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Dec 13. 2021

미국 대표로 따낸 금메달을 오하이오 강가에 던져버리고서

자신의 인생을 다시 일궈내 영원한 챔피언으로 기억되다.

1942년 1월 17일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캐시어스 마셀루스 클레이 주니어였다. 그가 살던 곳은 특히 인종차별이 심한 곳이었다. 극심한 차별대우를 받는 가운데, 그는 늘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생각했다. 그것이 자존심 강한 훗날의 그를 만들게 되는 기반이 된다.


그에게는 남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늘 버스비가 없었기 때문에 달리는 버스를 쫓아가는 내기를 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날렵한 몸놀림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어린 시절의 가난으로 인해 우연치 않게 매일을 달려야만 했던 환경 때문인지도 모른다.

 

클레이가 권투에 입문한 것은 참으로 우연이고 얄궂은 운명과도 같았다. 열두 살 때였다. 친구 조니 윌리스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잠시 비를 피하기 위해 자전거를 밖에 세워두고 극장에 들어가 비가 그치고 나와보니 자전거가 없어져 버린 것이 아닌가? 클레이는 경찰서에 신고하러 가서 씩씩거리며 당시 담당 형사이던 조 마틴에게 “자전거를 훔친 놈을 잡으면 한방 먹일 거예요!”라며 소리쳤다. 이에 형사는 “한방 먹이는 것을 정말 하고 싶다면 복싱 체육관부터 가라.”라고 농담을 던졌다.

이때 클레이는 뭔가 머리를 탁 때리는 충격을 받고 목표라는 것을 세우게 된다. 차별대우받는 흑인이 세상을 이겨나갈 수 있는 방법이라면 어쩌면 권투로 출세하는 길 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사각의 링 안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실도 그때 알게 된다. 단순히 자전거 도둑을 혼내주려던 계획은 결국 그의 인생을 바꾸는 큰 포부로 바뀌게 된다.

 

그렇게 복싱을 배우기 시작하던 어느 날 훈련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라디오를 켰는데, 마침 권투 중계방송 중이었다. 라디오에서 “우리의 헤비급 세계 챔피언, 록키 마르시아노입니다!”라는 흥분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영화 <록키>의 배경이 된 바로 그 경기, 맞다.). 클레이의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당시의 기억을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뼈를 통과하는 싸늘한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그 멘트처럼 나에게 큰 영향을 준 말은 없었습니다.”

권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꼽히는 전설이자,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도 손꼽히며 흑인 민권 운동에 몸담았으며 공개적으로 베트남 전쟁의 징집을 거부하는 등 사회 정의에 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회 운동가이기도 했던 우리에게는 이슬람으로 개종하며 바꾼 이름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محمد)’로 유명한 개명 전 본명,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 주니어(Cassius Marcellus Clay, Jr.)의 이야기이다.

 

원래 침례회 신자였으나 1964년 말콤 엑스가 이끄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가입하면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며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때문에 그는 1965년 소니 리스턴과의 2차전에서부터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으로 출전하였다.

미국 언론사 Vox는 그에 대해 ‘링 안에서도, 링 밖에서도 위대했던 파이터’라고 평가했다.

알리의 최대 강점은 집념이었다. 권투에 완전히 미치지 않으면 절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고 결코 저 꼭대기에 오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권투만으로 가득 들어찼다. 밥 먹을 때도 권투, 학교에 갈 때도 권투, 공부 시간에도 권투, 화장실에 앉아서도 그는 팔을 뻗으며 잽을 날리곤 했다. 권투 생각만 하다 보니 학교 성적은 바닥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또래 친구들 중 그 누구보다도 지혜로웠다.


