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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09. 2021

찢어지게 가난해서 고아처럼 자랐지만...

가난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연기로 승화시켜 세계 최고 희극배우로 인정받다.

1889년 웨스트 미들랜즈 지방의 집시 캐러번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모두 무대 연예인이었는데, 아버지가 가수였고 어머니가 단역배우였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곧 이혼했기 때문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른 형과 함께 살았다. 어머니가 후두염으로 목소리를 잃고 뮤직홀에 나갈 수 없게 되면서 몇 번씩 극단을 옮겨 다니다가 결국 연극 일을 포기하고 재봉사로 일하며 근근이 생계를 잇는 지경이 되었다. 


그는 이후 이 시절 겪은 배고픔을 평생 잊지 못했고, 이때의 경험이 훗날 영화들에 반어적으로 나타났다고 회고한다.


어머니는 생활고로 인해 마음고생을 하여 1895년부터는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나머지 정신질환에 걸리고 말았다. 어머니의 정신질환은 심각하여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며 수시로 정신병원에 들락거렸고, 그와 형은 함께 보육원에 맡겨지거나 아버지와 잠시 지내다가 계모의 학대를 못 이겨 다시 나오는 등 상당히 불안정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연기의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그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봤던 그의 아버지가 8살이던 그를 친구가 경영하는 ‘에이트 랭커셔 래즈(Eight Lancashire Lads)’라는 아동 극단에 입단하도록 주선했고, 그는 여기서 처음으로 코믹 연기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이 극단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배우의 길을 걷는 것을 반대한 어머니가 3년 만에 강제로 그를 퇴단시킨 것이다. 


한편 형인 시드니는 여객선의 나팔수 겸 급사로 취직했고, 이후 동생과 마찬가지로 연기에 재능을 보이면서 찰리보다 먼저 연예계에 뛰어들었다. 12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자주정신병원을 드나드는 어머니 때문에 고아나 다름없이 지내야 했다. 형의 권유로 ‘블랙모어 극단’에서 나이를 14세로 속여 오디션을 보았고, 여기서 ‘셜록 홈즈’ 연극에 꼬마 급사로 출연해 호평을 받았다. 


무려 3개국을 돌아다녔으며, 나중에는 런던으로 가서 연극 ‘셜록 홈즈’의 원작자(정확히는 아서 코난 도일과 공동집필)이자 연극에서 최초로 셜록 홈즈를 연기한 배우인 ‘윌리엄 질렛(William Gillette)’과 함께 연기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결국 연기력을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1908년(17세)에 당시 영국 최고의 인기 희극 극단 프레드 카노 극단에 입단하여 1913년까지 희극배우로서 명성을 쌓았다. 이때 미국과 프랑스의 순회공연도 다녀온다. 댄스·노래·어릿광대·몸짓 흉내·무언극 등 희극배우로서의 재질을 키우기 위한 수업을 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시절이었다.

영국의 배우이자 영화감독, 음악가이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코미디언이었던 희극영화의 거장, 우리에게는 찰리 채플린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본명 찰스 스펜서 채플린 주니어(Charles Spencer Chaplin Jr.)의 이야기이다.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에도 빠지지 않고 손꼽히는 영화계의 거장이자 20세기 영미권 연예계의 상징과도 같았던 전설로, 특유의 콧수염과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자신의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인물이다.

분장하지 않은 원래 그의 얼굴

1912년 카노 극단이 미국 순회공연을 할 때 영화제작자 맥 세네트은 그를 할리우드로 초청하였으며, 채플린은 여기서 큰 행운을 얻었다. 채플린의 탁월한 연기력이 키스톤 영화사의 맥 세네트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미국 영화는 발전단계에 있었고, 세네트는 희극영화 제작의 대가였던 것과 동시에 미국 영화의 개척자였으므로 채플린의 재능을 대성시켜 주는 후원자 역할을 하게 된다. 채플린은 키스톤 사와 영화 출연 계약을 맺고, 그 해 12월부터 주급 150달러를 받고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는 어떤 캐릭터를 만들어내야 할지 고민했다.

