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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08. 2021

30년간 조국을 떠나 애 딸린 40대 전업 주부였는데

뜬금없이 정치개혁의 투사로 세계에 이름을 알리다.

1945년, 양곤에서 버마의 국부(國父)로 불리는 아웅 산의 세 번째 아이이자 유일한 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나고 2년 후 미얀마의 독립을 획득한 그녀의 아버지는 제대로 정부가 구성되기도 전에 32살의 나이에 정적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32년이라는 짧은 인생 동안 오로지 미얀마를 위해 살았던 아웅 산은 그 투명한 삶과 업적으로 인해 미얀마의 국부(國父)로 불리며 국민 영웅이 되었다. 아웅 산의 유족들은 영웅의 유족으로 추앙받았고, 영웅의 유족답게 살아야만 한다는 책임감을 평생 느껴야만 했다. 그래서였을까? 1962년 네 윈에 의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아웅 산의 미망인 킨 치 여사는 중앙 정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그녀의 아버지 아웅 산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고, 아웅 산을 설명하게 되면 미얀마에 대한 대강의 역사를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아웅 산은 1932년, 양곤대학에 입학하였으며, 4년 뒤인 1936년 동맹휴학을 지도하였다. 1940년 영국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중국 하이난성에서 버마(1989년 이전까지는 이 호칭이 공식 국명이었다.)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이후 일본의 도움을 받아 버마에 다시 돌아와 영국군과 싸웠다. 일본은 괴뢰정부인 버마국을 세우고 영국보다 더욱 가혹한 통치를 시행하여 버마인을 비롯한 인근 국가에서 동원해온 민간인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에 아웅 산은 이른바 ‘30인의 동지’와 함께 반파시스트 인민 자유동맹(AFPFL)을 결성, 일본에 대한 저항운동을 시작한다.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버마인 희생자만 해도 무려 100만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한다.

아웅 산 장군의 가족 사진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항복하고 나서, 영국군이 버마를 재점령하자, 아웅 산은 1947년 1월, 런던에서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와 ‘애틀리-아웅 산 협정’을 맺음으로써 버마 독립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독립 직전이던 1947년 7월, 아웅 산의 형을 포함한 7인의 장관들과 함께 양곤 사무국 건물에서 임시 내각 회의를 진행했다. 그런데 아침에 군복을 입고 톰슨과 스텐 기관총으로 무장한 4명의 괴한이 지프를 타고 사무국으로 들이닥쳤다. 


이들은 경호원들을 죽이고 회의장으로 난입, 총기를 난사하였다. 아웅 산을 비롯한 5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3명은 치명상을 입었지만 겨우 살아남는다. 이후 영국 식민정부는 임시 내각의 총리였던 우 소를 비롯한 8명을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고 체포, 버마 임시 대법원에 이들의 재판권을 넘겨주었다. 우 소는 억울함을 항변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9명 모두 이듬해에 처형당하였다.

아웅 산의 죽음으로 버마의 운명은 독립 정부를 꾸리기도 전부터 삐걱댔고, 이후 버마족과 카렌, 카친, 샨, 친, 카미, 아라칸, 로힝야족 같은 소수민족들과 이념이 다른 정당 간 내전이 끊이지 않게 되었고, 나아가 동남아시아에서 혼란한 빈국으로 추락하고 만다. 만일 그가 죽지 않고 버마의 초대 대통령이나 혹은 초대 총리가 되었더라면 적어도 지금 같은 내전, 쿠데타 등에 이리 시달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실제로 아웅 산은 버마족 출신이었지만 카렌, 샨, 카친 등 소수민족들에게도 관대해서 ‘팡롱 협약’이라는 미얀마 내 소수종족들의 자치와 권익을 보장하는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었다.


