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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16. 2021

형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전쟁 포로가 되어 갇혀도,

끊임없이 사고하고 실천하여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 철학자로 남다.

1889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 노이발덱에서 무려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 시대에 8명이나 되는 자식들이 있었다고 하니 혹시나 전형적인 가난한 유년기를 말하려고 하나 싶다면 완전히 잘못짚었다. 그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의 카네기’라고 알려질 만큼 오스트리아 철강 산업의 대부호였다. 말하자면 그를 포함한 8남매는 요즘 기준의 ‘재벌 2세’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요즘 한국에서 보이는 졸부 수준의 재벌 2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아버지는 유태인의 후손이었지만 부친을 따라 개신교 신자였고, 탁월한 경제 평론가이자 음악 애호가였다. 그의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였고 음악을 남달리 사랑했으며 음악적 재능도 매우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에술가들의 후원자로 유명했다.

 

어마어마한 부를 기반으로 교양까지 갖춘 집안의 분위기 덕분에, 브람스, 클라라 슈만, 구스타프 말러, 지휘자였던 브루노 발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피아니스트 요하임 등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이 호화스러운 비트겐슈타인 궁에 모여들어 수많은 연주회가 열렸다. 이러한 예술적 분위기는 8남매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나중에 모두가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기도 한다.

그의 생가

큰 형 한스는 여러 가지 악기를 다루었고, 셋째 형 쿠르트는 첼로를, 그리고 넷째 형 파울은 피아노를 전문가 수준 이상으로 연주하였다. 그의 부모는 쇤베르크, 파블로 카잘스 등을 직접적으로 후원하기도 했다.

 

넷째 형 파울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오른팔을 잃었음에도, 왼손만으로 라벨의 ‘왼손을 위한 협주곡’을 작곡한 천재적인 피아니스트였다. 그 역시 그 피를 이어받아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교향곡 전체를 휘파람으로 불어 동료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 그는 빈 분리파 예술가들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그의 작은 누나 마르가레테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구스타프 클림트 <마르가레테의 초상화>

1913년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자기 몫의 유산을 물려받은 그는 예술가 후원 자금으로 10만 크로네를 기부했고, 작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이 가운데 2만 크로네를 지원받은 것은 유명한 일화 중 하나이다.

 

어려서 그는 당시 부유했던 집안 자녀들이 그랬던 것처럼 14살까지 가정교사들에게 지도받다가 1903년 린츠 국립 실업학교에 입학했지만(무려 히틀러가 바로 1년 후배 동문) 성적은 신통치 않았고 친구들과 잘 사귀지도 못했다. 재벌가 ‘도련님’으로 말을 더듬고 벌레를 심하게 무서워하는 데다가 ‘당신’, ‘그대’와 같은 격식이 잔뜩 들어간 귀족스러운 말투를 쓰는 그를 동급생들은 공공연히 따돌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시기 그는 집안에서도 불행을 겪기 시작한다. 그의 나이 13세가 되던 해, 아버지와 갈등을 겪고 집을 나간 맏형 한스가 미국에서 실종됐고(자살로 추정), 셋째 형 루돌프는 이듬해 베를린에서 청산염을 마시고 자살했다. (둘째 형 쿠르트는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선에서 자살한다.)


사실 그의 아버지는 청교도적 윤리를 지닌 자본가로서 그의 아들들이 가업을 잇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들은 모두 예술적 감수성이 남달리 깊었고, 그러한 산업사회의 기업가의 의무를 다하며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에서 오는 갈등이 심각했었다.


학교에서도 힘든 생활을 시작했는데, 정작 형들이 하나둘 자살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심각한 정신적 핀치에 몰리게 된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태생의 철학자. 20세기의 위대한 천재 철학자이자 현대 영미 분석철학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며, 언어에 대해 가장 철저하게 회의하고 분석한 일상 언어 학파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흔히 비트겐슈타인이라고 줄여서 부르는, 풀네임,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의 이야기이다.

 

일반성을 갈망해 점점 일그러져 가는 지성계에 언어 사용의 다양성과 차이를 강조하였고, 지성의 혼돈과 미망에서 벗어나 오로지 삶의 진실과 마주하려는 철학적 고투를 한 전설로 지금까지도 추앙받고 있는 철학자이다. 듀이, 하이데거와 함께 체계 철학에 대비되는 3대 교화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다.

