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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10. 2021

고등학교 중퇴에, 남편이 유부녀와 불륜인 것을 알고도,

전 세계인들에게 존경받는 당당한 봉사활동으로 자신을 되찾다.

1961년, 노퍽 주 샌드링엄에 위치한 왕실 별장 파크 하우스에서 귀족 가문의 1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이름은 먼 조상인 존 처칠의 외손녀 베드퍼드 공작부인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녀가 태어난 샌드링엄은 과거 엘리자베스 2세가 퍼모이 남작 부부에게 마련해준 곳으로, 외갓집이기도 한 이곳에서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은 대체로 불행했다고 한다. 이미 딸이 둘이나 있었던 백작 부부는 후계자가 될 아들이 아닌 것에 실망했고, 그 실망을 아기인 그녀가 커가며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강하게 전달했다고 한다.

4년 후 그녀의 남동생이 태어나면서 아들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는 듯했지만, 부모님의 갈등은 더욱 심각해져만 갔다. 매일같이 큰소리로 다투었고 어머니는 자주 울었다고 한다. 유모가 너무 자주 바뀌었고, 모든 것이 불안정했으며,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것을 문 뒤에 숨어서 지켜볼 때도 많았다고 그녀는 회상했다.

 

결국 그녀가 6살이 되던 1967년에 두 사람은 별거를 시작했고, 처음에는 어머니와 함께 런던에서 지냈으나 양육권 문제로 다시 샌드링엄으로 돌아갔다. 부모님이 정식으로 이혼한 것은 양육권과 재산권을 다투는 2년간의 법정분쟁이 끝난 그녀가 8살 때의 일이었다. 그녀는 매주 주말마다 형제들과 함께 어머니를 런던까지 보러 갔는데, 어머니는 자식들이 헤어질 때면 매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아버지는 결코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식들에게 다정한 포옹도 해주지 않고 언제나 다른 일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두 언니들은 켄트의 기숙학교에서 지내고 있었으며, 샌드링엄에는 다이애나와 남동생 찰스 단 둘 뿐이었다. 이후 그녀 역시 상류층 딸들이 다니는 명문 사립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리들스워스 홀 시절의 다이애나. 중간줄 가운데에 있는 소녀.

학창 시절의 스포츠를 좋아해서 수영과 테니스, 댄스를 잘했다. 학교 수업을 좋아했는데 특히 발레와 피아노를 즐겼다고 한다. 그녀가 입학하고 얼마 뒤 학교 안에 커다란 홀이 만들어졌는데, 밤이 되면 그곳에서 몰래 음악을 틀고 몇 시간씩 발레 연습을 하곤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당시 함께 기숙학교를 다닌 동창으로 틸다 스윈튼이 있다.

 

1975년, 14살에 친할아버지인 7대 스펜서 백작이 사망하자 당시 울소프 자작이던 아버지가 백작위를 계승하고, 역대 스펜서 백작들의 가족 저택인 울소프 저택(Althrop)에 입성한다.


언니들과 남동생은 학교에서도 알아주는 수재였지만, 형제 중엔 유일하게 공부를 워낙 못해서 고등학교 졸업시험조차 통과하지 못해, 최종 학력은 고등학교 중퇴였다. 워낙 소극적이고 내향적인 성향이 큰 이유였고, 그것 때문에 내내 열등감을 느껴야만 했다.

학력이 짧았던 탓에 제대로 된 전문직을 직업으로 갖지는 못했고, 상류층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에서 시간제 보모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다른 사람을 돌보고 도와주는 일이 적성에 맞았고, 이 일을 하면서 존재감을 인정받고 행복을 느낄 정도로 아이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또, 유치원에서 일하면서도 친분이 있는 귀족들의 자녀를 돌보는 베이비시터로도 일했다. 왜 귀족이면서 일을 했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영국의 귀족은 생계를 위해 일하지는 않지만, 전통상 자기 직업을 갖고 활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실 그녀의 가문이 워낙 부유했던 덕분에, 고등학교 중퇴 후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해 런던에 아파트를 얻어 친구와 살 때도 그 아파트를 그녀가 태어나자마자 외할아버지가 사준 그녀의 소유여서, 친구들에게 방세를 받았다고 하는 런던의 집값이 워낙 비싸 생활비로는 충분했다.

프린세스 오브 웨일스, 왕위 계승 서열 2위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윌리엄 왕세손)과 서식스 공작 해리의 어머니로, 1981년 ‘찰스 왕세자’와 혼인해 영국인들은 물론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우리에게는 ‘다이애나 비(妃)’로 익숙한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Diana Frances Spencer)의 이야기이다.