다시 그의 딸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그녀는 1960년 인도 대사로 부임하게 된 어머니를 따라 인도로 건너갔다. 그렇게 15살에 시작한 외국 생활은 그녀가 1988년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미얀마로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무려 30여 년이나 계속되었다. 1962년 아버지의 동료였던 네 윈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조국은 미얀마식 군부 사회주의 독재정권으로 바뀌었고 아웅 산 수 치는 망명 아닌 망명 상태로 외국을 떠돌았다. 그녀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정치와 경제, 철학을 공부하고 뉴욕에 있는 UN에서 일했다.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가이자 정치인, 미얀마의 국부 아웅 산의 딸인, 아웅 산 수 치(အောင်ဆန်းစုကြည; Aung San Suu Kyi)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199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으며, 2015년 총선 승리를 이끌어 미얀마의 오랜 군부 집권을 종식시켰다. 2016년부터 미얀마의 실질적 국가원수인 국가 고문 겸 외교부 장관이자 소속 정당인 민족민주연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의 의장 겸 사무총장을 지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군부가 쥔 차였고, 군부들의 로힝야족, 카렌족을 비롯한 일부 소수민족들 학살과 억압을 방조했다는 비판도 들었으며, 2020년 총선에서 민족민주연맹이 거대 의석을 가지게 되자 이에 반발한 군부에 의해 2021년 2월 1일 군부 쿠데타로 실각하였다.

이미 아웅 산 수 치의 오빠 우는 국적을 미국으로 바꾸고 조국 미얀마와는 상관없는 인생을 살겠다고 다시는 미얀마를 찾기 않았다. 그녀 역시 어머니를 따라 인도로 떠난 후 30년 동안을 단 한 번도 미얀마를 찾지 않았다. 


델리 대학교에서 정치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옥스퍼드 대학교 세인트 휴스 칼리지에서 PPE 학석사 연계과정으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았다. 결혼도 미얀마인이 아닌 ‘영국인’ 아시아 연구자 마이클 에어리스와 결혼하면서 조국 미얀마에 대한 아웅 산의 딸로서의 부채의식을 완전히 벗어버린 듯했다. 그녀는 남편을 따라 부탄과 영국에서 살았다. 그렇게 아들 둘을 낳고 교수 일을 하는 남편을 열심히 내조하며 영국 옥스퍼드에서 가정주부로 살았었다.

젊은 시절 수 치 여사

1985년부터 1986년까지 일본 교토대학의 동남아시아 연구소에서 객원연구원으로서 자신의 아버지인 아웅 산 장군과 관련 책을 쓰기 위해 자료 연구를 한 것이 그녀가 했던 외유(?)의 전부였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평범한 여인이 가질 수 있는 행복 따위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1988년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고 조국 미얀마가 그녀를 불러들였다.

 

당시 미얀마는 26년간 계속된 군부독재와 이에 따른 경제파탄과 인권유린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아웅 산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고 독립 후 군부의 수뇌가 된 네 윈은 1962년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물이 고이면 썩는다고 했던가, 군부정권의 최고 권좌에 앉아서 젊은 날의 독립운동하던 군인은 그저 탐욕스러운 독재자로 변해버렸다. 네 윈과 그를 둘러싼 군사 독재정권은 온전한 사회주의라기보다는 동양적 가치관과 불교가 습합된 미얀마식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표방하였다. 결국 시대에 역행한 정책과 독재 권력의 부정부패는 경제 파탄을 가져왔다. 버마의 국민들은 폭압과 가난 속에서 질식사할 상태에 이르렀다.

사회의 불만이 대학생들의 시위로 터져 나왔다. 군부는 평화적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많은 학생들이 군부의 총칼 아래 희생되었다. 꽃다운 젊은이들의 희생에 그동안 잠자코 있던 버마 국민들은 분노했다.


1988년 8월 8일 8시 수도 양곤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불교 승려와 시민들이 대거 참여한 이른바 ‘8888 항쟁’이 일어났다. 군부는 언제나처럼 이들을 총과 칼로 진압하려 하였다. 그러나 진압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시민들의 분노는 그 이상으로 강해졌고 시위대의 규모는 커져갔다. 사태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고, 잔혹한 군부에 경종을 울리고 선량한 국민들의 대변인이 간절한 상황으로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기 시작했다.

 

그 해 4월 미얀마로 돌아와 오로지 어머니의 간호에만 힘쓸 뿐 정치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수 치는 8888 항쟁을 지켜보면서 더 이상 자신이 미얀마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중들은 국민영웅 아웅 산의 딸이 나서 군부를 꾸짖고 새로운 세상을 국민들에게 가져다 주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8월 15일 아웅 산 수 치는 정부에 국민들의 요구에 응할 것을 촉구하는 ‘화평안’을 제안했다. 


