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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15. 2021

사랑에 버림받아 술에 쩔고 마약에 빠져 지냈어도

음악으로 치유하고 살아있는 음악의 전설, 기타의 신으로 추앙받다.

1945년, 영국 서레이(Surrey)주의 리플리(Ripley)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캐나다에서 복무한 군인이었다. 9살 때까지 누나로 알고 있던 사람이 알고 보니 어머니였고, 자신이 어머니가 캐나다의 군인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몇 년 후 어머니는 독일로 혼자서 이주해버렸고, 그는 조부모에게 맡겨져 키워졌다.

13살 때 생일 선물로 어쿠스틱 기타를 받았지만 한동안 쓰지 않다가, 15살 때 흥미를 붙여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처음 기타를 시작했을 어린 시절부터 블루스의 영향을 받았다. 흑인들의 비참함과 슬픔을 노래한 블루스가 그에게 스며든 것은 자연스러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빅 빌 블룬지(Big Bill Broonzy), 블라인드 윌리 존슨(Blind Willie Johnson) 등 초기 블루스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연주하며 성장했다. 특히 ‘델타 블루스의 왕’이라 불리는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의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킹스턴 대학교의 미술학과에 진학했지만, 미술보다 음악에 더 흥미를 보여 결국 대학교를 자퇴하고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기타 연주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1963년 야드버즈에 가입하면서부터였다. 그의 뛰어난 블루스 기타 테크닉은 단숨에 그룹의 사운드의 상징처럼 튀어올랐고, 매니저 지오지오 고멜스키(Giorgio Gomelsky)는 그에게 ‘슬로우 핸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빠른 속도의 격렬한 연주를 할 때 줄이 끊어지는 일이 많아지자 줄 교체 시간에 관객들이 그에게 느린 박수를 쳐주었는데 여기서 유래한 별명이다.)


하지만 자신만의 기준이 명확했던 그는 그룹의 음악이 상업적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며 1965년 3월 팀을 떠나 존 메이올이 이끌었던 블루스 브레이커스로 자리를 옮겼다.

야드버즈를 탈퇴한 직후 그가 연주했던 ‘For Your Love’는 영국 차트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스무 살에 이미 그는 기타에 있어 입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야드버즈는 제프 벡과 지미 페이지(Jimmy Page)가 가세하며 전성시대를 누렸다. 바로 록음악계의 ‘3대 기타리스트’가 모두 야즈버즈를 통해 비상했다.

영국의 대표하는 세계적인 기타리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 록, 블루스 음악가이다. 별명은 무려 ‘기타의 신’, ‘Mr Slowhand’. 최고의 음악적 성취를 거둔 기타리스트를 꼽을 때 항상 거론되며, 1960년대 말 이후 록 음악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록 음악 역대 최고의 아티스트 한 명으로 일컬어지는 통칭 에릭 클랩튼, 풀네임 에릭 패트릭 클랩튼(Eric Patrick Clapton)의 이야기이다.

 

그래미 어워드를 18번이나 수상하였고,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서 3회나 헌액되었다. 20세기 초반부터 이어져오던 정통 블루스를 현대의 록 음악과 결합하여 독특한 장르인 블루스 록을 개척한 장본인이다. 음악 쪽 전문가가 아니면 잘 모르는 사실이긴 한데, 헤비메탈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기타리스트로, 에릭 클랩튼이 없었다면 메탈 기타 주법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 메탈뿐만 아니라 블루스, 소프트 록, 하드 록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어쿠스틱 및 일렉트릭 기타 연주법의 교본으로도 불린다.

 

단순히 기타 연주법이나 장르 개척 등 음악적으로만 성과를 거둔 것이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매우 성공해, 싱글로 8,418만 장을, 크림 시절 판 음반 판매고까지 합치면 9,984만 장으로 거의 1억 장에 가까운 음반 판매고를 올렸다. 이는 폴 매카트니, 밥 딜런, 사이먼 앤 가펑클 등 어지간한 록 아티스트의 판매고를 상회하는 것이다. 1960년대부터 현대까지 왕성하게 활동해 싱글 정규 앨범만 21장을 냈고 판매고도 거의 일정하게 유지되는 록 음악의 살아있는 화석, 되시겠다. 한국에서는 ‘Layla’와 ‘Tears in Heaven’, ‘Wonderful Tonight’, ‘Change the World’ 등의 곡들이 유명하다.

