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다운 것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답게’라는 정명론(正名論)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by 발검무적
子曰: “觚不觚, 觚哉! 觚哉!”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모난 술그릇[觚]이 모나지 않으면 모난 술그릇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모난 술그릇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觚(고)’라는 것은, 본래 배 부분과 다리 부분에 네 개의 각진 모서리가 있는 제례용 술잔을 의미한다.(팔각의 모서리라는 설도 있다.) 원문에서 첫 번째 觚(고)는 개체로서의 고를 가리키고, 두 번째 觚(고)는 원래의 형태를 가진 이상적인 고의 성질을 가리킨다. 첫 번째 觚(고)는 명사이고 두 번째 觚(고)는 형용사로 전용된 것이다. 다시 말해 고(觚)는 본래 각진 모서리가 있어야 하는 물건인데, 시대가 흘러 당시에는 모서리가 없어져 맨들거리는 둥근 잔이 되었음에도 이름은 그대로 ‘고’라고 불렀기 때문에 공자가 이를 비유하여 황폐해진 정치의 도를 개탄한 것이다.

‘고(觚)’라는 술잔이 그렇게 불릴 수 있었던 것은 ‘본연의 성질’인 모서리가 있어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었는데, 모서리가 모두 없어져 반들반들한 둥근 잔이 되었음에도 그것을 고(觚)라고 부르는 것이, 사람이 본래 갖춰야 할 仁을 갖추지 못하면 사람으로 불릴 수 없다는 보이지 않는 훅이 양심을 강타한다.

주자는 이 글에 다음과 같은 해설을 하고 있다.

“觚는 모난 것이니, 혹자는 술그릇이라 하기도 하고 대나무 그릇이라 하기도 하는데, 모두 기물에 모가 있는 것이다. 모나지 않다는 것은, 당시 그 제도를 잃어 모가 나지 않은 것이다. 觚哉觚哉는 모난 술그릇이 될 수 없음을 말씀한 것이다.”

표면적인 설명에 혹시나 배우는 자들이 이해하지 못할까 싶어 정자(伊川)가 이렇게 설명한다.


“모난 그릇이 그 모양과 제도를 잃으면 모난 그릇이 아니니, 하나의 그릇을 들매 천하의 만물이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으로서 임금의 도리를 잃으면 임금 노릇을 못하는 것이요, 신하로서 신하의 직분을 잃으면 빈자리가 되는 것이다.”

문장의 마지막에 나온, ‘임금으로서 임금의 도리를 잃으면 임금 노릇을 못하는 것이다.’이라는 가르침이 이 장의 핵심 내용인 정명론(正名論), 되시겠다.


뒤에 배울 ‘안연(顏淵) 편’에서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고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않고 아들이 아들답지 않다면 비록 곡식이 있다고 한들 내가 그것을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공자의 입을 통해 구체화되는 내용에 다름 아니다.

이 장은 이것을 조금 비틀어서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만 양심에 대고 직접 전기충격에 가까운 데미지를 받으라고 보이지 않는 강 훅을 날린 것인데, 이 장이 은미하게 임금과 신하가 각자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않는 안타까운 세태를 개탄한 것이기에 그 충격은 훨씬 크다. 늘 그렇지만 대놓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급이 되는, 알아듣는 이들만을 위한 메타포는 파괴력이 배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장의 내용을 범씨(范祖禹)는 다음과 같은 한 줄로 정리한다.

“사람으로서 仁하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요, 나라로서 다스려지지 않으면 나라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人而不仁, 人哉! 人哉! (사람이면서 어질지 않다면 사람이랴! 사람이랴!)”를 그대로 가져와 주석에 변용한 것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정명론(正名論)이라는 것은 본래 그것이 가지고 있는 본성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원시 유학의 기본적인 가르침이 되는 뼈대에 해당한다. 이 말은 그 이름(名)에 부합한 실제(實)가 있어야 그 이름이 성립한다는 의미이다. 어떤 존재가 그 본질을 잃어버려 없어지거나 변질되어버리게 되면 이미 그 존재는 그것이 가지고 있던 이름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의 사상이론이다.

이 말 자체가 원래 <논어>에서 나온 말이다. 공자에게 정치를 맡기면 무엇부터 하겠느냐는 질문이 들어오자, 반드시 “이름부터 바로잡겠다(正名)”고 대답한 것이 그것이다. 유학 사상을 편협한 계급론으로 폄하하며 이해하고 아는 척하며 언급하는 이들은, 피상적으로 공자의 ‘정명론’이 일반적으로 군·신·부·자 등 신분질서를 지칭하는 이름에 한정하여, 그 이름에 걸 맞는 각 주체의 역할과 행위가 실현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 정도로만 해석한다.


