오핑은 1979년 말, 미국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찬위원회 지프니 부사장 등과 만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시장경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만 있다는 견해는 정확하지 않소. 사회주의 국가에서 왜 시장경제를 할 수 없단 말인가요?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시장경제는 자본주의라고 말할 수 없지요. 시장경제는 봉건사회 시대에 시작했던 것이므로, 사회주의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나라의 기반을 다지고 나라가 강하게 변모하는 모습을 보며 노년에 이렇게 말했다.

 

“국가는 발전했다. 나는 부유한 나라의 한 공민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공산주의 이상은 위대한 것이고, 사회주의는 경애로우며, 사회주의를 위해 일평생 투쟁하는 것은 값어치가 있다.”

 

몇 번이고 죽을 위기에 몰리고 몇 번이고 실패하여 역사의 한 자락에 사라질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기회를 기다렸고, 또 기다렸다. 그리고 끝내 모두를 젖히고 정점에 올랐고, 자신이 원하던 계획대로 국가를 변모시켰다.


나라를 송두리째 변모시킨 사람도 있는데, 당신이 지금 당신의 삶 하나 변모시키지 못하고 죽음을 위협당하는 절대적 위기상황도 아닌데, 고작 실패했다고 소주잔에 눈물 담아가며 그 청승을 떨고 있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죽지만 않으면, 살아만 있으면, 당신의 그 의지가 살아만 있다면 돈은 얼마든지 다시 모을 수 있고, 꿈은 언제든지 이룰 수 있다. 그것을 위해 당신이 끊임없이 당신의 힘을 키우고 실력을 키우고 하는 동안 때는 반드시 온다.


중국인들이 등소평을 뭐라 부르는지 아는가?

‘백년소평’이라 부른다.

 

당신에게 아직 때가 오지 않은 것은
당신이 아직 준비가 안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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