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께서 말씀하셨다. “知者는 물을 좋아하고 仁者는 산을 좋아하며, 知者는 動的이고 仁者는 靜的이며, 知者는 낙천적이고 仁者는 장수한다.”
전 장(章)에서 번지(樊遲)가 지(知)와 인(仁)에 대해 묻는 것에 대해 번지(樊遲)의 눈높이에 맞춰 대답해 준 것을 공부하였다. 이 장에서는 같은 개념에 대해 좀 더 대상을 확장하여 일반화하되 조금은 확장된 상위 수준에서 설명을 해주고 있다. 조금 특이한 것은 어떻게 하라는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취한 자가 어떠한 성향을 보여주는지에 대해 형용하는 듯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 장 역시, 서예가들에게도 그렇고 <논어>의 문구 중에서는 꽤나 유명세를 탄 글이다. 그런 글일수록 오독(誤讀)하고 잘못된 뜻을 평생 새기는 이들이 있으니 조금 더 주의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주자가 이 가르침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知者는 사리에 통달하여 두루 통달하고 막힘이 없어서 물과 비슷한 점이 있으므로 물을 좋아하고, 仁者는 의리에 편안하여 중후하고 옮기지 않아서 산과 비슷한 점이 있으므로 산을 좋아하는 것이다. 動과 靜은 體로 말한 것이요, 樂과 壽는 효과로 말한 것이다."
아무리 초심자라고 하더라도 이제 논어의 3분의 1이나 공부하고서도 이 장의 ‘樂’라는 글자를, 즐거울 ‘락’이라고 읽어서는 안 된다. ‘요’라고 읽고, 기뻐하고 좋아한다는 의미로 새긴다.
본래 본문에서도 공자가 그런 의미로 새겼으니 풀이를 그리 한 것이겠지만, 지(知)와 인(仁)을 이미지화한 것이 상당히 형이상학적인 메타포에 해당된다고 평가받는 장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를 두루 알게 되면 막힘이 없기 때문에 물과 비슷하다고 비유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동적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의리에 편안하여 중후하다는 의미는 이리저리 생각이나 의견을 뒤바꾸는 경박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에 비유하여 그것을 움직이지 않는 산에 비유한 것이다. 이 주석에서 눈여겨봐야 할 설명은 마지막 문장이다.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은 외형을 말한 것이고, 樂과 壽는 ‘효과’를 말한 것이라고 한다.
즉, 그 경지에 다다르게 되면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경지에 다름 아니다. 장수는 단순히 오래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음의 평정이 오래가기 때문에 얻게 되는 경지이기 때문에 행간의 의미가 두 단계를 한꺼번에 설명하고 있다.
현대에 이 장을 해석하는 자들 중에서, 원문에서 ‘壽(수)’의 의미가 다소 댓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여 ‘壽(수)’를 ‘憂(우)’의 오기(誤記)로 보아, “知者는 즐기나, 仁者는 현실에 대한 걱정을 한다.”라고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언뜻 현대적인 해석으로 눈에 맞추어보려고 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러한 시도가 맞는 것인지 잘 알지 못하겠다. 제발 주석 보고 철학 공부도 좀 하라고 권하고 싶다.
이런 자들이 수천 년 뒤에 한국에서 나올 것을 예상이라도 하였는지, 정자(伊川)가 이 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仁과 知를 체득하기를 깊이 한 자가 아니면 이처럼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왜 이런 말이 나왔는지 조금 상세히 전체의 면모를 읽어보도록 하자.
知者가 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물에는 온갖 생명의 물체가 풍부하게 들어 있고 자연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에서, 사람의 미덕과 비슷하다. 그것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데, 지렁이가 땅을 구불구불 기어가나 반드시 그 방향이 있는 것처럼, 정의(正義)와 마찬가지이다. 그것의 기세는 막을 수 없이 세차고 끝이 없다.
인간의 덕행과 비슷하여, 마치 인간이 제방을 만들어 흐르게 하면, 콸콸 멀리 흘러갈 수 있고, 설사 깊고 깊은 계곡에 떨어져 들어간다고 하여도, 조금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지 않는데, 마치 용감한 사람이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과 같다.