클랩튼은 블루스 브레이커스에서 존 메이욜(John Mayall-믹 재거, 키스 리처드, 지미 페이지 등등도 영향받은 영국 블루스의 장로 격 인물)의 독단적 행동에 불만을 품고 자신만의 그룹을 결성하기로 계획했다. 그는 1966년 존 메이욜 몰래 드러머 진저 베이커(Ginger Baker), 베이시스트 잭 브루스(Jack Bruce)와 함께 록음악 역사장 가장 위대한 밴드라 불리는 ‘크림’을 조직하게 된다. 하지만 얼마 후 음악 전문지 <멜로디 메이커(Melody Maker)>의 폭로로 인해 클랩튼은 블루스 브레이커스에서 해고를 당해야만 했다. 이때 런던의 한 빌딩 벽에는 ‘클랜튼은 신이다(Clapton is god)’라는 문구가 새겨져 많은 화제를 몰고 왔다.

 

에릭 클랩튼은 크림을 통해 ‘악기 예술의 미학’을 획득했다. 블루스와 재즈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그들의 사운드는 즉흥적이고 빠르며 굉음을 발산했다. 멤버들의 정교하고 뛰어난 연주 실력은 타 밴드와의 간격 차를 크게 벌려놓았고, 음악계에 상당한 충격파를 던졌다. 그들의 앨범들인 1966년의 <Fresh Cream>, 1967년의 <Disraeli Gears>, 그리고 이듬해의 <Wheels Of Fire> 모두 명반으로 손꼽히며 파죽지세의 인기몰이를 했다.

특히 스튜디오 녹음과 라이브를 한자리에 모은 더블 앨범 <Wheels Of Fire>는 미국에서 4주간 정상을 차지하며 멤버들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다. 바로 이 작품에 명곡 ‘White room’이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룹의 운명이 늘 그러하듯이 그들은 서로 간의 음악적 견해차를 이유로 1968년 11월 해산했다. 클랩튼의 음악 이력 중 최고의 절정기가 막을 내린 것이다. 이후 트리오는 1993년 1월 명예의 전당 헌액 기념으로 재결합 공연을 가져 많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

 

크림의 해체 이듬해 클랩튼은 진저 베이커와 함께 트래픽(Traffic) 출신의 스티브 윈우드(Steve Winwood), 패밀리(Family)의 베이스 주자였던 릭 그레치(Rick Grech)를 영입하여 ‘슈퍼 그룹’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를 탄생시켰다. 언론에서는 ‘인스턴트 슈퍼 그룹’이라고 비아냥거렸지만, 그들은 공연 때 ‘최후의 슈퍼 그룹’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대조를 이뤘다. 하지만 언론의 지적대로 그들은 1969년 데뷔 앨범 <Blind Faith>를 내놓고 각자의 길로 떠났다.

 

한편, 에릭은 크림 당시, 비틀즈(특히, 조지 해리슨)와 친분이 있어 비틀즈의 곡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의 기타 연주를 해주기도 했다. 이는 조지의 다소 즉흥적인 제안이었는데, 다른 아티스트가 비틀즈의 곡에 연주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에릭은 제안을 받아들이기를 꺼렸다고 한다. 조지 해리슨이 회상하기를 당시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꼽히던 에릭이 녹음에 참여하자 다른 비틀즈 멤버들도 평소보다 더 진지하게 녹음에 임했다고 한다.

패티 보이드(Patti Boyd)

에릭이 만나 사랑의 비극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사랑이 바로 조지 해리슨의 아내 패티 보이드(Patti Boyd)였던 것이다. 조지와 음악적 교류를 하면서 패티를 본 에릭 클랩튼이 금단의 사과를 깨물게 된 것이다. 당시 힌두교에 심취해 있던 남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패티 보이드는 클랩튼에게 의도적으로 눈길을 주어 질투를 유발하려고 했다.