 

분장실로 가면서 헐렁한 바지와 커다란 구두, 지팡이에 중산모를 쓰기로 했다. 헐렁한 바지에 위에 꽉 끼는 상의를 입고 작은 모자와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는 큼지막한 구두를 신어 과장된 스타일을 연출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채플린의 캐릭터 ‘떠돌이(The tramp)’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에 나이가 조금 들어 보이게 콧수염을 붙이니 그야말로 안성맞춤. 채플린은 영화 속에서 매우 똑똑한 부랑자가 되었다.

당시 채플린은 자신이 설정한 이 캐릭터에 대해 맥 세네트에게 이렇게 설명했다고 말한다.

 

“이 인물에 대해 설명드릴 것 같으면, 정말 다재다능한 사람입니다. 뜨내기이면서 신사이자 시인이고 몽상가인가 하면 외톨이이기도 하죠. 항상 로맨스와 모험을 꿈꿉니다. 그리고 남이 자신을 과학자, 음악가, 공작, 폴로 선수로 알아주었으면 하지요. 그렇지만 겨우 한다는 짓이 담배꽁초를 주워 피우거나 아이들 코 묻은 사탕이나 뺏어 먹는 거예요. 그리고 가끔이기는 하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오르면 부인의 궁둥이도 서슴지 않고 걷어찹니다.”

 

처음으로 출연한 영화 <메이벨의 알 수 없는 곤경 (Mabel’s Strange redicament)>(1914)에서부터 채플린의 연기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 영화가 거듭될수록 애수를 띤 희극적인 부랑자는 대중의 자리에 깊게 각인되었지만, 채플린의 독특한 아이디어와 감각은 오히려 감독들과 불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명성을 얻은 채플린은 결국 스스로 감독이 되어 자신의 영화에 출연했다.

 

맥 세니트는 어떻게든 채플린을 억눌러두려고 했지만, 영화 상영업자들이 채플린의 작품을 계속 원했기에 어쩔 수 없이 채플린으로부터 영화가 망했을 시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1500달러를 받은 뒤에야 채플린에게 직접 감독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영화가 바로, <사랑의 20분(Twenty Minutes of Love)>, (1914)이다.

<틸리의 무너진 로맨스(Tillie's Punctured Romance)>

이후 채플린은 거의 일주일에 한 작품 꼴로 영화를 찍기 시작했고 점차 영화감독으로서의 테크닉과 스틸을 터득해 갔다. 한편 채플린은 1914년 11월 개봉한 키스턴 최초의 장편 코미디 영화인 <틸리의 무너진 로맨스(Tillie's Punctured Romance)>에도 주연으로 출연하였는데 영화도 초대박을 치면서 채플린은 키스턴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키스턴의 하드코어 한 스케줄에 지친 채플린은 결국 1915년, 키스턴에서 독립했으며 이후 에세네이, 뮤추얼 등 상대적으로 나은 조건을 제공하는 영화사들을 차례로 전전하면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시간의 여유가 생긴 채플린은 당시 그리 보편적이지 않았던 재촬영을 적극적으로 실시, 자신이 만족할 장면이 나올 때까지 계속 작업에 몰두하는 근성을 발휘하였고 당시 코미디 영화의 관객들이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노려서, 영화에서 당하는 사람들을 부잣집 신사, 콧대 높은 여성, 차별적인 경찰관 등으로 설정했다.

 

이러한 그의 전략은 먹혀 들어가서 채플린은 인형, 담배, 보드게임, 만화 등 자신을 모델로 한 각종 상품들이 만들어지는 것은 기본이고, 그를 흉내 내는 대회 등이 수시로 열릴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된다. 심지어 다른 배우들이 채플린의 연기를 무단으로 베끼거나 짝퉁 채플린 영화를 만드는 등의 문제까지 생겨서 골치를 썩기도 했다.

 

영화계에서 잔뼈가 굵을수록 채플린의 보수는 천문학적인 숫자로 치솟아 올랐다. 단 몇 년 사이에 채플린은 일약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가 된 것이다.