 

스스로 “표현은 삶의 흐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라고 말한 것과 같이, 그의 삶을 그의 철학과 분리해 고찰하기는 어렵다. 그 누구보다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지만, 동시에 가장 인간답기를 바랐던 아이러니를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준 20세기의 전설적 철학자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음악뿐만 아니라 기계에 남달리 관심과 재능을 보였다. 그는 스스로 모형 비행기와 재봉틀을 만들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다. 만년에도 이러한 관심은 지속되었는데, 몇 시간씩 박물관에 전시된 증기 기관을 관찰했던 적도 있다고 한다.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기는 했지만, 3년간 린츠 국립 실업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1906년 독일에서 가장 유명했던, 베를린-샤를로텐부르크 기술 전문대학(오늘날 베를린 공대의 전신)에 입학하고, 이듬해 아버지의 권유로 영국 맨체스터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기계공학부 연구생으로 등록해 1908년에서 1911년까지 항공공학 연구에 매달린다. 그는 대기 상태를 연구하기 위하여 연으로 실험하기도 했고, 특히 제트 엔진 설계에 몰두했으며 프로펠러 설계로 특허를 따기도 했다.

 

그렇게 그의 관심사는 점점 지평의 확대로 이어진다. 항공공학에 대한 연구가 깊어질수록 관련된 이론에 대한 연구가 불가피했던 까닭이다. 그의 관심은 항공공학에서 유체 역학 이론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그는 자연스럽게 응용 수학과 순수 수학에 관심을 지니게 되었고, 급기야는 수학 기초론과 수학 철학, 그리고 논리학으로 관심사가 옮겨가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과 버트란트 러셀

그러던 중 그는 일생 최대 결정적인 전환기가 되는 사건을 맞게 된다. 우연히 러셀의 『수학 원리』를 접하게 된 것이다. 그는 1911년 가을, 본격적으로 논리학과 철학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케임브리지에서 그를 만난 버트런드 러셀은 다음과 같이 그를 기억했다.

 

“처음에 그는 기술자가 될 생각으로 맨체스터로 갔다. 수학 책을 읽다가 수학의 원리에 흥미를 느끼고, 수학 분야에 누가 있는지 맨체스터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거론하자 그는 케임브리지 트리니티로 짐을 싸 들고 왔다. 그는 정열적이고 심오하고 강렬하고 지배적이라는 점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천재의 완벽한 표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 러셀은 무어와 함께 영국 철학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수학 원리』의 출판과 더불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석학이었다. 러셀과 무어는 비트겐슈타인의 비범한 능력과 열정에 깊이 매료되었다. 1년 후 러셀은 더 이상 비트겐슈타인에게 가르칠 것이 없을 정도라고 느꼈고 더구나 그가 자신을 앞서가고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그의 학문적 아버지, 버트란트 러셀

1913년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적 문제와 싸우기 위해서 노르웨이의 바닷가에 스스로 오두막집을 지은 후 혼자 지낸다. 그런데 이러한 은둔도 잠시, 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한다. 그는 탈장으로 병역 면제 판정을 받은 상태였지만, 자원입대하여 처음에는 오스트리아 육군의 사병으로, 그리고 2년 후에는 장교 훈련을 받고서 장교로 참전했다. 포병으로 동부 전선과 남부 티롤에서 근무하다가 1918년 11월 이탈리아군의 포로가 되어 1년간이나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가 포로로 수감되었을 때 그의 배낭에는 전쟁 중에 틈틈이 계속 적어놓았던 『논리철학 논고』의 원고가 들어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비트겐슈타인의 실존적 고뇌와 철학적 문제는 삶과 죽음이 넘나드는 참혹한 전쟁의 공포와 절망 속에서 구체화되고 해결되었던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원고를 1918년 8월, 포로수용소에서 최종적으로 완성한다. 이후 1921년에 러셀의 주선을 받아 『논고』는 출판되었다.