그리고 8월 26일 희생당한 시민 시위대의 시신이 안치된 양곤의 종합병원 앞에서 몇십만의 남녀노소 버마 국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민주화를 위한 연설을 하게 된다. 이것이 당신이 익히 들어본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 아웅 산 수 치 여사의 제2의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렇게 수 치는 미얀마를 일당 통치하던 사회주의 계획 당에 다원적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미얀마 민중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야당 세력을 망라한 국민민주연맹(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을 창당하고 그 의장이 되었다.

 

잔혹한 진압에 대한 국제적 비난과 민주화에 대한 거센 국민의 요구에 잠시 주춤했던 군부는 수 치의 인기와 거침없는 정치 행보에 당황했다. 하지만 군부는 결코 정권을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때문에 수 치를 그대로 둘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마지못해 퇴진한 네 윈 이후 신군부의 소 마웅은 다시금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그동안 소강상태였던 시위대에 대한 잔혹한 진압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1989년 7월 아웅 산 수 치를 가택 연금시킨다. 아웅 산 수 치를 국민들과 격리시키면 시위는 사라지고 군사 독재가 가능할 것이라고 단순한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수도인 양곤이나 대도시의 식자층만이 자신들을 반대할 뿐 국민 전체는 아직도 군대를 믿고 따른다고 여긴 군사 정권은 8888 항쟁 때의 약속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1990년 5월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국민들은 그리 어리석지 않았다. 


결과는 아웅 산 수 치가 결성한 민주 민족동맹(NLD)이 82%의 지지를 받아 압승하였다. 그러나 군부는 엄연한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평화로운 정권 이양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오히려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고 민주 인사 수 백 명을 투옥하였다. 총과 칼이 설치는 군부의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선거 시기만 피해보자는 생각으로 1년 기한으로 연금한 아웅 산 수 치의 가택연금을 무기한으로 연장하였다. 한때 민주주의의 봄이 오는 듯했던 미얀마에는 다시 암흑이 내려앉았다.


바로 그 이듬해, 1991년 수 치는 민주화 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평화상 수상식이 열렸을 때 그녀는 미얀마의 군부독재 세력에 의해 여전히 연금 상태에 있어, 두 아들과 남편이 그녀의 전면 사진을 들고 대신 참석했다.

노벨상 수상식에 대리 참석한 그녀의 남편 마이클 에어리스와 두 아들.

이후 1995년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수 치는 가택연금에서 6년 만에 풀려났지만, 1999년 남편이 영국에서 암으로 사망할 때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남편에게 가는 것마저 포기한다. 그리고 2000년 9월 2차 연금 조치로 양곤 밖으로의 여행조차 금지당하게 된다.

 

2000년 9월부터 유엔 특사 라잘리 이스마일의 중재 아래 수지는 군사정부와 정국 타개를 위한 비밀 협상을 벌여왔다. 그 결과 2002년 5월 미얀마 군사정부를 이끄는 국가 평화발전협의회(SPDC)는 수 치를 가택연금에서 해제했고, 그녀는 서방국가의 미얀마 원조와 관광 중단, 단교 등을 촉구했지만 현실은 가혹했고, 2003년 5월 미얀마 군정은 수지가 이끄는 NLD 지지자와 친 군정 지지자들 사이에 유혈 충돌이 발생해 수 치를 다시 구금했다.

2010년 11월 13일, 국제 사회의 압력을 받은 미얀마 군정은 수 치의 가택 연금을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야당의 손발을 묶어 야당이 보이콧을 선언한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을 거뒀기 때문이었다. 여당은 25%의 자동 의석을 더하여 75%의 의석을 차지했다.

 

사실 수 치가 미얀마 군정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음에도 왜 죽이지 않았는지 의아할 수 있다. 이것은 미얀마의 국민정서와 관련되어 있는데, 단순히 그녀가 야당 인사였으면 바로 죽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국부이자 초기 군부의 상징적 인물의 딸이었다. 그녀의 제거는 국부인 아웅 산 장군을 부정해버린 거나 다름없기 때문에 오히려 내부에서부터 동요가 발생해 또 다른 군사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 더 컸다.

