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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14. 2021

이름도 못 지어준 아이를 가난으로 잃고서도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한국의 고흐로 기억되다.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매우 부유한 대지주의 삼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과는 열한 살, 누나와는 열 살 차이가 나는 늦둥이 막내아들이었기에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 그러나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슬픔을 겪게 된다. 그즈음부터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게 되는데, 어려서부터 사과 같은 것을 받아도 우선 그것을 그리고 나서 먹을 정도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마을의 서당을 다니다가 여덟 살에 외가가 있는 평양으로 가서 종로 보통학교에 입학. 선구적 유화 화가인 김찬영의 아들이자, 후에 화가가 된 김병기와 함께 학교를 같이 다니며 그 집에 가서 김찬영이 쓰던 화구와 미술 서적들을 접하게 되었다.


14세에 초등과정을 졸업하고, 평북 정주의 오산 고등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중등 과정 내내 소를 즐겨 그려서 학생들과 하숙생 사이에서 소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다 운명적으로 미술과 영어 과목의 교사로 부임한 스승 임용련을 만나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임용련은 미국으로 유학 가서 미술을 공부하고 프랑스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당시 조선에는 흔치 않던 서양화가였다. 이때부터 그는 임용련과 그의 부인 백남순에게 미술에 대한 재능과 열의를 인정받아 집중적인 지도를 받게 되었다. 소 그림 이외에도 식민 당국의 우리말 말살 정책에 반발해 한글 자모로 된 그림을 그렸는데, 이후 내내 한글 풀어쓰기로 이름 쓰기를 실천한다. 스승 임용련은 늘 “조선 사람은 조선 화풍으로 그려야 한다.”라는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연설하고 다녔는데, 그는 당시 임용련의 사상에 깊이 감명받았다고 한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몇몇 동급생과 공모하여 일본 회사의 보험금을 타서 낡은 학교를 재건하겠다는 의도로 불을 지르는 일도 있었다. 졸업기념 사진첩에 일제에 항거하는 그림을 그려 물의가 일었고 사진첩은 전면 취소된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미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 도쿄 무사시노에 있던 데이코쿠 미술학교(帝国美術学校)에 진학했으나, 곧 중퇴하고 사립 예술대학인 분카 가쿠잉(文化学院)에 입학한다. 이곳은 경직된 일본 사회 분위기에 반기를 들고, 자유롭고 독창적이며 감성적인 인간을 키워낸다는 이념 아래 설립되어 일본 최초의 남녀평등교육을 실시한 학교로도 유명하다.

1940년 유학 당시

피카소와 루오에 심취하여 이들의 그림을 모방하여 교수가 힐난하자 대판 싸운다. 이후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실제로 학교에서는 배운 것이 그다지 없었고, 상급생인 문학수를 통해서 알게 된 화가 쓰다 세이슈에게 오가면서 배운 것이 자신의 미술세계를 구축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한 바 있다.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한국의 서양화가로, 박수근과 함께 한국 근대 서양화의 양대 거목이라 일컫는 이중섭(李仲燮)의 이야기이다.


그는 시대의 아픔과 굴곡 많은 생애의 울분을 ‘소’라는 모티프를 통해 분출해냈다. 대담하고 거친 선묘를 특징으로 하면서도 해학과 천진무구한 소년의 정감이 작품 속에 녹아 있으며, 경쾌하고 유연한 필선의 은지화는 그 고유성을 인정받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소장되어 있다.

일본에 유학한 지 3년 만에 일본인 미술가들이 창립한 단체 자유미술가협회의 2번째 공모전에 응모하여 입선하고, 협회상을 받고 일본 미술계의 열렬한 찬사를 받는다. 이 즈음 이중섭은 대학에서 다섯 살 연하였던, 미술부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당시 이중섭은 굉장히 미남에다가 운동, 노래도 잘하고 그림 실력도 탁월해 교내의 인기스타였다고 한다.


