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께서 말씀하셨다. “齊나라가 한 번 변화하면 魯나라에 이르고, 魯나라가 한 번 변화하면 선왕의 도에 이를 것이다.”
이 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학에서 이른바 도통(道統)이라고 일컫는 계보에 대한 지식과 공자(孔子)가 추구하는 도(道)의 근원을 어디서부터 이어졌다고 보는가에 대한 사전 지식이 조금 필요하다. 공자가 생각했던 성숙도(成熟度)에 관한 기준도 엿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주는데, 자신의 조국, 노(魯) 나라와 이웃했던 제(齊) 나라를 비교하여 우열을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공자가 추구하는 도(道)가 바로 서 있는 사회는 보다 발전하고 보다 힘을 갖춘 강대국이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그 도(道)를 세운 사람이 있고 그것을 잘 보존하여 유지해나간 이른바 도(道)의 적통(嫡統)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
주(周) 나라 무왕(武王), 성왕(成王) 시절의 주공(周公) 단(旦)이 세운 주(周) 나라 봉건제(封建制)의 질서가 온전히 살아있는 주왕조(周王朝)가 공자가 롤모델로 삼고 있음을 이 장을 통해 명확하게 재확인할 수 있는데 공자는 그 근원의 형태를 보존하고 그때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초기의 질서를 부활해야 하냐고 역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원문에서 일컫는 두 왕조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지부터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한다.
폭정(暴政)의 은(殷) 왕조를 무너뜨리고 주(周) 왕조를 세우는 전략과 군사적 전술을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에게 제공한 인물이 ‘여상(呂尙)’인데, 반계(磻谿)에서 낚시를 하면서 서백(西伯) 창(昌)을 만나기를 기다려서, 결국 그를 도와 은(殷) 왕조의 폭정을 무너뜨리고 주왕조을 세우는 일을 돕게 된다. 서백(西伯) 창(昌)이 여상(呂尙)을 만났을 때, 그의 태공(太公)께서 주(周)의 흥함을 위해 기다리던 인물이라며 ‘태공망(太公望)’이라 불렀고, 그의 본성(本姓)이 강(姜)이라서, 흔히 세월을 낚은 강태공(姜太公)이라고도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문왕(文王)으로 추존된 창(昌)을 도와 주(周)의 흥함을 도왔고, 무왕(武王)이 은(殷)의 주(紂)를 치는 군사적 전술을 제공한 공으로 그의 출신지인 지금의 산동성 쪽 영지를 봉토로 받아, 그 제후국이 제(齊) 나라이며, 그 시조가 여상(呂尙)이었던 것이다.
주공 단(周公 旦)은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武王) 발(發)의 동생으로, 문왕(文王) 시절부터 형(兄)을 도와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데 전력(全力)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며, 무왕(武王)이 은(殷)의 주왕(紂王)을 벌한 후, 소공(召公) 석(奭)을 연(燕)에, 주공(周公) 단(旦)을 곡부의 노(魯)에 봉했으며, 주공(周公) 단(旦)은 봉지(封地)로 가지 않고 무왕을 보좌하고, 무왕이 죽자 무왕의 아들인 성왕이 어려 섭정을 하면서 주왕실(周王室)의 안정을 꾀하고, 봉지인 노(魯)에는 자신의 아들 백금(伯禽)을 보낸다.
성왕이 성장하자 모함을 받아 주공(周公) 단(旦)은 초(楚) 나라로 도망가게 되는데, 나중에 주공 단의 충심을 알게 된 성왕이 눈물로 호소하며 주공이 다시 돌아오기를 간청하여, 주공은 다시 돌아와 다사(多士)와 무일(毋逸)을 지어 성왕의 정사(政事)에 대한 훈계로 보필한다.
주공이 죽자, 주나라에는 추수 전 폭풍우가 몰아쳐 벼가 모두 쓰러지고 나무가 뽑히는 등 재난이 있어, 주나라가 공포에 휩싸였는데, 성왕과 대부들은 조회복으로 갈아입고, 금등서(金藤書)를 열어, 무왕이 아팠을 때 주공이 자신을 무왕 대신 제물로 바치는 글을 찾고서, 주공을 신하로 여기지 않고, 천자의 예를 갖추어 교(郊)에서 제사 지내니, 바람이 그치고 벼가 바로 서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성왕(成王)은 노(魯)에 명하여 노나라는 하늘에 제사 지내는 교(郊) 제사로 주 왕조의 시조인 문왕께 제사 지내게 하니, 노(魯) 나라는 다른 제후국들과 달리 천자의 예악(禮樂)을 가지는 특수함이 생기게 된다. 앞서 공부했던 ‘팔일(八佾)편’ 격에 맞춰 음악을 사용해야 한다고 그렇게 등급을 중시했던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기인한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강태공(姜太公) 여망(呂望)을 시조로 삼은 나라가 제나라이고 주공(周公)을 시조로 삼은 나라가 노나라이다.