 

1917년 뮤추얼 영화사와 우호적으로 계약을 끝낸 채플린은 퍼스트 내셔널 영화사로 이적했는데, 이때부터는 감독과 각본을 담당한 것도 모자라서 아예 자기가 마음대로 돌릴 수 있는 스튜디오까지 지어놓고 작업하기 시작했다. 

또한 퍼스트 내셔널 시절부터 그는 당시로서는 꽤 참신한 특수 효과 등을 동원해서 더 짜임새 있는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 채플린은 첫 번째 부인인 밀드레드 해리스가 아이를 유산하자 밀드레드에 대한 애정이 식어 둘의 관계가 늘상 다투는 등 불안정한 사생활 때문에 슬럼프에 빠져서 다소 매너리즘에 빠진 범작들을 많이 내놓았다.

 

1919년. 채플린은 기존 거대 영화사들의 대병합에 대항하기 위해 동료 영화인들과 함께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라는 신흥 영화사를 창립하였고 1921년에는 밀드레드와 이혼 소송을 마무리하고 아역배우 재키 쿠건을 공동 주연으로 발탁, 희극과 비극을 섞은 참신한 구성의 영화 <키드>를 발표하며 성공적으로 재기하였다. 이듬해인 1922년에 개봉된 <순례자>는 개신교의 맹목적인 전도 행위를 풍자하여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파리의 여인>

1923년 본인은 영화에 출연하지 않고 희극적인 요소도 완전히 배제된 <파리의 여인>을 발표하면서 채플린은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 본격적으로 둥지를 틀었다. <파리의 여인>은 비평가들로부터는 대단한 호응을 얻었지만, 코미디 스타가 아닌 ‘진지한’ 영화감독 찰리 채플린을 인정하지 못한 관객들로부터 흑역사 취급당하면서 그때까지의 채플린 영화 중 최악의 흥행 성적을 냈다. 이 영화는 후에 다시 발성 영화로 재개봉했으나 역시 흥행하지 못했다.

 

결국, 코미디언으로 복귀한 채플린은 작정한 듯이 영화 작업에 몰입하며 <황금광 시대>(1925), <서커스>(1928), <시티 라이트>(1931), <모던 타임즈>(1936), <위대한 독재자>(1940) 등의 걸작들을 차례로 선보이면서 필모그래피만 보면, 제2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은 히트작을 낸 시기 내내 그는 고난이라고밖에 여길 수 없었던 힘겨운 일들을 겪게 된다.

 

1926년 1월, 크랭크인을 했던 <서커스>는 한 달 동안 촬영한 분량이 현상실의 실수로 흠집이 생겨서 전부 폐기한 뒤 재촬영을 해야만 했고, 같은 해, 9월에는 스튜디오에 원인 불명의 화재가 발생하여 촬영이 한 달간 전면 중단되었다.


1926년 12월에는 채플린의 두 번째 부인 리타 그레이가 이혼 소송을 걸어서 막대한 위자료를 요구하는 동시에 재판정에서 채플린이 자신에게 변태적인 성행위를 강요했다는 증언을 하면서 그의 이미지가 추락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이혼 소송이 진행되는 중인 1927년에는 갑자기 미국 정부가 100만 달러 이상의 탈세 혐의로 채플린을 기소하는 일까지 터지고 만다. 게다가 <서커스>가 개봉되기 직전인 1927년 10월, <재즈 싱어>가 개봉되면서 본격적으로 유성영화의 시대가 개막되어 위기를 맞게 된다.

 

1928년 1월 개봉한 <서커스>의 흥행은 성공적이었지만 영화계의 판도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바뀌는 것을 보고 무성영화 시대의 다소 과장됐지만 그만큼 풍부하고 감수성 있는 몸짓 연기를 몹시 사랑했던 채플린은 “영화는 끝났다. 더 이상 사람들은 상상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영화계 은퇴를 선언한다.