 

순탄하지 못한 왕실 생활과 불화 끝에 1992년부터 별거에 돌입한 후 1996년에 이혼했다. 이혼 후로도 자신이 가진 영향력을 활용하여 봉사와 자선활동에 헌신하여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지만, 이혼 다음 해인 1997년 8월 31일 프랑스 파리에서 파파라치들의 추격을 피하다가 교통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여 전 세계적인 애도를 받았다.

다이애나가 찰스 왕세자의 남동생 앤드루 왕자와 소꿉친구라 아주 어릴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다이애나와 찰스가 서로를 제대로 인지하면서 처음 만난 것은 다이애나가 17세 때의 일이었다. 사실 그녀의 언니 사라와 8개월이나 좋은 만남을 이어가던 언니의 전 남친이었다.


자연스럽게 언니와 멀어지면서 그녀에게서도 왕세자의 기억은 지워져 갔다. 그러부터 3년 후, 런던의 아파트로 나와 독립한 20세의 그녀가 다시 소극적인 성격에서 활발해지며 가장 행복하다고 느꼈던 자유를 느끼기 시작하던 시기에 그 둘은 아주 우연하게 만나게 된다.

 

존경하던 친척을 잃은 찰스 왕세자를 위로하는 모임에 초대받은 다이애나는 우연히 찰스 왕세자의 옆자리에 앉게 되고 그녀 다운 따뜻함으로 왕세자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고, 12살이나 어린, 마냥 어린 소녀로만 기억하던 그녀가 성숙한 아가씨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마침 상심의 시기에 그녀의 위로를 받으며 찰스 왕세자는 그녀에게 갑작스레 호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다이애나는 여러 면에서 찰스 왕세자가 찾던 여인이었다. 영국 왕세자의 비가 되기 위해서는 성공회 신자이고 결혼한 적이 없는 처녀이며 왕족이거나 귀족 가문 출신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는데 다이애나는 이 모든 조건에 합당했다. 거기다 그녀는 아름답고 건강했으며 무엇보다도 순진무구했다. 그리고 마침 힘들어할 때 자신의 곁을 지켜주고 따스하게 위로해준 여자였던 것이다.

소나기처럼 몰아치는 찰스 왕세자의 데이트 신청과 왕세자와의 데이트가 거듭될수록 증폭되는 언론과 세간의 관심 속에서 기자와 파파라치가 유치원 보모로 일하던 다이애나에게 달라붙어 왕세자와의 관계를 캐물었고, 연애 기간 내내 각종 언론들과 파파라치들이 다이애나에게 열광했다. 쏟아지는 세간의 폭발적인 관심이 절정에 달할 무렵 다이애나는 찰스 왕세자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만남부터 결혼까지 모든 것이 주변에 의해 일사천리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결혼 며칠 전 다이애나는 문득 자신이 찰스 왕세자의 진짜 마음을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그에게 사랑을 묻자 찰스 왕세자는 흔쾌히 대답했다.‘사랑하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든(I love you, whatever love means.)’. 이 말은 결혼식 중 주교의 질문에도 다시 한번 반복되었다 ‘사랑하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든’. 매우 기묘한 말이었다. 사랑한다는 말 뒤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든’을 붙인 찰스 왕세자의 진심은 신혼이 시작되자마자 곧 밝혀졌다.

1981년 2월 24일, 왕실은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스펜서 두 사람의 약혼을 공식 발표했다. 그리고 5개월 후인 7월 29일 세계인 수억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세기의 결혼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때 다이애나의 나이는 불과 스물이었다.

 

‘20세기의 신데렐라’로 불리며 새로운 왕세자비가 된 다이애나를 본 세계인은, 그녀의 매력과 아름다움에 열광했다. 많은 사람이 이 부부가 앞으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지내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이애나가 입은 의상과 착용한 장신구는 당대의 패션을 선도하는 유행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고, 영국의 왕실은 더할 나위 없이 가족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흥분 속의 세기의 결혼식과 신혼여행을 거치며, 다이애나는 ‘결혼식이 끝났으니, 더 이상 언론들이 나에게 큰 관심을 갖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했던 그녀의 착각이었다. 파파라치들은 끊임없이, 다이애나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그녀를 괴롭혔다.