그것은 유약하나, 도달하지 못할 곳이 없어, 만물이 그것에 출입하게 되면, 신선하고 깨끗하게 변하게 되어, 마치 교화를 잘 받은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知者의 품격이다.
이 장(章) 외에 <논어>에서 공자께서 물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뒤에 나올 ‘자한(子罕) 편’의 17장에서, ‘逝者如斯夫, 不舍晝夜!(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낮밤을 가리지 않는구나!)’라는 언급으로 나온다. 나중에 공부할 때 더 자세히 다루기는 하겠으나, 간략히 설명하자면, 세월의 흐름과 같은 특성을 물의 흐름과 같은 것에서 찾아 언급한 것인데, 이 장과 직접적인 연관까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에 대한 특성을 형이상학적인 개념어들과 연관시키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웠던 것은 알 수 있다.
한편, 仁者가 산을 좋아하는 이유는, 산에는 초목이 무성하고, 새와 짐승이 무리 지어 있어, 사람들의 생산 활동에 소용되는 모든 물건이 일절 산에서 생산되며, 또한 아무리 써도 고갈되지 않기 때문이다. 산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물건을 많이 만들어 내는데, 자신은 사람들에게서 그 어떠한 것도 가져가지 않는다.
사방팔방의 사람들은 산에 와서 필요한 것들을 취하는데, 산은 모두 아낌없이 주고 있다. 산은 또 폭풍우가 일어나면 구름을 비로 만들어 땅을 관통하게 하여, 음양이 조화되어, 내린 단비는 만물에 혜택이 되고, 만물은 그래서 성장할 수가 있고, 사람은 의식이 풍족하게 되어 생활이 안락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자가 산을 즐겁게 바라보는 이유이다.
이와 같이 자연에 형이상학적인 비유를 하는 것은 사실 공자에게서만 발견되는 특징은 아니다.
노자(老子)는 물의 특성을 ‘尙善若水(상선약수;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라고 하였다. 공자가 남궁경숙을 따라 주(周) 나라에 갔을 때, 노자(老子)로부터 예(禮) 등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받았다는 일설이 있는데, 공자가 자신이 가늠할 수 없는 궁극의 현자로 보았다는 노자(老子)는, 물의 특성을 ‘반드시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웅덩이가 있으면 고이며, 흘러넘쳐 길이 있으면 반드시 따라 흐른다.’고 풀어 해석하며, 물의 특성을 상선(尙善)으로 보았던 것이다.
<예기(禮記)>의 ‘악기(樂記) 편’에 보면, 樂(악)과 禮(예)를 들어, ‘樂은 仁에 가깝고, 禮는 義에 가깝다.’고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러한 견해는, ‘樂은 天性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니 仁에 가깝고, 禮는 땅에 만들어진 사물의 질서를 잡는 것이니 義에 가깝다.’는 해석적 근거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장에서 다루고 있는 仁이나 知의 철학적 개념에 대한 좀 더 심도 있는 공부를 통해 접근해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라 실마리만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이 유명한 문구를 두고서, 등산을 취미로 삼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仁者’라고 칭하고, 계곡이나 바다를 좋아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知者’라고 칭하는 얼토당토않는 농담을 하는 것을 참으로 많이 보고 들었더랬다. 표면적으로 그렇게 쓰였으니 농담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면서 그런 농담을 했으면 좋겠다는 아주 작은 바람은 있다.
그나마 이런 무식한 농담은 조금 낫다. 이 장을 해석하면서 거창하게 중국의 예까지 들어가며 知者는 치수(治水)를 잘한다는 둥 하는 이상한 논리로 넘어가 물을 잘 다스린 임금들을 언급하는 참람된 글을 배설하는 이를 본 적도 있다. 제발 모르면 그냥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기로 하자.
이 장의 가장 숨겨져있지도 않은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은 두 개념이 상대되거나 분리되는 개념이 아님을 자연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은 건축물이 아니다. 그래서 산과 물을 따로 분리할 수 없다.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고 그 계곡에 흐르는 물이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적인 것이다. 그것 자체만으로 두 개념이 하나로 융합되어 있는 것이고 그것을 추구하라는 가르침은 기초 중에 기초이다. 감춰져 있지도 않은데 그것조차 못 보면 감춰져 있는 것은 찾을 엄두도 낼 필요가 없다.