 

결국, 2012년 4월 1일에 치러진 미얀마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 8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녀가 이끌던 NLD는 45개 선거구 중 43곳에서 승리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친군부계 통합 단결 발전 당(USDP)이나 정부군 소속 땃마도(Tatmadaw)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2012년 6월 16일, 노벨평화상 수상 21년 만에 노르웨이에서 수상 연설을 했다. 또한 2012년에 첫 해외 순방을 했다.

2015년 11월, 총선에서 수 치가 이끄는 야당의 압승한다. 선거 의석(전체 의석의 75%. 나머지 25%는 군부 몫의 직능 비례대표) 중에 88%를 쓸어 담으며 단독정부 수립(전체 의석 중에 67% 이상)에 성공한 것이다. 53년간 이어져온 미얀마의 군부 독재가 종식될 가능성이 처음으로 열린 것이다.

 

하지만, 외국인을 배우자로 둔 경우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미얀마 법 조항으로 인해 2016년 3월 수 치의 운전자 출신이자 측근인 틴초(Htin Kyaw)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코미디가 벌어진다.

틴초 대통령과 함께

2016년 외교부 장관과 대통령 자문역을 맡았으나 2021년 미얀마 군부에 의해 구금되었다. 수 치가 실질적인 권력을 가질 것으로 보였지만 여전히 막강한 군부의 권력과 이중적 권력 체제 때문에 미얀마에서 정치 불안과 쿠데타 우려는 상존해왔다. 사실 치안 및 안보, 국방 관련 등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군부가 쥐고 절대 포기하지 않았고 수 치 측에서도 청산하지 못했던 것이다. 미얀마에서는 대통령과 총리가 법제상 군 통수권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아킬레스 건 같은 사건이 이 즈음 일어난다. 바로 로힝야족 탄압 방관 사건이다. 2018년 12월 대한민국의 광주인권상을 박탈당하는 일도 이 사건이 이유였다. 하지만 미얀마 국민의 여론이 로힝야족을 축출하는 것에 동의했고 군부가 그 김에 쓸어버렸다는 것인데 그녀의 정치가 갖는 한계를 여실이 보인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노벨평화상의 취소도 고려되었을 정도로 그녀는 미얀마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많이 잃게 된다.

 

2020년 미얀마 총선에서 NLD가 압승하자 군부에서는 반발이 나오기 시작했다. 군부는 대법원에 대통령, 선관위원장 자격을 무효화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군 대변인 자우 민 툰 소장은 기자회견에서 “군부가 정권을 잡을 것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정권을 잡지 않을 것이라고도 역시 말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등 쿠데타를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그는 군 최고사령관 민 아웅 흘라잉이 이미 선거 때에 ‘부정직과 불공정’을 지적했다며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현 군부 수당 아웅 흘라잉

UN 등 국제사회는 군부의 이러한 막장 행보에 우려를 표명했다. 하지만 결국 군부는 2월 1일 쿠데타를 일으켰고 아웅산 수지는 다시 연금되었다. 미얀마군은 문민 통제는커녕 되려 자국군 통수권자를 자신들이 지명하고, 현역 군인들이 개헌저지를 위해 현역 의원으로 들어가 있는 등 사실상 정부의 통제가 불가능한 집단이었다.

 


 

당신이라면 당신의 아버지가 국부(國父)라는 그 중압감으로 정치라고는 해보지도 못한 그저 평범한 40대의 애 둘 키우던 전업주부에서 야당을 대표하는 정치 투사로 정치에 투신하여 그 수많은 세월을 가택연금을 당하고 그나마 정권을 잡았다고 하면서 군부의 꼭두각시 얼굴마담 노릇 정도만 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겠는가?

큰 아들이 태어나고 나서

사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미얀마 사태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고,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거나 군부를 축출해내는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내지 못한 수 치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바리가 총들도 정권을 찬탈했던 비슷하게 부끄러운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남의 일 같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물론 대한민국은 민중의 힘으로 그들을 축출했지만, 그러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고, 가택연금을 당했던 김영삼과 김대중이 대통령이 순서대로 되긴 했지만, 그들이 진정한 민주투사였거나 나라를 위했다고 평가되기엔 98% 부족함이 있다.