1913년에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가 별세했다. 비트겐슈타인이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어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은 상속받은 막대한 유산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유산을 릴케, 핵커와 같은 가난한 문인들을 위한 기금으로, 또 형제자매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다. 그 이후로 그는 극도로 단순하고 검약한 생활을 하였다. 심지어, 그는 넥타이를 맨 정장을 하고 다니는 모습도 거의 보이지 않았고, 그의 방에는 침대, 책상, 의자 등 기본적인 몇 개의 가구만 있었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철학적 문제들을 “궁극적으로 해결했다”라고 선언했고, 또 그렇게 믿었다. 이제 그에게는 그저 사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그는 쓸모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1919년에서 1920년까지 일종의 교육대학(교사 연수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오스트리아 동북부 시골마을 트라텐바흐의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시작한다. 교사 생활은 약 6년간 이어졌는데, 학생들에 대한 체벌 문제와 마을 사람들과의 알력과 같은 이런저런 문제로 결국 교사 생활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에 그는 수도원의 정원사 조수로 일하다가 잠시 조각을 하기도 하고, 누나 마르게레테의 부탁으로 누나의 저택 건축 작업에 착수한다. 이 건물은 설계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비트겐슈타인의 손이 가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세심하게 지어진 건물인데, 장식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대신에 엄격성, 정확성, 그리고 경제성을 특징으로 하는 이 건물의 건축 양식 자체가 그의 철학을 형상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철저하게 육체노동자로 살고자 했다. 철학 교수로서의 삶은 그에게 있어 ‘살아있는 죽음’이었다. 그랬던 그가 1929년 초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로 돌아오는 결정을 하게 된다. 그가 『논고』가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 이 당시 램지와 케인즈가 그를 계속 찾아와서 토론을 벌이고 또 철학에 복귀할 것을 간절히 권유한다. 비엔나 학파의 슐리크와 바이즈만과의 토론도 그가 철학에 복귀해야겠다는 결심을 재촉하였다. 특히 수학 기초론과 관련된 브라우어의 강연은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저명한 경제학자 케인즈가 흥분하며 보냈던 한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신이 도착했다!” 10여 년의 수많은 방황을 접고 그가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것은 그만큼 화제였다. 그는 바로 같은 해 6월 『논고』를 학위 논문으로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트리니티 칼리지 연구원이 됐고 바로 강의를 하게 된다.

당시 그의 강의에 대해 제자 노먼 맬컴은 이렇게 회상한다.

 

“그것은 강의라기보다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독창적인 연구 그 자체였다. 그는 질문을 던졌고 학생들의 대답에 다시 반응했지만, 때때로 어떤 생각을 짜내려 할 때, 학생들의 말을 멈추게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간헐적인 중얼거림과 좌중의 숨죽인 시선이 이어지는 긴 침묵. 그의 극도로 긴장되어 눈은 한 곳을 응시했고, 표정은 준엄했으되 얼굴에 생명감이 넘쳤다. 그럴 때면 학생들은 마치 자신이 고도로 몰입하여 지적인 힘이 충만하게 된다는 느낌에 휩싸였다.”

 

1930년대 전반 그는 강의와 연구에 몰두했다.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후,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중요한 전환을 맞는다. 비로소 그의 독창적인 철학이 싹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독창적인 사유는 『논고』(TLP)의 오류를 정확하게 비판하는 작업으로 시작되었다. 『철학적 고찰』(PR), 『철학적 문법』(PG), 『비트겐슈타인과 빈 학파』(WVC)는 『논고』에 대한 바로 그러한 철저한 반성과 비판을 읽을 수 있는 저작이다.


이러한 반성과 비판을 거친 후에 그의 독자적인 사상은 1933년에서 1934년에 구술되어 완성된 『청갈색책』(BBB),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RFM), 『심리 철학에 관한 고찰』(RPP)에서 서서히 윤곽이 제시된다. 이러한 노력은 미완성으로 끝나고 사후에야 출판된 『철학적 탐구』(PI)에서 집약된다.

그가 짓고 살았던 노르웨이 호숫가 오두막

1935년에는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그는 철학교수가 아닌 노동자로 살아가고자 했다) 소련을 방문했지만 포기하고 돌아왔다. 1936년 봄 연구원 임기가 끝나자 다시 노르웨이의 협만 오두막에 칩거했다. <철학적 탐구>의 제1부를 쓰기 시작한 것도 이곳에서였다. 1937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왔고 1939년에는 G. E. 무어의 후임으로 철학과에 임용됐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교수 취임을 하지 않고 런던의 가이 병원 약국의 배달 사원으로 일했으며, 나중에는 왕립 진료소 임상연구 실험실에서 일했다. 1944년 가을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비트겐슈타인은 3년 만인 1947년에 사임했다.