이중섭과 마사코는 연애 중에 서로를 ‘아고리’, ‘아스파라거스’라는 애칭으로 불렀는데, ‘아고리’란, 유학시절 일본인 친구들이 턱(あご, 아고)이 길었던 이(李, 리)중섭을 부르던 별명이었다. 또 ‘아스파라거스’는 둘이 하얀 아스파라거스 통조림을 자주 같이 먹곤 했는데, 길쭉한 아스파라거스와 마사코의 발가락이 닮았다고 해서 이중섭이 붙여준 별명이라고 한다. 또 이중섭은 마사코를 ‘발가락군(ゆび君)’이라는 애칭으로도 많이 불렀는데, 마사코가 발가락을 다쳤을 때 이중섭이 치료해 준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야마모토 마사코의 집안도 그녀의 아버지가 미쓰이 창고 주식회사 고위 임원을 지냈을 정도로 만만치 않게 부유한 집안이었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마사코의 집안에서 이중섭과의 교제를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후 야마모토 마사코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화가라서, 혹은 조선인이라서 결혼을 반대한 일이 없었다고 했다.

당시 아내 마사코의 모습

둘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으나, 이중섭이 1943년 전람회 준비를 위해 귀국했다가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원산에 계속 체류했다. 이때 그 유명한 그림으로만 된 엽서를 마사코에게 보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1944년, 이중섭이 가족의 결혼 승낙을 받고 마사코를 대한민국으로 불러온다. 1945년 당시에는 태평양 전쟁이 막판으로 치달으면서 미군이 폭격기와 잠수함을 동원해 일본 연안 해상교통을 옥죄던 시기였으나, 마사코는 겨우 배를 얻어 타고 부산을 거쳐 서울을 거쳐, 그가 있는 원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결혼식을 올렸고,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라는 의미의 ‘이남덕(李南德)’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들은 이후 아들만 셋을 낳았는데, 이름 불명의 장남은 생후 1년도 안 되어 디프테리아로 요절하게 된다. 장남을 잃은 큰 아픔으로 인해, 아들이 관 속에서도 외롭지 않기를 바라며 발가벗은 채 즐겁게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을 많이 그렸다.

하지만 이 그림들은 그저 ‘벌거벗었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 때문에 춘화로 취급되어 정부에 의해 강제로 철거당한다. 어린이가 옷을 벗은 것에 너무 심한 처분 아니었냐고 비난할 수도 있는데, 당시의 기준으로는 그다지 가혹한 처사가 아니었다.

 

아이들의 자유로움을 그린 그림에는 복숭아나 게 등 동양화에서 장수나 복을 상징하는 사물이 많이 들어가 있는데, 죽은 아들이 천국에서 따다 먹으라고 천도복숭아를 그렸다는 일화가 있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아이들>

소를 하루 종일 관찰하다 소 주인에게 고발당하는 해프닝도 있었고, 원산에서 열린 전시회에 함께 출품한 것이 인연이 되어 화가 박수근과 사귀기도 했다. 부인이 일본인이라는 점 때문에 친일파라는 지목을 받기도 한다.


이중섭 가족의 비운은 북한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고 그의 형 이중석이 자본가 계층으로 몰려 수난을 당하면서 시작되었다. 특히 6.25 전쟁이 혼전으로 치닫고 중공군이 개입하자, 가족 모두가 원산에 일군 삶의 터전을 모두 버려둔 채 알거지로 흥남 철수에 동행하여 남한으로 내려온다.


그렇게 부산으로 피난을 오기는 했지만, 남한에 의지할 만큼 형편 좋은 친척이나 지인이 없는 이중섭으로써는 생계가 막막했다. 남 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란 이중섭은 남에게 신세 지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고, 폐를 끼치면 어떻게든 갚아야 하는 성격이어서 어느 정도 뻔뻔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전시 상황에 전혀 융화되지 못했다. 게다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예술가여서 험한 막일을 해가며 돈벌이를 하는데도 능숙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이중섭을 대신해 이남덕이 거리로 나서 재봉질을 해가며 연명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너무 가난해서 난방은 꿈꿀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잘 때도 모든 옷들을 다 껴 입어도 너무 추워서 제대로 잠도 못 잘 지경이었다. 결국 1951년에는 조카 이영진이 머물고 있던 제주도로 건너가 11개월간 머무른다. 거기서도 별다를 것은 없었다. 온 가족이 게를 잡고 한라산에서 부추를 뜯으며 힘겹게 살아갔던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나마 살이 에이도록 추웠던 부산과 달리 제주도는 그나마 덜 추워서 생활은 자유롭고 즐거웠다고 한다.