 

그리고 다이애나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사진에 찍혔던 여성 인물(The most photographed woman in the world)’이 된다. 실제로 이 말은 타임이나 뉴스위크 같은 대중지에서 다이애나를 표현할 때 자주 인용되는 문구가 된다. 다이애나는 20세기 통틀어 그 어떤 연예계 스타나 정치인보다도 더 많은 대중의 관심을 받았고, 그만큼 사진도 많이 찍혔다.

남편인 찰스는 다이애나와 결혼하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카밀라 파커 볼스와 연인이었다. 카밀라가 이미 앤드류 파커 볼스와 결혼한 유부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불륜은 계속되었다. 다이애나는 남편의 마음이 본인에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찰스가 본인과 결혼한 이유가 ‘왕위를 계승하고 그러기 위한 전시용 왕세자비라는 적당한 인형을 마련하기 위함’이었음을 깨닫고 절망했다.

 

사실 찰스가 카밀라를 그렇게 사랑하고 그 사랑을 이루려고 했다면 지금 그의 둘째 아들 해리가 할리우드 영화배우와 한 것처럼 왕위 계승을 포기하고 사랑을 찾았으면 되었다. 하지만 찰스는 ‘왕위 계승권’과 ‘사랑’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 중 어느 하나도 놓치기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중을 속이고 왕세자로서의 인기를 얻으려고, 젊고 아름다운 데다 ‘성공회 신자’인 다이애나와 사랑도 없는 결혼을 한 것이었다. 그는 심지어 신혼여행 중에도 카밀라가 선물한 커프스를 달았다.


결혼한 다이애나의 눈에 찰스의 불륜과 간통 정황이 보이지 않았을 리 없었다. 당연히 그녀는 화를 냈고, 카밀라와의 관계를 청산하라고 여러 번 요구했다. 그러나 찰스는 오히려 “다이애나가 괜한 걸로 트집 잡아 오해한다.”며 뻔뻔하게 카밀라와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다이애나는 자살 시도에 거식증과 폭식증으로 심신이 황폐해져만 갔다.

결국 찰스를 차지한 카밀라 파커볼스

다이애나의 15년 간의 왕실 생활도 결혼생활 못지않게 괴로웠다. 그것은 주변에 마음을 터놓은 사람이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주변의 다른 왕족들 중 대부분은 딱딱하고 감정 표현을 지나치게 절제했다. <다이애나의 회고록>에 따르면, 다른 왕족들은 감성적이고 뭐든 진심으로 국민들을 대하는 다이애나를 골칫덩어리라고 여겼다. 그들은 외부인 출신 며느리인 다이애나 스펜서와 사라 퍼거슨을 은근히 소외시켰으며,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것에도 두 며느리를 번번이 제외시켰다. 왕족들은 찰스와 비교도 안 될 만큼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다이애나에 대해 비밀리에 악의적으로 타블로이드 기사를 내도록 지시했으며, 왕실이 결정한 일도 마치 다이애나가 문제인 것처럼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데에 바빴다.

 

다이애나의 왕실 생활이 계속될수록 왕궁 내에 그녀의 적들이 많아졌다. 궁정인들은 다이애나의 전화를 도청했으며 휴지통을 뒤져 그녀가 사용한 서류를 찾아내기도 했다. 그녀를 감시하는 궁정인들의 행보와 숨 막힐 듯하고 폐소 공포적인 왕실 생활에 다이애나의 불안감과 우울함은 고조되었다. 다이애나는 찰스뿐만이 아니라, 은근히 자신을 따돌리는 왕족들과 가식적이며 허울뿐인 군주제에 불만을 품었다.

시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함께

다이애나는 그녀가 국민들을 만날 때 혹은 공무를 수행할 때에도 다른 왕족들과는 달리 그녀의 마음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말과 행동만을 했다. 가식적인 왕실에 질려버린 다이애나는, 훗날 자신의 아들들에게도 감정표현을 솔직하게 할 수 있는 ‘개인’으로서 자라날 수 있도록 가르쳤다.

1983년, 켄싱턴 궁전에서 취재진들에게 아들 윌리엄 왕세손을 보여주고 있는 다이애나.