하지만 1931년 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자신의 다음 영화 <시티 라이트>를 무성영화로 만들어 개봉하면서 무성영화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초반부의 조각상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를 지직거리는 백색소음으로 처리함으로써 당시의 조악한 녹음 기술을 조롱하였다. <시티 라이트>의 첫 시사회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박사까지 참석했고 찰리 채플린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수여받는다.

 

유성영화의 시대가 열리며 그 변화를 바로 적응하기 시작한 채플린은 1936년 개봉한 <모던 타임스>에서부터 기계화와 자동화로 인한 실업 문제라는 사회 현실을 적극적으로 풍자하는 연출을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채플린의 모습은 나치로 인한 제2차 세계 대전의 징조, 소련의 대두 등의 외부적 문제와 결부되어 채플린이 ‘공산주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한다.

 

이후 채플린은 자신과 히틀러의 외모가 비슷하다는 것을 이용하여 '아데노이드 힝켈'이라는 독재자와 유대인 이발사라는 1인 2역으로 나치를 풍자한 <위대한 독재자>를 1940년에 완전 발성영화로 선보이는데 영화의 마지막의 연설 장면으로 인해 당시 제2차 세계 대전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했던 미국 정부로부터 미운털이 박히게 된다. 하지만 그즈음 미국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대한 강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시기였던 지라 큰 논란 없이 지나가게 된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 시대에 접어들고, 메카시즘으로 대표되는 빨갱이 사냥 열풍이 미국 전역을 휩쓸기 시작하면서 당대 미국인들 사이에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의 자유주의를 위협한다.”라는 여론이 강해지기 시작했고. 특히 부하들을 시켜 불법적으로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캐서 그들을 조종하는 것으로 유명한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 국장까지 채플린에게 이상할 정도의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FBI는 영국의 MI-5에 채플린의 과거에 대한 뒷조사를 의뢰하는가 하면, ‘조앤 배리’라는 여자와 접촉하여 채플린이 자신을 강간해 임신했다며 모해 소송까지 펼치게 하는 등 사방팔방으로 압박을 가했다.

 

조앤 배리와의 소송을 끝낸 채플린은 오슨 웰스가 프랑스의 연쇄 살인범 앙리 데지레 랑드뤼의 범행을 소재로 집필한 각본을 사들여 당시 미국의 높으신 분들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 영화 <살인광 시대>(1946)를 완성하고 개봉했다. 

<살인광시대>

그러나, “1명을 죽이면 살인범이지만 전쟁으로 100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라고 비꼬는 대사로 전쟁을 비판했더니 “전쟁터에서 싸운 병사들을 욕하고 있다.”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주인공 베르두가 돈 많은 여성들과 결혼, 살해하여 재산을 빼앗는다는 내용을 문제 삼아서 영화 검열 위원회와 가톨릭 풍기 위원회 등은 물론, 조앤 배리 사건과 영화를 연관시킨 관객들마저 채플린을 비난했고 채플린의 인기는 급락하게 된다.

 

결국 미국 활동에 염증을 느낀 채플린은 일종의 회고 영화인 <라임라이트>(1952)를 완성한 뒤 휴식 차 가족들과 영국을 방문한다. 하지만 여객선이 아직 영국에 도착하지 않았음에도 연방 정부는 재입국 허가를 무효화한다는 명령을 내렸고, 채플린은 주저하지 않고 유럽으로 활동 거점을 옮겨버린다.

 

이후 채플린은 주로 스위스에서 거주하면서 영국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식으로 생활했다. 영국에서 제작한 첫 번째 영화인 <뉴욕의 왕>(1957)에서 채플린은 로큰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면서 미국 대중문화의 방종과 퇴폐를 비판하였고, 후반부에는 자신의 부모님을 위해 동료들의 이름을 밀고하는 소년을 통해 매카시즘을 비판하는 등 대놓고 미국을 확실하게 까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할리우드에서처럼 자신이 영화 제작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는 시스템이 아니어서 특유의 개그 센스도 위축되었고 너무 미국을 편협하게 묘사하였다는 평론가들의 비판을 받았다.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1967)

1959년부터 1964년까지는 방대한 분량의 자서전을 집필했고, 마지막 영화이자 유일한 컬러 작품인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1967)을 제작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말론 브란도와 소피아 로렌이라는 주연에 유니버설 픽쳐스라는 거대 영화사의 제작이라는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구식 로맨틱 코미디 취급을 받으며 폭망 하고 만다.