그러므로 두 나라는 모두 선왕의 유풍을 지니고 있었지만, 노나라는 주나라의 예의와 제도를 잘 계승하여 공자의 이상에 매우 접근한 나라였고, 제나라는 자연조건이 좋아 백성이 부유하고 국력이 강성하여 환공(桓公) 같은 사람이 관중(管仲)을 등용하여 한때 패도 정치를 실시하는 등 노나라보다는 한 단계 아래인 나라였음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먼저 주자가 이 장을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공자 당시에 제(齊) 나라의 풍속은 功利를 우선으로 여기고 과장과 속임을 좋아했으니, 바로 패도정치의 남은 습속이었다. 노(魯) 나라는 禮敎를 중시하고 信義를 숭상하여 아직까지도 선왕의 남긴 풍속이 남아 있었으나, 다만 어진 사람이 죽고 훌륭한 정치가 그쳐져 폐지됨과 실수됨이 없지 못하였다. 도는 선왕의 도이다. 두 나라의 정치는 풍속에 아름다움과 나쁜 차이가 있으므로, 그 변화하여 선왕의 도로 감에 있어서 어렵고 쉬움이 있음을 말씀한 것이다.”
지금 공부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조금 위화감이 들 수도 있는 롤모델의 시대가 보여줬던 원형을 복원해야 한다는 의견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당연히 시대가 변하였으니 시대에 맞춰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혹자는 노나라가 힘이 없고 제나라가 힘을 갖추어서 그것을 미화하는 것으로 노나라에 정통성이 있는 것을 나라를 세운 사람의 신분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냐고 어리석은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공자의 의도가 그렇게 단순하고 무식하다면 아무도 공자를 성인이라 칭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자의 해설처럼 중요한 방점은 선왕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선왕의 도’에 있다. 그래서 역시나 그런 오해가 있을 것을 수천 년 전의 정자(伊川)가 꿰뚫어 보고 이렇게 설명한다.
“공자 당시에 제나라는 강하고 노나라는 약했으니, 누구인들 제나라가 노나라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노나라는 아직도 주공의 법제가 남아 있었고, 제나라는 환공의 패도정치로 말미암아 간략함을 따르고 功을 숭상하는 정치를 하여 태공의 남긴 법이 모두 없어져 버렸다. 그러므로 한 번 변화해야만 노나라에 이를 수 있고, 노나라는 폐지되고 실추된 것만 거행하면 될 뿐이니, 한 번 변화하면 선왕의 도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 주석은 중요한 핵심을 한 가지 알려준다. 두 나라 모두 본래는 선왕의 도를 갖추고 있었는데, 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던 환공이 오히려 패도정치를 펼쳐 나라는 강해졌을지 몰라도 선왕이 남긴 도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선왕의 도는 그저 선왕의 유지나 옛날의 예법 따위가 아니다. 나라를 운영하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하고 갖추어야만 하는 도리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수천 년이 흘러도 나라가 달라도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무엇을 중요하는가의 가치관의 문제이고 위정자가 추구해야 할 나라가 지향해야 할 바인 것이다.
그래서 주자는 이 내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내가 생각하건대, 두 나라의 풍속은 오직 夫子만이 변화시킬 수 있었는데, 한 번 시험해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말씀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그 시행함에 있어 완급의 순서를 대략 볼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것을 당연히 노나라와 제나라의 비교로 본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이 문장에서 한 가지 감춰진 행간을 읽는다. ‘一變’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한 문제인데, 공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 단어를 사용하여 두 나라보다 노나라가 조금은 더 빨리 돌아갈 수 있지만, ‘크게 변해야’한다는 점을 두 나라 모두에 강조하고 있다. 우열이 있고 완급의 차이는 있으나 ‘오십보백보’라는 할 정도로 당대의 현실이 선왕의 도로부터 얼마나 유리되었는지를 모두 까고 있는 것이다.
노나라가 공자에 의해 변화되지 못하여 선왕의 도를 구현하지 못한 것에서는 제나라보다 조금 나을 뿐 크게 변해야 하는데 자신이 그럴 기회를 갖지 못하였음을 한탄함과 동시에 그것을 읽어낼 만한 위정자가 있다면 보고서 뜨끔하라고 섞어 놓은 것에 다름 아닌 기술적 구사이다.
주(周) 왕조가 12대 유왕(幽王)에 주왕실은 권위를 잃고 공화 시대를 거쳐 춘추시대로 접어들게 되면서 각 제후국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걷게 되며,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게 되는데, 제(齊) 나라는 환공(桓公)과 관중(管仲)의 실용적 개혁을 기반으로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覇者)가 된다.
안영(晏嬰)
공자의 시대에도, 제(齊) 나라는 경공(景公)과 안영(晏嬰)에 의해 다시 세력을 키웠으니, 땅의 크기나 국력이라는 측면에서 제나라는 노(魯) 보다 강한 것은 엄연한 사실로 보이는데, 공자는 노(魯) 나라도 삼가(三家) 권세의 폐해가 심하고, 문무왕(文武王)의 창업 정신과 주공의 도(道)가 무너졌으니, 노(魯) 나라도 도(道)를 회복하려면 덕치(德治)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 것이다.