18세에 아마추어 선수로서 이미 180승을 올린 그는 1960년 로마 올림픽의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되었다. 올림픽에서 알리는 발군의 기량을 뽐내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금메달리스트가 되는 순간 이제 미국의 영웅이 되었다고 느꼈다. 그가 금의환향하자 고향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그의 집 현관은 성조기로 뒤덮였고, 페인트공인 아버지는 계단을 빨간색과 하얀색과 파란색으로 칠하여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의 아버지는 자랑스러운 아들을 환영하기 위해 이웃들을 모아놓고 미국 국가를 목소리 높여 불렀다. 그는 한동안 금메달을 목에 걸고 다녔다.

1960년 로마 올림픽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으로 금메달을 목에 건 클레이(알리)

하지만 그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루는 그가 친구 로니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햄버거를 먹기 위해 잠시 멈췄다. 그 식당은 백인들이 주로 다니는 곳이긴 했지만, 자신이 누군가? 금메달리스트인 국가적인 영웅이 아닌가.


그러나 식당에 들어선 순간 알리는 싸늘한 눈초리를 느끼며 움찔했다. 백인 불량배들이 노려보면서 그들에게 욕설을 퍼붓자, 식당 주인이 큰소리로 “난 깜둥이한테는 음식 안 팔아!”라고 함께 소리쳤다. 알리는 핵 주먹에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머리와 가슴이 멍해졌다.


한 번은 불량배들에게 금메달을 뺏길 뻔한 사건도 있었다. 불량배 두목이 대놓고 알리의 금메달을 뺏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을 물리치고 난 알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오하이오 강으로 갔다. 그는 아무런 미련 없이 강물에 자신의 금메달을 던져버렸다. 그리고 그는 다시 새로운 삶을 살리라고 목표를 재설정하고 큰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당시의 자신이 가졌던 심정을 이렇게 기억했다.


“내가 로마에서 가졌던 ‘미국을 대표한다’는 환상은 그때 사라졌습니다. 나는 흑인으로서 멸시받고 있는 켄터키의 고향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금메달까지 버린 그는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기로 마음먹는다. 그것은 어린 시절에 일찌감치 꿈꾸었던 록키가 이뤄냈던 바로 그 챔피언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루이빌 스폰서 그룹과 계약을 맺은 뒤 프로로 전향했다. 프로가 된 이상 아마추어처럼 얌전한 점수를 얻기 위한 권투를 구사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레슬링 선수 고저스 조지의 인터뷰를 듣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놈을 죽여버릴 거야. 두 팔을 확 뽑아버릴 거야. 그 자식에게 지면 링을 기어서 내 머리털이라도 잘라버릴 거야. 하지만 그럴 리 없어. 내가 세계에서 제일 강하니까.”

 

이 말을 듣고 알리는 그의 경기를 꼭 보고 싶다는 생각에 직접 그의 경기를 관람하게 된다. 경기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사람들은 큰소리로 떠벌리는 선수가 이기는 것뿐만 아니라 망신당하는 것까지를 재미있어하는 것이었다. 열광하는 사람들 틈에서 알리는 프로 선수가 되기 위해, 아니 유명한 프로선수로 성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론을 그를 통해 터득하고 돌아온다.

그것이 그가 ‘떠벌이’라는 과장된 별명을 얻게 되는 과정이다. 그가 본래의 성격이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는 진정한 프로가 되어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연기한 것이었다. 그렇게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나간 클레이에게 마침내 기회가 왔고, 소니 리스턴과의 타이틀전에서 그는 모든 방법론을 써먹었다.

 

WBA(세계권투연맹)/WBC(세계권투평의회) 세계 헤비급 통합 챔피언 소니 리스턴은 무시무시한 완력을 가진 선수였다. 그의 주먹은 가공할 위력을 자랑하여 그 주먹에 한번 맞은 이는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느낀다고 선수들 사이에 악명이 자자했다. 1962년 챔피언 벨트를 거머쥔 후 내로라하는 도전자들이 도전했지만 모두 경기 초반에 그 펀치에 쓰러져갔다. 사람들은 알리(당시 이름 : 캐시어스 클레이)도 1회전만이라도 버티면 선방한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관중들은 약자를 응원하게 되는지, 클레이를 연호하며 열렬히 응원하고 있었다.