음악밖에 모르고 지내던 쑥맥 에릭은 그것이 진정한 자신에 대한 사랑이라고 착각하고는 사랑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조지와의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갔고, (이것도 문제가 있는 것이 조지는 당시 링고 스타의 아내 모린 콕스와 바람이 났던 상황이었다.) 결국 이용만 당하고 혼자서 바보가 되어버려 실의에 빠진 소심하기 그지없던 에릭 클랩튼은 술과 마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만다.

이런 사랑에 대한 좌절감과 패배감은 1970년 11월에 발표된 데릭 앤 더 도미노스(Derek And The Dominos)의 마스터피스 <Layla & Other Assorted Lovesongs>에 고스란히 담겨졌다.

 

남편이 당신을 슬프게 만들었을 때
나는 당신을 위로하려고 노력했어요.
바보처럼 나는 당신과 사랑에 빠져버렸죠. 레일라 당신은 나를 무릎 꿇게 만들었어요. 레일라, 당신께 애원합니다.
제발...

https://youtu.be/tQsqLx0yYXQ


수록곡 ‘Layla’의 구구절절한 가사처럼 에릭 클랩튼의 상처 받은 마음은 노래 전체에 용광로처럼 녹아들어 있다. 고통스러운 자신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 직접 마주하고 그 고통을 음악으로 승화시키는 ‘처절한 내면의 객관화’ 작업을 과감하게 수행한다.

 

음악밖에 모르던 쑥맥에게 실연의 파장은 매우 컸다. 에릭 클랩튼은 감정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알코올과 약물 중독으로 인하여 병원과 요양원을 들락거려야만 했다. 기타조차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이때부터 드라마틱한 재기 스토리가 전개된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던 그에게 구세주가 찾아왔다. 그룹 후(The Who)의 ‘피트 타운센드’(Pete Townshend)였다. 피트는 이미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찬밥 취급을 받던 지미 헨드릭스를 영국으로 데려와 음악계에 데뷔시키는 등 ‘기적적 선행’을 벌여왔다.


피트는 클랩튼에게 마약에서 벗어날 것을 권유했고, 1973년 에렉 클랩튼의 레인보우 콘서트를 주최해 재기의 무대를 마련해줬다. 클랩튼은 데릭 앤 도미노스 이후 3년 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피트는 에릭 클랩튼이 정신을 못 차리자 하와이안 기타로 직접 머리를 때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기력을 회복한 에릭 클랩튼은 1년 뒤 재기 작품 <461 Ocean Boulevard>를 내놓았다. 앨범이 출시되기까지는 피트 타운센드와 함께 RSO 레이블의 사장인 로버트 스틱 우드(Robert Stigwood)의 도움이 컸다. 그는 폐인이 된 클랩튼을 위해 요양 장소로 플로리다에 있는 자신의 별장을 선뜻 내주며 재기의 기반을 마련케 했다. 클랩튼도 스틱 우드의 호의에 고개 숙여 감사하며 다시 기타를 집어 들었다. 스틱 우드의 별장 주소가 바로 이 앨범의 타이틀이다. 스틱 우드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밥 말리(Bob Marley)의 곡을 리메이크한 ‘I shot the sheriff’는 정상을 차지했고, ‘Let it grow’, ‘Give me strength’ 등이 인기가도를 달리며 ‘기타의 신’으로 완벽하게 부활했다. 이후 연이어 내놓은 앨범들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특히 ‘Wonderful tonight’이 실려있는 1977년 작품 <Slowhand>는 300만 장 이상의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에릭 클랩튼은 약물 중독으로 고생하던 이 시기를 잊지 못하고, 1999년 마약 중독자 치료기금을 위해 자신의 기타 100대를 경매에 내놓은 바 있다.

에릭이 재기에 성공하고 조지 해리슨보다 훨씬 더 높은 지명도를 차지하게 되자 쑥맥의 그간 고생에 하늘도 감동했던지 얼마 후 패티 보이드는 조지 해리슨과 이혼했고, 둘은 1979년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Wonderful Tonight’도 이때 부인 패티에게 바치는 찬가로 만든 곡이다.