현재 복원된 제주도 서귀포, 그의 가족이 살던 집

이중섭 가족은 1951년 말이 되자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파다한 데다 역시 제주도에도 가난을 해결할 수 없었던 터라, 겨울이 돌아오는 12월에 다시 부산 범일동 판자촌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져들며 여전히 돈벌이는 전혀 되지 않았고, 가난과 추위로 상당히 힘든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52년에 장인의 부고를 접하면서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게 된다.


가족끼리의 사랑은 여전히 깊어서 이별이 내키지는 않았으나, 이미 아내 마사코와 둘째 아들의 건강이 무척 나빠진 상태이기도 했고, 장인이 작고하면서 남긴 유산이 있어,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겨 이를 선택한 것이었다. 원래는 온 가족이 함께 도일하려고 했으나, 당시에는 해방 후 한일 간 국교가 단절된 상태여서 이중섭은 동행할 수가 없었다.

 

1953년, 일본에 있던 부인이 남편의 생활과 제작비를 위해서 일본을 왕래하는 선원이던 오산의 후배에게 일본 서적을 외상으로 보내고 이익의 일부를 이중섭에게 주기로 했으나 그 약속을 어김으로써 거액의 빚까지 지게 된다.


같은 해, 8월에 이중섭은 친구인 시인 구상의 도움으로 대한해운공사 선원증을 얻게 되어 단기체류로 일주일 동안 일본으로 갈 수 있게 되는데, 이때 마사코의 어머니는 이중섭이 항구에서 벗어나 가족들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신원보증서까지 구해 주었다. 그 뒤에 모든 일을 해결해준 사람이 일본 농림 대신(장관)이었다.

<물고기와 노는 세 아이>

가족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일본에 계속 머물겠다고 하던 이중섭을, 훗날 훌륭한 화가가 될 텐데 불법체류자라는 신분이 앞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며 설득해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낸 사람 역시 장모다. 이들 네 식구는 1주일 동안 히로시마의 여관방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결국 이것이 이들 가족이 함께 한 마지막 시간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그는, 그 후 죽을 때까지 1년 동안 가족과는 만나지 못한 채 가족과 다시 재회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면서 홀로 막노동을 하면서도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유강렬의 제의를 받아 통영으로 가서 안정을 얻게 되어 풍경화 등을 제작하고 다방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는데, <흰 소>, <황소>는 바로 이때 그려진 작품들이다.

<황소>

이 즈음 그가 간간히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나 그림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가족과 다시 함께 하고 싶다는 그의 간절한 소망은 그간 그렸던 그림을 가지고 1955년 1월 18일부터 서울 미도파 갤러리에서 개인전 개최했다.


유화 40여 점. 은지화를 비롯한 그림을 비롯한 소묘 50여 점을 선보였다. 전시는 호평을 받았으나 당국은 은지화를 춘화라고 하여 철거하도록 했으며, 팔린 그림 값을 떼이는 등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크게 실망하고 좌절하게 된다. 결국,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한 데에서 오는 그리움과 예술인으로 감당해야 하는 좌절감 등으로 술에 빠져, 마음의 병이 깊어진 이중섭은 조현증(정신 분열)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몸과 마음이 모두 쇠약해진 그는 결국 1956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홀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겨우 마흔이었다.


친구들이 병문안을 갔다가 병실이 비어 물어보니 며칠 전에 죽은 이중섭의 시체가 침대 위에 쓸쓸하게 방치되어 있었고, 죽은 그의 곁에 있는 것이라고는 병원비 독촉장이 전부였다고 한다. 평소에 친한 사이였던 3살 아래의 시인 구상이 그의 시신을 수습해서 이중섭의 가족들 및 친구들과 함께 장례를 치렀다. 이중섭의 무덤은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망우리공원묘지에 있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서 평화롭게 하루 종일 소를 관찰하며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대표작 <흰 소>는 백의민족이었던 대한민국을 의미했다. 그림을 보면 소가 말라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해 있는데 당시 6.25 전쟁 이후로 먹고살기 힘들었던 상황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 <황소>는 47억에 낙찰되었다. 이 작품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기증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총후 화가(일제를 찬양하는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가)로 일한 기록 때문에 혹 공격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이중섭이 전쟁에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형이 일부러 총후 화가에 등재한 고육책이었다. 광복 직후에는 강제적으로 공산당 동맹에 가입했으며 회의에 다녀올 때마다 “맥없다(맥 빠진다)”라고 호소했다. 이는 이중섭이 그리고 싶은 그림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맞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6.25 전쟁 당시 월남하면서 자신의 작품 대부분을 고향에 그대로 남은 노모에게 맡기고 왔기 때문에 작품의 절반 이상은 현재 쉽게 구할 길이 없다. 이중섭이 피난 생활을 했던 제주도 서귀포시에는 그가 가족들과 피난 생활을 했던 집을 1997년 그 상태를 다시 복원하여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그래도 이 피난 생활이 이중섭에게는 그나마 가장 평화로운 삶이었다고 하는데 피난 간 때의 경험이 창작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전쟁통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쓸모없어진 엽서나 담뱃갑의 은박지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는데 날카로운 것으로 새긴 뒤에 잉크를 은박지 위에 칠하고 닦으면 파인 곳에만 잉크가 스며든다. 이 은박지 작품 3점이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은박지 작품