경기 전부터 클레이는 특유의 독설로 상대를 자극하고 대중을 선동했다. “소니 리스턴은 아무것도 아냐! 난 이 애송이 녀석을 화성 너머 목성까지 날려버릴 거야.” 경기 전의 기자회견은 한판의 쇼였다. 리스턴은 과묵했지만, 클레이는 끊임없이 독설을 뿜어내어 시선을 끌었다. 특히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라는 그가 만들어낸 멘트는 대서특필되며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혔다. 클레이의 심리적 마케팅은 적중하여 사람들은 이 경기에 더욱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드디어 공이 울렸다. 클레이는 빠른 동작으로 링 위를 춤추듯 돌아다니며 리스턴의 살인 주먹을 잘도 피했다. 그러나 한방만 제대로 들어가도 버티기 어려운 강펀치임은 변함이 없었다. 리스턴의 주먹이 작렬할 때마다 사람들의 입에서는 환호성과 탄식이 동시에 흘러나왔지만, 링 전체를 쓰는 클레이의 작전에 휘말린 리스턴은 3회전 중반이 되자 점점 지치기 시작했다. 클레이는 왼손 잽을 부지런히 날렸다. 경기를 길게 끌고 간 경험이 별로 없던 챔피언은 초조해졌다.


6회전이 되자 리스턴의 동작이 한껏 커졌고, 그럴수록 원투 스트레이트를 날리는 클레이의 주먹은 가벼우면서도 날카로웠다. 챔피언의 오른쪽 눈이 퉁퉁 부어오르더니 마침내 눈두덩이 째지고 말았다. 6회전이 끝나갈 즈음 리스턴은 거의 그로기 상태였다. 그때 공이 울렸다. 1분을 쉬고 7회전 시작 공이 울렸으나 챔피언은 결정되지 못했다. 결과는 클레이의 TKO승.

클레이는 하늘로 펄쩍 뛰어오르며 포효했다. “나는 위대하다! 나는 왕이다! 세상의 왕이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는 왕이었다. 입만 살아 떠들다가 사라지는 허접한 이가 아닌, 진정한 강자였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새로운 챔피언은 ‘챔피언’이라는 용어를, 그 역사를 다시 쓰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당연히 챔피언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했지만, 미국인들은 물론 권투를 잘 모르는 전 세계의 사람들은 ‘챔피언’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여전히 무하마드 알리를 떠올린다. 그가 ‘영원한 챔피언’이 된 것은 단순히 권투를 잘하는 강자여서만은 아니다. 그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9개월 갓 지난 라일라와 세 살 된 큰 딸 한나와 함께(1978년)

무하마드 알리가 그저 권투 챔피언으로서의 정점에 올라 그 인생을 누렸다면 이 시리즈에도 등장할 일이 없고, 전 세계인들이 그를 영원한 챔피언이라고 기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리스턴에게 통쾌한 승리를 거둔 클레이는 정신적인 스승 말콤 엑스처럼 자신의 이름을 ‘캐시어스 엑스(X)’라 부르기로 했다. 미국인들이 노예에게 부여한 성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그는 당시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이슬람교의 분파이자 운동조직인 이슬람 국가 운동(Nation of Islam)에 참여하고 있었다.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것이다.

 

이슬람 국가 운동의 최고지도자인 엘리야 무하마드는 그에게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엘리야 무하마드가 당시 이슬람 국가 운동의 실력자 맬콤 엑스에게도 부여하지 않은 이름을 그에게 주었으니, 클레이가 얼마나 큰 특혜를 받았는지 짐작할 만하다. 클레이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이름이 ‘무하마드 알리’로 바뀌었음을 알리며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나는 알라를 믿고 평화를 믿습니다. 나는 백인 동네로 이사할 생각도 없고, 백인 여자와 혼인할 생각도 없습니다. 내가 택하는 길이 어떤 건지 알고 있고, 무엇이 진실인지도 압니다.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챔피언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말콤 엑스와 그의 딸들과 함께