이 과정만 보면 에릭이 패티를 엄청 사랑했던 것 같지만, 에릭은 결혼 전이나 후나 술과 마약을 해댔고, 패티가 아이를 못 낳는다는 걸 알자 밖에서 사생아를 둘이나 데려온다. 후에 에릭이 자서전에 밝히길 패티를 원했던 건 그저 조지 해리슨이 질투 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인간성이 안 좋다는 비판을 받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한 때 불타는 그녀를 위한 자신의 마음을 노래한 ‘라일라’가 수록된 음반은 비록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블루스와 삶을 완벽하게 조화시키며 걸작 음반의 반열에 올라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도 꾸준하게 앨범을 발표하지만 별다른 활약상을 보이지는 못했다. 1988년 패티와의 결혼을 10년도 채우지 못하고 이혼하게 된다. 물론 1989년 작품 <Journeyman>같은 수작을 낚아 올리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그룹 시절과 달리 음악적 측면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평론가들은 ‘에너지가 없어지고 느슨해진 팝 블루스’라며 평가 절하했다. 이 때문에 소심한 에릭은 다시 술에 있어서 자제를 못하고 자발적으로 알코올 중독 센터에 들어가는 등 막장 인생으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아들 코너의 생전 모습

하지만 그는 아이러니하게 1991년, ‘아들의 죽음’이라는 비극과 함께 현실 무대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운명의 여인’ 패티 보이드와 헤어지고 이탈리아 투어 도중 만난 젊은 사진작가이자 배우였던 로리 델 산토(Lori Del Santo)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4살 먹은 아들, 코너(Corner)가 뉴욕 맨해튼의 아파트에서 실족사하는 충격적이 사고를 맞게 된 것이다. 나중에 에릭은 당시의 망연자실했던 상황과 자신이 심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가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온통 경찰관과 의료진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것이 나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일처럼 느껴졌다.”


에릭은 알코올 중독을 극복하겠다고 다짐하고, 아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주기로 약속했는데, 아들이 에릭이 언제 오는지 보려고 베란다에 서 있다가 그만 추락사하고 만 것이다. 더군다나 아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에는 ‘아빠 사랑해요’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죽을 정도로 슬프고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 실연당했을 때처럼 에릭은 그렇게 기타를 놓고 패인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기타와 노래에 더욱 몰두했다. 음악만이 유일한 치료제라는 것을 이미 경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1992년 영화 <러쉬(Rush)>의 사운드 트랙에 삽입된 ‘Tears in heaven’에 죽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실었다. MTV의 제안으로 그 해 녹음된 앨범 <Unplugged>에서의 백미(白眉)는 단연 이 곡이었다.

https://youtu.be/N2CdeOOF3jk


어쿠스틱 기타에 실린 애절한 멜로디와 노랫말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듬해 그래미는 그에게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 ‘올해의 레코드(Record Of The Year)’, ‘올해의 노래(Song Of The Year)’ 등 알짜배기를 포함하여 6개의 트로피를 ‘위로 선물’로 전달했다. ‘추억’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재진입하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에릭의 상승세는 계속됐다. 1994년 발매한 <From The Cradle>은 흥행과 평단 양편에서 세계적인 명예를 얻게 된다. 미국과 영국 앨범 차트를 동시 석권하였고, 블루스의 성찬을 담아낸 작품으로 격찬받았다. 4년 뒤에 내놓은 앨범 <Pilgrim> 또한 플래티넘을 기록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에릭은 작품마다 자신의 인생을 투영시켜 곡에 혼을 불어넣었다. 앨범 <Reptile>에도 그의 삶을 관조하는 숨결은 살아 숨 쉰다. 그 앨범에는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삼촌의 죽음’이 있다. 삼촌에 대한 존경심을 작품 전체에 고스란히 옮겼다.

“‘Reptile(사전적 의미로는 비열한 인간이라는 뜻)’은 삼촌과 관련이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내가 태어난 곳에서 ‘Reptile’이란 단어는 사랑스러운 말이다.”