 

케임브리지를 떠난 그는 잠시 아일랜드에서 살았다. 골웨이 해변 오두막에서 지내는 그를 주변 어부들은 경외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마치 길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새들이 그의 어깨와 팔에 앉곤 했다는 것이다. 1949년 코넬대학의 노먼 맬컴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가 잠시 머물고 돌아온 뒤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다. 1951년 1월 29일 비트겐슈타인은 옥스퍼드에서 새로운 유언장을 작성하여 유언 집행인과 문헌 관리자들을 지정하고 케임브리지의 주치의 에드워드 베반 박사의 집에서 색채의 문제와 확실성의 문제에 관한 글을 작성하는 데 전념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며칠 전 미국에서 영국으로 날아갔다고 믿는다면, 나는 그가 그것에 관해 오류를 범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이 자기는 지금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내가 이런 경우에 오류를 범할 수 없다 하더라도, 내가 마취되어 있을 가능성은 있지 않은가? 내가 마취되어 있다면, 그리고 마취가 내 의식을 앗아가 버린다면, 이제 나는 실제로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지금 꿈꾸고 있다고 진지하게 가정할 수 없다. “나는 꿈꾸고 있다.”라고 꿈을 꾸면서 말하는 사람은, 비록 그가 그때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말을 한다 해도 옳지가 않다. 이는 실제로 비가 오는 동안 그가 꿈속에서 “비가 온다.”라고 말하더라도 그는 옳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비록 그의 꿈이 억수 같은 빗소리와 실제로 연관되어 있을지라도.”

                                              『확실성에 관하여』

 

4월 27일에 위와 같은 확실성에 관한 글을 쓰고 다음 날 저녁 의식을 잃었다. 결국 이 글은 그의 생애 마지막 글이 되었다. 1951년 4월 29일 아침 62세를 일기로 비트겐슈타인은 세상을 떠났다.

 

『확실성에 관하여』는 그가 죽기 며칠 전까지 하루하루 쓴 철학 일기이다. 이 작은 저작은 그의 철학의 깊이와 집념이 어떠했는지를 그대로 말해주는 걸작이며,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이 저작만큼 깊은 감동과 당혹스러움을 안겨주는 말이 있다. 주치의로부터 이제 살날이 며칠밖에 안 남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멋진 삶을 살았노라고 전해주시오.
(Good, Tell them I've had a wonderful life).”

 

이른바 ‘전기(前期) 비트겐슈타인’를 대표하는 『논고』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모든 철학적 문제를 해소시켰다 여겼다.


“철학적 저술에 기반을 둔 대부분의 명제와 질문들은 거짓이 아니라 헛소리들이다. 그런 질문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답도 할 수 없다. 다만 그것들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는 걸 입증할 수 있을 뿐이다.”


『논고』의 논리대로라면 언어의 기능은 세계를 묘사하거나 모사(模寫)하는 것이며,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사실 또는 실재가 있는가에 관한 것뿐이다. 사실 또는 실재가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세계의 뜻은 세계 바깥에 있어야 한다. 세계 안에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있으며, 모든 것은 일어난 그대로 일어난다. 그 안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세계 안에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 안의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결은 시간과 공간 바깥에 있다.” “실로 언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제자 노만 맬컴과 함께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거의 모든 철학적 명제들은 참이나 거짓이 아니라 헛소리다. 세계를 초월한 것, 다시 말해 언어를 초월한 것에 대하여 말하는 순간 그것은 헛소리다.

형이상학, 윤리학, 종교, 예술 등은 말할 수 없고 단지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논고』의 이 마지막 말을 끝으로 철학과 결별하려 했던 비트겐슈타인은 다시 철학으로 돌아왔다. 이른바 ‘후기(後期) 비트겐슈타인’이다.

 

식료품점 점원에게 ‘다섯 개의 빨간 사과’라고 적은 쪽지를 주었다고 해보자. 쪽지를 받은 점원은 쪽지의 내용대로 빨간 사과 다섯 개를 골라 줄 것이다. 쪽지에 적힌 내용에 대한 점원의 이해 여부는 그가 그 내용대로 ‘행동하느냐’에 달려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빨강’과 ‘사과’의 지시 대상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에 ‘다섯’이라는 말도 마치 그것의 지시 대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다섯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느냐가 문제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기능, 말의 의미에 관한 『논고』의 협소한 생각에서 벗어났다.

비트겐슈타인은 현대 서양철학의 이른바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를 주도한 철학자이자, 영미(英美)권의 언어분석철학 전통을 기초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철학을 ‘연구했다’기보다 철학을 ‘살았던’ 인물이다. 요컨대 논리적 논변, 이론적 체계, 생각의 기술을 다듬는 사고(思考) 기술자로서의 철학자가 아니라, 삶의 궁극적 문제, 인류의 문제를 치열하게 숙고하는 현인(賢人)으로서의 철학자에 가까웠다.