그러나 공자가 진정으로 지평의 확대를 통해 언급하는 정명의 ‘명(名)’이 신분질서를 나타내는 군, 신, 부, 자 따위를 표면적으로 지칭하였다손 치더라도, 결국 명은 세상 삼라만상 모든 개념을 포함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신하가 신하답게 되기 위해서는 충(忠)이 개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자식이 자식답게 되기 위해서는 진정한 효(孝)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고서는 이행할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에 맞닿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오는 문장이 “효가 ‘효다워야 효’라고 할 수 있다.”라는 말이다. 그래서 한글로 붙이면 정명론은 ‘~답게’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다시 말해, 겉으로 효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효가 아닌 행위가 있을 수 있다. 이로부터 ‘효’라는 이름 속에 다시 효라고 ‘명명’될 수 있는 수많은 ‘실체적 행위’를 함축하고 있어야만 한다. 이렇게 정명은 인간관계의 대표적인 역할 네 가지, 곧 임금, 신하, 아버지, 아들로부터 시작하여, 인간 사회의 모든 행위를 그 이름에 적합하도록 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지평을 확대하게 된다.

당신의 이름이 갖는 것이 당신의 본질을 의미하듯이 모든 철학적 개념과 삼라만상의 이름은 그것이 갖는 본질을 대표한다. 예컨대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정의(正義)’를 들 수 있겠다.


내가 정명론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절대적 기준'이다. 누구에게 정의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정의가 아닌 경우를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본다. 그 가장 많은 사태가 벌어지는 곳이 바로 전쟁터와 정치판이다. 전쟁은 적을 죽여야 내가 사는 인간만이 벌이는 행위이다. 그런데 자신들이 악당이라고 불의를 행한다고 전쟁을 하는 나라를 본 일이 있는가? 그렇다면 정의라는 개념은 그 이름이 가지고 있는 본성과 상관없이 누가 어떤 상황에 쓰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정명론이 무게를 갖는다. 그 개념은 상황이나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그 이름이 갖는, 그 본성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이다.


버젓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고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고서 정의를 이루고자 그따위 행동을 했다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그것이 정의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공자 당시는 패도정치의 시기였다. 저마다 자신들이 정의를 구현한답시고 입으로 떠들며 자신들의 세를 넓히고 자신들의 힘을 자랑했다. 그런 위정자들이 불의한 일을 자행해놓고서 참람되이 ‘정의’라는 명분을 붙이고자 한다면, 공자는 그것을 ‘불의(不義)’라고 규정하고 바로잡겠다고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잘못된 이름을 ‘바로잡겠다’는 공자의 정명론이 의미하는 진정한 의도인 것이다.


나라를 바로 세우겠다고,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고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자나 국회의원들이 되겠다는 자들이 말한다. 그런데 그들의 행동을 보자. 현 대통령을 포함하여 그간 우리가 뽑아주었던 대통령과 국회의원들 중에서 그것을 몸소 행한 자들이 과연 있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물론 더 가까이 노력한 자도 있고, 아예 노력은 고사하고 지 주머니에 돈 구겨 넣느라고 침 흘리고 정신을 못 차린 자도 있겠지만, 아직 그것이 실제로 구현된 것을 나는 아직 보지 못하였다. 언젠가는 볼 수 있게 되길 바라지만, 그저 바라고만 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가 바꿔야 하고, 우리가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펜을 들었다.

고리타분해 보이지만, 유학사상이, 공자의 가르침이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적확하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수차례 언급했던 바와 같이 사람이 변하지 않고 오히려 퇴보하였기 때문이다. 서글픈 일이지만 사람의 생각이 그 사고가 수천 년이나 지났는데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성으로 컨트롤하고 정제하여 수양을 통해 발전을 거듭했으면 과학의 발전같이 발전했겠으나 사람들은 측량이 가능한 과학적인 수치로 된 정량화된 마음을 가지고 있지 못한 탓에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앞서 잠시 말했던 것처럼 내가 어느 쪽에 서느냐에 따라 정의가 달라진다면 그것은 잘못된 정의이다. 정의는 하나이다. 그것에 인간의 욕심이나 이익을 챙기겠다고 하는 순간, 양심이 불편해져 움직이기 어렵고, 혼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움직여야 할 때 명분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을 온갖 감언이설로 포장하고 분장시켜 마치 그런 것인 양 보이게 할 뿐이다.