 

1970년대 들어서 다리 부상 등으로 인해 점차 건강이 쇠약해지기 시작한 채플린은 신작을 만드는 대신 그동안 감독했던 영화들에 음악과 색을 입혀서 재개봉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때 채플린은 그동안의 영화계에 공헌한 업적에 대한 각종 상과 직위를 수여받았다. 1972년에는 영화 예술 아카데미가 바치는 명예상 시상식을 위하여 약 20년 만에 미국을 다시 방문하여 아카데미 시상식 참석자 전원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명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때 감격에 겨운 채플린이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한다.

https://youtu.be/J3Pl-qvA1X8


이후 말년에 뇌졸중을 앓게 되면서 더 이상 걷지 못하고 휠체어를 타야 했고 의사소통조차 제대로 하지 못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다. 결국 채플린은 1977년 크리스마스에 스위스의 브베에 있는 자택에서 잠을 자던 중 숙환으로 타계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 88세였다.


장례 후 약 두 달 뒤 돈을 노린 두 명의 엔지니어가 무덤을 도굴하고는 채플린의 가족들에게 유해를 되찾고 싶으면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 전화를 거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결국 그들은 바로 체포되고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이후 같은 묘지에 재매장하면서, 도굴 시도를 막기 위해 관 위에 어마어마 두꺼운 콘크리트가 씌워졌다.

희극연기를 하는 이들의 무대 뒤 감춰진 인간적인 모습은 때론 관객을 당혹하게 한다. 한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의 관객들은 그의 진짜 얼굴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저 그가 만들어낸 바보 같은 희극적인 동작과 잘 짜여진 그 연기만을 본다.

하지만 오늘 살펴본 그의 인생처럼 그는 가난에 찌들다 못해 자기 어머니가 노래를 하다가 흔히 말하는 삑사리가 나서 술 취한 관객들에게 욕설을 들을 때, 삑사리가 나던 부분을 그대로 흉내 내며 다시 분위기를 바꿔 동전을 팁으로 받는 비참하기 그지없는 연기를 하며 어렵게 어렵게 살아가야만 했다. 이후 자신이 쓴 자서전에서 그는 어머니의 그 수치스러운 모습을 자시니 다시 흉내 내어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았던 순간이 가장 후회되는 일이라고 회고하였다.


그의 코믹 연기가 코믹스러울 수 있었던 것은 그 코믹한 연기에 슬픔이 배어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대변하는 캐릭터와 연기를 주로 삼았고, 돈이 많은 이들에 대한 풍자를 주로 삼았다. 물론 주요 관객들의 심리를 만족시켜주는 효과도 노린 것이긴 했지만 그가 직접 배고파보고 멸시받았던 그 시절의 기억을 뼛속 깊이 새겼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난하고 못 입고 못 입었던 기억을 추억으로 되살리듯 연기하고 소재로 삼는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도 아니고 하고 싶은 일도 아니었음에도 그는 그것들을 발판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영화가 지향하는 방향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단순한 우스꽝스러운 상황이나 동작이 아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처지와 입장이 반전처럼 드러나곤 한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체험을 통해 이와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된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정작 가난한 영국인이던 그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준 곳은 미국의 할리우드였다. 하지만 그렇게 부와 명예를 갖게 되었지만 그는 2차 세계대전을 보면서 느낀 자신이 내야 할 목소리를 <살인광 시대 (Monsieur Verdoux)>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의 범죄성을 파헤쳤고 그만이 할 수 있는 풍자적인 기법으로 대중들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소리쳤다.