이 시리즈가 논어 읽기 시리즈가 아니니 그들에 대한 비평은 다음 기회 논어 읽기에서 하기로 하고 다시 그녀의 고된 삶으로 돌아와 보자.

 

엊그제 그녀가 첫 번째 공판에서 모든 것이 틀어박혀 80을 바라보는 나이에 4년을 선고받았다가 국제사회가 비난하자 군부에서 졸속으로 2년으로 형을 줄였다는 코미디 뉴스를 접했다.

그녀가 박근혜처럼 아버지의 영광을 등에 업고 정권을 창출하자는 의도가 없었던 것은 그녀의 인생을 봐도 그렇고 이후 그녀의 행보를 보더라도 명확해 보인다.

 

당신 역시 당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갑작스럽게 당신의 인생이 확 틀어지는 경험을 해보았거나 할 수 있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사업 실패가 그러할 수 있고, 부모님의 이혼이 그러할 수도 있을 것이며, 행복하려고 했던 결혼의 실패로 이어진 이혼이 그러할 수 있고, 너무도 사랑하던 남편이 혹은 아내가 갑작스럽게 내 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을 수도 있다.

 

옛 말에 이런 말이 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아버지가 사업이 망해서 대궐 같은 집에서 쫓겨나 반지하에 가서도 먹고살아야 하고, 갑작스러운 배우자의 죽음으로 황망하기 그지없는 상황에서도 배는 꼬르륵거리며 먹어야 산다고 당신에게 외친다는 말이다.


아웅 산 수 치가 마지못해 운명의 수레바퀴에 끌려 나온 이후, 그녀는 전문가도 아니고 실제로 대단한 정치 행보를 통해 업적을 보이지도 못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언제나 해왔다. 군인 출신도 아닌, 정치라고는 책으로 배운 것이 다였던 그녀가 아이만 키우다가 정치 선두에 서서 뭘 얼마나 대단한 혁명을 이뤄낼 것이라고 기대한단 말인가?


내가 오늘 그녀를 소개하는 것은 최근 외신에 핫한 미얀마 사태에 대한 당신의 궁금함을 채워주기 위한 단순한 의도가 아니다. 그녀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걷게 된 제2의 인생, 남편이 암으로 죽어감에도 내가 지켜야 할 조국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출국을 포기하는 결정이 아무렇지도 않고 쉬웠을 리가 없지 않은가?

당신에게 닥친 고난이, 실패가 그 서러움과 아픔이 당신에게만 집중되어 당신의 삶을 온통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당신만 괴롭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 잘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살아야 하고, 어쩌면 당신 건사해야 할 당신의 남은 가족들이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당신은 살아야 하고, 살아남아 그들을 지켜줘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당신을 위한 새로운 삶을 현실과 함께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겨내야만 한다. 그것이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살 길이기 때문이다.


내가 예상할 수 있는 고난과 좌절은, 부러 고난과 좌절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상되는 것은 준비하면 되고 피하면 된다. 그럴 수 없기 때문에 고난이고 좌절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변화형이다. 고착형이 아니란 말이다. 


당신의 삶이 굴러가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들러붙어 계속 같이 굴러간다. 어떻게 변형시킬지 어떻게 떼어낼지 아니면 그것을 어떻게 유용하게 사용할지는 그 수레바퀴에 타고 있는 당신이 선택하고 결정할 문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든든히 밥도 먹어야 하고, 그래서 힘도 키워야 하고, 더 많이 배워야 하고, 특히 당신을 그 운명의 수레바퀴에 고난과 좌절로 떨어뜨린 이유에 대해서 철저히 배우고 다시는 똑같은 일에 당황하지 않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만 한다. 그것을 준비하는 동안 또 당신이 모르는 고난과 좌절이 올 수 있을지언정 당신은 한번 준비를 해본 경험이 있기에 전과 똑같이 무력하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 과정을 미리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당신이 이 정도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깨닫고 알아들으리라 믿으니까.


앞으로의 당신의 더 나아질 삶을 응원한다, 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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