우리에게 적통이 될만한 도통(道統)이 있는지는 역사학자들이나 정치학자들마다 선뜻 대답할 수 있지 못한 상황이다. 물론 있으면야 좋겠지만, 그것이 없다고 수치스럽거나 롤모델이 없어 제대로 수양하지 못하는 나라가 있다는 것은 말 그대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우리의 현실이, 이 장의 가르침이 나온 지 수천 년이 지난 대한민국이 ‘크게 한 번 변해야(一變)’ 제대로 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 글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는 당신에게 묻자.
대한민국의 무엇이 바뀌어야 한다고 그렇게 목청을 높이는가?
지금 자신들이 기득권을 놓쳤다고 생각하는 정신 나간 정치꾼 야당이 정권을 바꿔야 한다는 멍멍 소리하는 것 말고, 정말로 대한민국이 제대로 된 도통(道統)을 갖추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가슴 아프게 세상을 떠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잘한 성인군자가 아니었음은 그를 좋아하고 지지했던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모두 인정하는 일이다. 그가 나라를 대표하는 이가 되었을 때 무엇을 혁신하려 하였는지 혹시 당신들은 기억하는가?
그를 곁에서 모셨다고 했던 이가 지금 대통령을 한 지 한두 해도 아니고 약속한 시간이 모두 다 되어 가는데 과연 도합 10년의 시간 동안 그것을 이뤘다고 생각하는가?
노무현 대통령이 신임 검사들과 토론으로 맞짱을 뜨던 장면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 자리를 왜 가졌는지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리고 적당히 기억하는 이들 중에서도 과연 노무현 대통령이 어떤 복안을 가지고 있었는지 읽어내고 있던 사람은 당시에도 지금의 정부에도 많지 않아 보인다.
그는 알았다, 법비들의 세상이 판치는 어느 시점엔가는 그 끈을 끊어버려야 한다고.
그것은 그가 법조계라는 바닥에서부터 정치판으로 올라오면서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부대꼈기 때문에 안다. 그가 법을 배우고 변호사가 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세상을 바르게 바꿔보겠다는 거창한 꿈이나 이상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그가 여러 가지 부정과 부패와 잘못된 것을 정작 법조계에 들어가서 보고 부대끼면서 정치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그 오물판에 투신을 한 것이었다.
정치가 어려운 것은, 내가 누군가의 부정을 지적할 때, 분야가 다르고 색깔이 다르다 하더라도 내 오점을 상대가 지적하고 드러내는 순간, 그리고 그것이 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내 말의 무게는 깃털로 변해버리고 만다. 그것이 정치가 어려우면서도 지저분한 이유이다.
도덕군자가 되어야만 남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나를 지지해주는 이들에게 오물이 묻은 상태로 더 지저분한 상대가 지저분하다고 지적하는 것이 설득력을 가질 수 없는 것과 같다.
또 지나가던 자가 뜬금없이 이 글을 읽고, 아침부터 원문과 관계없는 엉뚱한 소리를 하시는 거 아니냐고 시비를 걸까 싶어 다시 맥을 짚어준다. 나는 이 장의 키워드를 ‘一變’으로 보고 그렇다면 무엇을 크게 바꿔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역사의 가르침에서 찾자고 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패기 있게 대드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자들은 지금 검찰의 수뇌부에 해당하는 기수들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법비들에 의해 썩어 빠져 나라가 잘못 돌아가고 그들이 정치판에 뛰어들어 그들의 이익에 위해 법을 바꾸고, 애꿎은 국민들을 겁박하며 적발되더라도 법망을 빠져나가고 그것으로 이익을 만들어 붕당을 이뤄 그들만의 리그가 커져가는 것을 당장 수뇌부의 목을 쳐서 혁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막 그 일을 시작한, 이제 갓 물들기 전의 이들과 그 혁신을 함께 할 수 없겠느냐고 설득하고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시도는 결국 처참하게 실패했고, 그것들은 위로 올라가며 그 전 선배들보다 더 악랄하고 더 지능적으로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문제가 무엇인지 알더라도 모두의 힘이 단칼에 실리지 못하면 짚단도 벨 수 없기 마련이다.
왜 법비들을 털어야 하는지는 20여 년 전에도 알았지만 그들의 강한 저항과 조직적인 방해에 실패하였다. 지금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대장동 게이트라고 거창하게 이야기했는데, 그 돈의 맥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니 대선배 법비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그 조직에서 조직은 생명이고 선배가 곧 너의 미래라고 세뇌교육을 받은 법비들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망연자실 우물쭈물 정권이 바뀌어 이것을 덮고 쪽바리들이 말하는 방식처럼 흘려버리자고 하고 있다.
크게 여러 번 바뀌어 세탁기로 돌리듯이 돌려야만 대한민국이 도통(道統)을 찾을 것 같기는 한데, 최소한 거창한 무언가를 되찾고 아니고를 떠나서 잘못된 가장 큰 것을 자르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이들의 힘이 필요하다. 손오공의 가장 파괴력이 큰 기술이 혼자서 쓰는 에네르기파가 아니라 원기옥인 이유는 그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