후에 다이애나가 1995년, 마틴 배셔와의 인터뷰 도중에 말했듯이, 왕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저 참거나 혹은 꼭두각시처럼 조용하게 왕세자의 옆을 지켜주지 않는 그녀를 못마땅했다. 다이애나는 다른 왕족들과는 다르게 통통 튀었고, 자꾸만 왕실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그렇게 왕실은 '다이애나는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왕비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이애나는 시어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에게 찰스와 카밀라의 불륜을 호소하기에 이르지만, 다이애나의 간청을 들을 때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왕세자는 구제불능이구나.”라는 대답만 반복하며 자기 아들을 꾸짖지도 않았고 그들의 불륜을 방관했다. 유일하게 시아버지인 필립 마운트배튼 공만이 다이애나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아픔을 위로해주었다. 왕세자 부부의 화목한 모습을 바라는 대중을 위해 끊임없는 언론플레이를 실시하고, 다이애나는 언론플레이에 맞춰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일을 반복하였다.

 

결국 다이애나는 살기 위해 자신의 관심을 왕실 내부가 아닌 외부로 쏟기로 결심한다. 왕세자비라는 지위로 대외 활동에 나선 다이애나에 대한 영국 국민의 인기는 매우 높아졌고, 왕실은 찰스 왕세자를 대신해 인기를 독차지한 다이애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규제하며 다이애나를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분노한 다이애나는 더 이상 참고만 있지 않았다.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 파커 스가 보란 듯이 승마 교관이었던 제임스 휴이트와 맞바람을 피우는가 하면, 왕실 근위병 및 경호원들과의 연애를 하며 염문설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왕실 전기 작가의 손을 빌려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과 왕실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모두 폭로, 고발하는 책을 출판하고는 1992년 12월 9일부터 별거에 들어갔다. 다이애나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자기 고백보다는 왕실에 대한 고발에 가까운 것이었다.

별거에 돌입한 다이애나는 비교적 자유로워졌으나, 그녀를 향한 파파라치와 각종 언론들의 폭발할 것 같은 관심에 그녀의 마음은 점점 피폐해졌다. 결혼 생활 정리와 의전 문제를 마무리 짓느라 시간이 흐르는 동안, 1995년 11월 BBC와 인터뷰한 다이애나는 “왕실과 남편이 체면치레를 위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며 대놓고 비난의 칼날을 세웠고,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인터뷰 직후 그녀와 찰스 왕세자를 불러들여 이혼을 지시했다. 결국 1996년 8월 28일 최종적으로 찰스와 이혼에 성공(?)했다.

 

‘마마(Her Royal Highness)’라는 경칭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왕위 계승 서열 2위와 3위 왕자의 어머니라는 점을 참작하여 ‘왕세자비(Princess of Wales)’이라는 직함은 유지하고 양육권을 나누어 가졌으며, 이전부터 살던 켄싱턴 궁전에 계속 거처할 권리와 함께 1,700만 파운드 위자료를 받았다.

 

그 난리를 치고 찰스 왕세자는 기어코 카밀라 파커 보울스와 재혼에 성공한다. 그녀는 웨일스 공비(=왕세자비) 칭호를 얻기는 했으나, 콘월 공작 부인(Duchess of Cornwall)으로 불린다. 사실 영국 헌법부에서는 “찰스 왕세자가 즉위한다면 카밀라가 왕비(Queen consort) 칭호를 쓸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으나, 하원의 반대와 국민들의 여론에 밀렸다. 또한 추문을 일으킨 탓인지 왕실은 왕의 배우자(princess consort)를 쓰도록 정했다.

비록 찰스 왕세자의 진심 어린 사랑은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슬하에 두 아들 윌리엄 왕세손과 해리 왕자를 출산해 차기 대통을 잇는 왕세자비로서의 의무를 다한 다이애나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신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아들들을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으로 양육하였다. 동서고금 어린 왕자와 공주의 양육을 유모에게 맡기는 왕실에서, 다이애나는 이례적으로 모유를 먹이며 두 아들을 직접 돌보는 양육법을 고수하였다.

 

어머니의 따스한 보살핌 아래 성장한 윌리엄과 해리는 미래의 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세대로 부각되었으며, 왕실에 오만 정이 떨어진 다이애나가 마음을 붙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녀는 본인이 어렸을 때처럼 부모의 이혼으로 자식이 불행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결혼 생활을 15년간 지속했다. 애정결핍이 심해, 유모를 더 따르는 윌리엄을 보고 첫 번째 유모를 바로 해고하는 모습도 보여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자선과 봉사에 열성적이었던 다이애나는 테레사 수녀와도 가까워졌는데, 공교롭게도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가 급서한 뒤 1주일도 지나지 않은 같은 해 9월 5일 테레사 수녀도 선종하여, 언론들은 ‘세계는 연인과 어머니를 모두 잃었다.’며 추모했다.