정말로 국민을 위하려는 자들은, 선거가 있을 때만 목이 터져라 지하철과 삼거리에서 고개를 90도로 숙이고, 그렇게 배지를 단 이후에 거들먹거리며 차에서 내리지 않고, 자신을 찾는 전화에 누구냐고 늘 묻는다. 그들은 그 짓을 4년마다 반복한다.

그것은 이미 속이는 자보다 속는 자가 어리석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속는 자는 4년 동안은 고사하고 그 속이는 자에게 계속 우롱당하고 농락당하고 그에게 짓밟혀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내가 살던 지역구에 선거 때마다 맨날 메가폰으로 떠들고, 벽보에 사진이 붙어 있고, 심지어 사람들이 많은 거리에 불쑥불쑥 튀어나오기까지 하는 그 자를 선거 때가 아니고서 거리에서 혹은 당신을 찾아온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아니, 정말로 도움이 필요해서 그의 사무실에 연락하거나 그에게 면담을 요청해서 만나서 민원을 해결해주던가?

국회의원 중에서 기회주의자로서는 능력이 으뜸으로 꼽히는 몇 안 되는 국회의원 중에 뇌물수수 혐의로 조사를 받던 자가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는 와중에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민원과 연결되어 뇌물을 받고 안 되는 일도 된다는 식으로 일을 꾸몄느냐고 언론에서 묻자 그 자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지역구의 주민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저에게 도움을 청해서 저는 그저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최대한 그것을 해결해드리려고 했던 것밖에 없습니다.”


그가 과연 거액의 돈이 떨어지지 않은 힘없는 지역주민들이 스스럼없이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와 자신과 차를 마시며 독대하도록 문턱을 낮춘 사람이었다는 거짓말을 믿는가?

검찰에 사건과 관련하여 검사실에 전화하여 검사에게 직접 항의를 해본 일이 있는가? 아니면 검사에게 사건과 관련하여 설명을 직접 상냥하게 들어본 일이 있는가? 그렇다면 영화에서 본 것처럼 부장검사나 차장검사가 민원인이나 사건 당사자에게 자신들의 잘못된 수사로 피해를 입은 자들에게 사과를 하거나 직접 연락하는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있는가?


왜? 그들만 바쁜가? 그들은 일반인과는 결코 겸상하지 않는 천상의 존재라고 하던가?

룸살롱에 가서 술퍼 먹고 돈 받아먹고 개가 되어 여자들위에서 별짓은 다해도 민원 당사자들과 직접 만나거나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고 하던가?


당신들의 주변에도 검찰에서 일하는 검사나, 하다못해 검찰 수사관이나 계장들이 있지 않은가? 그들이 별다른 사람이던가? 모두 당신의 옆집 이웃이고 아랫집 이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그런데 참 웃긴 것은 그들이 행하는 것이 정의라고 버젓이 쓰여 있는 건물에 당당히 들어간다.

정의사회 구현...

그 아랫급이라고 하는 경찰은 무엇이 다르더냐?

경찰청 본청에 문제가 있어서 찾아가면 일반인은 그 안에 담당자는커녕 그 건물 안에도 못 들어간다. 민원실이라는 곳에 문서로 적어놓고 가야만 한다며, 그것이 규칙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사건사고가 터지면 카메라 앞에서 허구한 날 고개를 숙이며 유감을 표하는 경찰청장을 당신은 결코 경찰의 불법 수사로 억울한 일을 당해도 결코 만나볼 수 없고, 심지어 그들에게 손해배상도 제대로 청구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놈들은 자신들이 피해를 봤다며 어마어마한 손해배상을 이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했던 시위 당사자들에게 내서 전례를 세우겠다고 으르렁거린다.


이런 것을 '부정의(不正義)'라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버젓이 지들이 일하는 건물의 캐치프레이즈로 ‘정의사회 구현’이라고 한다.

공자의 말을 빌자면, 이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민중은 힘이 없지만, 모두가 같은 의지를 가지면, 경찰이 아니라 검찰도 아니 자기 이익을 위해 청와대에 가고 싶어 안달을 부리며 지금 정부를 갈아치워야 한다는 것을 정의라고 감히 입에 달고 다니는 법비들을 혼쭐낼 수 있다.


지금 정부가 잘못한 게 있으면 잘못된 부분을 고치면 되는 것이지, 법비들이 자기들 호주머니 채우겠다고 자기들이 청와대 주인이 되고 싶다면서 정의를 입에 담을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제 국민들도 안다.