춘화라며 제재를 가했던 정부는 그가 죽고 나서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1978년 그에게 건국 훈장을 수여한다. 1986년 서소문을 거닐어 호암갤러리에서 그의 회고전에서 그의 그림을 접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그 먹먹했던 마음이 아직도 그의 그림을 볼 때마다 되살아나는 것 같아 그의 그림을 마음 편하게 접하기가 어렵다.


걱정 없이 그 시대에 막내이면서도 일본 유학을 떠날 수 있을 정도의 부잣집 막둥이가 일제 강점기를 거쳐 6.25라는 전쟁을 맞고, 겨우 목숨을 부지하겠다고 부산의 판자촌에 들어앉았을 상황을 그려본다. 평생 힘든 일이라고는 한 적이 없는 그에게 그런 생활은 그 자체로 고문이었을 테고, 그런 여리고 소심한 그에게 첫 아이의 죽음은 평생을 지켜주지 못했던 아빠로서의 죄책감과 트라우마였을 것이다. 한국의 고흐라며 그 작품이 수십억을 웃돌고, 그러한 이유로 한국에서 위작이 가장 많은 화가라는 오명도 함께 받고 있다.(엄밀히 말해 오명이 아닌 그만한 유명세라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 수도 있다.)

 

그렇게 가족과 함께 있으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고작 그의 꿈 전부였다. 누구도 그의 천재성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가 죽기 1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돈 좀 있다는 이들은 그의 그림을 소유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는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고, 병원비조차 제대로 내지 않았다며 시체조차 제대로 장례처리를 못할 지경으로 마흔을 갓 넘긴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만 했다.

망우리 공원묘지, 이중섭의 묘

마흔. 많다면 많은 나이, 젊다면 한참 젊은 나이.

그에게 격동하는 세월은, 그 험한 세상은 어울리지 않았고, 그는 도저히 그 세상에 적응할 수 없었다. 격동하는 그 시기는 그의 가족을 찢어 그에게 온갖 시련을 한꺼번에 폭풍우처럼 쏟아부었다. 도저히 그가 감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안간힘을 쓰며 부두의 막노동이라도 하려고 했고, 그림 그릴 종이 대신 담배의 은박지에까지 그림을 그렸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고 죽은 다음에 수십억 수백억의 가치와 훈장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느냐고 그가 그림의 뒤에서 절규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그의 해맑은 그림을 편하게 볼 수 없었다.

 

당신이 지키고 싶은 사랑을, 그 사랑들과 함께 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그는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천재성을 생전에 인정받은 화가였다. 그러나 시대는 그에게 그런 작은 소망마저도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가 너무도 사랑하는 아들을, 이름도 지어주지 못했던 아들을 보고 싶어서 천국에 먼저 갔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시련? 실패?

이중섭의 삶을 보라.

그가 겪은 아픔과 시련을 보라.


격동의 시대를 살아낼 요령이 없어서, 그것을 도저히 이겨내지 못하고 버텨내고 버텨내려고 했던 그의 삶과 시련을 보면서 지금 당신이 겪는 실패로 인한 시련을, 견뎌내기 어려운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그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당신에게는 당신을 믿고 사랑해 주는 이들이 당신의 곁에 있고, 아직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볼 수 있는 용기와 젊음과 건강이 있지 않은가?


당신은 당신이 지켜야 줘 야만 할 사랑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것은 당신이 지켜내야만 하는 존재가, 당신의 사랑하고 아끼는 존재들뿐만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죽은 후에 받을 수십 수백억? 아무 의미 없다.

당신이 살아있을 때,
당당하게 세상에게서 받아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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