미국에서 그의 재입국을 막았을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그의 목소리가 일반 대중들에게는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지만, 그것을 읽어냈던 식자층들에게는 메시지가 확실하게 전달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이라면, 매카시 열풍으로 서슬이 시퍼렇던 시대에 올바른 목소리를 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이 위험해져 실제로 미국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수모를 겪을 위험을 감수하고 그럴 수 있었겠는가?


찢어지게 가난한 유년기를 통해, 바닥을 경험했던 이는 아무리 위로 올라가더라도 무서워서 다시 내려가게 될만한 위험한 짓에 자신의 신념을 걸기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고 이후에도 자신의 결정과 행보에 아무런 후회를 보이지 않았다. 그의 그런 메시지 전달은 그가 영국인이었음에도 영국으로 돌아가 지내지 않고 중립국이던 스위스에서 지낸 것으로 지속적으로 전달되었다.

당신에게 혹은 당신의 부모님 세대에 차마 말하기 어려웠을 정도의 가난함이 있었을 수도 있다. 가난은 불편한 것이지 창피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부와 명예를 얻어 다시 상류층이 되었다고 하여 자신의 과거를, 혹은 자신의 부모를 부끄러워하는 것은 인간이 할 도리가 아니다. 그는 당당하게 자신의 가난한 시절이 자신의 연기 바탕이 되었고, 감독으로서 상당한 자양분이 되었다고 자랑스러워하였다. 당시 가난은 자신의 잘못도 아니었고 그것을 죄스러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혹 가난하다는 이유로, 남보다 못 가졌다는 이유로 사춘기의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창피하고 쪽팔리고 나중이라도 그것을 다시 입에 올리기 싫을 수는 있다, 사춘기라는 정서적 특수한 상황을 감안해서만이 이해된다는 의미이다.


아무것도 없을 때, 정의를 외치고 신념을 외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부와 명예를 가진 입장이 되었다고 옛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것을 지키겠다고 보수적으로 변해버리고 더 가진 자들과 같은 편이라는 착각을 하며 옳은 것에 대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가난하고 없는 자들, 옳은 것에 힘을 실어야 한다고 외치는 자들을 무시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채플린의 영화에서 나오는 풍자의 대상이 되는 배 나오고 있는 척하는 졸부들에 불과할 뿐이다.


무성영화에서 슬랩스틱 캐릭터로 단련되기만 했던 그는, 유성영화의 탄생과 함께 은퇴를 실제로 선언하며 더 이상 자신은 무언가를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포기한다. 하지만 그렇게 그는 포기하며 인생을 망치지 않았다. 


그 이후 그의 인생은 여러 사람의 질시와 음모와 불운으로 연이어 엎어지고 뒤집어졌지만, 그는 은퇴를 번복하고 유성영화에 적응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와 노력을 거듭하여 유성영화에도 통하는 채플린만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정작 그의 제2의 전성기는 그의 인생이 바닥으로 치달았다고 할 정도로 다사다난했던 시기였다.


그가 단순한 웃기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를 웃을 수 있게 해 주었던 대배우이자 감독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난관 속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자세와 노력으로 모든 역경을 꿋꿋이 이겨낸 다음의 미소를 보였기 때문이다.

당신의 삶이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왜 나만 이러냐고 속상하고 억울한가?

아니다. 당신이 기억하는 콧수염을 실룩거리던 그는 내내 눈물을 쏟아내야만 했고, 억울하게 자신이 살던 터전에서 불명예스럽게 쫓겨나기까지 해야 했지만, 당신에게 웃는 모습으로만 기억되지 않는가?


훗날,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그 모든 시련들을 이겨내고 미소 지으며 지난 시련을 추억이라 말할 수 있는 그날, 당신에게도 당신의 지난 모든 날들이 후회가 없었노라고 말하려면 일단 당신이 지금 시련이라 여기는 그것을 이겨내야 하지 않겠는가?


마냥 웃고 있는 그의 미소가 깊은 것은 이겨낸 시련의 골짜기가 그만큼 깊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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