핵심은 그가 개종하고 이름을 바꿨다는 따위가 아니다. 우리가 알리를 영원한 챔피언으로 생각하는 것은, 알리가 백인사회나 미국이라는 국가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최고의 자리를 지켰기 때문이다. 알리는 이 선언이 가져올 시련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알리가 백인들의 적인 엘리야 무하마드와 말콤 엑스의 친구임을 안 이상, 백인사회와 정부가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1964년 이후 알리는 이듬해 소니 리스턴과의 재경기에서 1회 KO승을 거두는 등 3년 동안 모든 도전자들을 물리쳤지만, 그들보다 훨씬 더 무서운 적과 싸워야 할 운명으로 뛰어들었다.

 

미국 정부는 알리를 베트남전에 보내기 위해 그에게 징집 영장을 보냈다. 알리는 전쟁에 참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베트콩은 나를 깜둥이라고 무시하지 않소. 내가 왜 베트남 사람들을 죽여야 한단 말이오?” 알리의 말이 신문에 보도되자 전국 각지에서 증오의 편지와, 협박 전화가 빗발쳤다. 1967년 4월 28일 알리는 징병위원회로부터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거부했다.


그 대가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챔피언 타이틀을 빼앗겼고, 선수 자격정지를 당했으며, 법원에 기소되었다. 법정에서는 5년의 실형을 받았다.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챔피언이 갑자기 운동을 하지 못하는 것도 사형선고였을 텐데, 실형까지. 본래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몰려다니기 마련이다.

그에게 실질적인 수입이 없어지자 주위의 사람들도 떠나버리고, 유명세를 활용할 가치가 없어지자, 엘리야 무하마드는 종파의 칙령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단에서 제명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념이 있었고, 그 정도 시련에 굽히지 않았다. 참고 견디며 다시 펀치를 날릴 기회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반전여론이 높아지면서, 대법원은 알리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꼬박 3년 세월을 법정에 불려 다니며 권투를 못한 동안 그는 벌써 30대가 코앞으로 다가오며 전성기와는 멀어지는 듯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힘든 운동이고 나이도 제법 들었으니 그냥 접을 수도 있었겠으나, 그는 다시 글러브를 끼었다.

그가 인생에 건 것은 오직 복싱 하나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1971년 조 프레이저와의 재기전에서 그의 생애 최초의 패배를 맛보게 된다. 하지만 알리는 한 번의 패배에 쓰러지지 않았다. 다시 심호흡을 크게 했다. 이렇게 끝내버리게 되면 자신은 ‘주둥이’만 살아 있는 ‘떠벌이 복서’로 역사에 기록된다는 벼랑 끝을 생각하며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다. 생애 첫 번째 패배였지만 그는 쉽게 좌절하지 않았고, 무려 3년이나 피를 토하고 뼈를 깎는 훈련을 거듭하여, 결국 다시 복수전에서 프레이저를 누르고 재기에 당당히 성공한다.

WBA/WBC 통합 챔피언 조지 포먼을 잡게 되면 명실상부한 세계 챔피언이 되는 순간이었다.

1974년 10월 30일, 막강한 주먹의 혈기방장한 26세의 조지 포먼과 전성기가 지났다고 전문가들이 냉정하게 판단한 32세의 알리가 자이르(현 콩고 공화국)의 킨샤사에서 맞붙었다. 정말로 불꽃 튀는 접전이었다.


알리는 인파이터인 포먼의 저돌적인 공격에 계속해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온 링의 로프를 이용한 펀치의 충격을 줄이는 기술, 이른바 , ‘Rope-a-dope’ 전술은 이후 복싱의 교과서적 기술로 남을 정도로 그는 여러 가지 테크닉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힘을 모아 8회에 작렬한 카운터 펀치로 그는 포먼을 조용히 잠재웠다.