그리고 두 번째로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은 순서이다. 고문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같은 개념이고 상호보완적인 개념이라고 글을 언급하는 순서가 그것을 익히는 순서를 가리키는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늘 말했지만, 배우는 것은 모든 행위의 기초이다. 바른 정보가 없이는 시비를 가리는 것에서부터 수양을 어떻게 해야 할 지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장에서도 知가 仁보다 먼저 언급된 것이다.
공자는 仁을 愛人(애인), 즉,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라 정의한 바 있다. 그런데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방법은 단순하거나 간단하지 않다. 토끼와 사자의 사랑이 그러하듯이 상대에 따라, 처지나 상황에 따라 사랑하는 방법을 적확하게 하려면 먼저 상대의 입장에서 제대로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대를 잘 알지 못하거나 상황 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랑은 토끼와 사자처럼 상대에게 온전히 전달될 수 없는 것이다. 방법이 적절하지 않으면 도리어 오해를 부르거나 자칫 잘못되면 파국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곧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고 상대가 원하는 방식을 온전히 파악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바로 앎의 영역이다. 앎이 온전히 갖추어져야 仁이 완성될 수 있다는 가르침인 것이다.
‘知人(지인)’ 즉, ‘사람을 아는 것’은 배움의 기본 중에 기본일 뿐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기본도 하지 못하고서 전부로 확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위정자가 백성을 위하는 것이 仁이라면 그 仁의 기본은 사람을 아는 것, 사람을 아는 것은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본 사람이 훨씬 더 낫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법비들은 정치판으로 판을 키워 뛰어들며 늘 말한다. 약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겠다고.
검찰이나 법원에서 검사나 판사를 하던 법비들이 정치를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대한민국 검찰과 법원에서 상대방(피고)의 입장을 이해하는 검사와 판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한다면, 그들이 눈높이와 그들의 깜냥에서 그런다고 코스프레를 할 뿐이다. 사자는 너무도 사랑하는 토끼에게 가장 아끼는 사슴고기를 대접했지만 그녀가 그것을 먹지 않는 것에 실망하고 속상해한다. 자신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찾지 않고 속상해하고 그것이 상대에게서 문제가 있다고 찾으려 든다는 것이다.
감사원을 비롯하여 세종에 사는 것들의 조직 내에 있는 감사실 직원들이 그 밥의 그 나물이고, 누차 언급했던 경찰청과 검찰청 내의 내부 감사조직들이 어쩌면 하나같이 형사처벌을 받아야 할 대상들을 솎아내지 못하고, 뉴스에만 걸리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그들을 처벌하는지 당신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그들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제대로 알 생각이 없으며, 우연히 알게 되더라도 그 입장을 대변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내게 필요한 물건임에도 더 필요해 보이는 사람에게 양보해야 하는데 너무도 당연히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냐고 묻는 놈도 나쁜 놈이지만, 자신에게는 아무 필요도 없는 물건을 그것을 간절하게 갖고 싶어 하는 이에게 주지 않겠다는 심보는 아주 나쁜 놈이다. 그것이 나에게도 필요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선뜻 내어주는 사람은, 자신이 같은 처지였을 때 도움을 받았거나 그런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 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서 그렇다.
배고파보지도 않았던 놈이, ‘TV에서 보고, 주변에 그런 친구들도 많이 보면서 자라서 잘 안다.’고 하는 것은 잘 알지도 못하는 놈이 그냥 떠드는 것이고 그렇기에 태생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부자가 죄는 아니다. 하지만 부자가 되기 위해 그렇지 못한 자들을 무시하고 자신과 같은 이익을 가진 자들을 비호하고 붕당을 이뤄 그 부를 이룬 놈들은 엄벌에 처해져야 할 나쁜 놈들이 맞다.
나쁜 놈들이 워낙 많이 떼거지로 모여있어 정치판으로 가는 것은 이해가 가나, 그들이 공직을 맡거나 하물며 국가를 대표하고 국정을 결정하는 자리에 가게 하는 것은 순리가 아닌 것을 떠나 지극히 위험한 도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