1997년 1월, 앙골라를 방문해 대인지뢰 제거 현장을 찾은 다이애나

이혼 후 1년간은 다이애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그녀가 말했다고 한다. 비록 왕세자비의 지위를 잃었다 해도 봉사활동을 통해 쌓은 그녀의 세계적 명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왕세자비라는 답답한 옷을 벗어버리고 날개를 단 듯 더 자유롭게 자신의 행보를 결정해나갔다. 그녀는 세계적 명사들과 함께 AIDS 환자들을 도왔고 대인지뢰반대 운동에 나서 미국과 프랑스 등에서 결과를 이끌어 냈다. 남편 찰스 왕세자의 불륜에 지쳐 맞바람으로 대응하던 지난날의 음습한 남녀관계가 아닌 대명천지에 떳떳한 사랑도 할 수 있게 되었다.

1997년 다이애나는 여름휴가를 애인과 함께 보냈다. 그녀의 애인은 영국 최고급 백화점인 해롯백화점을 운영하는 이집트인 모하메드 알 파예드의 장남 도디 파예드였다. 도디 파예드는 <불의 전차> 등 을 제작한 할리우드 영화제작자였으며 다이애나 스펜서를 만나기 전까지는 상류층 사이에 꽤나 바람둥이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지중해에서 꿈같은 여름휴가를 보낸 두 사람은 파리로 돌아왔다. 도디 파예드는 이곳에서 다이애나에게 청혼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다이애나도 그의 청혼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파리 시내의 리츠칼튼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끝내고 호텔이 제공한 벤츠에 오르자 그들의 연애에 초미의 관심을 보이던 파파라치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자동차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빗발치는 카메라 세례를 벗어나기 위해 차는 과속했다. 그리고 운명의 지하차도로 접어들자마자 벤츠는 중심을 잃고 기둥으로 돌진했다. 차는 미끄러져 한 바퀴 돈 다음 반대 방향으로 멈춰 섰다. 도디 파예드와 운전사 앙리 폴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다이애나 스펜서는 앞자리와 뒷자리에 끼어 치명적 중상을 입고 정신을 잃었다. 뒤따라오던 파파라치의 행렬이 차 옆에 섰다. 그들은 차의 뒷 문을 열고 죽어가며 괴로워하는 다이애나 스펜서를 향해 구조의 손길은 뻗치지 않고 카메라 플러시를 터뜨렸다. 심하게 파손된 차량 상태로 인해 다이애나는 사고 발생 30분이 지나서야 차에서 꺼내졌고 심정지가 발생했다. 심폐소생술로 간신히 맥박이 다시 뛰긴 했지만, 후술 할 프랑스 응급 의료 서비스인 SAMU는 어째서인지 20분 후에나 도착했고 현장 이탈 또한 20분이나 지나고 이뤄졌다.

당시 사고 현장

결국 사고 발생 약 2시간 만에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다이애나는 사망하게 된다.

스무 살, 찰스 왕세자와 데이트가 시작된 순간부터 언론의 카메라 세례 때문에 고통받았던 다이애나 스펜서는 영국의 왕세자비였다는 이유로 누구에게도 구조받지 못한 채 번쩍이는 카메라 불빛 속에서 36세의 짧은 생을 마쳤다.

 

다이애나의 갑작스러운 사고사는 세계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특히 다이애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대단했던 영국 국민의 상실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영국 국민들 한 명 한 명 모두 다이애나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했다.


다이애나의 행보는 왕실에 대한 거부감이나 반발이 강했던 노동자 계층이나 서민 계층, 심지어 공화주의자 계층에게서도 진심으로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다이애나의 인생에 대한 재평가가 속속 이루어지는 가운데, 다이애나의 죽음을 애도하는 꽃다발이 생전에 거주하던 켄싱턴 궁전 앞에 쌓이기 시작했다.

켄싱턴 궁전 정문 앞에 쌓인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꽃다발들

하지만 왕실은 찰스 왕세자와 이혼하여 왕실을 떠난 다이애나의 죽음에 쌀쌀맞은 태도로 일관했다. 왕실의 차가운 반응에 그렇지 않아도 엄청난 상실감에 휩싸여 있던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왕실이 다이애나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다는 여론이 떠올랐다.