나는 그의 저서를 통해, 그리고 그의 삶을 통해, 철학을, 실천하는 지성을, 어떻게 수양을 쌓고 자신을 뛰어넘는지에 대한 방식을 배웠다. 재벌의 아들로 태어나 충분히 평생을 편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그리하지 않았고, 군 면제이면서도 굳이 군대에 가서 전쟁터에서 철학을 메모하고 정리하며 1년이나 포로로 수감생활을 하면서 저작을 완성했다. 철학과 교수의 삶은 ‘살아있는 죽음’이라고 평가하며 철저하게 행동하는 노동자로서의 삶을 지향했다. 현대의 그 어느 철학자도 감히 20세기의 천재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넘어섰다고 입을 놀리지 못하는 이유이다.

 

철학이,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가 얼마나 치열한 것인지 삶 속에서 찾아내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던 그의 삶이 당신에게 얼마나 강한 충격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스스로 똑똑하다고 하는 이들은 한 번쯤 그의 저서에 도전한다. 그의 삶을 제대로 읽어내지 않은 채로 그의 저서를 탐독하고 겉만 훑어내는 것은 껍데기일 뿐이다. 당신의 삶이 그의 삶을 닮을 필요는 없다. 아니, 닮을 수도 없다.


내가 살아보니, 돈이 많으면서도 검소한 생활을 했다는 사람들에 대한 표현은 조금 수정해야 할 듯싶다. 겉을 치장하고 있는 척을 하는 것에 관심이 없고 그것이 주가 아닌 것뿐이지, 부러 검소하게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그의 삶에 주요 관심사아닐 뿐이다.

형 옆에서 다소곳한 자세로 책을 함께보는 그.

지금 당신의 삶의 목표는, 주는 무엇인가?

궁극의 진리를 찾기 위해 미친 듯이 공부하고 사유하는 사람을 내 이제껏 살면서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자신의 삶이 자신이 배우고 익힌 것과 일치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워낙 모든 것을 타고났던 그였기에 허무주의였을 것이라는 호사가들의 말은 다 의미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다 가진 일반인은 대개 더 갖겠다고 발버둥을 치다가 나락으로 떨어지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책을 통해, 경험을 통해 수만 차례 봐왔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삶의 목표가 부자이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당신의 삶에 대해 미안하지 않겠는가? 당신에게 위인이 되라거나 대단한 사람이 되라고는 하지 않겠지만, 최소한 당신이 죽음을 앞두고 스스로 자평하기에 당신의 삶이 멋졌노라고 말할 수 있는 당당함을 가지려면 지금부터라도 배움과 일치된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어리숙하게 사는 탓에, ‘삶이 무슨 도덕책처럼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고 살아온 내 입장에서 보건대, 지식이 당신을 돋보이게 만드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당신의 주머니를 돈으로 두둑하게 만들어주거나 당신의 지위를 올리는 한낮 방편으로 사용되어서는 더더욱 안될 것이라 본다.

넷째 형 파울과 함께

당신의 공부가 당신의 행동과 당신의 안목에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길 바라며, 당신의 공부가 당신의 도덕적 수양에 큰 도움이 되는 재료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부수적으로 경제적인 부나 명성을 얻게 되는 것은 아주 우연히 얻게 되는 칭찬 정도로 받아들이는 삶이길 바란다.


그러한 이유로 지금 당신이 겪은 실패나 고난이 결코 당신을 쓰러뜨리거나 당신의 신념과 당신이 가고자 하는 그 길을 그리 쉽게 방해할 수 없도록 한다는 사실을 깨닫길 바란다.


근엄하게 철학이 일반인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다고 여기며 난 척하고 싶어 하는 같잖은 것들을 위한 철학을 비트겐슈타인은 혐오했다. 그가 아끼던 제자에게(어쩌면 오늘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에게도), 그가 생각한 철학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설명해주는 편지글로 오늘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철학을 공부하여 얻는 효용이 그저 어떤 심오한 논리학의 문제 등에 관해 어느 정도 그럴듯하게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일상생활의 중요한 문제들에 관한 생각을 개선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위험한 말들을 사용하는 여느 기자들보다 우리를 더 양심적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철학을 공부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확실성, 확률, 지각 등에 관해 잘 생각하는 게 어렵다는 것을 나는 안다네. 그러나 우리 각자의 인생과 다른 사람들의 삶에 관해 진정으로 정직하게 생각하는 것, 또는 생각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가능하긴 하지만, 훨씬 더 어렵기 마련이지.”

                    제자 노먼 맬컴에게 보낸 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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