알리는 이후 1977년까지 타이틀을 지킨다. 권투선수로서 알리는 쇠잔한 기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KO보다는 판정승이 많아졌고, 경기도 예전 같은 박진감은 덜해졌다. 1978년 레온 스핑크스에게 타이틀을 뺏겼다가 다시 탈환하지만, 1980년 래리 홈즈에게 지면서 타이틀을 영원히 잃게 되고, 1981년 11월 12일 트레버 버빅과의 경기에서 패배한 것을 마지막으로 글러브를 벗는다. 통산 56승 5패, 20년 동안에 세운 이 기록에는 그 누구의 것과도 다른 시련이 배어 있었다.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당시

1996년 우리는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식에서 우리의 챔피언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는 파킨슨 병에 걸려 거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은퇴 후 불과 3년 만에 선고받은 파킨슨 병에 그의 은퇴 후 삶은 끊임없는 투병생활이었다. 그가 성화를 점화할 때 세계인들은 왕년 그의 모습을 상기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장애인으로서 꿋꿋이 살아가는 모습에 감동하기도 했다. 그가 얻게 된 병의 원인은 오래된 권투로 인한 부작용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몹쓸 병이 아닌, 그 역시도 알리의 열정이 낳은 산물의 하나였다. 실제로 많은 장애인들이 이 장면을 보고 용기를 얻었고, 알리 또한 장애인을 도왔다.

 

7남 2녀를 둔 알리는 1986년 재혼한 4번째 부인 로니와 함께 최근 피닉스 인근에서 특별한 외부활동 없이 조용한 나날을 보내오다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2016년 숨을 거뒀다. 향년 74세였다.

알리는 때로는 저항자로서 흑인들의 권리가 법대로 실행되지 않는 것에 항의하여 금메달을 강에 던져 버렸으며, 때로는 지식인처럼 정의롭지 못했던 전쟁을 고발하기 위해 내로라하는 엘리트들 앞에서 미국 명문대를 누비며 강연을 다녔고, 때로는 광대처럼 브로드웨이에서 <백인들의 희망>이라는 연극에 주인공으로 출연해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했고, 때로는 외교관이 되어 사담 후세인을 만나 억류되어 있던 인질들을 석방하도록 설득했으며, 정치 지도자처럼 미국의 공립학교와 병원을 찾아다니며 교육과 의료 체계의 중요성을 일깨우는데 힘을 쏟았으며, 또 파킨슨병을 연구하는 재단을 창립하여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는 수많은 이들을 돕기도 했다.


그가 원하지 않았던 인종차별이라는 시련에서부터 그가 신념을 가지고 벌일 일로 인해 얻어야만 했던 시련, 그리고 다시 일어서고자 하였지만 겪게 된 실패들, 그 모든 것을 이겨내 그는 만인의 영원한 챔피언이 되었다. 다가온 시련을 피하거나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극복했던 신념이 함께했기에 우리는 그를 20세기 최고의 권투선수이자 최고의 스포츠맨으로 기억한다.

 

1987년 권투잡지 <링 매거진>은 알리를 ‘영원한 헤비급 1위 선수’로 선정했고, 1999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20세기의 스포츠맨’으로 선정했다.

가난하고 인종차별을 받는 것이 싫어 나라를 대표해서 국가대표가 되었지만, 국민들은 그를 진정한 국가대표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그 소중한 금메달을 버리며 미국 국민이길 거부하며 더 꼭대기로 올라가기 위해 챔피언을 꿈꿨고, 실제로 그 꿈을 이뤘다.


하지만 그가 금메달을 던지던 신념은 그의 인생의 뼈대가 되었다. 한창 피크로 전성기를 누려야 할 시기에 타의에 의해 운동 자체를 하지 못하고 그간 쌓은 부와 명성을 모두 빼앗기게 되고 그 시기가 3년 이상이나 되었다는 것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게다가 그 공백을 다시 채우기 위해 전성기가 다 지난 그가 다시 글러브를 끼고 본래의 몸을 만드는데 걸린 3년은 아무도 그에게 주목하지 않던 시기다.