 

선배들을 향한 오마쥬도 계속된다. 에릭 클랩튼의 음악적 스승 중 한 명인 기타리스트 J.J. 케일(J.J. Cale)의 ‘Travelin` light’, 1985년에 세상을 떠난 ‘점프 블루스의 대가’ 빅 조 터너(Big Joe Turner)의 고전 ‘Got you on my mind’ 등이 그것이다. 또한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1980년대 히트 넘버 ‘I ain`t gonna stand for it’, 레이 찰스(Ray Charles)의 ‘Come back baby’를 새롭게 재해석하며 두 명의 맹인 거장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는 어설프게 ‘과거에 대한 향수’를 끌어오지 않는다. 애절하면서도 포근하게 감싸안는 음색과 선율로 그만의 분위기를 낸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곡조에 맞게 ‘톤’을 찾아내는, 바로 ‘기타의 신’만이 할 수 있는 특허품이다.

음악을 만들고 듣는 이가 인간이지만 ‘비인간적’인 음악이 판치는 요즘이다. 그러나 에릭 클랩튼의 음악은 인생과 유리되어 예술미를 강조하는 음악이 아니다. 합일점을 찾아 예술로 승화시킨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그가 겪은 인생의 희로애락이 그대로 담겨 있다. 특히 역경 속에서 소중한 음악의 싹을 틔우고 키워냈다. 내면의 고통과 이별의 슬픔을 블루스로 쏟아냈다. ‘인간의 음악’이다. 당연하다. 허나 바로 이 점 때문에 클랩튼은 전설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첫사랑의 아픔으로 술 마시고 괴로워할 수 있다. 그것이 청춘의 특권이다. 당신은 사랑 때문에 정말로 숨 쉬는 것조차 힘든데, 그것을 지나온 선배 세대나 친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것, 서운하고 비정하게 들릴 수 있다.


맞다. 그 아픔은 당신이 성장하기 위한 것이고 그것은 당신의 청춘의 아픔으로 그대로 나아 당신의 인생 나이테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첫사랑뿐만이 아니라 당신이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형태로 인생 굴곡이 되어 나이테를 늘려갈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이테를 만드는 것은 그만큼 성장하고 힘겨움을 넘어섰다는 증표인 것이지, 그 시련과 아픔에 무너져내려 인생을 거기서 끝냈다는 표시가 아니다.


부모에게 버림받다시피 하여 기타만이 유일한 친구였고, 음악만이 자신의 살길이었던 에릭의 삶은, 결코 누군가에게 모범이 되는 삶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것 역시 하나의 인생이고 삶이다. 삶이 마음에 안 든다고 얼른 스위치 끄고 동전 다시 넣고 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란 말이다. 실수하면 실수한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고쳐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과 인생은 연필로 써서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렇다고 하여, 망쳤다고 이번 생은 아니라고 접을 것은 더더욱 아니다.

에릭이 자신의 청춘과 인생을 다 바쳐 배운 교훈처럼, 그는 자신이 유일한 친구라고 여겼던 음악을 통해 그것을 극복해냈다. 그의 나이 이미 80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그는 음악활동에 열정을 쏟아내고 있다. 그것이 그의 삶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늙었다고 해서 삶을 대강 살고 포기한단 말인가?


이 시리즈를 통해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먼저 삶을 살아갔던 선배들의 다양한 실패를 보며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미리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나은 인생 교과서가 어디 있겠는가? 당신이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고, 다른 사람이 실패에서 어떻게 극복해서 다시 부활하여 당당한 삶을 사는지에 대한 조언을 얻어 당신의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실수를 줄이고 이미 겪은 실패를 다시 성공으로 가게 만들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공부는 없을 것이다.


그저 듣기 좋았던 그의 음악이 이제 그의 인생을 알고 들으면 달리 들릴 것이고 그의 인생이 들릴 것이고, 그가 말해주려고 하는 내가 어떻게 그 수렁에서 빠져나와 다시 최선을 다해 인생을, 그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지 일러줄 것이다.


세상 어느 하나 허투루 볼 것이 없다.

당신에게 있어 세상 모든 것들은 배울 것 투성이이다.

아직 눈곱만치도 배우지 않은 주제에, 실패를 말하고, 인생 다 산 사람처럼 깝죽대지 마라.

얼른 일어서서 다시 배에 힘주고 정신 차리고 앞을 똑바로 봐라.

당신이 갈 길은 아직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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