이로 인해 왕실에 대한 영국 국민의 분노는 이례적으로 극도로 커져갔으며, 당시 영국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가 이례적으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다이애나의 죽음을 왕실이 추모할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왕실은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여 다이애나의 장례식을 왕실장으로 치르고 전 세계에 텔레비전으로 방영했다. 당시 그녀를 위한 추모곡으로 불린 것이 그 유명한 버니 토핀이 개사하여 엘튼 존이 부른 <Candle In The Wind>이다.

https://youtu.be/7BrtCtv44Vg


한국의 무식한 언론에서 그녀를 유치원 보모였다가 왕세자비가 되었다며 떠들었던 뉴스가 떠오른다.


그녀는 영국 황실에 대등할만한 어마어마한 재부와 명예를 갖춘 귀족 가문의 자녀였다. 물론 그녀가 불화로 인해 제대로 된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고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며, 세상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온실 속의 화초로 자란 것은 불변의 사실이다.


그런 그녀를 이 시리즈에서 내가 당신에게 오늘 소개하는 이유는 멋모르고 결혼하고 아이까지 둘 낳고 윈도우 행세를 하던 그녀가 아닌 그 이후에 보인 그녀의 단호한 행보를 소개하고자 해서이다.

 

그녀는 남편의 불륜을 눈감고 황실의 체면을 내세우며 자신의 희생을 강요하는 무려 ‘여왕’ 시어머니를 언론과의 인터뷰로 코너에 몰았다. 남편이 불륜을 벌이니 자신도 사랑은 없었지만 당당하게 맞바람을 피워 불만을 표했고, 별거하면서도 이혼을 거부하는 시어머니를 언론과의 인터뷰를 무기로 이혼을 받아냈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던 세상모르는 귀족 아가씨가 세상을 알고 자살을 시도하고 거식증으로 힘겨워하면서도 그녀는 변모된 모습을 보인다.


왕세자비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 전 세계 어디라도 갔고, 위로와 도움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혼하고 새로 애인을 사귀고 자유로운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살면서도 자신의 행보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자신을 쫓는 파파라치를 두들겨 패기도 하고, 법원을 통해 접근금지명령도 받아내는 등 확연히 달라진 당당함으로 변모해 있었다.

 

서른여섯 살. 그녀가 알아야 뭘 그렇게 알고 경험해봐야 뭘 그렇게 경험했겠는가? 하지만 시작부터 잘못된 15년간의 지옥 같은 결혼생활을 버티고 이겨냈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삶을 쟁취해냈다.

 

최근 대한민국에 이혼한 사람이 4명 중 1명이라는 어림치 통계가 나왔다. 정확성을 굳이 따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혼율이 높아지고 홀로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고 한다. 남녀가 서로 헤어지는데 얼마나 수많은 사연과 이유가 있겠는가만은, 말도 안 되는 거기서 거기인 것들이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이혼 말고, 정말로 자신들의 체면을 위해 다이애나를 이용했던 찰스 같은 놈들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일반화되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대한민국에서 이혼은 흠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전통적인 사고방식이고 그럴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옳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자신을 희생하거나 자책하는 것은 그것보다 수천수만 배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이다.

세상의 어떤 흠도 당신의 영혼을 갉아먹으며 당신을 홀대하는 것보다 더 클 수는 없다. 더구나, 그저 이기적인 측면이 아닌, 그들의 사악한 욕심에 휘둘려 당신의 삶을 상처 주거나 당신의 미래가 손상되는 일은 일찍 손절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다시 당당하게 당신의 잃어버린 삶을 빨리 되찾아 하루라도 빨리 예쁘게 다시 만들어나가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혹여 체면 때문에, 부모님 때문에, 경제적 이유 때문에 말도 안 되는 부당한 꼴을 당하면서까지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마지막으로 핑계를 삼고 싶어 하는 당신의 아이가 원하지 않는 일임을 내가 지금 여기서 알려준다.


아주 쉽게 이야기해준다.

당신이, 이혼이 흠이어서 아이들 때문에 이혼을 못한다면, 이혼을 하고 나서의 삶을 그려봐라. 그 삶도 분명히 장단점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불합리한 삶이 주는 장점보다 홀로서기의 삶이 당신과 당신의 아이에게 더 낫다는 그림이 그려진다면 당신은 바로 현실적인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것이 맞다.


세상에 짐승보다 못한 것들이 다른 사람과 정을 통하면서 결혼으로 배우자를 묶어두려는 것들이다. 그런 것들에게 더 이상 사람 대우를 해주는 것은 당신의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다.

당신이 얼마든지 당당하게 홀로 설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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