복싱은 고독한 자기와의 싸움이다. 개체량을 위해 자신을 강력하게 조절해야 하고 개체량으로 인해 내 근력이 힘을 발휘하지 못해서는 안될 정도로 끊임없이 담금질을 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을 참고 견디고 똑같은 훈련을 부단히 지속해야 그것이 머리가 아닌 몸에 익혀지고 주먹에 익혀지고 본능처럼 움직일 수 있게 된다.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실패나 시련의 경험이 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당신이 당신이 생각한 옳지 않은 것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고 그것 때문에 받을 엄청난 시련이 명백함에도 주저함 없이 부와 명예를 포기하고서라도 그런 목소리를 낼 정도로 당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맞다. 매번 자신의 신념이라는 이유로 쉽게 사표를 던지거나 자신의 목소리를 낼만큼 당신의 상황이나 당신이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을 수도 있다. 그 부분은 알리와 같아질 수 없다고 한다면 그 부분까지는 인정 하마.


하지만, 당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당신이 맞닥뜨리게 된 실패와 시련에 대해 그냥 무너져 내리거나 포기하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


자신이 벌인 일이었음에도 알리는 기다렸고, 자신을 단련하였으며 끝내 극복해냈다.

복싱을 하는 이들은 복싱을 인생에 많이 비유한다. 맞지 않고 이길 수 없으며, 멧집 없이 이길 수 없으며, 상대를 때리지 않고 이길 수 없으며, 끝까지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자가 이기는 스포츠이다.


당신은 지금 사각의 링보다 더한 살벌한 현실이라는 정글에 있다. 매일매일이 먹고 먹히는 보이지 않는 살육전이 벌어지는 곳에서 매일같이 그 전쟁에서 살아남고 다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전장에 서야 한다. 때론 당신을 힘들게 하는 수많은 요소들이 일어나고 실제로 힘겨워 다리에 힘이 풀리고 그냥 쓰러져 심판의 카운터 따위 무시하고 잠들어버리면 딱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포기하는 순간, 또 다음 경기가 있다 하더라도 당신의 그 안일한 마음가짐은 새로운 결과를 얻어내기 어렵다.

당신이 두 주먹 불끈 쥐고 다리에 힘을 주고 눈을 부릅뜨고 세상에게 “덤벼봐라, 세상아!”라고 외칠 수 있는 기백과 준비된 마음가짐이 아니라면 이 세상은 당신의 적당한 투정을 받아줄 정도로 말랑말랑하지 않단 말이다.


일어서라. 몇 번을 쓰러지더라도 설사 판정으로 지게 될지 모른다는 안일한 생각이 들더라도 끝까지 눈을 뜨고 날아드는 펀치를 치어다보란 말이다. 그리고 끝까지 당신이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을 꺾지 마라.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노려보고 있다가 회심의 펀치를 날려라.


당신이라면, 그간 겪어온 그 수많은 시련을 이겨내고 이 글을 읽는 당신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한 준비가 되어 있는 자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시 일어나, 주먹을 움켜쥐고 이를 악물고, 눈을 치켜뜨고 상대를 노려봐라. 상대는 이미 당신보다 훨씬 더 지켜 빨리 당신이 쓰러지기를 기도하며 다리를 떨고 있단 말이다.


알리가 남긴 수많은 명언을 읽기보다, 당신을 위해 그가 회고록에 남긴 말을 당신에게 전하는 것으로 오늘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챔피언이란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다. 갈망, 꿈, 비전이 그것이다. 당신은 온 힘을 발휘해야 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보다 더 빨라야 한다. 당신은 기술이 있어야 하고 의지가 있어야 한다. 기술보다 의지가 더 중요하다. 의지가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등학교 중퇴에, 남편이 유부녀와 불륜인 것을 알고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